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사다난했네요...
http://v.media.daum.net/v/20170517110607605
[뉴스AS] 10장면으로 다시 보는 '임을 위한 행진곡' 수난기
이유진 입력 2017.05.17. 11:06
1. 슬프고도 아름다운 진혼곡, 임을 위한 행진곡
1982년 2월20일 광주 옛 망월동 5·18 묘역에서 결혼식이 열렸습니다. 신랑 신부는 모두 죽고 없는 ‘영혼결혼식’이었습니다. 신랑은 광주 민주화운동 당시인 1980년 5월27일 전남도청에서 최후를 맞은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당시 30살), 신부는 그와 함께 노동운동 활동을 하다 1978년 사망한 박기순(당시 20살)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광주 지역 최초의 노동야학 ‘들불야학’에서 교사로 함께 활동했습니다. 박기순이 연탄가스 중독으로 숨지고, 윤상원은 자신의 일기에 이렇게 썼습니다.
“불꽃처럼 살다간 누이여/왜 말없이 눈을 감고만 있는가/두 볼에 흐르던 장밋빛/늘 서럽도록 아름다웠지/….”
아끼던 동료가 먼저 떠나고 2년 뒤, 윤상원은 광주 민주화운동 한가운데에 섰습니다. 그의 마지막을 목격한 프랑스 <르 몽드> 기자 등은 그를 “침착하고 합리적이며 논리정연한 청년”으로 기억했습니다. 1980년 5월28일 미국 <볼티모어선>은 1면 머리기사에서 “이 청년이 죽는다면 그것은 한국의 큰 손실이 될 것이다”고 썼습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이 아까운 두 청춘을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영혼결혼식 소식을 들은 소설가 황석영씨와 당시 전남대생이었던 김종률·오정묵·김선출씨 등 10여명은 같은 해 4월 황씨의 광주 자택에 모여 둘의 넋을 위로하는 노래극 <넋풀이-빛의 결혼식>을 만들었습니다.
2014년 광주광역시가 제작한 4분47초 분량의 유시시(UCC).
‘임을 위한 행진곡’은 노래극의 마지막 합창곡입니다. 김종률 현 광주문화재단 사무처장이 작곡하고 가사는 백기완 현 통일문제연구소장이 1980년 12월 서대문구치소 옥중에서 지은 장편시 ‘묏비나리’ 일부를 차용해 황석영씨가 붙였습니다. 노래극은 당시 2천개의 테이프로 녹음돼 전국에 건네졌고 ‘임을 위한 행진곡’은 1980년대 민주화운동을 상징하는 노래가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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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단 한 번 참석 뒤 발길 끊은 두 명의 대통령
노래를 부르지 않은 것뿐만 아니라 발길도 끊었습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대통령으로서 2013년 한 차례 5·18 기념식에 참석했습니다. 2004년과 마찬가지로 일어서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경청하되 따라부르지는 않았습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어땠을까요. 이 전 대통령은 취임 직후인 2008년 5·18 기념식에 참석해 ‘임을 위한 행진곡’ 두세 소절을 따라불러 당시 언론들이 주요하게 보도하기도 했습니다. 그 역시 퇴임까지 다시는 기념식을 찾지 않았습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의 수난이 본격적으로 시작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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