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키아벨리는 16세기 초 공화정이 무너지고 왕정복고가 일어나자 유배 중에 <군주론>을 집필했다. 사진은 마키아벨리가 글을 썼던 서재와 책상.
그러나 이탈리아는 마키아벨리와 그람시라는 세계적인 (정치)사상가들을 낳은 ‘사상의 나라’이기도 하다.
마키아벨리(1469~1527)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안토니오 그람시(1891~1937)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우리가 많이 사용하는 헤게모니와 시민사회란 개념을 사실상 만든, 20세기 최고의 좌파 이론가로 그 영향력은 엄청나게 크다.
마키아벨리는 16세기 초 공화정이 무너지고 왕정복고가 일어나자 투옥과 고문 뒤 유배 속에서 <군주론>을, 그람시는 20세기 초 파시즘이 등장하던 반동의 시대에 투옥되어 <현대군주론>이라는 명작을 남겼다.
특히 우익포퓰리즘의 급부상이 보여주듯이 현재 세계는 이들의 시대와 아주 유사하다는 점에 주목, 손호철 서강대 명예교수가 6회에 걸쳐 이들의 행적을 추적하면서 그 현재적 의미를 살펴본다.
“아이구!”
서재 책상에 쌓아놓은 종이에 무언가를 쓰기 위해 펜에 잉크를 묻히려던 남자는 갑자기 어깨 통증에 외마디를 지르고 말았다. 짧은 머리의 그는 40대 초반으로 아직 심한 어깨 통증을 동반하는 오십견이 올 나이는 아니었지만, 그는 어렵게 펜에 잉크를 묻혀 글을 쓰기 시작했다.
<군주론>? 그렇다. 그는 <군주론>의 저자 마키아벨리였다. 이 책은 “군주는 인간에 대한 약속을 반드시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군주는 능숙한 사기꾼이고 위선자여야 한다”, “군주는 존경받기보다는 공포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등의 주장 때문에 출간 즉시 가톨릭에 의해 “악마의 손가락으로 쓴 인류의 적”이라는 평을 받고 금서에 올랐다. 마키아벨리 역시 “살아있는 프랑켄슈타인”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정치는 이래야 한다”는 규범적 처방만 남발했던 고전적 정치학을 벗어나 현실정치를 있는 그대로 분석하는 ‘근대정치학’의 효시로 불린다. 한데 그는 왜 40대에 어깨 통증에 시달렸으며, 또 통증에도 불구하고 논쟁적인 <군주론>을 쓴 것인가.
마키아벨리는 스스로 “거인에 맞선 피그미”라고 표현한 평민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피렌체 도심을 벗어나 아르노강에 놓인 낡은 베치오다리를 건너면 조그마한 상가가 나타난다. 마키아벨리가 태어난 곳이다. 그의 생가는 상가로 바뀌었지만 안으로 들어가는 서까래와 기둥에 마키아벨리의 생가라는 표식이 설치되어 있었다. 2차대전 때 폭격으로 파괴되어 서까래는 원래의 것을 찾아 올려 놓은 것이고 건물은 새로 지은 것이다. 당시 피렌체는 형식적으로는 공화국이었지만 실제로는 메디치가 지배하는 군주정이었다. 메디치가는 피렌체를 지배하는 대신 금융업으로 벌어들인 엄청난 부로 예술을 지원해 르네상스를 꽃피우게 함으로써 자신들의 지배를 정당화했다. 메디치 지배하에서 마키아벨리는 아리스토텔레스 등 고전을 읽으며 공화정에 대한 신념을 키워갔다. <군주론> 때문에 생겨난 ‘강력한 군주를 지지하는 반민주적 학자’라는 통념과 달리 그는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나 공화주의자였다. 다만 그는 앞으로 찾아갈 그람시와 달리 혁명가와는 거리가 멀어 메디치 체제에 저항할 생각은 없었다. 오히려 관리로 등용되기를 기다리는 ‘고시 준비생’에 가까웠다.
