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반이 걸리고 그들의 모든 돈을 투자한 결과물인 웨이 오브 더 워리어가 마침내 1995년 3DO로 출시되었다. 하지만 너티독의 미래는 3DO와 함께 계속되지는 않았다. 3DO는 200만대 정도 팔린후에 생산이 중단되었다. "웨이 오브 더 워리어가 발매되었지만 그냥 그런 정도의 판매였습니다. 하지만 유니버셜은 저희에게 '플랫폼을 고르고 IP를 그르고 게임의 타입을 정해라. 우리가 투자하겠다'라고 말했습니다."
"먼저 우리는 어떤 장르를 만들어야 할까라는 의문을 가졌습니다."라고 루빈은 설명했다. "캐릭터 액션게임은 당시 가장 인기있는 장르중의 하나였습니다. 소닉과 마리오 같은 게임 말이죠. 이때는 플레이스테이션이 소개되기 이전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장르를 만들어 보기로 했습니다. 우리는 할 수 있다면 우리의 게임이 독점이 될 수 있는 하드웨어를 찾으려 했습니다. 왜냐하면 3DO에서 그러한 전략이 맞아들어갔었기 때문입니다." 캠브리지에 처박혀 작업을 했던 수년이 지난 두명은 차에 타고 유니버셜 스튜디오가 위치하고 있는 캘리포니아로 떠났다. 크로스 컨트리 드라이빙 중에 두 명은 그들의 다음 게임에 대한 계획을 하면서 여행을 했다. 이번에도 그들은 그들이 만들고 싶을뿐 아니라 시장또한 원하는 게임을 만들어 보기로 결정했다.
여기에서 크래쉬 밴디쿳의 아이디어가 탄생하게 되었지만 아직 완벽하게 살이 입혀진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디어가 진행되면서 게빈과 루빈은 직면한 문제점에 봉착하게 되었다. 누가 게임을 만드는데 도움을 주게 될 것인가? 이제 더이상은 두 명만으로는 작업이 불가능하게 되었고 그 점은 웨이 오브 더 워리어의 제작과정에서 증명되었다. 이전 키프 더 시프나 링스 오브 파워를 만들때와는 다르게 게임 개발은 훨씬 더 복잡한 과정을 거치게 된 것이다.
"앤디와 제가 항상 원했던것은 자유였지만 그 자유는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넉넉한 자금또한 필요했습니다."라고 루빈은 설명했다. "유니버셜 스튜디오는 저희에게 '먼저 개발과정을 개선시키기 위에 무엇이 가장 필요한가?'라고 질문을 했고 저희는 "고용자가 필요하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유니버셜은 "그럼 고용해라"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처음으로 앤디와 저는 우리들의 회사를 만들어 나갈수 있었습니다."
가장 처음으로 고용된 두 사람중 한 명은 Dave Baggett인데 MIT 재학 시절 게빈의 친구였고 나머지 한 명은 Taylor Kurosaki인데
텔레비젼 방송계에서 시각효과를 담당했던 경력이 있던 사람이었다. 쿠로사키는 여전히 너티독에서 일하고 있는데 크래쉬 밴디쿳
시리즈 후반에서 부터 잭 앤 덱스터 시리즈를 발매하던때에는 공백기간이 있긴 하였다.
쿠로사키는 이렇게 말했다. "제가 TV쇼에서 일할때 두명의 남자가 우리가 자주 작업하던 뒷마당을 가진 빌딩에 입주했습니다. 그게 앤디와 제이슨이었는데 동부에서 LA로 이사온지 얼마 안된 발표되지 않은 게임의 제작을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때가 그들에게 있어서는 두 명외에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작업하는 첫번째 게임이었습니다. 저는 뒷마당에서 자주 비쥬얼 이펙트에 관한 작업을 했었습니다." 23세의 쿠로사키에게 있어 이러한 일은 매우 잘 맞는 직업이었다.
쿠로사키는 게빈, 루빈, 배젯과 친구가 되어 뒷마당에서 월리볼같은 게임을 함께 자주 즐겼다. "함께 자주 놀러다니면서 그 세명은 제가 어떤일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 관심을 보였습니다. 쥬라식 파크에 관한 이야기가 바로 튀어나갔었습니다. 제가 쥬라식파크를 만든 사람들에 대해 부러움을 가졌던 점은 제가 겨우 라이트웨이브 같은 것을 가지고 작업할때 그들은 실리콘 그래픽스나 파워애니메이터를 가지고 작업을 한다는 점이었습니다."
"앤디와 제이슨은 SGIs와 파워애니메이터를 이용해서 비디오게임 제작을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걸 듣고 '오 진짜 그것에 대해 배워보고 싶어요'라고 말하니 그 3명이 말하길 '우리랑 함께 일해보는건 어때?'였습니다. 그게 제가 너티독에서 일을 시작하게된 경위입니다."
