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디르&세주아니 단편 소설: 저주받은 이들을 위한 묵념
오딘 오스틴 샤퍼
https://universe.leagueoflegends.com/ko_KR/story/silence-for-the-damned/
얼어붙은 강물 너머로 불빛이 보였다. 불빛 쪽으로 가면 따뜻한 잠자리와 음식이 있을 것 같았다. 우디르는 도시의 가정집을 상상했다. 상상 속에서 난롯불이 소리를 내며 타올랐고 그 옆에는 따뜻한 모피 침구가 있었다.
강의 얼음이 큰 소리를 내며 갈라지자 우디르는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그리고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몸을 떨었다. 입고 있던 털옷은 진눈깨비에 젖어 있었다. 곧 해가 넘어가면 훨씬 더 추워질 터였다. 세주아니의 마음을 돌리기는 쉽지 않아 보였다. 우디르 역시 세주아니와 논쟁을 계속하거나 그녀의 군대에 다시 합류하고 싶지는 않았다.
발아래로 펼쳐진 계곡에 세주아니의 군대가 나타났다. 전쟁에서 승리한 겨울 발톱 부족은 십여 개의 소규모 부족과 돌 이빨 부족 전체를 거둬들였다. 수천 명의 노련한 전사, 기갑병, 매머드 기수와 냉기의 화신을 휘하에 둔 세주아니는 진정한 전쟁의 어머니로 거듭났다.
본대 앞에서 세주아니의 친위대 소속 전사들이 천막을 치고 있었다. 피의 서약자가 묵을 숙소이자 정찰대 본부로 쓰일 곳이었다. 야영지 한가운데에는 세주아니의 푸른색 천막이 있었고 룬 문자가 수 놓인 가죽이 그 위를 덮고 있었다.
우디르는 야영지로 다가갔다. 극심한 허기를 느끼며 이를 악물었지만, 길쭉한 턱은 이미 침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옆을 지나가는 울프하운드를 보고 나서야 우디르는 이 감정이 자신의 것이 아님을 알아차렸다. 우디르는 울프하운드를 향해 으르렁거리며 마음대로 움직이는 턱을 제어하려고 애썼다. 그리고 머릿속을 파고드는 울프하운드의 의식을 밀어냈다.
우디르는 피의 서약자와 함께 천막을 치고 있는 세주아니를 보았다.
우디르는 자랑스러운 마음에 미소를 지었다. 세주아니다운 모습이었다. 어떤 일이 됐건 간에 그녀는 앞장서서 행동했다. 젖은 땅에 매머드 가죽으로 만든 천막을 세우는 일은 번거로운 작업이었다. 세주아니는 무릎을 꿇고 엄니로 만든 말뚝을 진흙 속에 박아 넣었다. 옆에는 세주아니와 피의 서약을 맺은 전사들이 눈비를 맞으며 돕고 있었다. 그들은 궂은 날씨를 저주하며 거친 말을 내뱉었다.
힘겹게 몸을 일으키는 세주아니의 모습을 보고 우디르는 또 한 번 놀랐다. 그녀의 몸집은 몰라볼 정도로 커져 있었다. 오래전에 만났던 빼빼 마른 소녀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렇다고 그때의 모습이 그립진 않았다. 당시 세주아니는 절박하게 우디르의 도움을 갈구했었다. 하지만 앞으로 몇 년만 지나면 그는 세주아니에게 짐이 될지도 몰랐다. 우디르는 걱정이 앞섰다.
세주아니가 빗속에서 소리쳤다. "우디르, 날씨를 봐요. 더 말할 것도 없어요."
우디르가 대답했다. "서쪽으로 며칠만 가면 바르킨 부족의 영토야. 강을 건너지 않고 기습할 수—" 순간 옆으로 십여 마리의 말이 지나가면서 우디르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그는 말들의 근육이 추위 때문에 오그라든 것을 느꼈다. 우디르는 그중 가장 가까운 말에게 소리쳤다. "그만! 지금은 귀리 못 줘!"
그 모습에 깜짝 놀란 피의 서약자들이 불안한 시선을 주고받았다. 세주아니가 경고의 눈짓을 하자 그들은 하던 일을 계속했다. 아무리 피의 서약자들이라고 해도 부족 주술사의 기이한 행동에 의문을 가질 수 없었다.
우디르는 등 뒤로 손을 숨겼다. 그리고 주머니에 몰래 손을 넣어 은으로 만든 작은 못으로 손바닥을 찔렀다. 명상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손에 느껴지는 고통은 머릿속을 비우기에 충분했다. 덕분에 우디르는 인간의 대화에 다시 집중할 수 있었다.
"바르킨 부족 마을까지는 엿새면 충분해. 그 마을에는 울타리도 없다고." 우디르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세주아니는 우디르를 잠시 바라보더니 대답했다.
"시간이 없어요." 세주아니는 늘어진 천막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강 건너 도시를 점령하지 않으면 우린 얼어 죽을 거예요!" 그녀의 손은 다시 근처 전사들에게 향했다. "전사들은 자식들을 먹이느라 며칠째 식사도 못 했어요. 어제는 오르가이네 딸아이가 죽어서 내가 함께 묻어 줬어요. 두 살배기였지만, 갓난아기처럼 작고 연약했죠." 세주아니는 추위에 새파랗게 질려버린 입술을 앙다물었다. 그리고 시선을 돌리더니 한숨을 쉬었다. "더는 추위에 아이들을 잃을 수 없어요."
"그럼 지금 공격해." 우디르가 강 너머의 도시를 가리키며 말했다. "우리 전사들을 믿어. 도끼를 휘두르고 발톱으로 할퀴고 이빨로 물어뜯으면 돼. 옛날 방식대로 말이야."
