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르디우스의 매듭이라는 말이 있다.
모든 문제를 단칼에 잘라서 해결하는 아주 명쾌한 방법이지. 하지만 인생의 중대사는 그런 식으로 해결할 수 없다.
결국 그 자리에서 합의가 한 번에 도출되진 않았다. 다만 웃어른들의 조언이 그녀에게 건네지며 진지하게 생각할 시간이 주어졌다.
‘과연 지금의 생각이 사춘기의 열병이 아니라 장담할 수 있는가, 왕녀 아가씨? 한 사람도 아니라 두 사람의 인생을 좌지우지할 일인데, 그리 가볍게 여겨선 안 되네.’
과연 아버지다, 라고 트레이너는 내심 생각했다.
대기업에서 30년 넘게 계셨으니, 예상할 수 없던 이런 사태에도 최대한 침착하게 대응이 가능하셨으니까. 어린 치기로 바다까지 건너온 파인 모션은 그 말에 처음으로 약간 주눅이 든 듯, 귀가 살짝 젖혀진 모습을 보였을 정도였다. 그러나 진지하게 고민할 거리가 생겼음은 부정할 수 없었다.
이제까진 당연히 시리즈 끝나면 날 끌고 가야지, 했다가 현실적인 문제가 던져졌으니까.
물론 그런 정신적인 압박만 주어졌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말하자.
그가 서브 트레이너임에도 사실상 그녀를 전담해 온 건 분명 어딘가 파인 모션이 마음에 걸려서 그런 거였다. 그리고 지금도 그건 변함없었다.
단지 문제가 있다면, 뜬금없이 아일랜드행 비자 발급은 너무 급발진이었단 거지.
그래서 그는 귀가 쳐진 채 조용히 집을 나선 클로버 왕녀에게 말했다.
“파인.”
귀가 살짝 꿈틀거렸지만, 반응 속도가 느리다. 생각할 거리가 많아졌다는 것이겠지.
“파인.”
“응?”
두 번째로 부르자 그제야 퍼뜩 놀라서 연두색 눈을 그에게 향하는 걸 보면 확실하다. 이런 면에서 보면 아직 무르다. 배울 것이 많은 애라는 것이지. 이러면 시한을 줘야 한다. 그녀에게도, 그 자신에게도.
“아버지의 말씀도 일리가 분명히 있어. 그러니 이렇게 해볼까.”
트레이너는 몸을 약간 낮춰 파인 모션과 시선을 맞춘 후 말했다.
“네 졸업까지 앞으로 얼마나 남았지?”
“음, 이제 1년?”
얼마 남지 않은 중앙 트레센에서의 시간은 정확히 알고 있는 그녀의 말에 그는 어떻게 해야 할지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그러면 그동안 네가 내게 품고 있는 감정이 진짜인지 아니면 단발적인 것인지 잘 판단하는 시간으로 쓰도록 하자. 어때?”
“….”
그 말에 아일랜드의 왕녀는 명확히 고민의 기색이 눈동자에 떠올랐다.
솔직히 그럴만할 것이다.
지난 3년 동안 자기가 느꼈던 것이 진짜인지 충동적인 거짓인지 판단해야 한다고 하니, 어린 마음에 답답하기도 할 것이고.
하지만 이게 정답이다.
인생사 지름길이란 없다. 특히 파인 모션의 신분을 고려한다면 더더욱 신중해야 하고.
“그래볼까, 대신 나도 조건을 하나 걸게.”
“뭔데?”
대체 무슨 제약을 걸까 싶어서 촉각을 곤두세운 트레이너였지만, 돌아온 건 다소 힘이 빠지게 하는 것이었다.
“내가 원할 때, 필요할 때 꼭 같이 나가줄 것.”
“…그거, 결국 같이 라멘집 탐방 가자는 거 아냐?”
빙빙 돌려 말했지만, 결국 파인 모션다운, 그리고 이 나이대 소녀다운 요청이다. 뭐 엄청난 거라도 나올까 봐 조마조마했던 자신이 한심해질 정도로 말이다.
“네 이놈, 토 달지 말 거라.”
그걸 알고 있는지, 양쪽 귀에 클로버 장식을 달고 있는 우마무스메는 나름 위엄있게 빽, 하고 소리쳤는데 어림없지. 그녀의 라면 사랑은 숨길 수 없다. 뭐, 속내는 거기에 겸사겸사해서 같이 돌아다니며 시간 보내자는 것이겠지만.
아주 빤히 보입니다, 왕녀님.
“그런데 SP대장님하고 다른 경호원분들은 어디 갔어?”
그런데 문득 내려와서 보니 있어야 할 이들이 안 보이는 걸 알게 된 트레이너는 무심코 질문을 건넸다.
“아-. 근처 대형마트에 한국 라면 최대한 다양하게 한 박스씩 사 오라고 내려오면서 LANE을 보내서 부탁했거든.”