크래쉬밴디쿳이란 이름으로 완성되어 출시된 게임은 당시 게임산업계의 유행을 따라간 것이었다. 웨이 오브 더 워리어가 대전격투 게임의 붐에 편승한것 처럼 크래쉬 밴디쿳도 게임 산업이 3D로 이동해가는 흐름을 따라가게 되었다. 그는 제이슨과 앤디와 함께 임페리얼 팰리스에서 살았다고 한다. "너티독의 아티스트인 밥과 나는 마루에서 잤고 제이슨과 앤디는 킹사이즈 침대에서 함께 잤다. 우리가 작업 첫날에 한 일은 미팅을 하면서 PSX에서 돌아가는 릿지레이서 시연을 보는 것이었다. 우리는 그걸 보면서 "왓더퍽, 이게 뭐야 대체"라고 소리쳤고 우리가 정말로 만들고자 하는 게임을 구상하려고 노력했다."라며 쿠로사키는 말했다.
게빈과 루빈은 사이드 스크롤 플랫포머 게임을 개발하기로 했고 버츄어 파이터가 대전격투 게임에 3D를 도입한걸 보면 너티독도 플랫포머 게임에 3D를 도입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특히 슈퍼 닌텐도에서 발매되어 엄청난 성공을 했던 돈킹콩 컨트리를 좋아했었다."돈킹콩이 3D로 변한다면 어떨까?"라는 주제로 생각했다. "그때 당시에 그건 더 어려운 질문이었습니다. 왜냐하면 3D로 제작되면 좀더 열린 공간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결국 농담삼아 말하던 소닉의 엉덩이 아이디어를 채용하기로 했습니다."라고 게빈이 설명했다. 카메라 시점이 캐릭터의 뒷쪽인 플랫포머 게임을 의미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소니, 세가, 닌텐도 3사 모두 3D 게임에 대해서 이러한 결론을 냈었다. 그리고 각각의 회사들은 다른 종류의 방식으로 그들의 새로운 시스템의 플래그쉽 게임을 제작하려했다. "3가지 방법이 있었습니다. 첫번째는 사이드 스크롤 형식이지만 단지 그래픽이 3D인것, 두번재는 카메라가 줌 인 줌 아웃을 하지만 여전히 카메라는 고정인 경우, 마지막으로 완전 자유시점인 경우 였습니다. 그때 당시 우리는 자유시점을 구현할수 있을거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90년대 중반은 첫번째로 세 회사가 비디오 게임 콘솔의 왕좌를 놓고 대결했던 시기이다. 닌텐도와 세가는 닌텐도시스템과 제네시스로 이전세대에서 경쟁했던 사이이기 때문에 세가새턴과 닌텐도64로 재대결 하게 될것은 당연하게 여겨졌다. 하지만 플레이스테이션으로 첫 참전한 소니가 전쟁의 끝에 다른 경쟁 콘솔의 판매량을 합친것보다 3배이상의 판매를 하게되었었다.
This box entered the generation as an underdog. It would outsell its competition combined nearly three times over.
그때당시 소니가 경쟁사에 뒤쳐지는것은 마스코트였다. 세가는 소닉이 있었고 닌텐도에는 마리오가 있었다. 하지만 소니에겐 아무것도 없었다. 크래쉬밴디쿳으로 너티독은 모든걸 바꿀수는 있었지만 당시 소니는 아직 마스코트를 필요로 하지 않았었고 작은팀에 불과 했던 너티독은 그들의 생산품이 그러한 포텐샬을 지니고 있다는걸 몰랐었다.
게빈과 베젯은 기술적인 레벨은 높았었지만 너티독은 여전히 카메라에 대한 마지막 구상이 필요했었다. 다행스럽게도 팀에게는 생각할만한 시간과 자금이 있었다. 계속해서 심사숙고한 결과 그들은 다시한번 3D버존 돈킹콩 컨트리 형식의 게임을 만들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여전히 캐릭 컨셉이 필요했다. 플레이스테이션은 풀 3D 폴리곤 게임들을 지원했지만 " 그 머신들은 충분히 많은 양의 폴리곤을 지원하지는 못했습니다."라고 게빈은 인정했다. 데이브 베젯은 Dave’s Level Editor 약자로 DLE라는 개발툴을 만들어서 플레이스테이션의 그러한 한계를 확장했다.
