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의 눈, 영상물등급위원회
요즈음 대한민국 게임업계를 달구는 화제라면, “엑스박스 라이브의 개시”, “<타임크라이시스 3> 예약 조기 매진”, “닌텐도의 신기기 출하”(루머임이 판명되었지만 말이다)도 아니다. 단연, 화제는 영상물등급위원회(이하 영등위)가 휘두르는 `검열\'의 칼. <리니지 2>의 `18세 이용가\'를 시작으로 그 불똥이 <씰 온라인>을 거치더니 마침내 온 국민의 게임 고스톱을 내세운 포털 사이트에까지 튈 듯한 기세다. 한 쪽에서는 청소년 보호와 건전한 게임 문화 함양이라는 윤리적 명분을 그리고 다른 쪽에서는 게임 산업 육성이라는 실리적 이해를 내세우며 팽팽히 맞서고 있으니 구경하는 입장에서는 꽤나 흥미진진한 볼거리이다.
사실, (욕먹을 각오하고) 비디오게이머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이번 영등위 사태는 그야말로`강 건너 불구경\'이다. 루리웹의 여느 게이머들처럼, 나 역시 엑스박스 라이브의 개시에 가슴이 쿵쾅거리고, 아이토이의 출시 일자를 손꼽아 기다리며, <메탈기어: 트윈 스네이크>에서 연출을 맡았다는 기타무라 류헤이의 화려한 솜씨를 두 눈으로 확인해보고 싶은 마음이 앞서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영등위 문제를 꼭 남의 일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 일본의 게임들을 주로 즐겨왔던 비디오게이머들에게 영등위와 헛갈리기 쉬운 일부 학부모 관련 단체들은 오랫동안 공포의 대상이 아니었는가? 물론, 게시판에서 많은 분들이 지적했듯이 이들과 영등위는 게임을 보는 기준이 다르다. 명색이 대한민국의 모든 영상물을 심의하는 곳인데 그 기준과 잣대가 없으랴. 다만, 걱정스러운 것이라면 언젠가 콘솔 게임기가 대한민국의 게임문화에서 제대로 자리잡게 되는 순간, 이 바닥도 온라인 게임업계 같은 날벼락을 맞지 말라는 보장이 없는 것이다.
ESRB의 탄생
ESRB(Entertainment Software Rating Board)란 게임 소프트웨어에 대해 등급을 매기는 미국의 민간 심의기구이다. ESRB에서 매기는 등급에 법적인 강제성은 없다. 다만, ESRB의 지원기관이 업계의 연합체인 ESA(Entertainment Software Association; 이전의 IDSA가 올해로 이름을 바꾸었다)이기에, 등급을 어긴 업자는 소프트웨어를 공급 받을 수 없다. 법적인 구속은 없더라고 도소매 판매업자라면 반드시 지켜야 하는 강제가 되는 셈이다.
ESRB는 언제 어떻게 형성되었을까? 이를 알아보기 위해서 잠시 1993년 무렵의 북미 게임 시장으로 날아가보자.
ESRB의 스토리는 윌리엄스 게임에서 <모탈 컴뱃>을 내놓았던 199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들은 당대의 히트작 <스트리트 파이터 2>와 다른 색깔을 지니면서도 그 재미를 살릴만한 게임을 고민했다. 그들은 잔인함을 게임의 컨셉으로 삼았고, 당시의 격투게임에서 일반화된 필살기를 이러한 취지에서 강화했다. 이러한 비밀 요소가 게임의 인기를 높이는 건 당연했지만, 제작자들조차도 <모탈 컴뱃>의 페이탈 무브가 그토록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킬 것으로는 예측하지 못했다.
지금이나 그때나 아케이드의 히트작은 콘솔 게임기로 옮겨가기 마련이다. 어클레임은 고액을 지불하고 모탈 컴뱃의 라이센스를 구매한 후, 게임을 제네시스(메가드라이브)와 SNES(슈퍼패미컴)용으로 이식하고자 했다. 그런데, 닌텐도가 이식작에 제공을 걸고 나섰다. 패이탈 무브는 SNES에서 돌아가기에는 너무 잔인했고, 닌텐도의 철학과도 맞지 않았다. 결국, 제네시스에는 아케이드와 동일한 버전이 이식되었고, SNES 판에서는 잔인한 필살기들이 모두 빠지게 되었다.