기회를 노리던 프랑스가 이탈리아를 침공하면서 피렌체는 격변에 싸인다. 메디치가가 프랑스에 협력했다가 분노한 시민들의 봉기로 무너지고 만다. 급진적 수도승인 사보나롤라가 집권해 급진적인 개혁정책을 펴나갔지만 마키아벨리는 여전히 방관자였다. 사보나롤라가 민심이반으로 화형을 당한 뒤 마키아벨리는 제 2서기관(내정담당)에 응모해 공직에 나설 수 있었다. 29세 때 일이다.
그가 매일 걸어서 출근한 베치오다리는 관광객으로 넘쳐났다. 다리를 건너 조금만 걸어서 ‘르네상스의 꽃’인 우피치미술관을 지나가면 베치오궁전과 시그로리아 광장이 나타난다. 미켈란젤로의 걸작인 다비드상이 설치되어 있는 이 광장은 시민의 힘을 상징하는 곳으로 ‘피렌체의 광화문광장’이라 할 수 있다. 다비드상도 시민들이 공화정 복귀를 기념해 자유의 상징으로 미켈란젤로에게 청탁해 제작한 것이다(다행히 메디치가는 다시 권력을 잡은 뒤 다비드상을 파괴하는 대신에 맞은편에 왕권의 상징으로 헤라클레스상을 만들어 설치했다). 마키아벨리가 자신이 바라던 시민군을 만들어 시민들에게 열병식을 보여준 곳도 바로 여기다. 베치오궁전 역시 공화정과 마키아벨리에게 매우 중요한 곳이다. 이 건물은 일종의 ‘시청사’로 공화정의 정부가 자리 잡고 있어 마키아벨리가 15년 동안 외교사절로 출장 가지 않았을 때면 매일 출근하던 곳이다.
당시 유럽은 프랑스, 스페인 등에서 강력한 절대왕정이 등장하고 있었지만, 이탈리아는 작은 도시국가들로 나뉘어 있었다. 북쪽에는 밀라노공국이, 그 아래 동쪽으로는 베네치아공화국, 서쪽으로 제노바공국, 그 남쪽으로 피렌체공화국, 그 남쪽으로 교황직할국, 제일 남쪽에는 나폴리왕국이, 그리고 여러 작은 공국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한마디로, 피렌체는 인구 5만명의 작은 도시국가로, 마키아벨리가 자신에 대해 평한 표현대로 “거인에 맞선 피그미”에 불과했다. 그런 만큼 외교가 중요했다. 마키아벨리는 내치담당이지만 외교업무를 부여받고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프랑스, 독일 등을 자주 방문했다. 그러면서 그가 절실히 느낀 것은 도시국가를 넘어서 통일된 이탈리아의 필요성, 특히 용병체제를 넘어선, 상비군의 필요성이었다. 그는 상비군 설치를 주장하지만 귀족들은 평민들의 무장에 두려움을 느껴 반대했다. 1503년에 국가안보실장으로 임명되면서 드디어 일종의 의회를 설득해 시민민병대를 조직해 나갔다. 그는 피렌체가 지배하고 있는 농촌을 다니며 상비군의 필요성을 설명하고 징병제에 의해 시민민병대를 조직해, 피렌체 공화정을 지키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그러나 교황이 스페인군을 끌어들이고 스페인군이 피렌체로 진격해 오면서 메디치가가 다시 권력에 복귀했다. 마키아벨리는 15년간 일했던 공직을 박탈당하고 감옥에 갇혀야 했다. 마키아벨리가 일했던 베치오궁전을 지나 5분쯤 걸어가자 지금은 베르디 극장으로 변신한 건물이 나타났다. 예전에는 감옥이었던 곳으로 마키아벨리가 잡혀갔던 감옥이다. 스틴체 감옥 건물을 보고 있자 대학 2학년 때 학생운동을 하다가 박정희 정권에 붙잡혀 서대문형무소에 들어갈 때의 두려움이 생생하게 살아났다. 하물며 운동권과는 거리가 멀었던 마키아벨리가 느꼈을 공포가 어떠했을지 충분히 이해가 됐다. 설상가상으로, 메디치가 암살 계획 명단에 자신의 이름이 들어간 문서가 발견되면서 마키아벨리는 팔을 어깨 뒤로 돌린 뒤 팔목을 로프로 묶어서 매다는 잔인한 고문을 여섯 번이나 당해야 했다. 엄청난 고통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를 악물며 모르는 일이라고 부인했다. 행운의 여신, 즉 포르투나(fortuna)는 그를 버리지 않았다. 갑자기 교황이 죽고 메디치가에서 새 교황이 뽑히면서 이를 축하하는 특별사면에 의해 그는 석방됐다. 대신 그는 피렌체 근교에 있는 시골집으로 유배를 가야 했다.
