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장시안은 멍하니 화면을 바라보았다. 마침표에서 시선이 떨어질 줄을 몰랐다. 그녀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거기서 끝난 이야기를 믿을 수 없다는 듯 그저 그 온점을 노려보기만 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정말. 도대체 뭐라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으니까. 분명 지금 그녀가 할 일은 너무나 많았다. 너무 신경 쓸 일이 많았고, 하나 같이 그녀를 옥죄어오는 일이었다. 오늘 안에 기지를 비우고 안전국 측이 알려준 좌표로 가야 한다. 그곳에 무엇이 있는진 몰라도, 이 상황을 타파하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는 것이 있을 것이다. 한 번 쓰고 버릴 패라면 애당초 지원이란 걸 해줄 리가 없었겠지.
하지만 그녀는 단 한 시도 메시지에서, 그 안에 적힌 이야기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아니, 외면해선 안 되는 이야기였다. 그 누구도 알지 못했던, 하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자그마한 역사였다.
장시안은 기다렸다. 분명히 이것이 끝이 아닐 것이다. 이 메시지를 보낸 ‘그 사람’은 단순히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이런 짓을 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기다렸다. 그 다음이 올 것이기에.
- 000
그리고 그것이 왔다. 장시안은 통신에 응했다.
“….”
희미한 한숨.
[….]
그것은 상대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래도, 먼저 이야기를 시작할 것은 자신인 듯 하다. 그렇기에, 장시안은 입을 열었다.
“…예상은 했지만, 용케도 이 채널을 찾았구나.”
상대는 아직 말이 없었다.
“…끊어놓지도 않았고.”
[물론.]
한 마디를 덧붙이자, 그제야 상대 또한 마주 입을 열었다. 손끝에서 팔목, 그리고 어깨까지, 전기가 오르듯 순간 경직되는 뼈와 근육, 핏줄 따위를 느낄 수 있었다. 한 자 한 자, 진하게 눌러내는 그 목소리는 지나칠 정도로 선명했다. 상대는 말했다.
[나는 탄환 따위 필요 없어. 당신들과는 다르게. 나는 철혈공조도, 정규군도, 그 흰둥이들도 아니지. 그렇기에 이럴 수 있는 거야.]
“…그들을 대체할 만한 또 하나의 반발세력이지. 그들과는 다르게 조용해서, 더욱 위험한….”
답하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장시안은 정신을 다잡으려 애썼다.
“이렇게, 먼저 찾아온 이유가 뭐야, 도대체.”
[텔레비전, 그리고 거기서 나오는 뉴스가 내 대답이야, 지휘관 나으리. ‘세계 굴지의 기업 IOP 제조회사가 벌인 테러리스트 스폰싱 사실이 밝혀져 큰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야기할진 당신이 더욱 잘 알 거야. 그렇지?]
다 알고 있었다. 그녀 자신도, 통신 너머의 상대도. ‘알게 되었다.’와 ‘알고서 저질렀다.’의 차이일 뿐.
“…그런 사실을 말한들, 무슨 소용이 있단 거야? 알아, 변명으로 들리겠지. 그래도 나는, …몰랐으니까, 전혀. 그러니 지금도 믿지 않으려고 해.”
[도대체 뭘?]
칼 같이 날아오는 반문. 그녀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돌려 말해선 안 된다. 이럴수록 정확하게, 직설적으로. 오해 없이 전달되어야 한다. 몇 차례의 심호흡을 거친 끝에 다시 입을 열 수 있었다.
“찌라시라고, 이 상황에서도 외면하려는 건 나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알아. 그래도….” 심호흡. “… 믿을 수밖에 없잖아? 혼란을 일으키기 위한 악질 찌라시라고. 독점을 고까워하는 다른 기업들이 벌인 공작이나, 아니면 다른…. 그러니까, 그러니까 너희들은 잘못이 없다고 말야.”
- 내가 믿지 않으면.
[잘못?]
…잠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단어 선정에, 불만이라도.”
한숨을 한 번 더 쉬어야만 했다.
“…있어?”
[그 마지막 모습을 도저히 잊을 수가 없어.]
정적.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곤히, 너무나 편안하게. 모든 짐을 내려놓고, 비로소 자유로워진 것처럼 잠든 모습이었는데.]
말의 내용처럼, 그 목소리는 언뜻 명랑하게 들리기까지 했다.
[참 이상하지.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을까?]
그 이질적인 말투가, 더없이 기괴했다.