"옛날 방식은 최고의 전사들로 전투를 치르는 거예요. 지금 어사인족보다 강한 부족이 누가 있죠? 그들의 도움 없이 강을 건너면 수많은 전사들이 희생될 거예요. 굶주린 전사들을 죽음으로 내몰 수 없어요. 난 그들에게 힘과 승리를 약속했단 말입니다." 세주아니는 우디르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을 이었다. "당신이 뭘 두려워하는지 알아요. 하지만—"
"내가 두려워하는 건 애쉬의 군대라네." 우디르가 세주아니의 말을 가로챘다. "애쉬는 날이 갈수록 위세를 더하고 있어. 날마다 새로운 부족들이 아바로사 동맹 앞에 무릎을 꿇고 있다고. 겨울 발톱 부족의 힘을 키우고 싶다고 했지? 어사인족의 도움을 받으면 노예를 거둘 수 없고 적 전사들을 전향시킬 수도 없어. '잊혀진 자들'이 저 도시 사람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죽여버릴 테니까."
"우리는 겨울 발톱 부족입니다. 그들은 아군이고요. 내가 일으킨 전쟁이니 내가 멈추라고 하면—"
"어사인족은 누구의 명령도 따르지 않아!" 우디르가 확신하며 소리치자 못으로 손바닥을 찔러도 맑아지지 않던 정신이 마침내 깨끗해졌다. 우디르는 다시 목소리를 낮췄다. "놈들은 피에 굶주려 있어. 함께했다간 우리도 그렇게 될 거야."
세주아니는 곰곰이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나는 평생 당신의 조언을 따르며 살았지만, 이번엔 아니에요. 우리는 내일 저 도시를 반드시 점령할 겁니다."
"이보다 더 힘든 상황도 이겨냈잖아." 순간 우디르의 머릿속으로 멧돼지와 말, 늑대, 사람, 엘누크의 의식이 밀려 들어왔다. 우디르는 머릿속을 비워내려고 애썼다. 이 기회를 놓치면 세주아니를 설득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주아니." 우디르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칼키아는 지도자로서 흠이 많았어. 쉽게 타협했고 포기도 빨랐지. 그래서 네가 얼마나 실망했는지도 알아. 하지만 진짜 겁쟁이는 네 할머니였어. 약한 모습을 보이기 두려워했지. 그리고—"
"헤지안 할머니를 욕보이지 말아요." 세주아니가 경고했다.
"칼키아조차 네 할머니 같은 실수는 하지 않았어." 우디르는 말을 뱉으면서 자신이 선을 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할머니의 실수가 뭐죠? 어머니로부터 날 거둔 거요?" 세주아니의 눈이 분노로 번득였다. "당신은 내가 어머니처럼 남부의 겁쟁이가 되고, 족장 자리에 집착하길 원해요? 술에 절어 방탕하게 살길 바랍니까? 어머니는 전사로서, 지도자로서 실패한 분이었어요." 세주아니는 차가운 목소리로 덧붙였다. "할머니의 실수는 어머니의 통치를 묵인한 것, 그뿐이에요."
"헤지안은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고 너를 키운 거야."
"나는 그걸로도 감사해요."이제 세주아니의 표정에는 우디르를 향한 일말의 친근함이나 존중도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잊혀진 자들'을 부를 겁니다. 나를 도와 어사인족과 협상을 하든지, 아니면 이 추위 속에서 얼어 죽든지 마음대로 해요."
이제 우디르에게 희망은 없었다. 그는 패배를 인정하며 말했다. "그럼 나는 떠나야겠군. '쫓기는 자'는 나를 그리 반기지 않을 테니까." 우디르 역시 그자와 다시 만나고 싶지 않았다.
세주아니의 표정이 풀리더니 이내 의미심장한 미소가 떠올랐다.
"아뇨. 그래서 당신이 필요한 거예요, 우디르."
우디르의 머리 위로 노래나무가 보였다. 나뭇잎은 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우디르는 붉은 나뭇잎이 떨어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그동안 자신이 붉은색을 잘못 이해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고향에서는 언제나 흰 눈 위에 흩뿌려진 붉은색만 볼 수 있었다. 프렐요드의 붉은색은 폭력의 색이자 죽음의 색이었다. 하지만 진실은 그렇지 않았다. 붉은색은 생명의 색이었다. 살아있는 모든 인간과 동물의 몸 안에는 붉은색이 있었다.
우디르는 눈을 떴다.
명상을 하려고 켜 놓은 촛불이 붉게 빛났다. 비를 맞은 모닥불은 소리를 내며 점점 약해졌고, 바람은 밤을 넘기기 전 가죽 천막을 무너뜨리려는 듯이 세차게 불어댔다. 바닥에 깔아 놓은 가죽 장판 옆으로 얼음장같이 차가운 물이 흘렀다. 우디르가 앉아 있는 곳은 아이오니아의 수도원이 아니었다. 여기는 세주아니의 야영지였다.
'내 고향은 여기다.' 우디르는 억지 자부심을 품으며 생각했다.
몇 주 만에 명상에 성공한 우디르였지만, 그 기쁨을 음미할 시간은 없었다. 천천히 정신을 차리려는데 다시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우디르는 머릿속을 파고드는 불협화음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근처의 엘누크들, 드류바스크와 말들의 생각이 그의 의식을 잠식했다. 자신의 것이 아닌 감정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우디르처럼 강력한 정령 주술사들에게 이 소리는 천둥처럼 크게 느껴졌다. 그리고 절대 잦아들지 않았다. 동물들의 소리가 사그라지면 사람의 감정이 들렸다. 사람 역시 짐승과 다를 바 없이 수많은 생각의 조각들로 우디르의 머리를 어지럽혔다. 분노, 공포, 비통, 냉정—
우디르는 비명을 질렀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목구멍만 아플 뿐이었다. 머릿속을 가득 채운 목소리는 사라질 기미가 없었다. 우디르는 은으로 만든 못을 찾으려고 주머니를 뒤졌다. 못을 쥐자 손이 불타는 듯 뜨거워졌다. 우디르는 못으로 손바닥을 쉬지 않고 찔렀다. 죽을 만큼 아팠지만 개의치 않았다. 목소리만 사라진다면 그는 무엇이든 할 생각이었다. 무엇이든.
