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긴 어디죠? -
“여기? 흠···, 글쎄 어디라고 해야 할까? 일반 지도에는 없는 곳이라 딱히 이름이랄 것도 없지. 이름이란 자신보다 불러줄 대상을 위해 있는 것이니까 말이야. 내가 이곳을 찾은 건 페리덱시온 나무 때문이니까 굳이 부른다면 페리덱 섬이라고 할까?”
‘지도에도 없는 섬이라고? 내가 당신 말을 그대로 믿을 것 같아?’
- 역시 섬이었군요. 그럼 테세이아로 가는 배가 있나요? -
“빨리 여길 벗어나고 싶은 모양이네, 그런데 어쩌지? 아까도 말했지만 여긴 외부에서 오는 배가 없어. 하지만 날 도와주면 연구가 끝났을 때 함께 섬을 나가게 해줄게. 어때? 마침 연구가 거의 마무리 단계라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
‘계속 여기 있으라고? 노예상인이 올 때까지 날 잡아두려는 속셈일지 몰라. 주인은 못되도 몸값은 받을 수 있을 테니까. 어떻게 얻은 자유인데 가만히 당하고 있을 순 없어. 날 데리고 섬을 나간다는 건 분명히 배가 있다는 거야. 저 책들 가지고 여길 빠져나갈 방법을 찾아야겠어.’
- 전 연구 같은 거 할 줄 몰라요 -
“후훗, 너보고 연구하라는 게 아냐. 넌 라이트 헤이븐에서 하던 대로 밥하고 청소 같은 것만 해주면 돼. 연구에 집중하다 보면 집안일이 꽤나 성가시거든. 특히 지금은 집중을 오래 유지해야 할 때라 네가 다른 일들을 해결해 주면 좋겠어.”
- 뭘 연구하시는 데요? -
“호기심이 많은 애로구나. 말해줘도 모를 텐데. 아니다. 라이트 헤이븐에 있었으면 보고 들은 게 꽤 있어서 여느 노예들보다는 아는 게 좀 되겠지? 난 천사들의 힘을 연구하고 있어. 쉽게 말해서 마법이란다.”
‘마..법!’ 넬은 머리에서 벼락같은 울림이 터지면서 라이트 헤이븐에서의 마지막 날을 떠올렸다.
무릎까지 눈이 쌓인 산길을 넬과 유모가 함박눈을 맞으며 걷고 있었다. 머리와 어깨 위에 소복이 눈이 쌓였지만 털어낼 틈에 한 걸음이라도 더 가야 했다. 발을 한 번 내디딜 때마다 계단 서너 개를 한 번에 건너 오르는 것처럼 다리에 힘을 줘야 했다. 바람에 뒤엉킨 눈송이가 캄캄한 시야를 더 어지럽혔다. ‘엘그로브를 빠져나올 때도 이렇게 함박눈이 내렸었지.’
넬과 유모가 성벽 아래 비밀 출구로 나왔을 때 그들이 처음 본 것은 밧줄에 매달린 마리의 머리였다. 방긋 웃는 얼굴이 귀여웠던 일곱 살 아이는 얼굴에 피칠갑을 하고 멍한 눈으로 끊어진 몸을 찾는지 바람을 따라 머리를 천천히 좌우로 돌렸다.
유모는 자리에 주저앉아 피가 뚝뚝 떨어지도록 팔뚝을 깨물어가며 소리 죽여 흐느꼈다. 그러고는 넬을 등에 업고 눈보라 속을 쉬지 않고 걸어갔다.
“이제 공주님이 제 딸이에요, 제 딸···, 하나뿐인 내 딸···.”
유모는 같은 말을 계속 되풀이하며 걸었고 넬은 눈물로 젖은 유모의 등에 얼굴을 묻고 잠든 것이 엘그로브에서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걷던 유모가 갑자기 돌에 걸린 것처럼 앞으로 고꾸라졌다. 앞서 걷던 넬이 유모의 몸을 흔들었다.
“공주님···, 전 잠시 쉬었다··· 갈 테니 먼저 가세요. 그자들에게 잡히면 그리즈먼은··· 더 이상 희망이 없어요. 어서요.”
‘안돼! 같이 가야지.’ 넬은 두터운 유모의 팔을 잡아 일으켜 보려고 힘을 썼지만 돌덩이처럼 무거웠다.
