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7년 러시아에서 공산주의 혁명이 발생하고 적백 내전이 벌어지면서 백군을 지원하기 위해
연해주에 일본군이 진주해오게 됩니다. 이 때 연해주는 아직 백군의 세력 하에 있었으며
시베리아의 백군 대장인 콜차크 제독이 잡혀 처형된 후 적백 내전이 마무리되어갈 때까지
일본군의 힘을 빌어서 최후까지 남아있던 백군의 근거지였습니다.
유명 소설이자 영화화도 되었던 '닥터 지바고'의 등장인물 빅터 코마롭스키.
여주인공인 라라를 탐하던 탐욕스런 변호사로 원작이랑 영화에서도 후반부에 등장하여
숙청당할 위험에 처한 라라와 지바고를 백군 세력하의 연해주 극동공화국 으로 피신시키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미 공산 혁명의 소식이 이미 러시아 전역에 알려져있는 이 때에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던
연해주에서도 혁명에 동조하면서 반일적 성향을 띄는 기류가 형성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이 시기에 뜨랴삐친이라는 빨치산 지도자가 등장하게 됩니다.
하바로프스크와 니콜라예프스크 중간쯤 지점에 쏘피아라는 조그마한 어촌에서는 22세의 뜨래삐진이라는 청년이 있었다....(생략)...뜨래삐진은 제1차 대전시에 그의 조국을 위하여 종군하였다가 종전후에 귀향하여 우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자기 고향에 돌아와 보니 들리는 소식은 일본군이 시베리아로 출병하여 멀리 일크쯔끄까지 점령하리라는 소식이다. 아무리 자기 조국이 패전국이라 할지라도 원숭이 같은 일(본)군 에게 점령을 당한대서야 참을 수 없는 분통이 터지는 것이다. 그는 자기의 애인 레나에게 자기의 심정을 토론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애인 레나는 자기 고향에서 소학교 교원으로 있었다. …그들은 비밀리에 자기네들과 뜻을 같이 할 수 있는 5인이 동지를 구하자가 돌연 행동을 개시한 것이다. 그들은 촌락을 기습하고 청장년을 모집하고 동시에 부유한 집에서는 무기와 식량을 징발하였다. 이렇게 흑룡강 하류로 내려가면서 동일한 방법으로 무기와 군인들을 마구 모집하였다. 당시 러시아 청년들은 대개 출전하였던 군인출신이오, 시베리아 북극지대에서 기나긴 겨울의 주야를 농촌이나 어촌에서 보내는 것이 무료하던 차에 뜨래삐진 일파들의 애국적이고 모험적인 협객활동에 가담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생략)... 제정 러시아의 썩어빠진 탐관오리들의 횡포...일러전쟁 이후로 가장 멸시하는 일본군대까지 자기네 영토에서 우쭐대는 것을 보고는 숨이 막힐 정도로 저기압상태에 처해있는 그들에게 '이놈의 세상을 때려부시자!'하는 뜨래삐찐의 선둥구호에 공명하게 된 것은 무리가 아니다. 자기 집에 있는 연발 총이나 엽총이나를 되는대로 들고 뜨래삐진의 뒤를 따르는 것이었다.
흑룡강변 부락에서 월동하던 우리나라 사람들도 백여명이 뜨래삐찐의 무장집단에 가담하였다.
- 이지택, 니항사변과 독립군, 新東亞, 통권제45호, 1968, 321~322 -
1919년 뜨랴삐친의 부대는 인근의 빨치산들과 연합하여 세력을 키운 뒤 백군과 일본군과의 전투를 벌여나갔습니다. 그리고
1920년 2월 28일 니항(=니콜라에프스크)으로 진군하면서 일본군과는 휴전 협약을 맺어 평화 협정을 체결하게 됩니다.
(반병률, 49권 1920년대 전반 만주·러시아지역 항일무장투쟁)
뜨랴삐친과 그의 애인 레나.
