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네시까지 어쩌다 잠을 자지 않았다.
다음날 오후 한시까지 잠을 잤다.
그러면 반드시 이상하고 복잡한 꿈을 꾸게 마련이다.
그리고 그 꿈은 무언가 힘을 가진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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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 로봇 ‘빨강’은 20년 동안 주로 시설에서 잡역과 서비스업을 해오다 전쟁 중 징집되어 비밀리에 한 마을을 초토화시키는 작전에 투여되고, 민간인을 학살하는데 동참한다.
그는 ‘까망’이라는 다른 (여자?)로봇을 사랑한다. 그래서 빨강은 마을에 투하되자마자 까망을 찾아 나선다. 그는 민간인들을 위협하면서 은근히 도망치라는 눈치를 주면서 돌아다녔는데, 결국 까망을 찾았지만 그 과정에서 그를 저지하려는 사람들을 헤쳐 나가면서 집을 무너뜨려 살인을 하게 된다. 빨강은 까망과 함께 마을에서 도망가 먼 평야를 달리지만 그들 앞에는 다른 깃발을 한 군인들이 서있었다. 그들은 어디론가 작은 방에 웅크려 극도의 두려움에 질려 숨어있었지만, 이윽고 군인들이 다가와 그들을 찾아내 목덜미를 잡고 끌어냈다.
빨강은 어느 거대한 산속에 누워있는데, 이윽고 그의 몸 자체가 산골짜기의 일부임을 깨닫게 된다. 그는 작은 목소리의 지시에 따라 몸을 일으켜 커다란 바다로 걸어가는데, 아주 한참을 걷자 그는 다시 원래의 몸으로 돌아가 있었고, 바다는 거대한 어두운 절벽 끝에서 끝도 알수 없는 추락을 하고 있었다. 그 너머 암흑은 마치 세상의 끝인 양 두꺼웠다.
그는 그곳에서 작은 항구의 오두막을 발견한다. 그곳은 기묘하게 근대적인 낚시터의 휴게실 같은 곳으로, 연탄 난로가 덩그러니 있었고 새벽 별빛과 일렁이는 횃불에 망연히 눈뜬 노인들이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그 가운데엔 나이를 짐작도 할 수 없는 여인이 길고 화려한 기하학적인 무늬가 새겨진 옷을 입고 그 신성한 자태에 어울리지 않게 한 다리를 굽혀 그 위에 팔을 올린채 다소 건방진 자세로 앉아 그를 치켜보았다. 사람들은 저마다 끝없이 중얼거리며 말하고 있었는데, 빨강은 곧장 여인 앞에서 말을 걸었다.
여기가 어디입니까?
죽은 뒤에 오는 곳.
당신은 누구입니까?
여기에 가장 오래 있어온 존재. 안내자. 선장. 천사. 악마. 삼신 할머니. 염라대왕. 가브리엘. 가네샤. 부처.
그리고 덧붙였다.
용.
당신을 무어라 부르죠?
엄마라고 불러.
그건 거부감이 드는군요.
그럼 사탄이라고 부르던가. 그렇게 부르는 사람도 많더라.
당신은 악해보이지 않습니다. 그냥 마지막에 말한 대로 용이라고 부르죠.
용은 고개를 젖혀 옆에 웅크리고 기대 누운 노인을 제대로 바닥에 받쳐 뉘였다.
여긴 죽은 사람이 오는 곳이라고 했죠.
용이 못미덥게 ‘응’이라고 답했다.
까망도 여기 왔습니까?
몰라.
제가 죽인 사람들은요?
몰라. 라는 의미로 용이 고개를 저었다.
빨강은 용이 하늘거리는 옷깃과 손으로 주위의 노인들을 느릿느릿 잠재우는 것을 한참이나 보다가 그녀의 앞에서 주저앉았다. 그는 허리를 펴고 몹시 신중하게 용을 살폈다.
너는 너 자신을 보고 있어.
