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의 섬에서 본 책들
아크라시아의 탄생 1권~3권
고대의 기록에 의하면, 태초의 세상은 혼돈으로 가득 차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어느 순간 오롯이 무질서만이 가득했던 이 세계에 질서가 생겨나면서, 혼돈의 세계는 붕괴를 일으켜 두 개로 갈라져 내렸다고 한다.
질서의 신 루페온은 대우주 오르페우스를 창조했고, 공간을 메울 별을 만든 뒤 절대 꺼지지 않는 태초의 빛을 이용해 태양을 띄웠다.
그러나 태양의 무한함과는 달리 별은 유한하여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게 되었다.
질서는 생명을 창조하였으나, 죽음이란 그림자 또한 만들어 버린 것이다.
불완전한 질서의 세계를 바라보던 혼돈의 신 이그하람은 무한한 힘을 가진 태초의 빛에 눈독을 들이기 시작했다.
소멸하지 않는 그 힘이야말로 혼돈의 결정체라 생각했던 이그하람의 시선은, 아주 오랜 시간을 거쳐 혼돈으로 변하게 되었다.
그 동안 질서의 신 루페온은 대우주 오르페우스에 수많은 별과 행성을 창조해 내었다.
탄생과 죽음의 반복으로 응축된 생명의 힘은, 스스로 생명체를 창조할 힘을 지닌 별, '아크라시아'를 만들어 내었다.
루페온은 이를 관리하기 위해 일곱 신들을 창조하게 된다.
루페온에 의해 탄생한 일곱 신들은 아크라시아에 수많은 생명의 원천을 흩뿌렸다.
별에서 살아갈 종족들을 만들어낸 일곱 신들은, 조화의 신 기에나의 손길 아래 바다가 창조되고, 하나의 대륙은 여러 개로 쪼개져 각기 다른 모습을 지니게 되었다.
위대한 신들의 축복으로 인해, 아크라시아의 종족들은 더욱 더 풍요롭게 발전해 나갔다.
그 힘의 균형이, 깨어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完-
라이프 오브 체더 1권~7권
"하늘을 내려다 볼 수 있다니, 너무 예쁘다!"
유디아의 소금사막 한 가운데에서 치맛자락이 더러워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미소를 짓는 저 레이디의 이름은 루네디. 나는 그녀의 기사로, 몇시간 전 우리는 루테란에서 이곳까지 말을 타고 달려왔다.
"이것 봐, 체더! 지렁이가 소금을 먹어!"
유랑민 캠프에 말을 맡기고 소금사막을 걷던 나는 잠깐 한눈을 판 사이에 레이디 루네디가 저만치 앞서 가 있는 걸 발견했다. 그녀는 무언가를 손가락으로 가르키며 활짝 웃고 있었는데, 시선을 쫓아가 보니 근처에 웜 한 마리가 나타나 그녀를 위협하고 있었다.
나는 사색이 되어 외쳤다.
"아가씨! 위험합니다!"
소금사막의 웜 사건 이후 나는 유디아를 벗어나 루테란으로 돌아갈 것을 권유했지만 레이디 루네디는 유랑민 캠프에서 말을 되찾아 그 길로 항구까지 달려갔다.
간편한 복장으로 갈아입은 그녀는 본격적으로 배를 구해 항해를 시작했다.
"세상에 어쩜... 바닷물에 비친 햇빛 좀 봐. 보석같아."
나는 그녀의 충직한 기사로서 열심히 노를 저으며 말했다.
바다에 손을 담그는 행위는 매우 위험하다고. 하지만 레이디 루네디는 내 말을 귓등으로도... 아니, 새겨 듣지 않았다.
"꺄하하. 이것 봐, 체더! 물고기가 내 손을 따라오고 있어! 귀여워!"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던 나는 그녀의 손끝을 이리저리 맴도는 물고기를 발견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쳤다.
"아가씨! 위험합니다!"
눈을 떠 보니 어딘지 모를 해변가였다. 다행히 레이디 루네디와 함께였지만 좀처럼 그녀의 의식이 돌아오지 않아 용서를 구한 뒤 응급조치를 실시했다.
눈을 뜬 레이디 루네디는 겁에 질린 기색도 없이 두 눈을 반짝이며 우리가 쓰러져 있던 해변가를 둘러보았다.
"맨발로 걸어 보고 싶을 만큼 부드러운 모래야."
나는 그녀가 신발을 벗기 전에 달려가 겉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모래 속에는 뾰족한 나뭇가지나 돌이 많으니 주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레이디 루네디의 입꼬리가 내려갔다. 그녀가 실망한 건 할 수 없지만 우리는 이 섬을 벗어나야 했기에, 나는 그녀에게 않을 만한 자리를 확보해 준 후 뗏목을 만들 재료를 구해 오겠다고 했다.