세주아니는 어사인족을 불러내는 데 소모되는 물자를 헤아렸다. 거대한 모닥불에서 솟아오른 불꽃은 하늘 높이 치솟았다. 세주아니의 전사들은 모닥불 주위에서 굶주린 채 추위에 떨고 있었다. 불꽃을 바라보는 그들의 얼굴에는 불안과 피로가 가득했다. 이렇게 추운 날씨에 마른 장작은 생사를 결정하는 중요한 자원이다. 하지만 이렇게 해도 잊혀진 자들이 오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모닥불의 장작은 죽음의 매듭을 본떠 겹쳐진 삼각형 형태를 하고 있었다. 차례로 쌓아 올린 장작들은 마치 불타오르는 탑을 연상시켰다. 모닥불 주위에는 어사인의 문양이 새겨진 커다란 쇠말뚝이 박혀 있었고, 그 옆에는 마치 불쏘시개처럼 무기와 뼈가 쌓여 있었다. 모든 준비가 끝났다. 이제 전사들은 '붉은 축복'을 통해 의식을 시작할 수 있었다.
세주아니가 곰의 정령을 모시는 시종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자, 시종은 커다란 나무 그릇을 들어 서약을 노래하는 자들 위로 곰의 피를 부었다. 붉은 액체가 몸을 타고 흘러내리자 서약을 노래하는 자들은 곰 발톱 토템을 움켜쥐며 나지막히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마지막으로 나선 서약을 노래하는 자는 열 살짜리 소녀였다. 곰의 정령을 모시는 시종이 까마귀 깃털로 만든 숄을 소녀의 목에 두르자 소녀는 몸을 떨더니 모닥불 주위로 서 있는 전사들과 함께 노래를 불렀다. 마치 바람이 우는 듯한 목소리였다. 그러자 다른 이들도 각기 다른 높이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서약을 노래하는 자들이 내는 괴이한 장송곡은 모닥불이 타오르는 소리와 화음을 맞추며 울려 퍼졌다. 세주아니는 끊임없는 굶주림처럼 뱃속을 파고드는 공포를 느꼈다.
"우디르를 데려와." 세주아니는 옆에 있던 피의 서약자 두 명에게 말했지만, 모닥불에 홀려버린 그들은 의식에서 눈을 떼지도 못한 채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주술사를 찾아!" 세주아니가 소리쳤다.
세주아니의 호통에 정신을 차린 두 사람은 모닥불의 빛이 닿지 않는 어둠 속으로 걸어갔다.
세주아니는 모닥불을 뒤로하고 브리슬 쪽으로 걸어갔다. 아무리 불안하더라도, 자신은 전투를 이끌 준비가 됐음을 부족민들에게 보여줘야 했다.
세주아니는 커다란 드류바스크 위에 올라탔다. 거대한 멧돼지 같은 모습의 브리슬은 그녀보다 두 배나 컸고 장정 십여 명보다도 무거웠다. 브리슬의 콧소리에서 세주아니는 불안을 느꼈다. 주술사가 아니더라도 그 정도는 알 수 있었다.브리슬은 세주아니의 불안감을 함께 느끼고 있었다. 브리슬의 발아래 얼음이 소리를 내며 갈라졌다. 어사인족을 부르면서 감수해야 하는 것은 물자뿐만이 아니었다.
모닥불에서 튄 불똥이 하늘로 날렸다. 불똥은 티끌만 한 불빛을 내며 공중에서 춤을 췄다. 흩날리는 불똥 뒤로 폭풍이 다가오고 있었다. 멀리서 번개가 치자 짙게 드리운 먹구름이 번쩍였다. 거대한 소용돌이 앞에서 세주아니는 마치 어린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첫 번째 벼락이 큰 소리를 내며 쇠말뚝 위로 떨어졌다. 세주아니는 몸을 앞으로 숙이면서 브리슬의 검고 뻣뻣한 털을 쓰다듬었다. 말이나 다른 작은 동물이었다면 달래 주었겠지만, 세주아니는 대신 이렇게 속삭였다. "나도 마음에 들진 않지만, 이제 모든 건 주술사에게 달렸어."
아침은 오지 않았다.
시커멓게 소용돌이치는 먹구름이 태양을 가리고 있었다.
우디르는 추위에 몸서리쳤다. 전날 내린 비는 간밤에 얼어붙어 있었고, 추위에 바지가 굳어 움직이기가 불편했다. 우디르는 정신이 혼미했다. 너무 많은 동물, 너무 많은 사람이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들의 고통스러운 울부짖음이 우디르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세주아니는 숲 끝자락 강가에 전사들을 쌍각 대형으로 배치했다. 전열의 전사들 뒤로 보이는 언덕에 야영지와 온기가 필요한 자들로 구성된 부대가 있었다. 모두 무기를 뽑아 든 채 어사인족이 오기를 기다렸다. 경험 많은 전사들은 방패를 치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아군임을 확인하기 전에는 무기를 집어넣을 수 없었다. 그게 프렐요드의 방식이었다.
순간 겨울 발톱 부족의 갑옷, 검, 도끼에서 전기 불꽃이 일어나더니 각자의 무기 사이로 호를 그리며 뻗어갔다. 전사들은 놀란 표정으로 이 신기한 광경을 바라봤다. 우디르는 그들의 두려움을 느낄 수 있었다.
부대의 선두에 있던 세주아니는 망토를 화려하게 벗어 던졌다. 부족민들에게 자신이 전쟁의 어머니이자 냉기의 화신이라는 사실을 다시 일깨워주려는 목적이었다. 세주아니의 핏속에는 얼음 마법이 흘렀고, 전투만이 그녀에게 필요한 유일한 온기였다. 전사들은 환호했다.