<모탈 컴뱃>의 콘솔 버전은 매우 극적인 결과를 낳았다. 1993년에 비디오게임으로 등장한 <모탈 컴뱃>은 제네시스 버전이 SNES판에 비해 3배 이상 많이 팔렸고, 게임은 제네시스의 명실상부한 시스템 셀러가 되었다.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고 했던가? 마침, 1993년에 상원의원 조셉 리버만이 주도한 비디오게임의 폭력성에 관한 청문회가 소집되었다. 공식적으로는 <모탈 컴뱃>, <둠> 등의 불량 게임을 접한 리버만의 우국충정(憂國衷情)이 발단이었다고 알려졌지만, 게임 업계의 호사가들은 세가를 음해하기 위한 닌텐도의 음모라고 쑥덕거리곤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청문회 자리에서 당시 닌텐도의 지사장 하워드 링컨은 닌텐도가 얼마나 가족의 가치를 소중하게 여기고 있는지 강조하며 닌텐도에는 자체 심의과정이 있기 때문에 <모탈 컴뱃>같은 게임이 결코 그대로 출시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또한, 청문회 자리에서는 많은 폭력 게임들 중에서 유독 세가의 <모탈 컴뱃>과 <나이트 트랩>이 집중적으로 시연되었다고 한다.
비디오게임의 폭력성을 검증하는 청문회는 세가와 닌텐도의 격전지이기도 했다. 하워드 링컨은 비디오게임의 구매층이 성인으로 옮겨 갔다는 세가의 설명은 말도 안되며 <나이트 트랩>은 세가 CD의 기본 번들 게임이므로 누구나 구매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에 미국 세가의 지사장 빌 화이트는 SNES의 폭력 게임을 골라 담은 비디오 테이프을 청문회장에서 시연하면서 세가에는 자체적인 등급 시스템이 마련되어 있다고 강조했다.(당시 미국 세가는 학부모를 위해 자사의 게임들에 대한 네가지 등급을 제공하고 있었다.)
어쨌든, 1993년의 청문회는 미국에서 비디오게임 업계에 대한 `자정\'의 압박으로 작용했다. 청문회를 계기로 게임업계는 독자적인 이익단체인 ISDA를 조직하고 일차로 닌텐도, 세가, 어클레임, EA, 필립스, 아타리(인포그램즈가 이름을 바꾼 지금의 아타리가 아니라, 예전의 아타리다), 3DO가 참여했다. 문제는 등급을 심의할 수 있는 단체였다. 논쟁의 앙금이 남아 있던 세가와 닌텐도의 세 싸움이 계속되는 바람에 등급 시스템의 도입은 일년 이상 지체되었다. 마침내 1994년에 ESRB가 설립됨으로써 격렬한 논쟁이 끝을 맺었다. 처음에는 여러 회사들이 자사의 이해관계에 따라서 ESRB에 대해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으나, IDSA의 강력한 지지 그리고 게임업계의 자정작용이 미진할 경우 게임 판매를 금지시킬 수도 있다는 리버만 의원의 협박(?) 덕택에 ESRB는 비디오게임 업계의 등급 체계로 자리잡을 수 있었다.
ESRB의 등급체계
ESRB는 현재 비디오게임 및 PC게임에 대해서 6개의 등급과 컨텐츠에 대한 간단한 서술을 제공하고 있다. 게임의 표지 앞면에는 등급 분류 마크가 들어가고, 뒤면에는 컨텐츠에 대한 간단한 서술이 포함된다.
등급 심볼
1. EC(Early Childhood) - 아동용 : 3세 이상에게 적합한 타이틀이다. 부모가 부적절하게 느낄만한 내용이 조금도 없을 경우에 부여한다.
2. E(Everyone) - 전체용 : 6세 이상에게 적합한 타이틀이다. 최소한의 폭력, 만화적인 행위, 그리고 약한 수준의거친 언어가 포함되어 있다.
3. T(Teen) - 청소년용 : 13세 이상에게 적합한 타이틀이다. 폭력적인 내용과 거친 언어가 등장할 수 있으며, 이를 암시하는 주제들이 포함되어 있을 수 있다.
4. M(Mature) - 성인 : 17세 이상에게 적합한 타이틀이다. 성적인 주제, 보다 격렬한 폭력 장면 그리고 강한수준의 거친언어가 등장한다.
5. AO(Adult Only) - 성인 전용 : 섹스 혹은 폭력에 대한 도상적인 묘사가 포함된다. 이 등급은 18세 이하에게 판매할 수 없다.
6. RP(Rating Pending) - 등급 계류 : ESRB의 심의과정 중인 게임으로, 최종 등급을 기다리고 있는 게임에 대해 부여된다.
한편, 이러한 기본 등급과 더불어 ESRB에서는 31개의 `컨텐츠 설명자\'(Contents Descriptor)를 두고 게임 표지 뒷면에 등급과 함께 문제가 될만한 내용을 간략히 적어두고 있다. 이 설명자의 항목들은 폭력, 알코올, 성적 묘사, 사용된 언어의 정도를 평가하는 내용들이다(자세한 해설은 http://esrb.com/esrbratings_guide.asp#symbols 를 참고).
