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사쿠사에서 유람선을 타고 오다이바로 이동합니다.
이 부근은 수상교통 라인이 잘 갖춰져 있어서 아사쿠사 외에도 니혼바시, 하마리큐 정원, 빅사이트, 오다이바 공원 등 배를 통해 갈 수 있는 곳이 여러 군데 있습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유람선 타는 게 두근두근하고 신이 났는데 타고 나서 1~20분 정도 지나니까 시들해지기 시작합니다.
게다가 아사쿠사-오다이바 라인은 운행 시간도 가장 많이 소요됩니다.
무려 한 시간 동안 별로 바뀌는 것 없는 물길 풍경을 보고 있노라면 어릴 적 한강 유람선 탔을 때도 처음에나 신나지 나중에는 매점에서 간식 사먹는 재미였다는 게 기억납니다.
그래도 오다이바에 가까워지면서 레인보우 브릿지를 지나가는 건 마음에 듭니다.
안그래도 "춤추는 대수사선: 레인보우 브릿지를 봉쇄하라"를 재미있게 보고 난 뒤인지라 뭔가 감회가 새롭습니다.
조명이 일곱 번 바뀌면서 비춰주기 때문에 레인보우 브릿지라고 하는데, 아직은 낮시간이라 불은 꺼져 있네요.
이렇게 커다란 다리를 지나니 오다이바가 섬이라는 사실이 실감납니다.
원래 오다이바는 우리나라의 초지진처럼 해안을 방어하기 위한 포대로 만들어졌습니다.
1853년, 미국의 페리 제독이 연기 푹푹 내뿜는 증기선을 타고 와서 개항을 요청하며 1년의 유예기간을 주지요.
이에 막부 정권은 무력 분쟁이 벌어질 것을 대비해 해안 요새를 건설하고, 그래서 다이바(台場:포대)라는 지명이 붙었습니다.
결국 개항에 동의하면서 쓸모가 없어진 오다이바는 매립되었고, 한참 동안은 버려진 땅으로 놀고 있다가
버블경제 당시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남아도는 돈이 부동산으로 몰리면서 오다이바 역시 대대적인 매립사업을 통해
거대한 인공섬 위에 세워진 번쩍번쩍한 상업지구로 바뀌게 되었지요.
오다이바에서 꼭 보고 싶었던 것 중 하나, 자유의 여신상입니다.
미국에 있는 자유의 여신상은 원래 프랑스에서 만들어서 선물로 보내준 것이고, 프랑스 세느 강변에도 작은 크기의 복제품 여신상이 있습니다.
그런데 1998년 "프랑스의 해" 기념으로 일본에서 그 복제품 여신상을 빌려오는데, 이게 워낙 인기가 많아서 복제품의 복제품을 만들어 영구 전시중입니다.
미국에 있는 93m짜리 여신상에 비하면 12m 겨우 넘는 작은 크기인데다가 뜬금없이 일본 해안에 서 있기 때문에 여행 책자에 "애처로운 자유의 여신상"이라고 묘사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자유의 여신상이 워낙 유명한 까닭에 세계 곳곳에 모조품이 널려있는데, 그래도 오다이바의 여신상은 뉴욕과 파리의 여신상과 함께 나름 프랑스 정부에서 공인한 석상이라는 사실.
그런데 사실 쇼핑몰이라면 모를까, 오다이바에서 즐길 수 있는 관광 명소는 그닥 많지 않습니다.
일본 최대의 만화 및 애니메이션 축제인 코믹마켓이 열리는 빅사이트가 오다이바에 있는 까닭에
특정 시기에는 사람들이 바글바글하지만, 그 외에는 한산하다 못해 썰렁한 분위기마저 감도는 동네지요.
그나마 몇 안되는 관광 명소중의 하나가 건물 생김새부터가 뭔가 범상치 않은 외관을 자랑하는 후지TV 본사입니다.
이런저런 오락 프로그램이 많은 방송국 건물이라 그런지 견학 시설도 굉장히 잘 되어있습니다.
물론 건물의 주 사용 용도는 방송국인 까닭에 대부분의 장소는 접근이 금지되어 있지만
관람객을 위해 공개된 1층, 5층, 7층, 24층, 25층만 다 둘러봐도 제법 풍부한 볼거리를 만날 수 있습니다.