"처음으로 학생이 아닌 상태에서 개발을 시작했습니다. 처음으로 모두 함께 작업을 했고 진짜 예산을 배정받아 직원들과 함께 제작을 하는 진짜 직업의 시작이었습니다."라고 루빈은 말했다. "크래쉬 밴디쿳의 캐릭터 디자인은 오랜기간이 걸렸습니다. 우리는 헐리우드의 카툰 애니메이터인 Charles Zembillas와 Joe Pearson.과 함께 컨셉작업을 했습니다. 그들에게서 컨셉디자인을 받았습니다."
"카메라 워킹과 미리 계산되어 물건들을 집어 던질수 있는것들등 게임에 사용된 모든 요소는 끝내줬습니다."라고 쿠로사키는 설명했다. "아트 부문에는 세명의 스태프가 있었습니다. 제이슨, 밥, 그리고 저였습니다. 우린 모두 같은 일을 했습니다. 제가 처음으로 움파 프루트를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작업이 진행되면서 각각 가장 뛰어난 부문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밥은 기본적으로 배경을 만드는 데에 뛰어났습니다. 밥이 크래쉬 밴디쿳의 대부분의 배경을 만들었습니다. 제이슨은 애니메이션 부문을 맡았습니다. 밥이 모든 애니메이션을 만들었습니다. 저는 게임 디자이너를 맡았습니다. 우리는 각각의 작업에 전념했지만 모두 함께 조정을 했습니다." 그러한 모두의 작업으로 크래쉬 밴디쿳은 캐릭터로서 디자인 되었다.
"긴 시간 동안 크래쉬의 이름은 윌리 더 웜뱃이었습니다. 아무도 그 이름을 좋아하지는 않았었습니다."라고 쿠로사키는 인정했다. "저는 이름이 크래쉬 웜뱃으로 정해지길 바랬습니다. 지금까지 제 생각에 크래쉬 웜뱃이 크래쉬 밴디쿳보다 더 혀에 딱 달라붙는 발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게임플레이는 돈킹콩 컨트리에서 큰 영감을 받았지만, 캐릭터 디자인은 루니툰 카툰에서 큰 영감을 받았다. 크래쉬의 디자인은 532폴리곤을 이용해서 만들어져서 완벽하게 애니메이트 되었다. 크래쉬의 외형은 워너 브라더스의 고전적인 만화 시리즈와 비슷한 그낌을 주었다.
Nintendo's Mario 64 and SEGA's NiGHTS Into Dreams were Crash's big 3D competition. (Courtesy: Wikia)
그동안 닌텐도는 3D게임의 역사상 혁명이라고 할만한 슈퍼마리오 64를 만들었고 세가 또한 나이츠 인투 드림즈라는 3D게임을 제작하였다. 두 회사의 퍼스트 파티들은 새로운 그들의 경쟁자가 3D게임을 만들고 있었다는 것을 몰랐었다.
이 당시에 새로운 아이디어를 가진 게임들의 탄생이 시작되었다. 너티독은 이때부터 소니와의 굳은 관계가 시작되었다. 오늘날의 소니또한 인디에 매우 친화적이지만 이 당시의 소니는 작은 규모의 스튜디오들에게 정말로 잘해주었었다. 소니는 그들의 콘솔에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너티독같은 스튜디오에 많이 기대었었다. 루빈과 게빈은 44~45번째로 플레이스테이션과 계약한 인디 개발자가 되었다.
"소니는 매우 적은 인디 개발자들만이 개발킷에 접할수 있던 시기에 특이한 방법으로 계약을 했습니다."라고 게빈이 설명했다. "당시 아무런 결과물이 주어지지 않아도 소니는 후에 퍼블리셔를 찾는다는 가정하에 라이센스 계약을 했습니다." 그당시 너티독이 퍼블리셔와 계약을 했었긴 하지만 너티독은 퍼블리셔에 소속된 회사는 아니었다. 이점이 너티독이 플레이스테이션 개발툴을 더 쉽게 얻을 수
있게한 이유가 되었다. "만약 당신이 게임을 개발한다면 퍼블리셔에게 가져가서 그들이 리뷰를 할 수 있게 해야합니다. 너티독은 유니버셜과 계약을 하긴 했지만 그들을 위해 일한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린 우리의 개발킷을 개발한후 소니에게 말했습니다. '우린 소니의 마스코트가 될 수 있는 게임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소니는 그 게임을 본적조차 없었습니다. 개발되고 있는 게임의 가치에 대해 듣기는 했지만 소니는 크래쉬를 본적 조차 없었습니다."
소니에게 너티독이 작업하고 있는것을 보여주기 위해 팀은 쿠로사키가 가지고 있는 시퀘스트 스탭과의 커넥션을 사용했다. 그와 게빈은 소니에게 보여주기 위한 데모를 티비쇼 작업장에서 완성했다. 게빈은 테이프를 친구에게 부탁해서 소니의 고위층에게 전달했다. 이를 본 소니 컴퓨터 엔터테인먼트 아메리카의 사장은 "이건 뭐시여? 끝내주는데? 이런게 끝내주는거지"라고 말했다고 게빈은 회상했다.