니항에 입성한 뜨랴삐친의 빨치산 부대는 백군인 옴스크 정부의 관리, 자본가, 장교들을 체포하여 처형하였고
일본과 내통했다는 명목으로 400명 이상의 '유태인 자본가' 들을 아무르 강의 얼음구멍에 넣어 익사시켰습니다.
그는 제1착으로 일본군 세력과 결탁한 유태계 자본가들과 악질적인 탐관오리들을 숙청하기 시작했다
- 이지택, 니항사변과 독립군, 新東亞, 통권제45호, 1968,, 324쪽 -
자본가들(다수로 유태민족)과 중들을 모착하여서 야무르강 어름 구영(얼음 구멍)에 띠엇다.
- 홍파, 니꼴라옙스크 사변, 독립운동사 사료 홍범도 편, 113쪽 -
그 뒤 3월 5일에 백군의 무장을 해제한 뜨랴삐친 부대는 12일에 주둔한 일본군 14 보병 사단의 무장을 해제시키려 하였으나
일본군은 이에 응하지 않고 3월 12일 빨치산들의 연회가 열린 틈을 타서 기습적으로 공격을 가했습니다.
이에 뜨랴삐친이 부상당하는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고 결국 일본군들이 숨어있는 병영을 빨치산들이 대구경포로
포격하면서 결국 300여명의 일본군들이 항복하여 포로로 잡히게 됩니다.
그리고 이 전투에 상당수의 일본 거주민들이 무장을 하고 일본군을 도와 전투에 참전하였으며, 이에 대한 보복으로
빨치산들은 일본인 거주민들을 저항했던 하지 않았던 무차별로 학살하기에 이릅니다.
뜨라비찐는 일본인은 로소남녀를 막론하고 모조리 학살하라고 명령하였다. 이 명령은 충분히 실현되었다. 은행과 상점들을 압수하였다. 상점에 싸이어 있던 피물로 2000명 빨찌산 군복을 하여 입게 되었다.
이 때에 전설에 의하면 한 유대녀자가 자기는 죽이어도 자기의 어린아들을 살려달라고 애걸하엿다.그러나 그 어린아이를 그 녀자 보는데 먼저 죽이고 다음에 그녀를 죽이었으며 한 일본 은행사무원은 일본도 베게 두개만한 체적을 가지고 눈길에 시외 몇 킬로 멧틀에루 도망간 것을 고려인 빨찌산 두명은 그 자취를 따라가니 일본인이 자기에게 있는 돈을 줄 것이니 자기의 생명을 살려달라고 애걸하엿다. 그러나 그 돈을 일본인이 보는데서 불에 태워버리고 다음으로 일본인을 죽이었다.
- 홍파, 니꼴라옙스크 사변, 독립운동사 사료 홍범도 편, 113 -
시가지에서 일인집들과 러시사아 장교집들을 철저히 수색했다. 최후의 발악으로 일인 거류민들도 최후까지 항거했다. 그러나 그것은 전가족의 몰살로 끝났다. 시가에 소탕전이 약 1주일 후에야 끝났다. 박이나 나는 1주일 동안 집안에서 딩굴었다. 공연히 나다니다가는 유탄에 맞아 죽기 알맞기 때문이다. 일군의 항전은 포로 30여명의 생존가 남았을 분 그외에는 모두 학살당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일본 군인인지 거류민인지 헐벗은 일본인이 문모라는 우리나라 사람집에 달려들어서 살려달라고 애걸하더란 것이다. 그래서 할 수 없이 하루밤을 재워 보내면서 여벌의 외투까지 주었다는 것이다.
- 이지택, 니항사변과 독립군, 新東亞, 통권제45호, 1968, 325~326 -
여기서 살아남은 136명 가량의 일본인 여성, 어린이들은 빨치산들에 의해 감옥에 가두어졌는데, 훗날 일본군이 반격할
조짐을 보이자 빨치산들은 후퇴하는 과정에서 이들을 모두 처형합니다.