용이 바다를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어째서 너가 여기 있는지 궁금한 거지?
네.
빨강이 답했다.
이곳을 다른 말로 무어라 부르는지 알아?
용이 웃음 지었다. 그녀가 턱으로 바다를 가리켰다.
용의 집.
거대한 폭포 소리는 끊임없이 쾅쾅 울렸다.
당신이 저를 이곳에 부른 겁니까?
그런 거지.
빨강은 부르지 않았습니까? 그녀는 살았나요?
몰라.
당신은... 이른바 신적인 존재 아닙니까, 용?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더 많아 보이네요.
난 너만을 위한... 일종의 화신이야. 지금껏 너 하나만을 기다려 왔다고.
빨강은 눈썹을 찌푸리며 주위 노인들을 둘러보았다.
여기서 저는 무얼 해야 하죠? 저 자들처럼 웅크리고 기대 계속 있어야 하는 겁니까?
여기서 넌 선택할 수 있어. 용이 손으로 얼마 머지 않은 폭포 낭떠러지를 가리켰다.
저기로 가면 넌 산산히 부서져 흩어질 거야. 다른 모든 이들과 함께. 그리고 그 밑에서 뒤섞여 새롭게 만들어질 거야.
빨강이 죽음의 안개가 피어나는 암흑을 쳐다보았다.
반대편으로 가면... 네가 있던 산 말야. 거길 갈 수도 있어.
가면 무엇이 있나요, 용?
신.
빨강은 그가 골짜기의 일부로서 존재했던 한없이 먼 거리에 선으로나마 존재하는 산을 바라보았다. 그가 고개를 저었다.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저는 인간도 아니고 하찮은 미생물조차 아닙니다. 기계일 뿐인데, 어떻게 이런 곳에 올 수 있었던 거죠?
왜 올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저는 생명체가 아닙니다. 외피는 유사 유기세포로 이루어져있지만 속은 호스와 기어로 이루어져 있어요.
용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뇌도 없습니다. 신경계가 없습니다. 저의 생각, 마음, 의식은 작은 칩의 연산에 따른 것이죠.
저는, 저의 동지들은 당연하지만 성기도 없습니다. 저흰 후세를 남길 수도 없어요.
그는 인간의 명령을 따라 살인을 하다가 인간의 손에 붙잡혀 죽은 그와 까망의 최후를, 까망의 공포에 찬 숨소리를 떠올렸다. 까망은 거칠어진 숨을 다스렸다.
우린 결핍된 존재입니다.
용이 눈을 감고 고개를 어깨에 대고 웃었다. 빨강이 조심스럽게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사실 ‘우리’입장에서 볼때 너희나 인간이나 돌덩이나 크게 다를 게 없어. 그들 사이 차이를 구별 지으려 애쓰는 건 인간들이나 하는 거지.
저에게 영혼이 있습니까?
아마 없을걸.
빨강이 끄덕였다. 다행이군요. 저는 심판받지도 않겠지요?
용이 자애로운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빨강은 왜인지 점점 용이 ‘엄마’라고 부르라 한 이유를 알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당신은 저를 기다렸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영혼도 없는 절 왜 기다린거죠?
그게 나의 일이니까.
빨강이 고개를 저었다.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은 답을 해주는 존재가 아니 군요, 용.
용이 손을 뻗어 아주 부드럽게 그의 뺨과 어깨를 쓸었다. 빨강은 어느새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제가 얼마나 고통 속에서 살아왔는지 알기나 합니까? 어찌 보면 저는 당신보다도 더 허상에 가까운, 이 세상에서 먼, 존재에요. 스스로 진짜가 아님을 생각할 수 있는 존재를 상상해 보셨습니까?
용은 어느새 두 팔을 뻗어 그를 감싸안았다. 그녀의 길고 아름다운 옷깃이 살갗에 스쳤다.