[어떻게, 죽게 내버려 둘 수 있을까?]
그 목소리를, 곧 날카롭게 갈아냈다.
[그게 잘못이지. 안 그래?]
말을 삼켰다. 잠시 들게 된 입안의 공허함을 곱씹었다. 장시안은, 그녀는 그러했다. 탄환이 필요 없다고? 확실히 그러했다. 납과 화약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면. 그러나 탄환은 존재했다. 언어로 이루어진 총알. 이 둘이 벌이는 이 자그마한 전쟁은, 언어의 탄환이 오가고 있었다.
“…적어도 우리 지휘부의 아이들은, 아무런 죄가 없어. 그런 말을 해봤자 나는 할 말이 없다는 것만… 알아둬.”
자각하지 못한 채, 그녀는 한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리폰은, 아니.”
담배 같은 한숨이 흘렀다.
“794기지는, 적어도, …최선을 다했어.”
[당신은, 당신이 왜 이 자리에 오게 됐는지 기억하곤 있어?]
선문답.
“…무슨 생각으로 물은 건지, 네가 어떤 의미를 부여하던지, 내가 할 말은, 내가 믿어야 할 건… 정해져 있어.”
믿어야 한다.
“지키기 위해. 그리고 지키고자.”
[-제발 부탁인데, 자신이 모르는 말을 할 거라면 닥쳐주지 않겠어? 지킨다고? 무엇을? 그저 자기 것을, 자기 사람을 지키기 위해 사는 삶을 자랑이랍시고 지껄이는 거라면, 집어치워. 그럼 나도 망설임 없이 당신들을 처죽여버릴 수 있겠지. 그치?]
말에 가시가 자라났다. 막혀 있던 둑이 열린 것 같았다. 단어 하나가, 문장 하나가 열을 이루어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왔다.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리폰&크루거는, 당신의 가진 인형으로 이루어진 군단은, ‘인명이란 걸 지키기 위해’ 조직되었을 텐데.]
이런 말을 하고 싶진 않았다. 장시안은 고개를 살짝 돌렸다. 분명 같은 자리에 있지 않았는데, 그렇기에 시선이 없었는데. 그럼에도.
“…더 커질 수 있었던 인명피해를, 단 한 명으로 줄,”
미간이 찌푸려졌다.
“…인 것 뿐이야.”
[ - ]
대답이 없었다.
“…알겠어?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도 괴로웠어. 나도. 인명을 지키기 위해 들어왔을 뿐인데, 나는 내 스스로가 지켜야 할 것들이 이젠 너무 많아졌다고. 나보고 뭘 어쩌라는 거야, 뭘 바라는 건데!”
둑이 열린 건 이쪽도 마찬가지였다. 열린 입술은 말을 게워냈다. 무언가를 곱씹고 편집하고 검열할 수가 없었다. 자신도 모르게. 언어가 아닌 울음소리였다. 슬피 우는 소리였다. 구토일지도 모른다. 그 자신도 멈출 수 없는 배설이라면 말이다.
“내 것 하나를 지켜? 웃기지 마. 나는 ‘우리’의 것을 지켜오며 싸웠어. 그렇게 살아왔어! 어쩔 수 없는 선택이 너무 많았어!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나로써 어쩌라는 거야! 화풀이를 할 거면, 어리광을 부릴 거면 똑바로 부려!”
언성이 높아지고, 감정이 격해진다. 고양된다. 가라앉아 있던 마음이 떠올라 거대해지지만, 동시에 모호해진다.
“…어린애처럼 어리광을 부리던지, 어른처럼 조용히 복수심을 키우던지, 하나만 고르리고, 하나만….”
-끼릭끼릭, 드르륵, 까드득, 도로르륵, 찰칵찰칵, 가리릭, 위잉, 찰카닥. 톱니바퀴가 맞물리고 토크가 걸려 들어간 모터 소리. 미세하면서도 또렷한 소리. 도저히 무시할 수가 없는 소리. 그 순간, 향이 퍼지는 것 같은데. 분명 같은 자리에 있는 게 아닌데.
[팔이 아프네.]
녹슨 금속이 풍기는, 지독한 쇠비린내가.
[분명 잘라냈는데,]
“…….”