테이프를 본뒤에 소니는 "직원들에게 테잎을 보여주었고 본 사람들의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라는 반응을 보였다라고 루빈이 계속했다. 소니는 이 게임의 데모를 본 뒤에 그들이 필요로 하는것이 이런 것이란것을 깨달았다고 그는 설명했다.
"우리는 그때 미야모토가 어떤 작업을 하고 있는지 몰랐습니다."라고 쿠로사키는 말했다. "우리는 마리오64에 대해 어떤것도 알지 못했습니다. 마리오 64가 공개되었을때 아직도 우리는 게임을 완성하기엔 몇달이 남아있었습니다.마리오64를 본뒤 우리는 '아나 히밤, 이거 진짜 끝내주는데'라고 소리질렀습니다. 정말로 완벽한 다음세대 게임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우리가 만들고 있는 밀도 있는 배경을 만들지는 못했습니다. 하나를 취하려면 다른 하나를 버릴수 밖에 없으니까요." 이때 라이벌 회사인 세가에는 소닉(실은 이때 만들고 있던건 나이츠 였지만), 닌텐도에는 마리오가 있었지만 소니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크래쉬 밴디쿳의 알파버전을 본 뒤 소니는 닌텐도 부쓰 바로 옆에 전시하기로 했었던 그들이 준비하던 첫번째 프로젝트를 치우고 크래쉬 밴디쿳을 전시하기로 했습니다.소니는 유니버셜과 크래쉬 밴디쿳의 퍼블리셔를 담당하기로 계약했습니다. 마리오와 정면 대결을 위해 크래쉬 밴디쿳을 사용하기로 했습니다. 우리가 마리오 64를 처음 본 것은 E3에서였습니다."
이당시 E3에 출품됐던 게임들은 이전 루빈이 예상했던 3D게임의 방식이 적중했다. "2D방식은 나이츠 였고, 2D와 3D의 융합은 저희의 크래쉬 밴디쿳이였으며, 완전한 오픈월드는 마리오 64였습니다. 그리고 3가지 게임모두 완전히 다른 방식들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모두들 비밀을 고수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나이츠의 고정된 카메라 형식을 좋아하지는 않았습니다. 세가는 그러한 방식이 소닉과 어울리지 않는다는것을 알고 있었다고 여깁니다. 왜냐하면 나이츠의 게임플레이는 그다지 좋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라고 루빈을 설명했다.
"어떤 방식이 더 나은지에 대해서는 밤새워 논쟁을 할수도 있을겁니다. 소비자들은 크래쉬 밴디쿳을 높게 평가했고, 저희에게 많은 성원을 보내주었습니다. 리뷰에서 크래쉬는 마리오가 아니다라는 말도 나왔지만, 결국 우리는 크래쉬밴디쿳을 마리오64보다 많이 판매하였습니다. 물론 거기에는 플레이스테이션이 닌텐도64보다 많은 판매를 한 것도 이유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좋은 게임이기 때문에 많은 판매를 보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크래쉬2편과 크래쉬3편에서 계속해서 마리오 보다 더 많은 판매량을 이어갔습니다.
CTR(크래쉬 팀 레이싱)또한 큰 성공을 보였습니다. 그 당시 마리오카트보다 많은 판매를 했다고 생각합니다.(작자주: 사실 마리오카트가 CTR보다 많이 팔렸었다.)"라 루빈은 말했다. "마리오64는 정말 끝내주는 게임이었습니다. 하지만 비쥬얼 적인 측면에선 크래쉬 밴디쿳이 앞서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마리오는 게임플레이를 배우는데 좀더 큰 곡선을 그렸습니다. 많은 측면에서 크래쉬보다 새로운 게임플레이영역을 만들어낼만큼 창의적인 게임이었지만 그만큼 처음 접했을때 조작법을 배우는게 어려운 게임이었습니다. 3차원에 익숙해져야했고 카메라를 조작하는데 익숙해져야 했습니다. 카메라또한 어떤때에 혼란을 유발하기도 했습니다. 지금에 와선 해결된 부분이지만 당시 처음 접했을때 스스로 그 부분에 대해 익숙해져야만 했습니다."