마키아벨리가 유배된 곳은 피렌체를 가로지르는 아르노강을 건너 남쪽으로 20㎞ 떨어진 곳이다. 특히 이곳에 가려면 지동설을 주장하다 유배당한 갈릴레오의 유배지를 지나가야 한다. 갈릴레오의 유배지에 들른 후 도착한 마키아벨리의 유배지는 평민이지만 그런 대로 돈이 있었던 마키아벨리의 아버지가 농장을 경영했던 곳답게 꽤 큰 2층 돌집이었다. 특히 관리인이 길 건너편에 마키아벨리라는 이름의 레스토랑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중국 관광객이 꽉 차 있었다. 우리 관광객 중에 마키아벨리 유배지를 가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돌집으로 들어가자 마키아벨리의 초상이 걸려있고 서재로 들어가자 검은 책상 위에 <군주론>이 한 권 놓여 있었다. 마키아벨리가 고문으로 생긴 어깨 통증에도 불구하고 <군주론>을 쓴 책상이다. 그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이 “낮에는 동네의 선술집에 가 소작인이나 지나가는 행인들과 잡담을 나누다가도 저녁이면 글을 쓰며 만나게 되는 옛 성현들에게 예의를 갖추기 위해 가진 것 중 가장 좋은 옷을 차려입고 서재에 들어가 정중한 자세로 책상에서 책을 쓰고 있다”고 말했다. 바로 그 책상이다.
‘군주론’ 때문에 생겨난
강력한 군주를 지지하는
반민주적 학자라는 통념과 달리
그는 이론·실천적 공화주의자
마키아벨리는 공화주의자로서 공화정을 위해 오랜 기간 일했으며 공화정이 무너지자 투옥과 고문을 당하고 나와 유배지에서 <군주론>을 쓴 것이다. 게다가 공화정을 몰아내고 자신을 공직에서 쫓아낸 메디치가에 헌정했다. 결과만 보면, <군주론>은 사후이긴 하지만 그에게 엄청난 명성을 가져다줬다는 점에서 해피엔딩으로 끝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공화주의자였던 그가 투옥과 고문을 당하고 나와 유배지에서 왜 강력한 군주를 찬양하는 <군주론>을 썼느냐는 것은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다. 비유를 들자면, 이는 고 김근태 의원이 악명 높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군사독재세력에 의해 죽음의 고문을 당하고 나와 상한 몸으로 개발독재를 찬양하는 <개발독재론>을 쓰고 박근혜에게 헌정한 것과 크게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좌파 운동권으로 투옥과 고문을 당하다가 소련동구 몰락 등을 보며 갑자기 우익으로 변신한 뉴라이트처럼 투옥과 고문, 그리고 세상의 변화를 겪으면서 생각이 바뀌어 ‘변절’을 한 것인가? 그 같은 해석은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에 이어 쓴 <로마사논고>에서는 “민중이 군주보다 사려 깊고, 안정감이 있고, 판단력도 낫다”며 공화정을 주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설명할 수 없게 만든다.
피렌체 남쪽에 있는 마키아벨리의 유배지를 알리는 표시판(위 사진)과 피렌체 전경. 피렌체는 마키아벨리가 활동했던 무대이다.
