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 https://bbs.ruliweb.com/community/board/300143/read/45173435
1619년 음력 2월, 명나라의 요동 경략 양호는 누르하치와의 최후 협상이 결렬되자 드디어 누르하치의 후금을 정벌키 위해 대군을 준비시켰다.
당시 요동으로 집결해 있던 명군은 최소 8만이었으며, 추정상 10만의 규모를 상회했다.
총사령관은 요동 경략 양호였고, 그 밑으로 산해 총병 두송, 개원 총병 마림, 요동 총병 이여백, 요양 총병 유정등이 각각 1개군씩을 지휘했다.
그들은 군대를 하나로 통합하여 움직이지 않고 4개군으로 쪼개어 허투 알아로 진격하는 전략을 사용코자 했고(사로병진), 그 덕택에 위 네 개 군도 동서남북으로 배치되었다.
서로군 최고 지휘관은 총병 두송이었다. 그 휘하에는 왕선과 조몽린등이 있었다.
북로군 최고 지휘관은 마림이었다. 그 휘하에는 마암과 반종안등이 있었다.
남로군 최고 지휘관은 이여백이었다. 그 휘하에는 하세현과 염명태등이 있었다.
동로군 최고 지휘관은 유정이었다. 그 휘하에는 강응건등이 있엇다.
명군 외에도 후금 정벌군 군대는 또 있었다. 그들은 바로 예허와 조선군이었다.
누르하치에게 압박당하고 있던 여진 국가, 예허의 지도자 긴타이시와 부양구는 1만에서 1만 5천명의 병력을 준비하여 마림과 함께 했다.
그들로서는 이번의 싸움이 마지막 도박이었다. 여기서 패배한다면, 예허는 멸망이었다.
한편 조선은 명 조정의 재조지은을 배경으로 한 참전 종용에 광해군이 승낙 의사를 보이고 도원수 강홍립, 부원수 김경서의 총병력 1만 8천의 군대를 준비시켰다.
그들은 동로군의 유정과 함께하기로 했다.
한편 후금 정벌군이 출정하기 직전 후금군은 이러하다.
우선, 1만 5천여명의 공병대와 보병들은 사르후 지역에 있었다. 그들은 그 곳에서 누르하치의 명에 의해 성을 쌓고 있었다.
곧 엄습해올 명군을 막기 위함이었다.
한편 후금의 주력 야전군 6만여명은 허투 알아에서 초조하게 대기중이었다. 명군이 어느 방향에서 공격해 올지 그들은 아직 특정하지 못했다. (그리고 후금이 그러기를 원했기에 양호는 각개격파의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네 방향 공격을 시도하려 한 것이었다. 물론 사로병진의 이유가 이것만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국경 척후들이 보고를 올리면 즉시 움직이기 위해 항시 출전 태세를 갖춘 상태로 대기하고 있었다.
국경 척후들은 각각의 국경에 수백명 단위로 포진해 있었다. 그들은 허투 알아로 침공해 들어올 것이 자명한 명군을 관측하고, 돌입 시간을 지연하기 위해 존재했다.
이것이, 1619년 음력 2월 중순경의 전역 상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