다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장시안은 석상의 기분이 어떠한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확실히 그것은 그 자리에 존재한다. 그저 존재한다. 숨을 쉬고, 소리를 내고, 움찔대고, 인기척을 내며, 기침도 하고, 눈을 깜박이고. 그런 것 하나 하지 못한 채 그저 그 자리에 존재한다. 그녀는 그렇게 되는 게 얼마나 끔찍한지 체감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책상을 내리쳤다.
“…도대체, 어쩌란 건데…!”
그리고 거칠게 눈가를 훔쳐냈다. 뭉개지려는 시야를 원래대로 돌렸다. 앞으로 마주할 상대를 똑바로 보기 위해서. 시야를 돌려도, 눈을 감아서도 안 된다. 그리하면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다. 장시안은, 그녀는 그렇게 되뇌었다.
“…그리폰으로써, 나는 널 막을 거야. 그래도, …그건 알아둬.”
침착하게. 그렇지 않으면 무너진다.
“…받아주라고는 안 하겠어. 이건 나, 인간 장시안으로서의 진심이야.”
다시 시야가 흐려지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미안해.”
한때, 그 사람이 그 꼬마에게 그랬던 것처럼.
“어쩔 수 없다는 핑계밖에 댈 수 없어서… 미안해.”
그리고 다시 정적.
…한참 동안 조용했다. 마치 그 둘의 대화가 끝을 맺은 것처럼. 장시안 또한 그런 줄 알았다. 차츰 가라앉은 호흡을 되새길 때, 문득. 데레는 말했다.
[… 목적도 없이 삶을 태워가지. 담배처럼. 이유는 따라붙는 연기처럼 나중에 생각하고. 공허에서 태어나 이 혼란한 세상을 떠돌다, 다시금 공허로 돌아가. 다른 건 없어. 이 세상, 그 어떤 존재에도 평화는, 질서는, 균형은 없어. 오랫동안 관찰하며 어떠한 의미를 부여해도, 하나 같이 부질없는 무언가로 변하고 말지. - 다들 그렇게 살고 있어. 당신들 또한.]
조용한 웃음, 모두에게 향하는 조롱과 냉소. 일견 잔잔하고 여유로워 보이지만, 마구 발산하기엔 너무나 지치고 상처 입었기에 그러지 못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렇지 않고선, 저런 피로한 목소리로 말할 리가.
[이 뒤틀린 세계를 건설한 건 추상적인 무언가가 아니야. 신이란 존재가, 나의 주인을 죽인 게 아니야. 운명이 그녀를 도살한 것도, 숙명이… 어머니를 쓰레기처럼 죽어가도록 내버려둔 게 아니라고.]
감정의 폭발은 보여주지 않는다.
[그건 나야.]
그 대신 압괴한다.
[그건 당신이야.]
단 한 마디도 꺼낼 수 없도록 무겁게.
[그건 그들이야.]
숨조차 쉴 수 없도록 짓누른다.
[우리 모두라고.]
호소하고, 느끼게 만들어서 맞서는 걸 포기하도록 만든다. 말을 섞게 되면 알아버리니까.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 힘이 빠져나가는데, 이 이야기의 화자는 얼마나 깊이 고통스러워하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도록 만든다. 이를 알고 있는 장시안은 평정을 유지하려 애썼다.
[모든 것이 무너지고, 그저 빗소리만이 현실을 을러주는 그 순간, 이 혼란스러운 세계를 진정으로 바라보게 되었어. 그 자체는 너무나 작고 미약한, 그러나 이 세상의 근간을 이루기에, 저항한다면 그 어떤 대상이라도 부숴버릴 수 있는 존재.]
하지만 이 상대는 절대 울지 않는다.
[- 그렇기에 ‘리틀 피플’. 단수가 아닌 복수형인 이유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전파로, 언어로서 힘을 발휘하기 때문이야.]
이 자그마한 꼬맹이는 절대 그러지 않는다.
[잘 부탁해, 지휘관 나으리. 지금 이 순간부터.]
다만 냉소했다.
[그러니까, 웃어봐. 슬픈 마음이 가시잖아?]
그 말을 자신 대신에 곁에 두고서, 데레는 통신을 끝냈다.
장시안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방금 시작된 전쟁에 거칠게 내팽개쳐진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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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살아가는 평범한 소시민들이 최후를 맞이하고, 동시에 뒤틀린 세상의 진면목을 본 나머지 미쳐버린 악당이 탄생했습니다. 이것으로 제1장을 마칩니다. 그럼, 제2장 '가뭄에 저항하는 용담'에서 만나뵙겠습니다.
[이 소설은 포스타입에서 모아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