우디르는 세주아니를 따라 숲의 끝자락으로 이동했다. 순간 그의 표정이 뒤틀리기 시작하더니 입에서 송곳니가 솟아났다. 송곳니는 뒤로 휘어지며 우디르의 몸집만큼이나 커졌다. 피부에서는 털이 솟아나더니 곧 그의 몸을 파도처럼 뒤덮었다. 우디르는 으르렁거리며 알 수 없는 말을 늘어놓았고 입에서는 침이 뚝뚝 떨어졌다. 그러다 갑자기 눈을 떴다.
"왔군."
숲속에 정적이 감돌았다.
검은 숲의 나무 사이로 첫 어사인족이 소리 없이 모습을 드러냈다. 피로 물든 피부는 갈색빛을 띠고 있었으며 오물이 묻은 머리카락은 머리에 들러붙어 있었다. 이들은 야만인이었다. 일부는 곰 가죽이나 넝마를 걸치고 있었지만, 몇몇은 그마저도 없이 발가벗고 있었다.
다음으로 야수들이 나타났다. 대부분 곰이었는데, 크기나 털의 색깔이 각양각색이었다. 우디르가 아는 종도 있었지만, 생전 처음 보는 형태도 있었다. 이들은 자신이 인간이었다는 사실도 잊어버린 채 곰의 몸에 영원히 갇혀버린 정령 주술사들이었다.
그리고 괴물들이 나타났다.
이들은 곰과 다른 생명체가 기이하게 뒤섞인 형태를 하고 있었다. 전설이나 꿈, 아니면 신화에 나올 법한 모습이었다. 이들 역시 한때는 인간이었지만, 지금은 야생의 정수에 잠식당한 상태였다. 그 정도가 심한 나머지 평범한 동물의 모습을 더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중에서 몸집이 가장 큰 괴물은 곰과 비슷했다. 검은 깃털로 뒤덮인 갈기 위에는 머리 대신에 썩어버린 엘크의 두개골이 달려 있었다. 그것이 푸른색 눈을 빛내며 입을 벌리자 어두운 기운과 함께 소름끼치는 형체가 보였다. 그 뒤를 이어 다른 악몽 같은 존재들이 비틀거리며 기어 나왔다.
어사인족은 세주아니의 군대 맞은편에 자리 잡았다. 한데 모여 있었지만, 진형을 갖추었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그들은 공격 태세를 갖추지도, 입을 열지도 않았다. 그저 기다릴 뿐이었다.
거칠었던 우디르의 숨소리가 점차 느려졌다. 더는 알 수 없는 말을 늘어놓진 않았지만, 최면에 걸린 듯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었다. 양손에서 느껴지던 고통은 사라진 상태였다. 우디르는 벌판 건너편에서 낯익은 영혼들을 보았다. 한때는 수행자였거나 스승 혹은 서약을 노래하는 자였던 이들이었다. 술을 마시며 친해졌던 주술사들이자 전투에서 만났던 전사들이었다. 예전 의식은 거의 남아있지 않아 대부분 자신이 인간이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몇몇은 자신의 영혼을 깎아 무자비한 곰의 정령으로 탈바꿈했고, 광기에 가까운 자신감을 내뿜고 있었다.
그때 나무 사이로 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까마귀 깃털로 장식된 커다란 두건과 곰 가죽으로 만든 망토 외에는 아무것도 걸치고 있지 않았다. '쫓기는 자'였다.
"볼리베어 님의 뜻을 전하러 왔다." 남자가 말했다.
우디르는 몇 년 전 어린 소년에 불과했던 남자의 모습을 떠올렸다. 괴로움에 시달리던 나자크라는 이름의 소년은 정식 훈련을 받지는 않았지만 위대한 정령 주술사가 될 잠재력을 지니고 있었다. 우디르의 첫 번째 제자였던 그가 지금은 어사인의 뜻을 대변하고 있었다. 우디르는 남자를 둘러싼 마법에 집중하면서 나자크의 정신에 귀를 기울였지만, 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았다. 그때의 그 소년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나는 네 스승으로서 실패했구나.' 우디르는 속으로 생각하다가 나자크가 자기 생각을 또렷하게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당신은 겁쟁이였다." 쫓기는 자가 우디르의 생각을 읽고 으르렁거리듯 대답했다. "타고난 정령 주술사의 재능을 억누르면서 그 진정한 힘을 부정했지." 얼어붙은 나무들 사이로 바람 소리가 들렸다. 마치 귀신이 내는 소리 같았다. "겨울 발톱 부족이여, 왜 우리를 불렀지?"
"어사인족의 힘을 빌리고 싶소." 세주아니가 대답했다. "쫓기는 자여, 우리와 함께 싸워 주시오."
나자크는 고개를 세주아니 쪽으로 돌렸다. 생기를 잃은 눈동자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소용없다. 나는 단지 볼리베어 님의 목소리일 뿐이다."
"볼리베어의 대리인으로서 당신이 약속하면—"
"나는 볼리베어 님을 대신해서 결정할 수 없다. 나는 단지 그분의 수하일 뿐이다." 쫓기는 자는 세주아니의 말을 가로채더니 그녀를 뚫어질 듯 노려봤다. "주군께서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신다."
볼리베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우디르는 그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우디르를 끝없이 괴롭히던 인간들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심지어 바로 옆에 서 있던 세주아니 특유의 참을성 없는 목소리마저 점점 작아졌다. 볼리베어가 와 있었다.
나자크 뒤로 늘어선 나무들이 부러지는 소리를 내며 흔들리더니 매머드보다 거대한 '형체'가 나타났다. 터질듯한 근육으로 둘러싸인 몸통에는 사람보다 커다란 팔다리가 달려 있었다. 셀 수 없이 많은 전투를 함께하고 망가져 버린 고대의 판금 갑옷은 말라붙은 피 때문에 갈색빛을 띠고 있었고 등과 어깨에 박혀 있는 무기들은 녹이 슨 채 부러져 있었다. 얼굴은 엉망이 되었으며 입에서는 시커먼 액체가 흘러나왔다.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한 네 개의 눈은 세주아니와 우디르를 차갑게 내려다봤다.