유명한 TV쇼 장면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을 수도 있고, 운이 좋으면 진짜로 진행중인 TV 프로그램이 방송되는 것을 견학할 수도 있습니다.
건물 곳곳에서는 후지TV의 마스코트인 푸르딩딩 멍멍이 라후군의 모형이나 움직이는 인형을 만날 수 있습니다.
워낙 애니메이션 팬들이 많이 찾는 장소여서 그런지 성인 남성이 달려들면서 사진찍자고 하면 다른 인형탈 아르바이트생들은 곧잘 당황하는데 라후군은 아주 능숙하게 포즈 잡고 사진을 찍어줍니다.
1층 인포메이션 센터에서 스탬프 용지를 받아 각 층에서 도장을 찍어 완성하면 기념품을 주는 것 또한 매력 포인트.
견학 시설 곳곳을 자발적으로 탐방하게 만드는 시스템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25층은 유료 전망대인지라 입장권을 따로 끊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나중에 텔레콤센터 전망대를 갈 생각이었기 때문에 후지TV 전망대는 패스한지라 어떤 기념품을 주는지가 궁금하네요.
후지TV에서 가장 상품성이 높은 프로그램, 원피스.
1997년부터 지금까지 무려 20년동안 연재중인 만화가 원작으로, 숨겨진 보물을 찾는 초능력 해적들이 펼치는 모험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왠지 유치하게 들리는데, 무려 3억부 이상 팔리면서 기네스북에도 등재된 만화입니다. (와피스가 아니라 원피스!)
그야말로 드래곤볼과 함께 일본 만화에서는 기념비적인 작품.
그래서 이렇게 움직이는 거대 쵸파 인형도 있고, 기념품 상점에는 원피스 관련 상품이 가득합니다.
막상 돌아다닐 때는 나름 한적한 분위기에서 여유롭게 구경했는데,
듣기로는 휴일이나 방학, 그리고 수학여행 시즌에는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학생들이 넘쳐난다고 하니 '때를 잘 맞췄구나'싶기도 합니다.
후지TV에서 나와 유리카모메를 타고 텔레콤센터 역으로 이동합니다.
유리카모메는 오다이바 내부에서 이동할 때 자주 이용하게 되는 전철 노선입니다.
전 구간이 고가철도인데다 운전사가 없는 무인 운행 차량인 덕에 열차 첫 칸이나 마지막 칸에 타면 풍경이 탁 트인 것이
관광지 모노레일 타고 돌아다니는 기분이 들 정도로 경치 구경하는 데 안성맞춤입니다.
텔레콤센터에 도착한 이유는 바로 이곳, 오에도 온센 모노가타리 (에도시대 온천 이야기).
화산이 많은 일본답게 온천 문화도 발달해 있고, 비록 시간 부족으로 인해 하코네나 닛코처럼 본격적인 온천은 못 가도 나름 일본식 온천의 느낌을 겉핥기로나마 체험할 수 있는 장소입니다.
추가금을 내면 숙박도 가능해서 배낭여행객에게도 인기가 많은 장소. 뭐, 기본적으로는 테마온천인지라 우리나라 찜질방에서 자는 것과 크게 다를 바가 없어보이기는 하지만요.
탈의실에서 유카타로 갈아입고 나오면 에도 시대의 길거리가 눈 앞에 펼쳐집니다.
탈의실과 온천욕탕 사이의 거리가 엄청나게 멀고, 그 사이의 공간을 다 이런 테마파크로 꾸며놨습니다.
목욕만 하러 온 사람도 강제로 쇼핑하게 만드는 구조.
일단 온천욕부터 하고 개운한 기분으로 돌아다니자는 생각에 온천탕으로 먼저 발걸음을 옮깁니다.
우리나라에도 거대 목욕탕이 워낙 많은지라 온천탕 자체는 그닥 특별할 게 없는데,
가장 충격적이었던 건 남탕 때밀이가 여자였다는 사실!
때 미는 장소가 오픈되어있는 데다가, 여자 직원들이 입은 수영복도 야한 느낌이 드는 비키니 수영복이 아니라 래쉬가드 비슷한 작업용 수영복인지라 불법퇴폐 영업의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지만 그래도 깜짝 놀랐네요.
일본 온천은 전통적으로 남녀 혼탕이었다는 말도 있지만, 그래도 수건 한 장으로 사타구니만 가린 남자들이 수영복 입은 여자들에게 때를 밀리는 풍경은 나름 문화적 충격을 가져다 줍니다.