“으! 으으!”
“잠깐..이면 되니까···, 어서요···, 빨..리···.”
추위 때문인지 고개를 든 유모의 얼굴이 핼쑥한 푸른색을 띠고 있었다.
“으으으으!”
넬이 유모의 몸을 마구 흔들자 그녀의 등에서 빨간 얼룩이 장미꽃처럼 피어나 점점 커졌다. ‘헉! 언제 이렇게!’ 계속 유모를 흔들수록 그녀 주변의 하얀 눈이 붉게 물들어갔다. 넬이 고개를 세차게 흔드는 대로 흩어진 눈물방울들이 눈밭에 작은 구멍을 냈다.
“마..마법으··· 에..엘..그로ㅂ···, 마..리···.”
유모는 매몰찬 눈보라에게 마지막 말끝을 뺏긴 채 그대로 혀가 굳었다. 치켜뜬 눈에서 흘러내린 눈물을 따라 가느다랗게 김이 피어올랐다.
“으아아아아아!”
넬이 막힌 소리를 지르며 거칠게 유모를 흔들고 두드렸지만 벌써 얼어붙은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생기가 사그라진 눈으로 죽은 딸을 보는지 눈송이가 눈동자를 덮는데도 조금도 깜빡이지 않고 어둠 너머를 향하고 있었다.
“저기 있다!”
뒤편 저만치에서 남자 셋이 넬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그들과 넬 사이에 이어진 발자국마다 붉은 줄이 그어져 있었다. ‘놈들에게 잡힐까 봐 무서워서 서두르기만 했어. 유모가 부상당한 것만 알았어도 무리해서 도망치진 않았을 텐데. 내가 유모를 죽였어.’
남자들이 눈밭을 헤치며 달려오는 데도 넬은 유모의 등 위에 내려앉는 눈이 그녀를 세상에서 지워버릴까 봐 손으로 쓸고 또 쓸어냈다.
“호호호, 그렇게 놀란 얼굴을 하니까 귀엽네. 마법이 뭔지 들어는 봤나 보구나? 어때? 어차피 당장 섬을 떠날 수는 없다니까.”
- 연구를 도울 테니 제게 마법을 가르쳐 주세요. -
“핫! 이건 요리책으로 조리법을 배우는 거랑은 차원이 달라. 설령 배운다 해도 넌 안 돼. 마법을 발동시키려면 만트라로 영창을 해야 하는데 넌 벙어리라 말을 못 하잖니.”
‘!!!’ 넬은 몽둥이로 세게 뒤통수를 맞은 것 같아서 자기도 모르게 으어 소리를 냈다.
“뭐야, 정말로 마법을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한 거야? 아서라, 이건 글을 읽는 정도로 배울 수 있는 게 아니야. 글자 이면에 숨겨진 의미를 이해해야 하고···, 어머? 너 우는 거니?”
고개 숙인 넬 앞에 탁자보 위로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졌다. 허벅지에 옷자락을 움켜쥔 손이 부르르 떨었다. 예르카는 턱을 괴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넬을 살폈다.
“음···, 그럼 이렇게 하자, 네가 아예 소리를 못내는 것은 아니잖니? 신성어에도 으, 어 비슷한 발음도 있어. 그러니까 네가 낼 수 있는 발음으로 가능한 마법이 있는지 찾아보마. 그게 무슨 마법일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걸 익히면 너도 마법을 쓸 수 있게 되는 거잖니. 그러면 난 널 공짜로 부려먹지 않는 셈이 되니 염치를 챙길 수 있어서 좋겠다.”
넬이 눈물과 콧물이 범벅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예르카가 가볍게 미소 지었다.
“좋아, 됐으면 이제 그만 울어. 아니다! 잠깐만 좀 더 울고 있어봐. 네 눈물 좀 받아둬야겠다. 깊이 실망한 여자의 눈물을 재료로 하는 마법을 본 것 같단 말이야.”
서둘러 방을 나가는 예르카를 보며 넬은 말린 약초들이 걸려있는 천정을 올려다봤다. ‘라이트 헤이븐에서 그렇게 애를 써도 알 수 없었던 마법에 드디어 접근할 수 있게 됐어. 유모! 하늘에 있으면서도 날 여기까지 이끌어 준 거지? 여기가 무인도든, 혼자 떠날 수 없든 상관없어. 설령 마법을 쓰지 못하더라도 이 기회만큼은 절대로 놓치지 않을 거야.’