곰 정령의 화신이 가까이 다가오자, 우디르의 머릿속은 태풍의 눈처럼 고요해졌다. 덕분에 우디르는 한 곳에 정신을 집중할 수 있었다. 어떤 소리도, 어떤 감정도 들리지 않았다. 심지어 우디르 자신의 생각조차 희미해졌다. 그는 오직 볼리베어만 느낄 수 있었다. 볼리베어가 가져온 정적은 어떤 인간이나 동물과도 달랐다. 볼리베어가 지닌 순수한 의식은 다른 모든 것들을 짓눌렀다.
세주아니의 부대는 어사인족보다 백 배는 숫자가 많았지만, 겨울 발톱 부족 전사들은 볼리베어를 보고 뒷걸음질 쳤다. 거대한 전쟁 매머드와 인간, 트롤, 바스타야를 상대로 산전수전을 다 겪은 노련한 전사들조차 두려움에 떨었다.
세주아니는 눈앞의 광경을 보고 숨이 턱 막혔다. 곰 정령의 화신이 자신의 부름에 직접 응답하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지만, 잊혀진 자들보다는 그들의 족장을 상대하는 편이 훨씬 나았다.
볼리베어가 천천히 다가오자 세주아니는 브리슬의 안장에 앉은 채로 마음을 다잡았다. 그녀의 얼굴에선 공포가 아닌 패기가 느껴졌다.
우디르는 정적에 맞서면서 말을 하려고 애썼다. 그리고 어린 시절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이야기에 따르면 볼리베어 역시 과거에는 인간이었다고 한다. 위대한 정령 주술사였지만, 곰의 정령에 굴복한 후 몸과 영혼이 완전히 잠식당했다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지금 이 괴물은 과거에 인간이었다고 보기에는 너무나도 거대했다. 볼리베어가 세주아니 앞에 서자 등 뒤로 번개가 내리쳤다.
볼리베어의 궁금증이 우디르의 정신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우디르를 압도했다. 마치 볼리베어가 내뱉는 말이 우디르의 몸을 뚫고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전쟁의 아이여, 왜 우리를 불렀는가?"
볼리베어의 목소리는 그곳에 있던 모든 어사인족과 정령 주술사들의 입을 통해 울려 퍼졌다.
세주아니는 쫓기는 자의 눈이 뒤집히더니 새카맣게 변하면서 고개가 뒤로 꺾이는 모습을 지켜봤다. 깡마른 그의 몸에서 눈사태와 같은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마치 목구멍 안에 천둥이 치는 듯했다. 우디르 역시 볼리베어가 한 말을 작게 속삭였다. 세주아니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세주아니는 정신을 차리고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양쪽 병사들이 모두 들을 수 있게 큰 소리로 말했다. "나는 남부 부족들의 농장을 불태우고 아이들을 사냥할 겁니다. 그들의 성벽을 무너뜨리고 집을 허물겠습니다. 다시는 우리에게 맞서지 못하도록 말입니다." 세주아니는 남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눈이 내리는 땅은 모조리 우리의 영토가 될 것입니다. 내 이름은 공포의 대상이 될 것이며 '우리' 부족은 영원히 프렐요드를 지배할 겁니다."
세주아니가 말을 마치자 정적이 감돌았다. 우디르의 망토가 바람에 흩날리는 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하늘에 먹구름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우리의 힘이 필요한가?" 볼리베어가 말했다.
우디르는 온 정신을 집중해 주머니에 손을 넣고 은으로 만든 못을 꺼냈다. 못의 냉기가 팔을 얼얼하게 했다. 세주아니가 계약을 맺기 전에 말을 할 수만 있다면... 다시 인간의 언어를 입 밖으로 낼 수만 있다면... 아직 시간이 있었다...
아직 늦지 않았다.
"네, 당신의 힘이 필요합니다." 세주아니가 대답했다. 우디르는 온 힘을 다해 세주아니와 볼리베어 사이로 비틀거리며 걸어갔다.
우디르는 못으로 손바닥을 찔렀지만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고통은 물론이고 금속의 감촉도 느껴지지 않았다. 우디르는 입을 열었지만,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결국 다시 볼리베어의 의식에 사로잡힌 우디르는 무릎을 꿇었다.
"누구를 제물로 바칠 테냐?" 우디르와 쫓기는 자가 볼리베어의 목소리로 말했다.
우디르는 눈을 감고 붉은 낙엽이 날리던 아이오니아의 언덕을 떠올렸다. 명상을 익히고 힘을 제어하는 법을 배웠던 그때의 기억이 희미하게 느껴졌다. 그곳은 고향이라 부를 수 없는 땅이자, 다시는 보지 못할 땅이었다. 그리고 프렐요드로 돌아와 어린 세주아니를 만났던 때를 떠올렸다. 우디르는 세주아니의 곁을 지키며 그녀가 전쟁의 어머니로 거듭나는 모습을 지켜봤다.
우디르는 갈라지는 목소리로 겨우 말을 뱉었다. "곰의 정령이여, 세주아니는 아무것도 바치지 않는다." 그리고 마른침을 삼키며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괴물을 향해 다가갔다. "우리가 줄 수 있는 건 전쟁과 죽음뿐이다."
분노한 볼리베어가 포효하자 우디르는 그 위력을 이기지 못하고 세주아니 쪽으로 밀려났다. 그리고 볼리베어가 마법에서 깨어났다.