그리고 돌아온 답이 상식을 깨부쉈다.
그 말을 들은 직후, 그는 우뚝 섰다. 그리고 바로 파인 모션의 양 어깨를 콱 움켜쥐었다.
“파인 모션.”
“으, 응?”
불과 조금 전까지의 인간적인 어투와 달리, 트레이너로서 진지하게 자신을 부르자 파인 모션은 자신도 모르게 바짝 긴장했다.
“라면 한 봉지에! 몇 칼로리인지! 알고 있지!”
그리고 그녀의 어깨를 넘어 양 뺨을 붙잡고 덜덜 떨며 말했다.
제아무리 트윙클 시리즈의 마지막 스케줄을 끝냈다 해도 체형 관리를 비롯한 건강 관리는 해야 한다. 그것도 졸업 전까지는 더더욱 철저히.
“아, 알지, 당연히.”
“절대로! 한 번에! 5봉 이상! 먹으면! 안 된다!”
그리고 그걸 전담하는 건 사실상 그녀의 담당 트레이너인 그의 몫. 고삐가 풀려서 면식 수행을 1년 내내 이어 나갈 파인 모션의 미래가 훤히 그려지자 시원한 겨울바람이 부는데도 벌써부터 이마에서 식은땀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라멘에 한국 라면의 콤보라면 시리즈 내내 관리해 왔던 그녀의 몸이 망가지는 건 한순간일 거니까.
“우, 후후…. 노력해 볼게?”
“눈 돌리지 말고!”
-적어도, 적어도 1년 만이라도!
설마 시리즈 끝났다고 리미터를 풀 작정이냐!
슬라브 여인네의 풍채를 보일 생각인 것이냐!
“네 이놈, 무슨 생각을 한 것이냐!”
“왕녀님, 저는 결단코 왕녀전하가 지름 10m짜리 통나무 한 뭉터기를 혼자 들고 나르는 상상을 하지 않았습니다.”
앗, 생각이 입 밖으로 나왔다.
“너무해! 그건 내가 반에이 애들처럼 될 거란 얘기잖아!”
충격을 받은 듯, 천둥 치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은 표정이 되어 그를 쳐다보는 파인 모션이었지만, 이참에 할 말은 해야 했다.
“그러니까 그렇게 되기 싫으면 식단 조절 잘해야지? 드림 트로피도 안 나가는데 칼로리 태우는 거 도와주는 데에는 나도 한계가 있어 한계가.”
파인 모션은 그 위치상 드림 트로피 출주는 하지 않기로 결정되었다.
중앙 트레센에서의 유학이 끝나고 나면 곧바로 고국으로 돌아가야 하기도 하는데 드림 트로피는 뭔 놈의 드림 트로피여, 거기 라면 매니아 씨, 돌아갈 티켓이나 끊어. 대학은 더블린으로 돌아가서 진학하면 되는 거고, 뭐 선택지는 많다.
어차피 자매들도 거기 있는데 가족들 곁으로 슬슬 돌아가야지. 어린 나이에 너무 오랫동안 외국에 있는 것도 솔직히 정신건강에 그리 좋진 않다. 게다가 이만큼 G1 땄으면 체류한 보람은 있으니까 된 거겠지.
1년의 기간은 일본에서의 신변 정리에 필요한 기간이다.
그 사이에 그는 그녀에게 숙제를 하나 준 거고.
“칫, 노력해 볼게.”
뭐, 그 노력에 일상적인 과제 하나도 더 추가되어 입을 삐죽거리긴 했지만, 365일 아침부터 야식까지 면식하려 한 거니 설마.
“대신 네가 부르면 무슨 일이 있어도 달려가 줄 테니까, 기분 풀어.”
그렇게 삐진 그녀의 기분을 풀어주려는 듯, 한 말에 귀가 쫑긋거렸다.
“정말이지?”
“그래, 약속이다.”
“후훗, 믿을게?”
파인 모션의 1년짜리 숙제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불꽃이 계속 타오른다면 잠시 보류된 트레이너의 아일랜드행은 확정이 될 것이고, 불길이 사그라든다면 그는 그녀의 인생에서 지나가는 친구 중 하나로 남겠지.
뭐 아무래도 좋은 결과 아니겠는가.
-⏲-
그렇다고 일본행을 같은 항공편의 비즈니스석으로 하는 건 광고하는 꼴이잖니, 파인아.
한국으로 빤스런 쳤을 때 이코노미, 나리타행은 비즈니스를 타게 된 트레이너는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이 어린 왕녀에게 있어선 URA소속 우마무스메를 넘어 일국의 왕족이라는 공인이 취해야 할 행동거지나 마음가짐이 부족해 보였는데 언제쯤 철이 들까.
참 갈 길이 멀어 보였다.
파인 소재로는 꼭 쓰고 싶은게 하나 있어서 빌드업 좀 필요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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