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간만에 스테이크를 구워 먹기로 합니다.
그냥 고기만 구워먹기에는 심심하니까, 만드는 김에 곁들이 음식도 만들고 잭 다니엘 소스도 만들어서 제대로 한 접시 차려먹을 생각입니다.
우선 재료부터 준비합니다. 스테이크용 고기, 소금, 후추는 물론이고 애호박, 주키니, 감자, 당근, 양파, 샐러리까지 쓰기 편하게 정리합니다.
요리를 시작하기 전에 필요한 재료를 미리 갖춰놓는 것을 mise en place 라고 하는데, 프랑스어로 제 자리에 배치, 정리정돈이라는 의미가 있지요.
미리 준비를 하면서 부족한 재료는 없는지 살피고, 지금부터 할 요리의 대략적인 시간표를 짜는 게 맛있는 음식을 만드는 시작입니다.
우선 마늘을 다지고 올리브 오일과 발사믹 식초, 허브를 섞어서 마리네이드를 만듭니다.
제일 시간이 많이 걸리는 로스트 토마토를 먼저 만들어야 하거든요. 토마토를 반으로 갈라 마리네이드를 바르고 오븐에서 한 시간 정도 굽기만 하면 되는 간단한 요리입니다.
토마토를 오븐에 넣고 남은 오일에 스테이크 고기를 마리네이드합니다.
오늘 구울 고기는 뉴욕 스트립인데, 꽃등심이나 안심 부분을 약간 두툼하게 썰어낸 고기를 뉴욕 스트립이라고 부릅니다.
원래는 뉴욕의 델모니코스 레스토랑에서 이 부위를 두껍게 썰어서 스테이크로 제공하면서 델모니코스 스테이크라고 부르기 시작했는데,
뉴욕에 위치한 레스토랑에서 개발한 메뉴라서인지 뉴욕 스트립이라는 이름으로도 널리 알려졌지요.
냉장고에서 나온 고기의 찬 기운도 좀 빼줄 겸, 고기는 마리네이드한 채로 놔두고 다른 재료를 손질하기 시작합니다.
애호박과 주키니(애호박과 비슷하게 생긴 노란색의 미국 호박)를 잘 씻어서 껍질 부분만 슬라이서로 썰어냅니다.
색깔이 다른 채소를 얇고 길게 썬 다음 버터에 볶으면 국수처럼 먹을 수 있거든요.
그래서 처음 메뉴판에서 "Vegie noodle"을 봤을 때는 채소가 들어간 파스타라고 생각했다가 정작 나온 건 100% 채소인 탓에 조금 당황한 적도 있었지만요.
만돌린이라고 부르는 슬라이서가 없으면 일일히 칼로 얇게 썰어야 하는데, 저 수많은 국수 가닥을 썰어내는 건 그야말로 못할 짓입니다.
하지만 채소 국수를 썰어내는 것보다 더 힘든 것이 있으니, 바로 토르네라고 불리는 채소 손질 방법입니다.
이른바 요리학교 학생들의 악몽이라고 할 수도 있지요.
감자나 당근 등을 길쭉한 럭비공 모양으로 깎아내야 하는데, 그 옆면이 하필이면 6면도 아니고 8면도 아닌 7개의 면을 가지고 있어야 하기 때문에 "토르네를 발명한 요리사는 변태가 틀림없다"는 말을 할 정도입니다.
다 만든 토르네는 끓는 물에 삶아서 80%정도 익혀줍니다. 나머지 20%는 버터와 함께 볶으면서 최종적으로 조리 할 생각이니까요.
토르네 준비가 끝나면 소스 재료도 준비합니다. 깊은 향과 맛을 더해주는 미르포아(Mirepoix: 양파, 당근, 샐러리를 2:1:1의 비율로 잘라서 섞은 것)도 준비하고, 루(Roux: 밀가루, 버터를 3:2 비율로 섞어서 볶은 것)도 미리 대기시켜 둡니다.