세주아니는 혼자서 얼음용을 사냥했다. 과거 십여 회에 달하는 전투를 치르기에 앞서 항상 머리카락을 죽음의 매듭 형태로 묶으며 승리가 아니면 죽음을 택하겠다고 맹세했다. 한 치 앞도 안 보일 정도로 깜깜한 어둠 속에 뛰어들어 트롤들과 싸운 적도 있었다. 하지만 볼리베어가 마법에서 깨어났을 때, 자신을 내려다보는 거대한 괴물을 보며 세주아니는 진정한 공포를 느꼈다. 볼리베어의 털은 전부 곤두서 있었고, 살갗 아래에서는 번갯불이 번쩍였다. 흉터 자국에서는 빛이 났으며 입에서는 벼락이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극심한 공포를 느낀 세주아니는 하마터면 자신의 부족 전체를 어사인족에게 제물로 바칠 뻔했다.
이것이야말로 볼리베어의 진정한 힘이었다.
하지만 우디르는 이 압도적인 힘에 맞서고 있었다. 세주아니는 그런 그를 경외하며 바라보았다.
"위대한 곰의 정령이여. 우리의 전쟁이 두려운가?" 우디르가 볼리베어를 향해 소리쳤다.
볼리베어가 다시 포효했다. 그리고는 곰의 모습이 아닌 점점 알 수 없는 형체로 변해갔다. 몸에서 떨어져 나온 살점과 근육, 털가죽은 셀 수 없이 많은 번개 줄기로 서로 이어져 있었다. 볼리베어가 공격을 준비하자 세주아니는 우디르 앞으로 달려나갔다.
"폭풍과 자연의 반신이여. 우리와 함께 싸울 텐가? 아니면 우리의 전쟁이 두려운가?" 우디르가 계속 소리쳤다.
한참 뒤 볼리베어가 대답했다.
"우리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우디르는 도시의 허물어진 관문 아래로 걸어갔다. 이제 이 강가 도시에 밤의 추위로부터 몸을 녹일 화롯불은 없었다. 건물이 있던 자리에는 까만 골격만이 남아 있었고, 돌무더기 위에는 불타버린 대들보와 돌로 만든 굴뚝만이 우뚝 서 있었다.
우디르는 그을음으로 뒤덮인 바닥에 잿빛 발자국을 남기며 도시 중심부로 이동했다. 사방을 둘러싼 시커먼 연기 사이로 도시의 거리와 석조 건물의 잔해가 희미하게 비쳤다. 연기가 잠깐 걷힐 때면 십여 명의 겨울 발톱 부족 전사가 보였다. 그들은 불타는 방어 탑을 빙 둘러싼 채 생존자들을 처리하고 있었고, 살기 위해 밖으로 기어 나오는 도시 경비병들에게 도끼를 휘둘렀다.
멀지 않은 곳에서 어사인족 전사 한 명이 상점 주인을 무참히 공격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짐승 같은 얼굴을 돌려 우디르를 바라봤다. 털가죽이 이미 엉망이 되어 있었지만, 어사인족 전사는 고함을 지르며 계속 도끼를 휘둘렀다. 옆에선 겨울 발톱 전사들이 마지막으로 남은 경비병을 끝장냈다.
이들은 우디르가 처음으로 본 생존자들이었다. 먼저 도시의 방어선을 붕괴한 쪽은 어사인족이었다. 세주아니의 부대는 뒤이어 진입했지만, 잔혹하기로는 어사인족에 뒤지지 않았다. 우디르는 지금도 잔혹하고 무자비한 곰의 정령이 주변 모든 생명체의 정신을 잠식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어사인족의 힘이 세지고 있었다.
우디르는 폐허가 된 광장의 계단을 올라갔다. 그리고 높은 건물에 둘러싸인 채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괴물을 보았다. 도시 한가운데 홀로 서 있는 볼리베어 주위로 시체들이 즐비했다. 시체에서 검은 가지와 뿌리가 자라나 마치 지렁이처럼 볼리베어를 향해 뻗어갔다. 그러자 볼리베어의 얼굴에서 새 살과 털이 돋아났고, 몸의 근육은 더 두꺼워졌다.
볼리베어는 시선을 돌려 다가오는 우디르를 바라봤다. 볼리베어의 얼굴에는 십여 개의 새로운 눈이 생겨나 있었다. 그 눈들은 마치 거미의 그것처럼 어둡고 차가웠다. 겨울 발톱 부족의 주술사에게서 낯선 마법의 냄새를 맡아서인지 몰라도, 볼리베어는 우디르를 찬찬히 살피더니 말했다. 우디르는 볼리베어가 자신만 들을 수 있게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나는 다시 태어난다. 네가 막을 수 있는 일은 없다, 인간의 자식이여."
우디르는 망토를 벗고 저녁 명상 때마다 연습했던 자세들을 차례로 취했다. 불사의 독수리 태세, 영리한 살쾡이 태세, 강철의 멧돼지 태세 외에도 십여 가지 야수 정령의 힘을 끌어냈다. 곰의 형태를 취하기까지는 잠시 시간이 필요했지만, 곧 자신 앞에 서 있는 괴물의 모습으로 변했다. 그리고 마침내 우디르는 곰의 숙적이자 불과 난로, 대장간의 정령인 거대한 숫양 태세를 취했다.
우디르는 볼리베어와의 싸움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전혀 두렵지 않았다. 우디르의 머릿속은 조용했다. 그것이 좋지 않은 징조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세주아니가 그랬듯이, 우디르 역시 볼리베어에게 잠식당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우디르는 마치 아버지처럼 세주아니를 지키겠다고 맹세했다. 그리고 어떤 일이 있더라도 그 맹세를 지킬 생각이었다.
"세주아니는 넘겨줄 수 없다." 우디르가 내뱉듯 말했다.
볼리베어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돌아서서 소름 끼치는 회복 의식을 계속했다.
케일 배경 이야기 업데이트
https://universe.leagueoflegends.com/ko_KR/story/champion/kayle
룬 전쟁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타곤 산은 다가오는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과 같았다. 그 빛 속에서 케일과 그녀의 쌍둥이 동생 모르가나가 태어났다. 자매의 부모였던 미히라와 킬람은 부족을 파멸에서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타곤 산을 오르고 있었다.