"짚고 넘어가야할점은 게이머들은 그때 처음으로 3D를 경험했다는 겁니다. 완전히 자유로운 카메라와 완전히 자유로운 이동은 정말로 혁명적인 것이었지만 반대로 게이머들중 아무도 이런것을 경험해 본적이 없던 시기였습니다. 물론 언제나처럼 게이머들은 거기에 익숙해집니다. 하지만 전체 시장을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플레이스테이션은 거대 게임 시장에 진입한 처녀 머신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필요했던것은 원 버튼으로 플레이 가능한 좀더 쉬운 게임이었습니다."
"크래쉬의 개발 목표는 명확했습니다."라고 게빈은 지적했다. "앞으로 나아가면서 살아남는 것이었습니다. 마리오에서는 항상 여기선 무얼 해야만 하지라는 의문이 생겼습니다. 배수구를 열거나 물로 채우거나 등등을 시도해야 했습니다. 처음 접했을때는 알아내기가 쉽지 않은 것들입니다. 사실 그러한 방식은 정말로 훌륭한 것이고 언어 없이도 소통을 가능케하는 방식이었습니다. 하지만 접근성이 좋지 않다는 점은 존재했습니다."
크래쉬 밴디쿳은 1996년 늦은 여름에 플레이스테이션 독점으로 발매되었다. 소니에서 오랫동안 프로듀서를 맡았던 샘 톰슨이 다음해에 너티독에 합류했다. 톰슨은 QA 부문을 맡아 스퀘어에서부터 소니 리버풀, 같은 회사를 담당했었다. 이후 너티독이 크래쉬밴디쿳을 발매하면서 너티독으로 옮겨오게 되었다.
"흥미로운 점은 소니는 이전 마스코트 캐릭을 원하지는 않았었다는 점입니다."라고 톰슨은 설명했다. "소니는 브랜드 이름인 플레이스테이션을 중점으로 홍보하고자 했었습니다. 모든 다른것들은 그 이후의 문제로 여겼습니다. 하지만 그후 파라파, 크래쉬 등의 다른 캐릭터들이 내세워졌었습니다. 제가 일을 너티독에서 시작했을때 크래쉬 밴디쿳은 저에게 정말 기똥찬 게임이었습니다. 저는 크래쉬밴디쿳을 종일 플레이했습니다. 그때 전 이 게임에 중독되다 싶이 했었습니다. 그때 제 PS1은 하루종일 가동되었습니다."라고 톰슨은 말했었다. 소니에 있던 시절 PS1으로 크래쉬밴디쿳을 플레이 했던 그는 크래쉬 밴디쿳2의 제작때 너티독에 합류하게 된다. "제가 크래쉬 밴디쿳2의 제작에 합류할수 있던 기회가 왔을때 정말 멋진일이라 생각했습니다."라고 톰슨은 말했다.
하지만 크래쉬 밴디쿳은 소니의 중역진들에게만 히트한 게임은 아니었다. 전세계의 게이머들이 크래쉬에 열광했었다. "크래쉬는 소니가 최초로 서양 개발사를 통해 일본에 발매해 큰 상업적 성공을 거둔 게임이었습니다. 그 전에는 그런일은 일어나지 않았었습니다."라고 톰슨은 언급했다. "크래쉬 밴디쿳은 일본에서 100만장 이상을 파는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드디어 서양의 게임도 일본에서 성공할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최초의 사례였습니다." 전세계에서 큰 성공을 거둔후 플레이스테이션은 크래쉬 밴디쿳과 같은 시리즈에 힘입어 성공적인 미래를 보여주게 되었다. 그리고 상황이 조금 달라지게 되었다. 소니와 유니버셜은 그때까지는 크래쉬 밴디쿳의 개발에 큰 관여를 하지는 않았었다. 쿠로사키는 말했다. "크래쉬 밴디쿳은 성공할 게임이었고 소니가 정말로 크래쉬 밴디쿳을 원하게 될 것이라는건 확실한 일이었습니다."
쿠로사키에게는 불행하게도 유니버셜과 소니는 크래쉬 밴디쿳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지게되어 그와 너티독이 생각하고 있던 속편의 발매 시기에 대해 간섭을 하게 된다. "다시한번 우리는 플레이스테이션으로 또다른 게임을 개발하게 되었습니다. 그게 우리가 알던 모든것이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우리는 소니나 유니버셜이 '오 좋아 이제 니넨 우리 마스코트야'라고 말하며 그들에게 우리는 휘둘리게 되었던것 같습니다.
"우리는 그때 크래쉬 밴디쿳 2를 2년 정도 후에 발매할 예정의 개발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저는 크래쉬1의 개발이 끝났을때부터 차기작에 넣고자 한 다른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카메라가 주위를 둘러볼수 있게 움직인다거나 완벽하게 새로운 크래쉬의 움직임을 넣으려고 했습니다. 새로운 기술들을 확장하고자 했었습니다." 이러한 쿠로사키의 아이디어는 결국 3탄이나올때까지 적용할수가 없었다.