그러고보면 우리나라 목욕탕은 나체로 돌아다니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은데, 일본은 목욕탕에서도 꼭 수건을 하반신에 두르고 다니는 게 예의라고 하고, 그러면서도 남탕에 여자 종업원이 있는 것은 덤덤하게 받아들이는 것을 보면 이웃나라라도 확실히 차이가 많이 나네요.
일단 온천욕을 한 번 하면서 여행으로 피곤해진 몸에 에너지를 충전하고 다시 상점거리로 나와 봅니다.
음식점, 상점, 공연장은 물론이고 일본 만화나 애니메이션에서 흔히 보던 야시장 가게들이 다 들어서 있습니다.
공기총으로 과녁 맞추기나 공 던져서 깡통 쓰러트리기 같이 우리나라에서도 가끔 볼 수 있는 오락거리도 있고
금붕어 건지기나 물풍선 건지기 같은 전형적인 일본 야시장 오락도 있습니다.
여기에 솜사탕이나 꼬치구이 같은 간식도 사서 한 손에 들고, 그렇게 돈 쓰고 받은 영수증을 모아서 경품 룰렛도 돌려봅니다.
저녁식사로 먹은 유부 우동과 라무네.
우동이야 그렇다쳐도 탄산수에 설탕과 레몬향을 넣은 라무네는 꼭 한 번 마셔보고 싶은 일본 음료였거든요.
레모네이드라는 단어를 잘못 발음해서 라무네라는 이름이 붙었는데, 일본판 사이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볼록한 병 모양에 구슬이 들어있는 것이 라무네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데,
기술이 부족했던 옛날에 탄산가스가 새어나오지 못하게 뚜껑을 틀어막을 수가 없어서 유리구슬을 넣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탄산이 팽창하면서 구슬이 자동적으로 병 입구를 막는 구조지요.
처음 마셔보는 입장에서는 구슬을 병 안으로 쳐서 넣는 것도 힘들고, 마시다보면 구슬이 굴러다니며 입구를 막는 것도 불편한데
일본 사람들은 이게 나름 과거의 추억을 회상하게 만들어주는 장치라서 그런지 여전히 라무네 병에는 구슬이 딸랑거립니다.
온천욕을 하고 나와 바로 앞의 텔레콤센터 전망대로 올라갑니다.
후지TV와 대관람차, 레인보우 브릿지 같은 오다이바 랜드마크는 물론이고 저 멀리 도쿄타워도 보이네요.
시간이 많았으면 대관람차도 한 번 타보고, 쇼핑몰도 돌아보는 건데 짧은 일정 여건상 멋진 야경을 보는 것으로 마음을 달랩니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 이미 시간은 늦었지만 이런 밤에만 제대로 구경할 수 있는 곳, 가부키쵸를 들러봅니다.
원래는 일본 전통 연극인 가부키 극장이 있기 때문에 이런 지명이 붙었고,
낮에는 가부키 배우들이 무대 의상을 입고 특유의 진한 전통 화장을 한 채 거리를 돌아다니는 모습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밤이 되면 그런 고즈넉한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휘황찬란한 네온사인이 거리를 밝히는 환락의 도시가 되지요.
단순히 사람들이 북적이는 번화가라서가 아니라, 이 지역의 가게들 주 업종이 술집, 클럽, 가라오케에서부터 한국의 룸싸롱에 해당될 캬바쿠라나 호스트바에 이르기까지 흥청망청 즐기는 유흥업소 밀집지역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일본과 한국의 성매매에 대한 법률은 꽤나 차이가 커서,
한국이 "돈을 주고 사는 성적인 접대 서비스는 모두 불법이다! 하지만 음성적으로 공공연하게 널려있는 불법안마시술소, 오피스텔, 변종 성매매업소를 모두 잡아내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지..."라는 느낌이라면
일본은 "실제로 성기 삽입만 하지 않으면 합법"이라는 전제하에 소프란도 내지는 풍속점이라 불리는 업소들이 성행중입니다.
왠지 성인용 비디오의 경우에도 한국은 "성기 부분이 노출되면 불법. 하지만 외국산 ㅍㄹㄴ나 성인 방송을 막을 방법은 없지"인데 일본은 "실제 삽입을 해도 괜찮으니 모자이크만 넣어라"라는 차이가 나는 것과 비슷한 느낌입니다.