미히라는 산을 오르던 중 자신이 임신했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등반을 멈추지 않았다. 타곤 산 정상에 도달한 그녀는 정의의 성위로 선택받아 태양보다 눈부시게 타오르는 칼을 휘두르게 되었다.
미히라는 얼마 지나지 않아 쌍둥이를 출산했다. 간발의 차이로 먼저 세상에 나온 케일은 눈부신 빛을 발산했지만, 뒤이어 나온 모르가나는 그만큼 어두운 기운을 내뿜었다.
그리고 미히라는 필멸자 최강의 전사가 되었다. 하지만 킬람은 신성한 임무를 맡게 된 미히라가 점점 두려워졌다. 온갖 사악한 마법사들이 그녀가 내뿜는 빛에 이끌려 몰려들자 결국 킬람은 쌍둥이의 안전을 위해 미히라의 곁을 떠나기로 했다. 그리고 정복자의 바다를 건너 새로운 정착지로 향했다. 마법을 차단하는 힘이 있다고 알려진 땅에 세워진 곳이었다.
새 고향에서 킬람은 혼자 쌍둥이를 길렀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둘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커 갔다. 나이에 맞지 않게 어른스러웠던 케일은 지도자들과 정착지의 법을 놓고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자신의 어머니가 어떤 능력을 지녔었는지 잘 기억하지 못했지만, 법의 목적이 모든 사람의 안전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킬람은 얘기하길 꺼렸지만, 케일은 미히라가 어느 먼 전쟁터에서 룬 전쟁을 끝내고 세상을 구원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시간이 지나 쌍둥이는 십 대가 되었다. 그리고 어느 날, 기다란 불줄기가 하늘을 가로지르더니 천상의 화염으로 이글거리는 검 한 자루가 두 조각으로 갈라지면서 케일과 모르가나 사이로 떨어졌다. 킬람은 그 검이 미히라의 것임을 알아보고 몹시 놀랄 수밖에 없었다.
케일은 일말의 머뭇거림도 없이 갈라진 검 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러자 케일의 어깨에서 깃털이 수북한 날개가 뻗어 나왔다. 케일을 따라 조심스럽게 나머지 검을 집어 든 모르가나도 마찬가지였다. 그 순간 케일은 어머니와 그 어느 때보다 깊은 교감을 느꼈다. 이 검은 어머니가 보낸 신호가 분명했다. 어머니는 자신이 아직 살아있으며, 자매가 자신과 같은 길을 걷기를 바라고 있었다.
정착지의 주민들은 자매가 별의 축복을 받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들이 이제 막 걸음마를 뗀 데마시아를 외부 세력으로부터 지켜주리라고 믿었다. 이 날개 달린 수호자들은 곧 빛과 진리의 상징이자 모두에게 존경받는 존재가 되었다. 이후 케일은 수도 없이 많은 전투에서 활약했다. 데마시아 민병대 역시 점점 규모가 커졌고, 케일은 용감한 전사들의 무기에 신성한 불의 축복을 내렸다. 하지만 정의 실현을 향한 케일의 의지는 점점 집착으로 변했다. 케일은 안팎의 위협을 물리치고자 심판단을 조직해 법을 집행했고, 맹렬한 기세로 반역자들과 약탈자들을 색출했다.
하지만 그런 케일도 모르가나를 대할 때는 물러질 수밖에 없었다. 케일은 추종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모르가나에게 죄를 뉘우치는 자들을 교화하는 임무를 맡겼다. 이에 크게 반발한 케일의 제자, 로나스는 케일이 자리를 비운 사이를 모르가나를 감옥에 가두려고 했다.
도시에서는 곧 폭동이 일어났고, 그 와중에 로나스는 목숨을 잃었다. 분노에 사로잡힌 채 하늘로 날아오른 케일은 신성한 불꽃을 소환해 죄악으로 가득 찬 도시를 정화하려고 했다.
그때 모르가나가 검을 손에 쥐고 케일 앞으로 날아갔다. 케일이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악을 몰아내려면 가장 먼저 모르가나부터 처리해야 했다. 자매는 공중에서 전투를 벌이며 서로를 향해 치명적인 일격을 날렸고, 그 충격으로 도시는 점점 파괴되어 갔다.
순간 고통에 찬 킬람의 비명이 들려오자 두 사람은 싸움을 멈췄다.
케일은 모르가나의 품에 안겨 죽어가는 킬람을 바라봤다. 그날 도시를 휩쓴 폭력이 낳은 무고한 희생자였다. 케일은 어머니가 남긴 검을 양손에 하나씩 쥐고 다시는 하찮은 감정에 사로잡히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그리고 구름 위로 날아올라 지평선 너머 어렴풋이 보이는 타곤 산을 바라봤다. 산 정상은 석양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케일은 다짐했다. 타곤 산에서 완벽하고 순수한 존재가 되겠다고. 그리고 어머니의 뒤를 이어 정의의 성위가 되리라고.
그 후 수백 년간 케일은 데마시아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케일에 관한 전설은 데마시아 왕국의 문화와 법률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데마시아인들은 날개 달린 수호자를 본떠 거대한 동상과 우상을 만들었고, 병사들은 그 정신을 이어받아 어두운 밤을 밝게 비추며 왕국에서 그림자를 몰아냈다.
왕국이 갈등과 혼란에 시달릴 때마다 데마시아인들은 케일이 다시 나타나기를 소망했다. 하지만 케일의 재림을 바라지 않는 이들도 있었다.
모르가나 배경 이야기 업데이트
https://universe.leagueoflegends.com/ko_KR/story/champion/morgana/
운명일까 아니면 단순한 우연일까. 모르가나와 쌍둥이 언니 케일은 혼돈에 빠진 세상에 태어났다. 룬 전쟁은 발로란과 슈리마의 대부분 지역을 쑥대밭으로 만들었고 타곤 산 정상까지 그 마수를 뻗치려 하고 있었다. 모르가나의 부모인 미히라와 킬람은 타곤 산 정상에서 신성한 힘을 얻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부족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건 여정에 올랐다.