이 설명자들은 등급분류의 기준을 공개적으로 제시함으로써 자녀를 위해 게임을 구매하려는 부모의 선택을 돕는다. 또한, 이는 등급에 관해 발생할지도 모를 시비의 소지를 사전에 억제하는 역할도 담당한다. 등급 판정에 대해 업계에서 불만을 제기할 경우 설명자라는 공통의 기준에 따라 협의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처럼 `허공의 구름 잡는 식\'으로 논의가 흘러가는 것을 미리 막아주는 셈이다.
GTA3 vs <겟어웨이>
우리의 비디오게임 심의는 어떤 상태일까? 그간 몇가지 작은 사건들이 있긴 했지만, 역시 가장 주목할만한 사례는 GTA3와 <겟어웨이>의 엇갈린 등급판정이다.
최근, <겟어웨이>는 `18세 이용가\'라는 판정을 받았다 GTA3의 PC판과 PS2판 모두 `등급 보류\' 판정을 받았던 것을 떠올려보면, <겟어웨이>의 심의 통과는 제법 이례적이다. 게임의 한글판 정보들을 접할수록 더욱 그렇다. 원작의 욕설이 여과 없이 그대로 옮겨졌고, 갱스터 전쟁과 얽힌 게임의 사건 전개는 GTA3 만큼이나 거칠고 폭력적이다.
<겟어웨이>와 의 차이는 무엇일까? 두 게임에 대해 서로 다른 등급 결정이 내려진 이유를 한번 추측해보도록 하자. 화면을 통해 표현되는 그리고 플레이어가 구사할 수 있는 수준에서 드러나는 폭력과 외설의 정도를 본다면 두 게임에는 큰 차이가 없을 듯 싶다. 거리에서 총질을 해대는 것은 두 게임의 기본에 속한다. 물론, 게임의 진행 방식에서 가 보다 많은 자유를 허용하기 때문에 게임의 스토리라인과 관계없는 범죄적인 행동을 즐길 여지가 많다. 하지만, 등급 분류의 취지가 작품이 표방하는 교훈이나 이데올로기와는 독립적으로 가급적 게임 속의 표현이나 언어의 수위에 따르는 것이라고 한다면, 두 작품이 서로 다른 등급을 받을 이유는 없다는 것이다.
역시, 문제는 게임의 결론이었을까? 사실, 이러한 설명은 꽤나 그럴듯해 보인다. <겟어웨이>의 주인공들은 `어쨌든\' 선의 실현자다. 게임 전반부의 주인공 마크 해먼드는 아들을 구하기 위해 보스의 지령에 따르는 것일 뿐 악행을 저지를 의도는 없다. 반면, 의 주인공은 조직에서 인정받기 위해서 두목이 내리는 명령에 충실히 따른다. <겟어웨이>에서는 폭력이 선을 실현하는 도중에 불가피하게 등장한 것이라면, 에서는 폭력 그 자체가 목적인 셈이다. 비슷한 장르로서 최근에 역시 `18세 이용가\' 판정을 받은 PC게임 <마피아>의 경우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마피아>의 행동대원으로 악행을 일삼던 주인공이지만, 조직의 악행에 염증을 느껴 그들을 배신하게 된다면 점에서 그는 결론적으로 선의 편이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의 영상물 심의기관이 지닌 기준은 주로 결론의 교훈성에 따른 것이란 말인가? <겟어웨이>나 <마피아>는 되는데 GTA3가 안된다는 판단의 바탕에는 이러한 정서가 녹아 있다는 것인가? 심의란 결코 창작의 자유를 막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 사회 일반이 아직 표현의 자유에 대해서 인색한 편이긴 하나, 스너프 필름처럼 행위 자체가 범죄가 아닌 이상 상상력의 자유를 보장해주는 것은 게임과 같은 문화산업의 발전에는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상상력의 자유를 뒷받침하는 업계의 역량
검열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그렇다고, 모든 게임이 아무런 규제 없이 마구잡이로 유통되어야 한다는 것도 아니다. 사실, 오랜 세월 음지에서 패드를 잡아온 비디오게이머들의 상당수는 의 정식발매를 반대한다. 게임을 즐기기 싫어서일까? 물론, 아니다. 현 세대 비디오게임의 표준이 된 작품을 왜 즐겨보고 싶지 않으랴. 다만, 그들은 게임 하나로 인해서 비디오게임 전체가 비난 받고 다시 음지로 몰리게 되지 않을까 근심할 뿐이다.
