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르하치는 1588년 음력 4월 무렵 건주내에 여전히 존속하고 있던 3 개의 큼지막한 세력 지도자로부터 귀부를 받았다. 수완의 솔고, 야르구의 훌라후, 동고의 호호리가 그들이었다. 특히 솔고와 훌라후의 아들들은 그 재능이 범상치 않아 누르하치가 크게 관심을 가졌다.
이 중 솔고의 아들 피옹돈은 나이가 완숙하여 누르하치가 자르구치의 직함을 주고 법제를 맡기는 동시에 장수로 삼았으며 훌라후의 아들 후르한은 아직 나이가 어렸기에 자신이 직접 교육키로 하고 양자로 삼았다. 호호리와 피옹돈, 후르한 세 명은 이후 모두 후금의 개국공신이 되는 것을 생각해보자면 누르하치의 안목은 정확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이 시기(1588년)부터 누르하치는 본격적으로 명나라에 조공을 바치기 시작했다. 무황제실록과 무황제실록을 옮겨 재편찬한 만주실록에는 이 무렵부터 누르하치가 명나라에 해마다 사신을 보내어 조공을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1 이 조공에서 중심적 역할을 한 것은 누르하치 휘하의 외교실무자 겸 문서담당자인 마삼비와 그 아들 마신, 그리고 동양재로 추정되는데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한문을 알고 있어 누르하치에게 입조사신으로 선택된 것으로 판단된다.2
물론 누르하치가 마삼비와 동양재등의 사신을 이용한 조공만 행한것은 아니다. 누르하치 본인이 직접 나서서 입공을 하기도 했다. 자신이 직접 나서는 성의를 보임으로서 명나라로부터 충직함을 인정받고 추가적인 직첩을 받고자 한 것이다. 여기에는 누르하치의 동생이자 세력을 함께 통치하던 슈르가치 역시도 나섰다. 이들은 북경에 사신단을 이끌고 가서 조공을 바치고 하사품을 받았으며 그 이후에는 회동관에서 무역을 했다.3비록 직접적인 입공 자체는 그 횟수가 아주 많진 않았으나4 누르하치가 북경에까지 가서 조공을 바쳤다는 것은 특기할 만한 사항이다,
누르하치의 조공을 포함한 여진 세력의 조공에서, 명나라가 여진족 수령들에게 하사한 대명 위소관칙서는 주요한 역할을 했다. 위소관칙서는 명나라가 여진을 자신들의 관외통제체계에 내속시키기 위해 하사한 임명장인데, 명초 영락제 시기에는 정치적 역할과 경제적 역할을 반분하고 있었으나 이 시기 무렵에는 경제적 역할의 지분이 훨씬 커졌다. 당시 보유 위소관칙서의 수량에 따라 여진측의 입공인원이 제한되었는데, 보유칙서 1장당 1명이 제한인원이었다. 이 당시 누르하치는 건주의 대부분을 손에 넣음으로서 건주 여진에 배당된 명나라의 위소관칙서 5백장을 모두 소유한 것으로 보인다.5 따라서 이 무렵 누르하치는 건주 여진이 명나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조공하사품을 독점했다고 할 수 있다.
누르하치의 조공은 비록 중간에 끊어진 적도 있으나 기본적으로 1588년부터 후금 건국 직전까지 지속된 것으로 보인다.6 이 조공은 청측의 실록에 쓰여 있는 기록, 조선측 기록, 그리고 명측이 누르하치의 조공이 고작 2년여 끊긴 것에도 민감한 반응을 보인 사실등을 추합해 생각컨대7 매해마다 정기적으로 행해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정기적 조공 관례로 말미암아 누르하치는 경제적 수익과 정치적 이득, 외교적 이득을 모두 볼 수 있었다.
이 쯤에서 곁다리로 넘겨짚고 갈 사소한 사항이 있는데, 바로 태조무황제실록 다음에 편찬된 태조고황제실록에서는 누르하치가 명나라에 조공을 시작했다는 기록이 상당히 완곡하게 변했다는 것이다. 이는 태조고황제실록 기록 특유의 완곡성-미화성 탓으로 보인다. 태조고황제실록은 직설적 서술 성격이 강한 무황제실록에 비해 기록 자체가 완곡해지고 미화되었는데, 명나라에 대한 조공 역시도 서술적 윤색의 대상이 된 것으로 유추된다. 단적으로 비교하여 무황제실록은 확실하게 조공을 바쳤다고 서술했지만(與大明通好,遣人朝貢), 고황제실록은 이보다 훨씬 완곡한 서술을 사용했다.(明亦遣使通好。歲以金幣聘問)
누르하치가 명나라에 조공만 바친 것은 아니다. 무황제실록과 만주실록에는 이 때 누르하치가 본격적인 호시 거래를 통해 명으로부터 많은 경제적 이득을 보았다고 기록되어 있다.8조공은 조공대로 바쳐 막대한 하사품을 받고 요동지역에서의 변경 호시 역시 적극적으로 이용해 자신의 세력에 필요한 물자들을 확보한 것이다. 이 때 누르하치는 사냥등을 통해 얻은 가죽이나 채집을 통해 얻은 인삼등을 호시에 내놓아 팔고 대신 자신에게 필요한 물건들을 명으로부터 수입해왔다.
명나라와의 호시 거래에 필요했던 것은 앞서 조공에 관한 설명을 할 때에도 다루었던 대명 위소관칙서다. 요컨대 위소관칙서는 교역허가장으로서의 역할을 했다. 앞서 설명했다시피 누르하치는 건주 여진의 위소관칙서를 사실상 독점했고, 그로 말미암아 본래는 건주의 여러 세력들이 나누어 가져야 할 무역이익을 자신이 온전히 소유했다. 그 경제적 이득은 상당했을 것이다.
결론부서 요약하자면 누르하치는 1588년 상반기 건주를 거진 다 통일한 시점에서 명나라의 관외경제체제에 스스로의 의지로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것은 경제적 수익을 확보하기 위함도 있었으나 결정적으로 명나라의 질서에 스스로 포함됨으로서 자신의 성장에 대한 명나라의 간섭 가능성을 최대한 배제하고 자신의 대외적 입지를 굳건히 다지려 함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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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무황제실록 1588년 음력 4월, 만주실록 동년 동월. 다만 만주실록은 조공에 대한 표현이 애매하게 바뀌었다.
2.조선왕조실록 선조 28년 음력 12월 5일
3.누르하치가 명나라의 입공에 최초로 나선 것은 1590년인 것으로 보인다. 명신종실록 만력 18년 음력 4월 29일
4.명실록에 의하면 총 7차례 직접 입공하였으며 동생 슈르가치의 입공을 포함하면 더 많이 계산된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보다 더 많은 입공이 있었을 것으로 사료된다.
5.무황제실록 1588년 음력 4월. 그러나 명신종실록을 보자면 이 시기의 누르하치의 입공인원은 그리 대규모는 아닌 것 같다. 다만 이후 점점 입공인원이 늘어난 것으로 보인다.
6.후금 건국 이후로도 명나라와 외교적 교류를 주고 받았던 것을 생각해보자면 기록은 남지 않았으나 전쟁선포전까지 조공을 바쳤을 수도 있다.
7.명신종실록 만력 36년 3월 18일
8.태조무황제실록 1588년 음력 4월, 만주실록 동년 동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