루는 고소한 맛을 더하는 역할도 하지만, 그보다도 소스나 국물을 걸쭉하게 만들기 위해 주로 사용됩니다.
버터를 팬에 녹이고 밀가루를 섞은 후 볶기만 하면 되는데, 사용하기 전에 한 김 식혀줘야 합니다.
뜨거운 루를 뜨거운 국물에 넣으면 부글부글 끓어오르면서 사방에 다 튀고, 차가운 루를 차가운 국물에 넣으면 멍물이 지면서 잘 섞이지 않거든요.
준비가 끝나면 고기를 굽습니다. 스테이크 맛있게 굽는 방법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의견이 많은데, 그 중 어떤 것이 정답이라고 꼭 집어 말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조리는 과학이지만 요리는 과학이 아니거든요. 동일한 재료를 일정한 방법으로 조리해서 특정 수치를 극대화 하기 공식은 존재할지 몰라도, 그 결과물을 받아들이는 인간은 주관적이고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정답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세계 최고의 요리사가 세계 최고의 소고기로 세계 최고의 스테이크를 굽는다고 해도, 독실한 힌두교도에게는 맛있는 음식이 아니라 입에 대지도 못할 물건이 되는 것처럼 말이지요.
굳이 이런 극단적인 상황이 아니라도 사람마다 경험과 취향이 다 다르고, 여기에 개인의 생물학적 특징 (예를 들어 맛을 느끼는 미뢰 세포의 숫자)마저도 각양각색이다보니 최고의 요리법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다만 많은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좋아하는 방향성은 있을 수 있고, 그 방향성을 따라가면서 자신의 취향을 덧붙여 최적화된 요리를 추구할 수는 있지만요.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오늘처럼 스테인레스 팬을 써서 고기를 굽는 것은 완전히 제 취향은 아닙니다.
무쇠팬으로 그릴마크 남겨가며 고기를 굽고, 버섯이나 채소를 대충 썰어 넣고 볶아서 뜨거운 팬을 접시삼아 먹는 걸 좋아하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소스를 만들기 위해서는 술을 뿌리고 팬의 바닥을 박박 긁어 낼 필요가 있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스테인레스 팬을 사용합니다.
이미 고기에 오일이 듬뿍 묻어있으니 팬에는 오일을 아주 살짝만 두르고 연기가 날 때까지 가열한 다음 고기를 구워주면 됩니다.
팬이 충분히 달궈지지 않으면 고기가 들러붙기 때문에 예열이 중요한데, 그래서 사람들이 고기 구울 때 가장 중요한 게 뭐냐고 물을 때면 "고기도 아니고, 팬도 아니고, 불도 아닌, 환기 잘 되는 집"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전 기숙사에서는 고기 굽다가 연기를 하도 내는 바람에 경보기가 두 번이나 울렸거든요.
그래서 요즘엔 고기 구울 때는 아예 공기청정기를 바로 앞에 가져다놓고 최대로 틀어놓은 채 요리하곤 합니다.
고기가 다 구워지면 육즙이 고기 내부에 골고루 퍼질 수 있도록 랙 위에 올려 레스팅을 합니다.
팬에 약간 남은 기름에 미르포아를 볶다가, 잭 다니엘 위스키를 1/4컵 정도 뿌린 다음 불을 붙여 플람베합니다.
뜨거운 팬에 술을 부으면 알콜이 바로 증기가 되면서 날아가다가 불이 붙기 때문에 불길이 상당히 높이 올라오는 것을 미리 예상하고 있어야 합니다.
불이 꺼지면 소 뼈 육수를 넣고 바닥에 눌어붙은 것까지 싹싹 긁어가며 맛을 우려냅니다.
마지막엔 루를 넣고 약간 걸쭉한 농도가 되도록 맞춰 준 다음, 거름망에 소스만 걸러내면 잭 다니엘 소스 완성이지요.
