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을 어렸을 때 부터 좋아했다. 아파트 상가 지하에서 한층 더 내려간 쿱쿱한 창고같은 공간에 오락기 몇 대가 놓아져 있었고, 거기서 킹 오브 파이터즈 95, 철권 2를 하다가 아빠한테 걸려서 풀 죽은채로 아빠 뒤를 따라 터덜터덜 계단을 올라가곤 했다.
혼나면서도 끊임없이 문방구로 출근했고, 게임기의 게임이 업그레이드되어있을때마다 흥분하며 새로운 게임을 탐닉하며 플레이했다.
동네 고수형들에게 백원씩 쥐어주며 숨겨진 기술이나 플레이 요령도 배웠고, 때론 질나쁜 형들에게 게임을 이기면 괜히 혼나기도 하고, 일부러 져주고나서 친구들끼리 히히거리던 시절이었다.
오락실과 콘솔게임기를 위주로 게임을 해왔고 컴퓨터도 에뮬레이터로 게임을 즐기는 수단이었다.
그렇게 지내던 초등학교 3학년때 스타크래프트가 나왔다.
해처리가 지어지던 핏줄잡힌 계란같은 덩어리가 꿈틀거리던 기괴한 모습의 충격은 여전히 선명하다.
이유는 알수없지만 스타크래프트는 광적인 열풍이었고, 당시 초등학생들에게 편성되있던 컴퓨터 시간은 스타크래프트 시간이었다. 선생님들조차 제재하지 않았다.
친한애들끼리 저글링 블러드, 질럿 블러드를 하면서 한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학교밖을 나서면 문방구에 들러 철권 태그로 친구들과 자존심 대결을 했는데, 우물안 개구리 였던 시절 나는 꽤 잘하는 편이었다.
그러던 시절 내 인생에 게임이란 것의 비중을 높여버린 게임을 만나게 됐다.
여느때처럼 문방구에서 철권을 하던 나에게 친구는 알피지를 하고 싶다며 나를 꼬셨다.
당시 나는 알피지가 무엇인지도 몰랐는데, 친구는 무작정 나를 피시방으로 데려갔다.
처음 시작한 그 게임은 모닥불에 5명의 서양인을이 서있었고, 친구는 아무거나 골라서 이름을 짓고 시작하라고 했다.
로그캠프에서 시작한 그 게임은 풀밭으로 뛰어나가 빨간 괴물들을 패죽이는 게임이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난 그 게임에 미쳐서 고등학교 2학년 겨울방학 서울에 미술학원을 한달간 다니러 올라갔던 그때도 학원을 안가고 피시방에서 바알런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나에게 디아블로 2를 알려준 친구를 오랫만에 만났더니 이번엔 또 다른 게임을 하고있었다.
그 친구는 나에게 가로나 서버로 오라고 했고, 스톰윈드란 곳으로 오라고 한 뒤 가방 4개를 주고 사라졌다.
역시 정신을 차리고보니 난 학고를 맞으면서 영던을 돌고있었다.
세월이 흐르고 어느새 나도 하고싶은것과 해야될것을 구분하는 인간이 되어서 이제는 게임을 오래하지 못한다.
하지만 오랜 시간 나와 같이 살아왔던 게임들, 그리고 특정한 회사의 게임만 하며 지내왔던 내 인생에서 그 회사의 게임이란건 내가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나에겐 남다른 의미였나보다.
가장 가까이 지내고 당연하다 생각하며 대해왔던 것의 상실이란것이 가장 충격적이니까.
내 눈에서 콩깍지가 떨어지고, 마음에서 애정이 식어간다는 것이 느껴져서 기분이 좋지않다.
내가 같이 살아왔던 블리자드의 게임이 아니었던 때는 이미 오래전이었지만, 그들의 변화된 태도에 나도 변하게 된 순간을 결국 맞이하게 되었다.
다행히 나에겐 게임말고도 인생의 즐길거리가 생겨나고 있다. 그들에게 느끼는 실망감은 마음속에 작은 공간을 차지하고, 다른 부분들에게 영향을 주지 않을 정도로 잘 정리되어있다.
하지만 블리자드가 변하고 나도 변했다는 것은 믿겨지지 않는다.
슬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