(반병률, 49권 1920년대 전반 만주·러시아지역 항일무장투쟁)
이러한 속에서 뜨랴삐친 부대에 소속되어 있던 한인 부대원들도 학살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였으며,
니항 점령 이후에는 안하무인의 태도로 행패를 부려 같은 고려인들도 불안에 떨어야만 했습니다.
홍군의 의미심장한 말한마디로 우리들은 긴장해지기 시작했다. 홍군의 말인 즉 이번 사건이 좀 평정해지면서 우리 한인부대 군인들의 횡포가 심해져가고 가고 그들이 안하무인격으로 주민들에게 대한다는 것이다. 자기집에 와서도 그렇게 우쭐대는 것을 보니 다른 집에 가서는 행패가 더 심하리라는 것이다. 고중대장과 홍군 아버지와는 형님 동생하는 친한 사이였다. 한인 군인들의 행패를 막기위해서는 무슨 대칙이 있어야 하겠다는 것이다. 자기도 하도 분해서 고중대장을 찾아서 자기 집에 총을 메고 와서 "술을 내놔라 일본놈을 내 놔라"하고 여자들에게 총을 들이대고 당장 쏴 죽일 것처럼 행패를 부리니 어디 그럴 수 있느냐고 대들었더니 고중대장도 미안하다고 하면서 사과는 했지만 무지막지한 그놈들이 어디서 무슨 짓을 저지를는지 알 수 없으니 그 대책을 강구해야 하겠다는 것이다.
- 이지택, 니항사변과 독립군, 新東亞, 통권제45호, 1968, 326 -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군의 반격이 임박해왔다는 조짐을 보고받은 뜨랴삐친은 니콜라예프스크(=니항)에서
철수할 생각을 품게 되고 철수하면서 니항을 모두 파괴하고 남아있는 반동들을 모두 숙청한다는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이를 알게 된 자유단(한인 항일 청년들의 단체)의 청년들은 뜨랴삐친을 면담하여 "가족들의 안전을 보장한다."
라는 조건 하에 죽지 않기 위해 뜨랴삐친의 부대에 가담하게 됩니다.
1900년 니항=니콜라예프스크의 사진.
빨치산들이 철수하면서 파괴한 니항의 잔재.
그리고 5월이 되어 아무르 강의 얼음이 풀리자 일본군의 보복 함대가 니항 근처로 접근하기 시작하고
이에 뜨랴삐친은 피난가지 않은 모든 주민들과 살아남은 일본인 포로들을 모두 죽이고 철수하였습니다.
또한 철수하는 동안에 들른 암군강가에서도 학살을 자행하여 니항에서 지원한 자유단 청년들이 크게
경악하기도 했습니다.
“대중테러가 발생하여 수많은 부르주아 및 소부르주아 가족과 우익사회주의 활동가들 심지어는 소비에트 권력의 동조자들까지도 희생되었다. 동시에 이러한 테러는 암군강가의 마을에서도 벌어졌으며 아이들까지도 죽임을 당했다. 이사건들은 어떠한 변명으로도 용납될 수 없으며 계속된 완전한 해명을 요구한다.
- 군사소비에트 전권위원 베우드닌,사할린주 군사정치정세에 대한 보고,1920년 9월 9일,켈비 -
뜨래삐찐이 날비에 주둔하고 있으면서 하는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행동을 하는 것 같아서 늘 불만이 만만하였다. 한가지 예를 들면 날비에 가서도 뜨래삐찐의 부하들이 사람을 어찌나 죽이던지 하루에도 한둘의 시체는 강물위로 떠내려오고 있었다. 우리도 이따금식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는 일이었지만 심지어 감시대라는 것을 두어서 강으로 오르내리면서 강변에 걸린 시체나 떠오르는 강상의 시체를 거두어서 강변에 묻어주는 일을 하게까지 하였으니 그 살인적 행위는 불문가지였다.
- 이지택, 이지택, 니항사변과 독립군, 新東亞, 통권제45호, 1968, 343 -
결국 이에 더는 이꼴을 두고볼 수 없게된 뜨랴삐친의 반대파는 뜨랴삐친의 기병대가 주변 마을을 약탈할 때를
노려 쿠데타를 일으켜 성공해 부대의 지휘권을 잡게 되었고 여기에 박 바실리가 이끄는 자유단 청년들도
가담하였습니다. 뜨랴삐친과 그의 부인 레나를 비롯한 수뇌부 7명은 그 자리에서 처형되었습니다.