`심의\'의 사전적인 의미는 “제출된 안건을 상세히 검토하고 그 가부를 논의한다”는 것이다. 심의와 검열의 차이점이라면 일방적으로 막는 대신 보편적이고 합리적인 가이드라인을 제시한다는 데 있을 것이다. 또한, 그 가이드라인은 게임이 가져올 파급 효과를 미리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게임 컨텐츠의 연령기준에 대한 가급적 객관적인 판단이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에겐 이러한 가이드라인도 없고 이를 마련하기 위한 토론 조차도 개시되지 않은 상황이다. 온라인 게임에 대한 등급 판정이 경우를 보자면, 각종의 이해관계에 따라서 등급 결정에 대한 음모론들만 던져 놓을 뿐 누구도 왜 그러한 결정이 내려졌는지 설명하거나 토론하려 들지 않는다.
게임은 본래 현실에서는 이룰 수 없는 꿈, 상상, 욕망을 채워주는 엔터테인먼트 장르이다. 그리고, 성인이 게임의 소비 계층으로 부상함에 따라서 개발의 상상력을 담는 형태 역시 진화하기 마련이다. 앞으로도 GTA3와 같은 게임은 더욱 많이 등장할 것이고, 개중에는 권선징악이라는 심의의 모범을 따르지 않는 작품들이 많을지도 모르겠다. 매번, 성인의 도덕성까지 미리 염려해 모두 막아버려야 할까?
앞서도 보았지만, 게임의 심의제도는 상상력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게임업계가 스스로 창출한 것이다. 이는 표현 및 상상력의 자유라는 원칙과 어린이 보호라는 사회적 요구가 맺은 일종의 타협이기도 하다. 최근 일본에서도 미국의 ESRB와 비슷한 심의 기관이 창설되었다. CERO, 즉 컴퓨터엔터테인먼트심의기구 역시 게임 업계의 자율기구로서 그 구성 방식 및 분류의 기준이 ESRB와 큰 차이가 없다(자세한 것은 http://www.cero.gr.jp/rating.html을 참고). 일본의 경우 표현의 자유를 존중하는 사회 분위기도 강하지만, 게임 업계를 이끌어온 닌텐도와 소니가 가족의 건전성을 표방했기에 그간 심의라는 제도에 대해서 큰 필요성이 제기되지 않았다. 역시 이번 세대에 접어들면서 빠르게 진전된 컨텐츠와 게임 취향의 성인화가 CERO의 신설을 가져왔을 것으로 추측된다.
CERO의 심의에 얽힌 흥미로운 에피소드가 하나 있었다. 남코의 미국 지사에서 제작한 <데드 투 라이츠>의 일본판에 대해서 CERO는 `18세 이용가\' 판정을 내렸다. 이 결정에 대해서 남코의 나카무라 사장이 강한 불만을 제기했다. 판매량 자체가 큰 지장을 받는다기보다는 CERO 초기부터 남코의 게임이 성인용으로 찍혀 사회적인 인식이 나빠지는 것을 우려했을 듯 싶다. 그런데, 나카무라 사장은 CERO의 결정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남코로서는 불만족스럽지만 비디오게임 업계의 거물이 시장 전체의 성숙을 위해 양보하는 태도를 취한 것이다. 역시, 판을 깨겠다는 생각보다 자신의 손해를 감수하면서 업계 일반을 존중하는 이러한 자세를 보면 그네들의 축적된 역량이 대단하다는 생각이다.
<겟어웨이>의 심의 통과는 무척 반갑고 신나는 일이다. 그런데, GTA3는 왜 안되는가? 한국에서 비디오게임은 아직 심의라는 껄끄러운 문제의 중심은 아니다. 과연, 온라인 게임 업계와 비슷한 문제에 부딪혔을 때 한국의 업계와 유저들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답은 없지만, 한번쯤은 생각해볼 문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