실제로 크래쉬 밴디쿳이 엄청나게 성장한뒤엔 " 누군가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지요.'좋아 내년엔 크래쉬 속편을 발매하는거야'"라고 일정을 알려왔다고 쿠로사키는 설명했다. "1편때는 6명으로 작업을 시작해서 발매할 즘에는 7명이 되었습니다. 속편 개발때 인원이 늘어나고 분위기가 바뀌었는데 저는 결국 그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이후 잭과 덱스터3를 개발할기 전까지 7년간 너티독을 떠나게 되었었다. 쿠로사키가 떠남으로서 크래쉬 밴디쿳의 개발에 난항이 생겼지만 너티독은 계속해서 나아갔고 크래쉬는 더더욱 발전했다. 너티독은 크래쉬시리즈의 인기 상승인 Q score(친숙도를 나타내는 기준)에 기반해 분석했다. 루빈은 말했다. 슈퍼맨과 배트맨의 인지도는 넘사벽이고 미키마우스는 말할 필요도 없지요. 13~18세 사이의 나이에서 크래쉬 시리즈는 마리오에 친숙도를 앞섰습니다. 크래쉬의 시간이 왔던거죠. "
크래쉬 시리즈의 성공은 너티독과 퍼블리셔인 유니버셜, 콘솔파트너인 소니와의 관계에 변화를 주었다. "유니버설은 우리에게 첫 게임을 개발할때 투자를 했습니다. 두번째 게임이 개발될 때에는 소니가 자금을 투자했습니다. 유니버셜은 그때 중간에서 소니로부터 돈을 받기만 했습니다. 소니로부터 돈을 받아 90일간 가지고 있다가 우리에게 주었습니다. 우리가 사용할수도 있던 자금을요"라고 루빈은 말했다.
소니는 크래쉬의 성공을 기반으로 스스로 플랫포머 게임을 만들어 주변을 엉망진창으로 만들기도 했다. "유니버셜은 소니가 너티독을 퍼스트파티로 영입하기 전에 크래쉬의 판권을 가지고 있었기 떄문에 소니는 크래쉬가 더이상 플레이스테이션으로 나오지 못할 경우를 생각해서 스스로 게임을 개발했었습니다."라고 루빈은 회상했다. "그리고 사실 소니 내부적으로 프로젝트 이름이 크래쉬 킬러였습니다. 결과적으로 Harry Jalapeno라는 게임의 개발이었죠. 믿거나 말거나 입니다. 사실 유니버셜이 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단 한명의 예외를 제외하면요. 마크서니는 엄청난 재능을 지닌 사람이었는데 우리와 함께 많은 개발을 했었습니다. 써니는 유니버셜 인터랙티브의 책임을 맡고 있었지만 써니 그 자신은 유니버셜의 사람이라기보다는 너티독에 속했다고 생각을 했지요."
Today, Mark Cerny's working on PlayStation 4. Back then, he helped bring Crash Bandicoot to the world.
너티독은 크래쉬 시리즈를 발매하면서 회사의 크기를 점점더 불려나갔다. 요즘에 비교하면 여전히 작은 편이지만 말이다. 8명이 오리지널 크래쉬 밴디쿳을 만들었었다. 크래쉬2의 개발 당시에는 16~19명으로 개발 인원이 늘어났다. 3탄 발매때는 23명으로 늘어났고 크래쉬 팀 레이싱때는 30명 정도가 되었다."
크래쉬 시리즈가 성장할 동안 마크써니는 유니버셜을 떠나 너티독과 직접 계약하게 되었다. "그래서 우린 써니와 유니버셜을 통해서가 아닌 직접 함께 이하게 되었죠."루빈은 말했다. "사실 크래쉬3가 나올때쯤엔 유니버셜은 하는일도 없이 중간에 끼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엄청난 돈을 로열티를 통해 벌어들였죠." 써니는 오늘날 PS4의 설계팀 수장을 맡았었고 SCE에서 높은 위치에 있다.
Pangilinan은 너티독의 13번째 고용자였는데 1997년 크래쉬2의 개발때 합류했었다. "전 세가에서 근무했었습니다. 세가새턴이 몰락을 시작했던 시기였지요. 세가는 사람들을 해고하는 중이었습니다."라고 Pangilinan은 언급했다. 그는 당시에 많은 세가의 인원들이 소니쪽으로 고용되었다고 회상했다. 크래쉬2는 1997년 11월에 발매하게 되어 너티독이 큰 성장을 이루게 되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로인해 많은 새로운 재능을 가진 사람들을 고용할수 있었다. 그중 한명이 Erick Pangilinan이었다. 그는 여전히 너티독에서 근무하고 있고 라스트 오브 어스의 아트 디렉터를 맡았었다.