“아니, 저게 무슨 일이여!”
연기를 쫓아 해변 끝의 언덕에 올라선 뒤렉이 본 것은 어둠 속에서 화염에 휩싸인 마을이었다. 한달음에 뛰어 도착한 마을 어귀 선착장에는 곳곳에 사람들이 피투성이로 쓰러져 있고 나무를 대어 만든 방갈로들이 불길 속에서 검은 연기를 내고 있었다. 근처에 쓰러진 사람들을 살피는데 모두 죽어있었다.
‘다들 검이나 날붙이 무기에 당했구만. 선창과 배로 봐선 작은 어촌 같은데 해적들에게 습격을 받았나? 흐음.’ 피송곳니를 꺼내들고 주위를 살피며 천천히 마을 안으로 들어갔다. 방갈로들이 마주 보고 늘어서 있는 광장에 피투성이가 된 사람들이 쓰러져 있고 불이 붙지 않은 집이 없었다.
피 냄새와 나무 타는 냄새에 사람의 살 타는 냄새까지 더해진 공기는 평생 공방에서 타는 냄새를 맡고 살아온 뒤렉이라도 비위가 뒤집혀 미간을 찌푸리고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허어, 여자와 아이들까지···, 재물이나 뺐고 말 것이지 제정신이 아닌 놈들이구만.’
본문
[연재] 엘더사가 - 96화
추천 0 조회 137 댓글수 0
ID | 구분 | 제목 | 글쓴이 | 추천 | 조회 | 날짜 |
---|---|---|---|---|---|---|
118 | 전체공지 | 업데이트 내역 / 버튜버 방송 일정 | 8[RULIWEB] | 2023.08.08 | ||
30565814 | 연재 | lee950626 | 20 | 00:03 | ||
30565813 | 판타지 | NoDap | 20 | 2024.04.24 | ||
30565812 | 잡담 | 페르샤D | 37 | 2024.04.24 | ||
30565811 | 연재 | lee950626 | 35 | 2024.04.24 | ||
30565810 | 연재 | lee950626 | 35 | 2024.04.23 | ||
30565809 | 연재 | 미친돌고래 | 346 | 2024.04.22 | ||
30565808 | 연재 | lee950626 | 36 | 2024.04.22 | ||
30565807 | 연재 | 미친돌고래 | 48 | 2024.04.21 | ||
30565806 | 잡담 | Xatra | 57 | 2024.04.21 | ||
30565805 | 연재 | lee950626 | 490 | 2024.04.21 | ||
30565804 | 연재 | 미친돌고래 | 37 | 2024.04.20 | ||
30565803 | 연재 | 미친돌고래 | 67 | 2024.04.20 | ||
30565802 | 연재 | lee950626 | 45 | 2024.04.20 | ||
30565801 | 연재 | lee950626 | 80 | 2024.04.19 | ||
30565800 | 연재 | 미친돌고래 | 45 | 2024.04.18 | ||
30565799 | 연재 | lee950626 | 48 | 2024.04.18 | ||
30565798 | 연재 | 미친돌고래 | 62 | 2024.04.17 | ||
30565797 | 연재 | 페르샤D | 56 | 2024.04.17 | ||
30565796 | 연재 | lee950626 | 32 | 2024.04.17 | ||
30565795 | 연재 | 미친돌고래 | 164 | 2024.04.16 | ||
30565794 | 연재 | lee950626 | 66 | 2024.04.16 | ||
30565793 | 연재 | 미친돌고래 | 76 | 2024.04.15 | ||
30565792 | 연재 | lee950626 | 57 | 2024.04.15 | ||
30565791 | 연재 | 미친돌고래 | 99 | 2024.04.14 | ||
30565790 | 연재 | 미친돌고래 | 87 | 2024.04.14 | ||
30565789 | 연재 | lee950626 | 59 | 2024.04.14 | ||
30565788 | 잡담 | 에단 헌트 | 64 | 2024.04.13 | ||
30565787 | 연재 | lee950626 | 59 | 2024.04.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