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 안좋은 반응들만 가져오길래 일본에서 분석한 좋은 글도 가져와 봄. 아카데미 수상전에 작성된 칼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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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준호 감독은 한국영화계와 함께 성장해왔다. 세계적 히트 <기생충>이 가진 뒤틀린 매력의 정체
마츠타니 소이치로: 작가, 리서처
2019년 미국에서 가장 히트한 외국어 영화
(일본에서) 개봉된 지 1개월이 지난 한국영화 <기생충>. 봉준호 감독의 작품으로서, 일본에서 처음으로 10억 엔(약 108억 원)이 넘는 히트를 기록하고 있다. 처음에는 131개 상영관에서 상영됐지만 순조롭게 관객을 모으면서 1개월이 지난 지금도 개봉 규모를 확대하고 있는 중이다.
이런 상황은 일본뿐만이 아니다. 2019년 5월에 한국에서 개봉된 이래 <기생충>은 전 세계적인 히트를 이어가고 있다. 본국인 한국은 물론이고, 미국과 캐나다에서도 약 3,300만 달러의 흥행 수입을 올리면서 작년에 가장 히트한 외국어 영화가 되었다.
흥행뿐만 아니라 내용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프랑스 칸 영화제에서는 황금종려상(최고상)을 수상했고, 미국 골든글로브상에서는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했다.
며칠 뒤 열릴 아카데미상에서도 작품상을 포함해 6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되었다. 지난 해 작품 <로마> 등 외국어영화가 아카데미 작품상에 노미네이트되는 것은 드문 일인데, 한국영화가 거기에 가세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비평과 흥행, 그것은 종종 대립적인 구도로 이야기되어 왔다. 바꿔 말하면 예술성과 오락성의 대립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일본에서 순문학과 오락소설로 불리기도 하듯이, 그러한 구분은 영화에만 있는 것도 아니다. 예술의 사상에 따라 상업적인 논리는 종종 높은 장벽으로 인식되곤 했다. 한 십여 년 전에는 그런 구분이 자본주의에 대한 대항으로서 문화계 좌파의 이데올로기를 지탱하는 프레임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봉준호는 그런 구도를 가뿐히 뛰어넘어왔다. 두 번째 장편 연출작인 <살인의 추억>(2003)부터 늘 관객과 비평가 양측으로부터 폭넓게 받아들여졌다.
그의 작품은 다양한 관객을 끌어들일 만큼 다층적인 구조를 띄고 있기 때문이다. <기생충>도 봉준호의 다른 작품들처럼 대중적인 코미디풍의 전개로 감상자를 끌어들이고선 지하 깊은 곳까지 끌고 가버린다.
이번 <기생충>의 히트는 그런 봉준호의 기교를 전 세계에 알린 순간이다.
일본의 영화 인구를 능가하는 한국
2019년 한국영화계는 관객 동원수가 2억2668만 명, 흥행 수입은 1조9140억 원으로 역대 최고 기록을 수립했다. (한국의) 총 인구수가 일본의 40%에 불과함에도 불구하고 2011년 이래로 일본의 영화 인구를 능가해오고 있다. 일본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영화에 대한 관심이 높다.
2000년에 장편 영화 데뷔를 한 봉준호는 그런 상황을 이어온 한국영화계와 함께 성장해왔다.
데뷔작 <플란다스의 개>(2000)는 흥행적으로 실패했지만, 개를 통해 세대 갈등이 있는 한국 사회의 뒤틀린 면을 그려내는 데 성공했다. 실제 연쇄살인사건을 모델로 한 두 번째 작품 <살인의 추억>(2003)은 국내외에서 높은 평가를 받으며 일약 스타 감독이 되었다. 3번째 작품 <괴물>(2006)에선 괴수의 존재를 통해 한국 내 미군의 존재를 그렸고, 4번째 작품 <마더>(2009)에선 살인 용의자가 된 아들을 필사적으로 구하려는 모친을 통해 한국사회의 가족상을 그렸다.
2010년도에 들어서면서 봉준호는 해외에 진출했다. 약 4천만 달러의 예산을 투입해 북미 지역에서도 개봉한 영어 대사 영화 <설국열차>(2013)는, 끝없이 달리는 열차의 차량을 고스란히 사회 계층으로 표현한 SF 영화였다. 그리고 넷플릭스를 통해 배급된 <옥자>(2017)에선 인간과 동물(애완동물/가축)의 관계를 보다 순화시킨, <플란다스의 개>의 글로벌용 개정판 같은 내용이었다.
이러한 필모그래피를 따라가 보면 봉준호가 <기생충>에 다다르게 된 콘텍스트도 밝혀지게 된다. 2000년대에는 한국적인 영화를 만들었고, 2010년대에는 한국에선 불가능한 규모의 예산으로 해외 진출을 시도했다.
무대는 바뀌어도 다루는 테마는 큰 차이가 없었다. <기생충>에 그려진 양극화 사회는 <설국열차>에서, 밀착적인 가족 관계는 <괴물>과 <마더>에서 다룬 바 있다.