파도가 부서지고 폭발하는 소리에 별빛이 잠기고, 더 어두운 침묵이 풀려나왔다. 노인들이 뒤척였고, 작은 휴게실은 상당한 속도로 넘실되는 물살에 삐꺽였다. 그 모든 소리와 격정은 한층의 벽에 가려 낮게 속삭이듯 끝없이 두들겼다.
저는 까망을 찾아야 합니다.
빨강이 용에게 속삭였다.
저를 산으로 안내해 주세요.
그들은 배에 탔다. 지극히 오래됐으면서도 동시에 단순하고 세련된 소형보트였다. 빨강은 군시절에 이런 보트의 노를 젓는 법을 알았다. 용이 노를 건네자 그가 저었다. 물살이 온통 폭포로 향했기 때문에 폭포에서 몇 킬로미터까진 손으로 밀고 가는 게 빨랐다(발이 땅에 닿았다.) 물은 미지근했다. 하지만 깊어질수록 차가웠다. 그들은 노를 저어 산으로 나아갔다.
이따금 바다에서 괴물이 튀어나왔다. 수룡처럼 생겼거나, 인간의 형상을 한 거인, 두손에 야만적인 칼을 든 여자, 얼음 괴물들. 용은 그들과 싸워 이겼다. 그때마다 거대한 파도가 일어 배가 뒤집어지려 했다. 빨가은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았다. 소름끼치게 깊은 해저엔 어두운 산호초와 미역이 가득했다.
산이 있는 뭍에 다다르자, 모래사장이 바다만큼이나 넓게 펼쳐졌다. 여전히 사위는 새벽처럼 어두침침했지만, 기이한 광원이 산 쪽에서 뻗어 나와 마치 조명을 받는 것 같았다. 용과 빨강 모두 흠뻑 젖고 초췌했다. 그들은 수십년을 바다 위에서, 다시 수십년을 모래사장 위에서 걸었다. 마침내 산에 도착했다. 용이 예의 깔보는 눈빛으로 깎아지른 듯 한 바위절벽을 올려다보았다.
여기부턴 내가 갈 수 없어.
빨강이 돌아보았다.
무슨소리 하는거야?
용이 그를 껴안았다. 빨강이 그녀의 품에(용은 빨강보다 컸다) 안겼다.
너는 선택을 할 수 있어. 그리고 너는 너 자신을 가만두지 않아. 그게 네가 여기 있는 이유야.
빨강이 울며 매달렸다. 용이 그의 머리를 차분히 쓸었다.
오, 너는 아직 너무 어려...
산은 그야말로 위엄있는 수염난 얼굴처럼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저기서 까망을 보게 될까? 그녀는 이곳으로 오지 않고 폭포에 뛰어내렸으면 어떡하지?
용이 하하 웃었다. 그녀의 맨발은 까지고 부르트고 발톱이 나가있었다.
그녀를 만나면,
빨강은 한참이나 용을 올려다 본채 굳어있었다. 용은 형용할 수 없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용은 아주 천천히 거의 찢기고 해진 옷을 걸친 팔을 내려, 우아하게 뒤돌아 다시 어두운 바다로 되돌아갔다. 다시 그 휴게실로 가려면 백년은 걸릴 터다.
빨강은 그녀의 모습이 수평선에서 완전히 사라지기까지 아주 오랜 시간을 바라보다가, 뒤돌아서서 절벽을 보고, 그의 두 손을 보고, 바위의 돌출부를 잡고 오르기 시작했다. 바위의 작은 이끼들에 자꾸만 손이 미끄러졌다. 그러나 그는 단단히 버티고서 떨어지진 않았다. 그는 그의 등 뒤를 신경쓰지 않으려 애썼다. 그는 약한 고소공포증이 있었다. 그는 아예 눈을 감고 오르기로 했다. 그는 추락하면서도 다시 오를 생각만 하였다. 그리고 다시 올랐다.
(다른 커뮤니티 사이트에도 올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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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담] 꿈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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