산을 오르던 중 미히라의 임신 사실을 알았지만, 그들은 멈추지 않았고 결국 정상에 도달했다. 룬테라와 별이 만나는 그곳에서 킬람은 미히라가 정의의 성위로 선택받는 광경을 경외의 시선으로 지켜봤다.
구원을 얻은 부부는 쌍둥이 딸, 모르가나와 케일을 품에 안고 산에서 내려왔다. 하지만 천상의 힘을 부여받은 미히라는 점점 차갑게 변했고 쌍둥이를 킬람의 손에 맡긴 채 대부분의 시간을 전장에서 보냈다.
킬람은 시간이 지날수록 불안해졌다. 아직 세상 곳곳에서는 전쟁이 한창이었고, 사랑하는 아내는 점점 곁에서 멀어져 갔다. 쌍둥이의 안전을 염려한 킬람은 결국 미히라가 또다시 떠나길 기다렸다가 딸들을 데리고 타곤 산에서 도망쳤다.
킬람은 쌍둥이를 데리고 이름 없는 정착지에 자리 잡았다. 훗날 그곳은 마법과 박해로부터 안전한 나라, 데마시아 왕국으로 불렸다.
쌍둥이는 시간이 갈수록 서로 다른 모습으로 성장했다. 케일은 정착지의 규율에 관심이 많았지만, 흑발의 모르가나는 새로운 사람들을 배척하는 그들의 모습에 괴로워했다. 피난민으로서의 삶이 어떤지 잘 알고 있었던 그녀는 정착지 밖을 떠돌며 질 나쁜 마법사들이나 다른 추방자들과 어울렸다. 그리고 아내를 두고 떠난 죄책감에 괴로워하는 아버지를 보며,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게 한 어머니를 미워했다.
모르가나는 자신과 케일이 어머니의 능력을 물려받았을까 봐 우려했다. 그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어느 날, 어둠 속에서 나타난 거대한 검이 별의 불씨와 함께 하늘에서 떨어지면서 둘로 갈라지자 자매의 어깨에서 날개가 솟아났다. 킬람은 쌍둥이가 검을 손에 쥐는 모습을 보고 눈물을 흘렸고, 위로하려고 다가온 모르가나의 손길조차 뿌리치며 돌아섰다.
케일은 자신에게 주어진 새로운 사명을 받아들이고 심판단을 조직해 법을 집행했다. 하지만 모르가나는 자신의 새로운 능력을 저주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약탈자들이 어둠을 틈타 정착지를 습격했고 곳곳에서 전투가 벌어지는 사이 킬람이 약탈자들에게 둘러싸였다. 하지만 그 순간 모르가나가 나타나 아버지를 보호하고 약탈자들을 처단해 버렸다. 정착지를 위기에서 구한 자매는 데마시아의 날개 달린 수호자로 불리며 사람들의 추앙을 받았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정의를 향한 케일의 집착은 점점 극단적으로 변했다. 그런 와중에 모르가나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죄인들을 보호하는 데 힘을 쏟았다. 그렇게 두 자매와 그 추종자들은 위태로운 균형을 이루는 듯했으나, 그마저도 오래가지 못했다. 케일의 가장 열렬한 제자였던 로나스가 모르가나를 체포하려고 하자 모르가나는 암흑 불꽃으로 그를 속박해 자신을 따르는 죄인들을 지키려다가 그를 죽이고 말았다.
케일이 로나스를 죽인 자를 반드시 벌하겠다며 공중에서 신성한 불꽃을 피우자, 모르가나가 케일의 앞으로 날아올랐다.
자매는 서로를 향해 칼을 휘둘렀다. 눈부시게 빛나는 화염과 이글거리는 암흑 불꽃이 호를 그리며 맞부딪치는 동안 도시는 점점 파괴되어갔다. 승부가 나려던 순간, 모르가나는 아버지의 고통스러운 비명을 듣고 멈칫했다. 그리고 폐허가 된 도시에 쓰러져 죽어 가는 킬람을 발견했다. 모르가나는 비통에 빠져 울부짖으며 어머니가 남긴 검을 케일에게 던지고는 마치 운석이 떨어지듯 지상으로 급강하했다.
모르가나는 킬람을 끌어안고 파멸을 불러온 어머니의 유산을 저주했다. 그리고 넋을 잃고 뒤따라 내려온 케일에게 따져 물었다. 케일이 말하는 정의가 어머니로부터 자신들을 구한 죄밖에 없는 아버지를 벌하는 것이었는지... 케일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다가 하늘로 솟구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날아가 버렸다.
모르가나는 자신의 어깨에 돋친 날개를 볼 때마다 고통스러운 과거가 떠올랐다. 그녀는 날개를 잘라내려고 했지만, 날개는 세상의 어떤 칼보다도 강했다. 결국 모르가나는 쇠사슬로 날개를 묶고 평생 필멸자들처럼 땅 위를 걷기로 했다.
수백 년의 시간이 흐르면서 그녀의 이야기는 신화가 되었고, 모르가나라는 이름은 점차 사람들에게서 잊혀 갔다. 현재까지도 데마시아인들은 케일을 두고 영광과 진리를 전파하던 '날개 달린 수호자'라며 숭배하지만, 암흑 불꽃을 내뿜으며 죄인들을 구원하던 모르가나는 비밀투성이의 '가려진 자'로 불리고 있다.
모르가나는 사람들에게 배신당한 채 고통의 시간을 보내면서도 자신의 도움이 필요한 자들을 외면하지 않았다. 그리고 왕국의 그림자 속에서 때를 기다렸다. 언젠가 케일의 빛이 룬테라로 돌아와 모두를 심판할 것임을 알기에.
마법이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하는 지금, 모르가나는 새벽이 가까워졌음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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