그는 많은 개발사에서 면접을 보았었는데 -스퀘어 같은- 너티독이 그의 종착역이었다. 그는 회사의 모든 사람들이 한 방에 있던 것을 기억했다. "가구들의 배치가 하나도어울리지 않는 곳이었습니다. 방 여기저기에 사람들마다 자기 책상을 가지고 있었죠. 중앙에는 원탁이 있었는데 카페트는 매우 지저분했었습니다. 거기에 개를 키우고 있어서 말이죠."
처음에 그는 실망을 했었다고 한다. "처음 스튜디오에 들어가서 전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정말로 이런 인간들이 크래쉬를 만든거야?' 세가의 마치 리조트와 같은 거대한 스튜디오에서 근무했었던 저는 적응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세가에서는 우리에게 자동차를 렌탈까지 해줬지요. 스포츠카를 가지고 여기저기 돈을 뿌리고 다녔었습니다. 다른 스튜디오를 봤을때도 마찬가지였죠. 영화산업 스타일의 게임스튜디오들이었었습니다."
Pangilinan이 너티독같이 더 작고 허름한 스튜디오로 옮기게 된것은 직관에 의한것이었다고 한다. "세가는 리조트 같았습니다. 세가에서 우리를 해고하기 전까지 전 제가 뭐라도 된것 같았습니다. 사실 아무것도 아니었는데 말이죠. 단지 사원의 1명이었을 뿐이었습니다. 저를 자르고 나중에 봅시다라고 한마디 한게 다였죠. 전 그걸 납득할수가 없었습니다. 너티독을 보았을때 여기는 마치 가족과 같이 느껴졌습니다. 이런 거짓없는 분위기를 가진곳이 정말로 제가 일하고자 원했던 곳이라는걸 느꼈습니다. 그래서 저는 너티독으로 향해 스튜디오를 보게 되었습니다. 제 인터뷰는 제가 기억하기로 밤 8시에 했었습니다. 스튜디오는 여전히 사람으로 가득차 있었는데 다른 스튜디오와는 다른것이었습니다. 다른곳에선 6시면 모두 사라졌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선 여전히 다들 일하고 있더군요. 서로 소리쳐가면서 작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정말로 열정적인 진실된 스튜디오였죠."
또한 그는 너티독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가진 지식에 대해 존경을 표했다. 다른 회사에서는 창업자인 루빈과 게빈처럼 모든 지식들을 공유하는 곳은 없었습니다. 다른곳에서는 서로 거짓을 말할수 있었지만 너티독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너티독에서 거짓말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너티독은 4개의 크래쉬 밴디쿳 게임들을 제작했었고 그중 3가지는 유니버셜과의 계약을 통해 만들어졌었다. 크래쉬 팀 레이싱은 1998년 말에 발매되었었는데 큰 성공을 거두었다. 사실 크래쉬 시리즈의 인기는 계속될수 있었지만 너티독과 유니버셜의 관계가 악화되게 되었다.
"유니버설에서 비벤디 그리고 다시 액티비전까지 크래쉬 시리즈의 판권이 계속해서 넘어가게 됩니다. 1999년에 가장 성공했던 캐릭터였기 때문에 여기저기 떠돌게 되었던 거죠. " 라고 루빈은 말했다.
"당시 세계에서 가장 인기있던 캐릭터중 하나였기 때문에 크래쉬는 피자헛 광고에 등장하거나 호주 서핑협회에서 어린이 안전을 위한 정책을 홍보하기도 했었죠. 런던에서 파리로 가는 떼제베 열차에도 크래쉬는 등장했었습니다. 도쿄공항에는 거대한 크래쉬룸도 있었습니다. 크래쉬가 크게 성공하면서 불행히도 유니버셜은 회사입장으로서 그를 혹사시켰죠." 크래쉬의 미래는 결국 너티독의 손을 떠나게 된다. 너티독과 소니 모두 크래쉬의 판권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참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유니버셜에게 투자를 받았었고 많은 이들이 유니버셜을 통해 입사했었죠. 하지만 실제로 유니버셜은 무얼 해야하는지도 확실히 모르고 있었습니다. 영화 스튜디오가 있었는데 그들이 하는 일이라곤 소니에게 디스크를 전해주는 정도였습니다. 소니가 퍼블리셔였습니다. 참 이상한 일이죠. 만드는건 너티독이고 판매하는건 소니인데 유니버셜 사람들은 뭘하는거였을까요? 우리가 정말로 파트너로 삼고 싶었던건 소니였습니다." 그럼에도 너티독은 크래쉬에 애정을 가지고 프로젝트를 계속해 나갔었다. 크래쉬 팀 레이싱이 그런 게임이다. "크래쉬 팀 레이싱은 너티독의 자금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소니에게 네모난 머리를 가진 캐릭이 등장하는 데모를 주고 이 게임은 끝내줄겁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우리와 유니버셜의 관계를 아시죠라고 소니에게 전했습니다."