고기만 먹다 보면 감각 기관의 피로로 인해 맛을 잘 못 느끼게 되는데, 이럴 때 소스를 살짝 곁들여 먹으면 또 새로운 맛을 느낄 수 있습니다.
소스가 완성되면 재빨리 팬을 닦은 후, 버터를 녹인 다음 토르네를 볶아줍니다.
여기서 사용되는 버터는 정제 버터 (Clarified Butter)입니다. 정제 버터라고 해봤자 별 대단한 것은 없고, 버터를 중탕에 녹인 다음 위쪽으로 뜨는 유지방 부분만 따로 모은 것에 불과하지만요.
버터가 쉽게 타는 이유는 버터 안의 수분 때문인데, 이렇게 유청과 고형분을 제거하면 버터의 발연점이 확 높아져서 요리용 기름으로 사용하기 좋습니다.
마찬가지로 채소 국수도 볶은 다음 접시에 잘 올립니다. 토르네는 양 끝 부분에 파슬리 가루를 살짝 묻히고, 오븐에 구운 토마토도 함께 올려줍니다.
마지막으로 먹기 좋게 썬 스테이크를 국수 위에 놓고 소스를 살짝 뿌려주면 한 접시 완성!
평소에 잭 다니엘은 콜라에 섞어마시기만 했는데, 이렇게 스테이크 소스로 만들어 먹으니 또 색다른 맛이 있네요.
학교에서는 스테이크 소스는 주구장창 와인만 섞어 만들었는데, 개인적인 입맛에는 잭 다니엘이 훨씬 더 잘 맞는 듯 합니다.
육즙 줄줄 흐르는 고기를 소스와 함께 우적우적 씹다가 아삭한 채소 국수나 토르네를 먹고, 또 고기 먹다가 신 맛 나는 토마토로 입가심 하고...
확실히 고기만 구워 먹을 때보다 조합할 수 있는 경우의 수가 많아지니 다양한 맛을 즐길 수 있어서 좋네요.
고기와 소스의 궁합이 워낙 잘 맞다보니 '내가 지금까지 와일드하게 스테이크 구워 먹었던 건 소스를 맛있게 만들 수 있는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인가'라며 스테이크 굽는 취향이 흔들릴 정도입니다.
하긴, 점점 더 많은 것을 먹고, 점점 더 많은 요리를 하다 보면 입맛도 변하는 게 당연하지요. 새로운 감동을 통해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의 경계를 넓히기 위한 수단이 바로 예술이고, 요리 (Culinary Art) 역시 그 중의 하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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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진짜 이 형님이랑 술 한잔 하면서 요리얘기 들으면서 밤새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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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로의 유산
감사합니다! | 19.01.16 02:3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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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저트도 만들어야겠군요 ㅎㅎ | 19.01.16 02:3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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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uce Poivrade 맛있지요 ㅎㅎ 근데 그거 브라운 소스 계열이라 제대로 만들려면 진명황의 집행검 만들듯 노가다를 해야 합니다.. 약식으로 하려면 미르포아 볶다가 화이트 와인으로 디글레이즈하고 시판 데미글라스 붓고 으깬 통후추 우려내서 걸러내면 비슷한 맛이 납니다. 제대로 만든다면 소뼈 굽기부터 시작해야 하지만요... | 19.01.16 02:3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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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지간한 레스토랑에선 찾기 힘들더라구요. 가성비가 극악인지라.. | 19.01.16 02:3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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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한잔 하면 술 얘기밖에 안나옵니다 ㅎㅎ | 19.01.16 02:3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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굽기 정도에 따라 다른 맛을 보여주는 게 스테이크의 또 다른 매력이지요 ㅎㅎ | 19.01.16 02:3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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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킹 하는 친구들 보면 예술가 공방 보는 느낌입니다. 요리쪽은 완전 전쟁터인데 빵은 미리 만들어놓고 파는 식이라 아무래도 시간에 쫓기지는 않더라구요 | 19.01.16 02:3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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