그렇다고 일본까지 가서 이런 성매매 업소를 방문하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일인데, 일단 우리나라는 속인주의인지라 한국 사람이 외국 가서 한국법으로 불법적인 일을 하면 처벌을 받습니다.
네덜란드에서 ㅁㅇ 했던 경험을 자랑삼아 올린 블로거가 경찰서 다녀온 일화가 유명하지요.
가부키쵸 1번가 까지는 그래도 상대적으로 좀 건전한 노래방(가라오케)나 주점들이 대부분이라 거리를 걸으면서도
'뭐야, 생각보다 그닥 특별할 것도 없네'라고 여겼습니다...만.
2번가 3번가 골목으로 들어갈수록 좀 더 본격적인 유흥업소들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건물 하나에 클럽, 캬바쿠라, 호스트바까지 옹기종기 다 모여있는 모습.
게다가 건장한 흑인 아저씨들이 일본어, 영어, 한국어를 써 가며 "한잔 하구가! 여자 있어요!"라며 호객행위를 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상상을 뛰어넘네요.
특히 가부키쵸에는 우리나라에선 익숙하지 않은 호스트바가 간판 선수들의 대문짝만한 사진을 내걸며 성업중입니다.
겉보기엔 그닥 잘생긴 것 같지 않은데 싶지만, 의외로 호스트의 '선수'들에게 중요한 것은 외모 뿐만이 아니라 여성의 마음을 사로잡(아 돈을 뜯어내)는 기술이라고 하니 왠지 그럴듯해 보입니다.
"돈을 못 벌면 호스트가 아니다. 여자를 기쁘게 해주지 못하면 호스트를 할 자격이 없어!
여자가 기뻐하는 얼굴을 보고 싶다고 순수하게 생각해. 웃어주는 여자가 많을수록 성공한 거야!
호스트는 모든 게 매상이라는 확실한 숫자로 나타나는 세계다."
- 마나베 쇼헤이, "사채꾼 우시지마" 중에서
그래도 일단 가부키쵸까지 왔으니 나도 일탈의 끝자락은 경험해 봐야 하지 않겠나 싶어서 도전한 파친코!
불법으로 돈을 밀반출해서 거액의 원정도박을 하는 경우만 아니라면 이정도 도박은 '일시적 오락'으로 간주해서 처벌받지 않는다고 하니까요.
수 많은 기계가 불빛을 깜빡이며 굉음을 내고 있는데, 그 중에 그래도 익숙한 얼굴들이 보이길래 에반게리온 파칭코에 도전합니다.
그리고 지폐가 구슬로 바뀌고, 구슬이 폭포수처럼 떨어지길 구경하고, 돈 다 털리는 데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십여분.
중간에 뭐라도 터질 것처럼 화면도 바뀌고 긴장감 흐르는 음악도 흘렀는데 결국 꽝이었네요.
지폐 한 장 더 넣어볼까 생각했는데 폐점시간이라며 쫓아냅니다. 도박장인데 폐장 시간이 오후 10시라니...
하긴 어설프게 따서 파친코에 빠지기라도 하면 자식도 못 알아볼 정도로 미치는 경우도 많다고 하니, 차라리 잘 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완전히 지친 몸을 이끌고 숙소로 돌아가는데 모스버거의 간판이 눈에 띕니다.
일본 와서 먹고 싶었던 것들 리스트에 올라와 있던 녀석인지라 낼름 들어가서 주문을 했습니다.
처음엔 모스버거라고 해서 '왠 나방(moth)버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알고 보니 Mountain, Ocean, Sun의 약자를 따서 MOS 버거였네요. 햄버거치곤 참 엄청난 이름입니다...
지금은 한국에도 모스버거가 들어왔지만, 이 당시만 해도 일본 여행에서나 볼 수 있던 햄버거 체인인지라 기대가 남달랐지요.
햄버거를 미리 만들어서 보온하는 방식이 아니라 주문하면 그때부터 제작하는 방식이어서 주문 후에도 십여분을 기다려야 했던 게 기억에 남습니다.
하지만 갓 만든 햄버거를 손에 쥐는 순간 느껴지는 뜨거운 빵의 열기는 기다리는 보람이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
이렇게 모스버거와 함께 일본 여행의 둘째날도 종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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