소니는 이에 유니버셜과 협상을 한후 크래쉬 캐릭을 사용할수 있게 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유니버셜과의 관계가 끊어지면서 크래쉬 밴디쿳은 너티독의 손에서 떠나게 되었다.
"문제는 크래쉬의 판권소유자가 유니버셜이었다는 겁니다. 우리가 우리의 아이덴티티를 가지지 못한다는건 이상한 상황이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너티독인걸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디에 속했던거죠? 우리는 누군가에게 소유된것이 아니었습니다."
업계의 베테랑인 요시다 슈헤이가 이 일에 대해 착수했었고 결국 너티독과 유니버셜의 관계를 끝맺게 한것은 마크 써니였다. "마크가 모든 일을 정리한 사람이었죠"라고 톰슨은 설명했다. 결과적으로 "써니가 바로 제이슨과 엔디가 유니버셜로 부터 득립할수 있도록 딜을 하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은 미래의 방향을 어디로 잡아야할지를 알았습니다. 지금의 파트너와 함께는 불가능하다는걸요"
"유니버셜은 사실 모션 픽쳐 부문에서 사업을 주관했었고 그들중 아무도 정확히 게임개발을 알지 못했습니다. 아무런 아이디어도 없었죠. 단순히 이런 사업이 돈이 된다는 정도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너티독이 남기고간 프랜차이즈를 어떻게 활용해야 될지도 몰랐습니다." 결국 크래쉬 팀 레이싱이 너티독이 개발한 마지막 시리즈가 되었고 그 후의 크래쉬들은 다른 스튜디오들에 의해 개발되게 될 것이었다. 마지막 개발을 하게 된것은 액티비젼이었는데 결국 프랜차이즈의 명성은 땅에 떨어지게 된다. 하지만 여전히 너티독의 오랜팀원들은 크래쉬 밴디쿳을 좋아하고 크래쉬 시리즈가 스튜디오와 플레이스테이션과 게임 커뮤니티의 발전에 미친 영향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사람들은 게임을 좋아하고 캐릭터를 좋아합니다. 그때 사람들은 캐릭터 기반의 게임을 좋아했는데 마리오는 엄청난 수익을 거두었었죠. 당시 사람들이 게임에 원하던 것은 밝고 순수했었습니다. 슬라이 쿠퍼나 밴디쿳 시리즈를 즐기는 사람들의 얼굴을 밝았습니다. 소닉같은 경우 그당시 그리고 지금까지도 세가의 브랜드 아이덴티티입니다. 마리오는 닌텐도의 영원한 상징이구요. 우리는 당시 크래쉬라는 큰 마스코트를 가지고 있었었죠. "
-3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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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크래쉬의 판권소유자가 유니버셜이었다는 겁니다 라고 본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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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플4 독점작들 이거저거 해보면서 대부분 시원찮았던 걸 보니 진짜 SCE는 너티독은 죽어도 놔주지 말아야 한다는 걸 느낍니다. 플4 나온지 1년이 훨씬 넘었지만 리마스터작인 라오어를 뛰어넘는 게임 전혀 없고, 믿을 건 언차4 뿐.(그리고 블러드 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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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변함없이 닉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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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들이 바로 "잠깐의 성공으로 세계에서 오직 루리웹 플게에서만 과하게 추앙받는다"는 그 너티독이로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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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래쉬밴디쿳 플랜차이즈를 왜 마리오정도롤 끌어올리지 못했냐 소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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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플4 독점작들 이거저거 해보면서 대부분 시원찮았던 걸 보니 진짜 SCE는 너티독은 죽어도 놔주지 말아야 한다는 걸 느낍니다. 플4 나온지 1년이 훨씬 넘었지만 리마스터작인 라오어를 뛰어넘는 게임 전혀 없고, 믿을 건 언차4 뿐.(그리고 블러드 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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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래쉬밴디쿳 플랜차이즈를 왜 마리오정도롤 끌어올리지 못했냐 소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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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크래쉬의 판권소유자가 유니버셜이었다는 겁니다 라고 본문에......... | 15.03.06 12:46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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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변함없이 닉값 | 15.03.06 12:39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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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들이 바로 "잠깐의 성공으로 세계에서 오직 루리웹 플게에서만 과하게 추앙받는다"는 그 너티독이로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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