51년 봄
그간 떠돌던 흉흉한 소문이 사실로 밝혀졌다.
9만 명의 젊은이가 전쟁터가 아닌 길에서
굶어 죽고, 얼어 죽고, 병들어 죽은 것이다.
온 국민을 경악케 한
국민방위군 사건
50년 12월
전황이 불리해진 남한은 전국에서 예비 병력을 소집했고
17세에서 40세 까지의 장정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서울에 모인 수만 해도
50만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 예비 병사들을 남하시키면서
군은 제대로 된 숙식은 물론 군복조차 제공하지 않았다.
"걸어가던 중에 그 때 그 방위군이 밥을, 점심이 없었잖아요? 겨울인데.
그럼 어디서, 군인이니까, 뭐 국을 끓이지도 못하고..."
"...주먹밥인데, 그땐 주먹밥 요만한거 두 개야. 아침에 하나, 저녁에 하나.
그 남하하면서 제일 잘 먹은 것이 소금 국물 주는거."
"요렇게 쪼개 거기다가 소금 국물 부어주면
그게 제일 잘 먹는거야."
끼니는 주먹밥 한 덩이
잠자리는 학교에 빈 교실이나 강당
한겨울, 두 명 몫으로 지급된 가마니 한 장이
혹한을 견딜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몇 날 며칠을 그렇게 먹이고 재우자
건장했던 장정들이 하나둘 쓰러지기 시작했다.
"내가 거기서 발진푸스에 걸렸어요. 죽는거야, 하나씩.
그 교실, 의무실에서, 환자실에서 얼마가 있느냐면 80명인데..."
"...하루에 5명씩 죽어나가는 거야. 근데 내 차례야, 뭐 별 수 있나.
그래도 이제 서울에서 운동하고 젊고... 정신적으로 좌우간 여기서 죽으면 안되겠다."
"살아야 한다, 이런 생각... 뭐 퍽퍽! 죽어 나가요. 그러더니 거기서 젤 1차로 귀향을 시키더라고.
그러니 먹지 못하니, 뭐 영양실조 다하고 그렇잖아요. 그건 말고는, 그 아주 뭐 대단해요, 그거."
"그래서 거기서 그 두 친구는 못 오고, 내주지를 않으니까.
그것도 아주 너가 나가면 죽거나 말거나 중환자는 내버리는 거야."
"치료를 안 해주고 갖다 죽으라는 거지.
많이 죽었어요, 그래."
"이 사람들이 극도의 영양실조에 걸린거라, 전부 다.
그래 가지고 날이 차니까, 감기만 들었다 하면 대개 다 죽는거야.
또 설사 걸렸다 하면, 제일 비참한게 설사로 죽는 사람인데..."
"...이게 영양실조에다 설사를 하니까, 먹은 건 없으니까. 누런 물만 자꾸...
하루쯤은 변소를 드나드는데. 그 다음 날부턴 자기가 나오는 걸 몰라요.
그러니 냄새가 꾸리지..."
"...그 막사에 있는 사람, 애들은 전부 '어이구 냄새야' 뭐, 뭐 야단이고.
저 한 구석에 가서... 그렇게 누워, 저기 그 죽어가고 있는데,
자기들 친구라도 있는 사람은 물이라도 떠다 멕이고 하는데..."
"...그런 사람도 없는 사람은... 탈수 현상이 와 가지고 입이 타 가지고서...
사람만 지나가면 입만 뻐금뻐금... 물 달라는 기라. 물, 물.
그러니 뭐... 내, 내 살아야 될 판인데... 그런거 뭐 인정가질 뭐, 뭐 여유가 어디 있어요?"
군 지휘 경험이 없는 사람들이 간부가 됐고
그들은 예산의 상당 부분을 정치자금과 유흥비로 탕진했다.
돈 냄새는 인간의 이성을 마비시켰고
마비된 이성이 비극을 낳았다.
결국 5명의 간부가 사형됐다.
그러나 죽임으로 이 일을 무마시키기엔
국민의 배신감이 너무도 컸다.
멀리서 들리는 포성으로 전쟁 중임을 가능할 만큼
외떨어진 경남의 한 산간마을
중국군의 투입으로 전황이 역전되자
산 속에 숨어있던 빨치산들이 활동을 재개했다.
남한 정부는 국군의 정규 사단을 빼내
본격적인 토벌전에 나섰다.
마을이 술렁거린 건 이때부터였다.
밤이면 빨치산들이 산에서 내려와 식량을 얻어갔고
낮이면 한국군이 찾아와 이것저것을 캐 물었다.
"산에, 밤손님이라 해요. 거기선. 이 사람들이 밤이면 내려와.
그리고 낮이면 경찰들이 들어와서 그 부락을 다스리는 거야."
"그러다가 저녁만 되면 그 사람들이 따콩따콩 총을 쏘면서 들어온다고, 빨치산들이.
그러면 또 경찰들이 철수하는 거야. 거기다 주민들은 놔두고.
그걸 갖다 반복을 여러번 했어요, 우리가."
마을 사람들은 이중 생활에 지쳐갔다.
공산주의, 자본주의
정치, 이념
평생 흙만 보고 살아온 산골 사람들에게
그것은 생경한 물건의 이름과도 같았다.
51년 2월
이 마을에 엄청난 사건이 일어났다.
이른바 거창양민학살사건
공비 소탕의 명분으로 한국군이
경찰과 군 가족을 제외한 많은 주민을 학살한 것이다.
확실한 근거나 조사도 없이
자행된 민간인 집단학살
통비분자 즉, 공비와 내통하고 있다는게
학살의 이유였다.
거창 주민 719명이
소리없이 세상을 떠났다.
설마 우리를 죽일까
설마 우리가 죽을까
양떼처럼 순순히 따라 나섰던 사람들이
정말로 죽었다.
구사일생으로 살았다 해도
참극을 목도한 이상
그것은 사는게 아니었다.
떠난 사람도
떠나지 않은 사람도
전쟁의 얼룩진 기억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새해가 왔고
또다시 봄이었다.
시간은 더디지만
빠르게 흘렀다.
집으로 돌아간 이도 있고
피난지에 그대로 눌러 앉은 이도 있었다.
그 무렵 피난민들의 생계 일터였던
부산 국제시장이 화염에 휩싸옇다.
피난민들이 삶의 의지를 불태웠던 곳
사람들은 그간 소유한 것을
또 한번 잃게 됐다.
그러나 이러한 절망은
전쟁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땅이 갈라지고 사람이 갈리고
살이 찢기고 피가 흐르는
동족 간에 전쟁
전쟁은 인간에게
가장 큰 재앙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