그런 가운데 <설국열차>와 <옥자>는 해외를 무대로 한 탓에 디테일을 통한 생생함이 약해졌고, 한편으로 작품의 구조가 보다 순화되었다. 그 두 작품은 아마도 봉준호의 영화들을 보아온 사람들에게 있어서 결코 높게 평가를 받는 작품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기생충>은 그 두 작품이 없었다면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켄 로치, 고레에다 히로카즈, 봉준호의 공통점
<기생충>은 사실 매우 단순한 이야기다. 반지하에 살던 가족이 부유층 가족에 기생하고, 거기서 생각지도 못했던 다른 문이 열리고 만다. 이런 이야기 구조와 대단히 이해하기 쉬운 결말은 해외 진출을 해봤기 때문에 나올 수 있었을 것이다.
한편 그와 동시에 무척이나 한국적인 상황도 그려냈다. 그것은 가부장제도의 색채가 짙은 가족의 형태이다. 사회학자 한동현도 지적했듯이 주인공 가족도, 부유층 가족도 자신들의 ‘가족’에 대해서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그것은 지극히 자명한 것으로 그려져 있다.
봉준호는 <기생충>에 대해서 말할 때, 켄 로치의 <나, 다니엘 블레이크>와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어느 가족>을 예로 든다. 모두 최근에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작품들이다. <기생충>까지 세 작품들의 공통점은 각국의 양극화 사회와, 거기에 농락당하는 가족을 그리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기생충> 외의 두 작품에선 혈연관계가 아닌 사람들끼리도 가족(적인) 관계가 구축될 수 있는 가능성을 그리고 있다. 행정(사회)로부터 방치된 자들이 서로 돕고 사는 그 관계는 최후의 희망이자 수단이 된다. 그것은 가족을 명백한 것으로 다루지 않고, 재귀적(再帰的)인 것으로 다루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물론 봉준호 역시 재귀적 가족에 대해 이해하고 있다는 것은 <괴물>의 결말을 통해 알 수 있다.
하지만 <기생충>에 등장하는 여러 가족들은 그러한 가능성을 무시하고 있다. 그들은 어디까지나 혈연과 가장의 존재를 의심치 않는 운명공동체다. 그렇기 때문에 가족은 사회로부터 떨어진 독립 개체로서의 특성을 강화하면서, 다른 가족과 협력하지 않고 서로 기생하는 것이다. 한편으로 기생당하고 있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그 관계에선 합목적성만이 모든 것이다. 거기에 공공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기생충>의 뒤틀린 매력은 바로 그런 기생에 있다.
생각해보면 1980년대부터 영미를 중심으로 일본과 한국에도 도입된 신자유주의정책이 이상적으로 여긴 것은 낙수(trickle-down)이론이었다. 부가 상류층에만 모이지 않고 하류층으로 낙수하면서 경제가 선순환 된다는 도식이다.
하지만 토마 피케티가 갈파했듯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격차는 확대되고 상류층의 부는 낙수하는 일 없이, 빗물이 그저 하류층에 흘러들어 오물이 될 뿐이다. 기생은 낙수를 기대하지 않는 하층민들이 떠올린 지혜의 결실인 것이다.
가족에서 시작되어 개인의 본성을 드러내는 이야기
영국의 <나, 다니엘 블레이크>, 일본의 <어느 가족>, 미국의 <조커>, 그리고 한국의 <기생충>.
이러한 작품들이 최근 3년 사이에 발표되고 주목받은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모두 신자유주의 사회정책을 추진했고, 그 결과로서 경제 양극화가 확대된 나라에서 생겨난 영화들이다.
작은 정부를 목적으로 하는 신자유주의에서, 그것이 쉽게 보이는 잔혹함으로서 드러난 것은 사회보장과 교육이다. 영화의 등장인물들은 고통 받고 항의하고 폭동을 일으킨다. 영화에서 발산되고 있는 그 메시지는 무척이나 직설적이다.
하지만 <기생충>에선 행정에 대한 직접적인 불만은 거의 그려져 있지 않다. 정치에 대해 적극적인 태도를 보여 온 한국사회에서, 그들(기택네 가족)은 열등한 존재로 보일지도 모른다. 대신에 공공연하게 보이는 것은 명확한 빈부의 차와 밀착된 가족군(家族群), 그리고 서로 기생하는 관계성이다.
감상자는 뒤틀린 밀착 가족을 통해 격차를 알고, 거기에 더해 정체를 알 수 없는 지하로 끌려가게 된다. 직접적인 메시지가 나오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잔혹한 사회구조를 내다볼 수 있게 된다. 그런 점에서 <기생충>은 복잡하면서 지극히 교묘하다.
다만 클라이맥스에서 이 이야기는 크게 비약한다. 단 한 장면에 의해.
6년 전 <설국열차>가 개봉됐을 때 봉준호 감독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지금까지의 내 작품들은 한국사회를 그린 한국영화였지만, 한 꺼풀 벗기면 결국 인간에 관한 영화였죠. 인간의 조건이란 무엇인가, 인간의 본성이란 무엇인가. 그런 것들에 대한 질문이었습니다.”(닛케이 트렌디넷 2014년 2월12일자)
아마 <기생충>도 그 예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여러 인물들의 본성이 드러나는 그 장면은 이전까지의 깔끔했던 전개를 파탄시킨다. 한 가족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여러 가족들을 경유하면서 사회구조를 내다보게 하고, 그리고 개인의 본성으로 이어져 간다.
그 결과, 우리들은 당연한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가족과 사회는 개인의 집적(集積)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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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준호 본인도 자기를 장르감독이라고 하니까ㅇㅇ | 20.02.17 13:00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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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레에다가 진순이라면 봉준호는 진메같음 | 20.02.17 12:56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