"이것 봐, 체더! 여기에..."
숲이 있는 쪽으로 향하던 나는 발걸음을 멈추고 습관적으로 외쳤다.
"아가씨! 위험합...!"
그러나 레이디 루네디의 손바닥 위에 올라간 자그만한 난쟁이를 발견하고는 황급히 뒷말을 삼켰다.
"안녕, 코코모!"
잎사귀로 만든 옷을 입은 난쟁이가 두 팔을 벌려 내게 인사했다.
난쟁이들의 도움으로 섬을 탈출한 우리는 바다에서 방향을 잃고 표류하다가 어느 해적의 도움으로 얼음의 땅 슈샤이어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나는 육지에 발을 디디는 것만으로도 감격했으나 레이디 루네디는 어딘지 모르게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아가씨, 슈고 가죽으로 만든 겉옷을 구해 오겠습니다."
살을 에는 추위 때문이리라 생각한 나는 남은 돈을 뒤졌다.
"체더, 우리는 빈털터리야."
그 말에 정신이 번뜩 들었다. 그렇다. 난파된 이후 우리는 가진 것이라곤 몸밖에 없는 처지였다. 레이디 루네디의 입에서 하얀 입김이 뿜어져 나오는 것을 보며 나는 결단을 내렸다.
"슈고 가죽으로 만든 따뜻한 겉옷은 물론, 루테란으로 갈 수 있는 뱃삯과 여행에 필요한 음식들을 구해 오겠습니다."
비장한 나의 목소리에 무언가를 느꼈는지 그렇게 잘 웃던 레이디 루네디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명색이 기사였기에 체력에는 자신이 있었다. 얼어붙은 이 땅의 추위에도 금방 적응했다. 먹는 것이 조금 부실했지만 못 견딜 정도는 아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겐 레이디 루네디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가진것이 몸밖에 없었던 우리에게 남은 선택은 단 하나였다.
나는 기사의 명예를 버리고, 몸을 팔아 레이디 루네디에게 약속했던 것들을 건네주엇다. 남루한 행색에도 포기하지 않았던 검을 마지막으로 건냈을 때, 그녀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반드시 체더, 당신을 사러 오겠어."
레이디 루네디가 탄 배가 항구에서 멀어져 보이지 않을 때까지 우두커니 바라보고 있던 나는 손에 무언가가 쥐어져 있다는 걸 눈치챘다.
손가락을 펴자 그녀가 아끼던 나무반지가 있었다. 반지 안쪽에는 레이디 루네디가 태어난 날이 각인되어 있었다.
몇 년이 흘렀을까, 기억 속에서 그녀의 얼굴이 점점 흐릿해져 갔다.
돌아오지 않는 그녀에 대한 원망과 분노, 슬픔보다는 그녀의 얼굴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는 것이 힘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가 찾아왔다.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그토록 기다린 순간, 눈물을 흘릴 뻔했지만 가까스로 참았다.
레이디 루네디는 내게 아름다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 헤어지기 전에 건냈던 나의 검을 두 손으로 쥐고 지면에 검 끝을 댔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리가 없었다.
"아가씨, 저는..."
"체더, 당신의 명예는 나한테 있어. 명예를 원한다면 무릎을 꿇어."
그 말에 어찌 반박할 수 있을까... 나는 무릎을 꿇었고, 레이디 루네디는 두 손으로 쥐고 있던 검을 들어올려 기사임명식의 시작을 알렸다.
그 후, 나는 나무반지를 그녀의 손가락에 끼워 주었다.
슈샤이어에서 노예의 삶을 끝내고 다시 루테란으로 돌아가나 싶었지만 레이디 루네디의 성격이 어디 가겠는가? 그대로 여행길에 오른 우리는 신비로운 로헨델, 붉은 사막의 아르데타인, 예술의 나라 플레체 등 온 대륙을 돌아다녔다.
"이제 그만 돌아가자, 체더."
더 이상 돌아볼 곳도 없을 때쯤 애니츠에서 만두를 먹던 그녀가 지는 해를 바라보며 내게 말했다. 언제나 그랬듯, 나는 그녀의 말을 따랐다.
루테란으로 돌아온 나는 동부에서 집을 구해 작은 과수원을 시작했다.
"후훗. 이것 봐, 체더! 사과가 잘 익어서 루비처럼 빛이 나!"
한창 수확철이라 사과를 따고 있던 나는 바구니에서 사과를 꺼내 이리저리 살펴보는 레이디 루네디... 아니...
"은근슬쩍 먹으려고 하지 마, 루네디."
나의 사랑스러운 아내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