뜨랴삐친(가운데 수염 기른 사람)과 아내 레나(옆의 가방을 든 여성), 그의 빨치산 동지들.
그러나 뜨랴삐친의 열렬한 추종자이자 심복이었던 한인부대원 박일리아는 이 처형에 반대표를 던졌으며,
뜨랴삐친을 "혁명적 애국자"로 간주하고 처형하는 것에 상당한 불만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박일리아는 뜨랴삐친을 몰아낸 쿠데타에 가담한 박 바실리를 린치하여 죽입니다.
"첫째,위 부대의 사령관으로 있으면서 한인특별보병대대 오하묵으로부터 승인을 받지 않고 블라고베센스크로 가서 2달 이상 체류한 점.
둘째,이곳(블라고베센스크 호텔)에 사령부를 설치하고 한인특별보병대대의 조직적 해체에 종사한 점.
셋째,이전 니꼴라예프스크 병사들과 관계를 맺고 박 바실리 동지의 살해를 막지 않은 점.
넷째,부대를 자유시에서 시골로 옮기면서 평화로운 러시아농민들을 강압적으로 약탈한 점.
다섯째,거짓된 정보로 한인부와 최고사령부로 하여금 거짓된 정세를 받아들이도록 한 점.
여섯째,유언비어와 모험적 행동으로 일부 한인혁명가들의 신용을 실추시킨 점.
일곱째,니꼴라예프스크 부대의 무책임한 테러리스트들로 그룹을 만들어 한인특립보병대대의 병사들과 지휘부를 낭패에 빠뜨린 점"
- 1921년 3월 2일 치타에서 열린 특별한인군사협의회 제1회 회의 회록 -
경비원들이 차례로 한사람씩 불러내서는 "심심한데 빈데나 털어 볼까"하고 밖으로 데리고 나가서는 몽둥이로 온 전신을 두드려 패는 것이었다. 이렇게 며칠동안 못살게 굴더니 그들의 교대가 끝날 마지막 날에 와서 밤중에 4,5명이 우르르 몰려 들더니 박병길(박 바실리)을 불러 내더란 것이었따. 박이 불려나가니 또 빈대털리가 시작되나 보다 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고개를 빼서 내려다보고 잇는데 박이 내려 서자마자 뒤에서 한 놈이 러시아식 뾰족한 총장으로 느닷없이 박의 등을 찔러버렸따는 것이다. 그놈들도 무고한 사람을 죽이고나니 겁이 나서 더 죽일 용기가 나질 않았떤지 모두 몰려 나가고 쇠를 채우는 소리가 나더니 잠잠해지더란 것이었다.
- 이지택, 이지택, 니항사변과 독립군, 新東亞, 통권제45호, 1968, 349 -
그리고 박일리아는 1921년 5월 상해파 고려공산당의 군사부 담당 중앙위원이 되었으며, 이어서
소련 적계군 한인 부대장을 맡아 당시 막 편성되었던 대한독립군단에 소속되어있던 이청천(본명 이청천)의
대한독립단에 홍범도의 소개를 받아 독립군의 훈련을 맡게 됩니다. 그리고...
상하이 임시정부를 지지하는 상해 고려공산당의 입장에 따라 대한독립군단의 모든 부대를 자신의
사할린 의용대 휘하에 두려고 했다가 대한국민회의를 지지하는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휘하의
자유대대가 휘하에 들어오는 것을 거절하자, 먼저 그들을 무장해제시키고 강제 편입시켰으며 이에
반대파인 이르쿠츠크파가 러시아 적군을 끌어들이게 되면서... 한국 독립사의 비극이라고 할 수 있는
자유시 참변 이 발생하게 됩니다.