그것이 아니면 평민 출신으로 다른 출세나 생계의 길이 없는 그로서는 변절이란 욕을 먹더라도 다시 공직에 나가고 싶었던 것인가? “나는 내 재능을 낭비하고 있다. 더 이상 이렇게 가난 속에 지낼 수는 없다. 나는 메디치가 왕자들이 내게 다시 일자리를 주기를 바라고 있다”는 그의 사적인 고백은 그 같은 추정을 뒷받침해준다. 그러나 “나는 내 영혼보다 조국을 더 사랑한다”는 또 다른 고백은 <군주론>으로 변절자란 욕을 먹더라도 다시 공직에 나가 피렌체를 발전시켜야겠다는 애국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그것도 아니면, 교황청이 의심했듯이, <군주론>을 읽고 군주들이 악정을 펴게 만들어 민중봉기로 전복시키고 공화정을 회복시키기 위한 고도의 계략이었는가? 사실 루소는 마키아벨리가 이야기한 권모술수는 왕들이 대부분 알고 있었던 내용이라는 점에서, 그가 왕들을 가르치는 척했지만 “그가 진정으로 가르친 것은 인민들”이라고 주장했다.
“산맥과 고지대의 특성을 알려면 낮은 곳으로 내려가야 합니다. 또 평야의 특징을 알려면 높은 곳으로 올라가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민중의 특성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군주가 될 필요가 있으며, 군주의 특성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민중이 될 필요가 있습니다.” 이처럼 시작되는 <군주론>의 도입부를 읽으면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알 수 없는 일이다. 이 점에서 “마키아벨리는 과연 이해될 수 있을까”라고 말한 메를로 퐁티의 의문은 적절한 질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공화정이 무너지자 투옥과 고문
유배지서 논쟁적 ‘군주론’ 집필해
공화정 몰아낸 메디치가에 헌정
그의 ‘변절’은 여전한 의문으로
어쨌든 그의 헌정에도 불구하고 로렌체 데 메디치는 자기에게 헌정한 <군주론>을 읽지도 않았고 마키아벨리는 끝까지 메디치가의 부름을 받지 못했다. 그리고 메디치가 무너지고 공화정이 회복되자 공직에 출마하지만 큰 표 차로 낙방했고 얼마 뒤 쓸쓸이 죽어야 했다. <군주론>을 둘러싼 궁금증을 안은 채 나는 그가 묻힌 성당을 찾았다. 성당에 들어가 그를 찾아보았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알고 보니 보수 중이라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마키아벨리와 마찬가지로 유배 속에 죽어간 단테의 옆자리가 바로 그의 묘였다. 그의 묘에는 그가 유명해진 뒤 새로 써 놓은 묘비명으로 “어떠한 찬사도 그의 이름에 미치지 못한다”고 쓰여 있다. 사실 그는 <군주론> 때문에 이탈리아 출신 중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사상가가 되었다.
우피치미술관 회랑에 설치된 마키아벨리 동상(왼쪽 사진)과 공화정이 무너지고 메디치가가 다시 집권한 뒤 그가 끌려가 고문을 당한 감옥.
그리고 그를 투옥하고 고문했던 메디치가의 우피치미술관 외벽 회랑에는 피렌체를 세계적으로 알린 인물들의 동상이 설치되어 있는바, 그중에는 마키아벨리의 동상도 당당하게 설치되어 있다. 마키아벨리는 평소 “나는 천당보다는 지옥에 가기를 원한다. 천당에는 거지, 수도승이나 사도들밖에 없지만, 지옥에는 교황과 왕, 왕자들과 함께 갈 수 있으니까”라고 빈정댄 바 있다. 그에게 물었다. “평소의 독설대로, 지옥에 가서 교황과 군주들과 놀고 있는지요?”
공화정의 붕괴와 왕정복고라는 반동의 시대에 유배 속에서 마키아벨리가 쓴 <군주론>은 우익포퓰리즘의 부상이라는 ‘새로운 반동의 시대’에 무슨 의미를 갖는 것일까? 이 같은 화두를 안은 채 나는 마키아벨리의 행적을 따라 피렌체를 떠나 피사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