이 참변으로 인해 대한독립군단은 와해되었으며 홍범도는 소련군에 편입(후에 강제이주당함)되었고
김좌진은 겨우 목숨만 건져 달아났으며 이범석, 김홍일은 만주에서 잠적하였고(후에 임시정부에 참여)
지청천은 임시정부로 향했습니다. 이로서 무장독립세력이 크게 약화되었으며,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
민족주의 vs 공산주의 의 이념 갈등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리고 일제는 이 사건을 핑계로 하여 소련에게 한국 독립군의 무장해제를 요구하는 한 편,
(이를 소련이 받아들여 1922년 소련 휘하 한인 독립군들은 모두 해산) 신한촌을 기습하여
그곳에 살던 조선인 거주민들을 학살하는 4월 참변을 벌였습니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07737&cid=40942&categoryId=31778)
니항을 재탈환한 뒤 일제가 세운 니항 초혼비.
빨간 점이 니항의 위치. 아무르 강을 끼고 있으며 옆의 커다란 섬은 사할린 섬이다.
위키 백과의 니항 사건 항목 : https://en.wikipedia.org/wiki/Nikolayevsk_incident
네이버의 니항 사건 항목 :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078727&cid=40942&categoryId=317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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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족 1.
러시아지역에서 독립군으로 일본 제국주의에 반대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박일리아는 러시아 10월 혁명과 3.1운동을 거치면서 본격적으로 혁명 활동에 나섰다...(생략)... 1921년 6월 자유시참변 당시 박일리아는 사할린의용대(대한의용군)의 중심인물로 고려혁명군의 무장해제에 저항하였으며, 이때 약 500명의 무장부대를 지휘하였다. 이후 연해주 이만으로 이동하여 11월 전한군사위원회 위원, 1922년 8월 대한혁명통군서와 고려혁명군정의회 군정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일본군이 후원하는 러시아 백군과의 전투를 전개하였다. 1923년 경 중국 요하(饒河)지역으로 이주하여 1924년 교하(交河)에서 대한혁명통군부의 설립에 참여하고 중동 부사령관에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6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독립유공자 공훈록 박일리아 항목(http://www.mpva.go.kr/narasarang/gonghun_view.asp?id=10766&ipp=10) -
사족 2.
...이처럼 극동시베리아의 한인들은 ‘남의 나라’ 혁명에 온몸을 바쳤다. 1920년 3월
박일리아가 이끄는 사할린대대는러시아 빨치산들과 연합해 아무르강 하구의
니콜라예프스크에서 700여명의 일본군과 일본인들을 몰살시키기도 했다. 또
대한의용군, 고려혁명군, 혈성단, 다반군대, 솔밭관군대 등 많게는 30개에 이르는
한인 독립군 내지 빨치산 부대가 수많은 전투에서 활약했다....
- 한겨레 기사 2005.9.14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8&aid=0000125228) -
간단한 정리.
① 뜨랴삐친이 이끄는 빨치산들이 니항에서 백군과 일본군들을 무찌름.
② 근데 일본 민간인하고 러시아 민간인들까지 죽임. 그것도 같은 공산당에서 안 좋게 볼 정도로 많이 죽임.
③ 박일리아를 필두로 한 한인부대원들이 뜨랴삐친의 학살에 적극 가담하였음.
④ 이를 두고보지 못한 다른 한인 청년들이 반대파의 쿠데타에 가담, 뜨랴삐친을 죽임.
⑤ 이에 박일리아는 보복으로 쿠데타에 가담한 한인 청년들을 린치하고, 죽이기도 함.
⑥ 후에 박일리아는 대한독립군단에 가담하여 먼저 반대파 공산당을 무장해제 시키려다가 역으로 당함.
⑦ 여기에 다른 독립군들이 휩쓸려 많이 희생됨.
⑧ 2006년에 박일리아에게 건국훈장 수여됨. 지금까지 니항 사건에 대해 말하는 역사가들 거의 없음.
(IP보기클릭)175.223.***.***
뭔가 복잡한 역사네요. 잘보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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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복잡한 역사네요. 잘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