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46 룬테라 지도 항목 추가
룬테라 지도 업데이트
단편소설과 슈리마의 정글 관련 챔피언들의 이야기가 업데이트되면서 룬테라 지도도 새로운 이야기가 추가되었습니다.
https://map.leagueoflegends.com/ko_KR
단편소설: 세상의 끝에서
이안 세인트 마틴
https://universe.leagueoflegends.com/ko_KR/story/at-the-edge-of-the-world/
"일곱 번째입니다." 이사드 토미리가 무덤덤한 목소리와 표정을 유지하려 애쓰며 말했다.
오디츠 선장은 책상을 메우고 있는 지도와 보고서에 정신이 팔려 일등 항해사인 이사드의 말에 바로 답하지 않았다. 혹은 정신이 팔린 척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짧은 기간이나마 함께 키로냐호를 타고 항해하는 동안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그녀를 방으로 불러 차렷 자세를 취하도록 한 것은 분명 그가 가진 권력의 표출이었다.
"최고 사령부와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이사드가 이번엔 양보하지 않겠다는 투로 말했다.
"토미리 사령관, 여기서는 내가 최고 사령부의 대변인이네." 오디츠가 눈도 마주치지 않고 말했다. "자네는 그 사실을 모르고 있거나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것 같은데?"
"일곱 번째입니다." 이사드가 반복했다. "최고 사령부와 이야기하고 싶다고 일곱 번을 요청했습니다. 뭘 애원하려는 것도 아니고, 간청하려는 것도 아니고, 약속하기 위해서요."
"약속?" 책상 위에 널린 문서를 보던 선장이 마침내 고개를 들어 이사드를 바라보며 말했다.
"예. 제국의 영광을 말입니다. 말로든 피를 흘려서든 제국의 영토를 넓히고 원주민들을 데려오겠다고 약속하고 싶습니다. 국경에서는 녹서스의 새로운 영토를 확보하기 위해 매일같이 병력이 동원되고 사절이 파견되고 있습니다. 제가 할 수 있습니다. 명령만 내려주십시오."
"이미 말했을 텐데." 오디츠가 짜증 내듯 말했다. "자네도 알다시피 나도 일곱 번째 말하는 거야. 트리파릭스의 생각을 해석하는 건 최고 사령부의 일이지, 그 수하에 있는 우리가 관여할 사안이 아니야."
이사드의 몸이 뻣뻣해졌다. 불만이 차올라 참을 수가 없었다. "후라드 선장이 루우그 해안에서 해적 놈들에게 당했을 때 키로냐호를 승리로 이끈 건 선장님이 아니라 저였습니다. 선원들과 함께 놈들의 배를 나포한 것도 저였고, 마지막 놈까지 소탕했을 때 선원들이 환호하며 부른 이름도 제 이름이었습니다. 그게 '당연'하다고 느꼈습니다. 그런 승리 후에 제가 기대한 건—"
"뭐? 자네가? 겨우 굶주린 프렐요드 몇 놈을 잡아 바다에 빠뜨리고선 자네가 나 대신 이 자리에 앉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으니 날 뛰어넘어 직접 최고 사령부와의 대화를 요청한 거고."
오디츠 선장은 쥐고 있던 깃펜을 조용히 내려놓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이사드 쪽으로 덮칠 듯이 다가가자 평생 전장에서 싸우며 얻은 오랜 상흔들이 빛을 받아 드러났다. "토미리 사령관, 원래대로라면 상관에 대한 불손한 태도를 이유로 파면은 물론이고 청산업자 소굴에 내던져 버렸을 텐데." 그가 딱딱하게 말했다. "하지만 하늘이 자네 운명에 개입한 것 같군."
그가 두루마리 하나를 꺼내 이사드에게 휙 건넸다.
두루마리의 봉랍 부분은 뜯겨 있었고, 오디츠 혹은 그의 부하 중 누군가가 이미 내용을 확인한 흔적이 보였다. 그들에게는 그럴 권한이 있었다.
"가지고 나가게."
이사드는 잠시 놀란 채로 망설이다가 서신을 집어 들었다. 선장에게 경례한 후 자신의 방으로 서둘러 돌아온 그녀는 서신을 펼치고선 빠르게 읽기 시작했다.
그녀는 마치 도가니의 녹은 쇳물이 가슴에 부어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등 뒤로 부는 바람에서 처음으로 신의 섭리를 느꼈다. 드디어 자신의 능력을 증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수도로 오라는 명령이었다. 드디어 그녀에게 명령이 내려졌다.
항구는 인파로 가득했다. 함대 선원들의 옆쪽으로 상인, 무역상, 부두 노동자 등 다양한 사람들이 지나가며 끊임없이 승선하고 하선했다. 쇠 우리 안에는 희귀한 짐승들이 울부짖고 있었다. 투기장에 끌려가거나 귀족들의 관상용으로 팔려갈 운명이었다. 무역선에서는 룬테라 전역에서 실려 온 식자재들이 하적된 후 배분되고 있었다. 이사드의 척박한 고향 땅에 사는 수많은 시민들의 배를 채우기 위함이었다. 이는 참으로 놀라운 광경이었다. 생동감으로 가득 찬 항구에는 제국을 넓히고, 풍요롭게 하고, 더 견고히 하는 새로운 문물과 사상들이 흘러들고 있었다.
이 모든 것, 그리고 이곳 너머로 뻗어있는 도시는 불멸의 요새의 그림자 안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사드는 항구 근처의 길가에서 웅장한 고대 건물을 바라보았다. 제국의 깃발이 휘날리는 탑과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이 솟은 성벽이 보였다. 녹서스의 힘을 과시하는 데 있어 이보다 더 좋은 것은 없었다. 그녀의 가슴에서 타오르는 바로 그 힘이었다.
이사드는 무뚝뚝한 표정과 함께 지휘관으로서의 효율적인 사고방식이 자신을 지배하기 전에 주변의 활기찬 광경을 좀 더 구경하는 시간을 가졌다.
원대한 여정이 기다리고 있었기에 그녀는 배가 정박되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이사드가 보기에 아르덴티우스호는 다른 과거의 시간대에서 밀려온 배 같았다. 표면의 흔적이 그 역사를 말해줬다. 닳아버린 뱃머리와 뒷갑판의 삐걱거리는 나무판자까지, 선체에는 수십 년을 항해하면서 생긴 상처가 마치 거미줄처럼 곳곳에 나 있었다. 이런 소형 구축함은 키로냐호처럼 더 큰 전함을 호위하는 용도로 사용되곤 했다. 적 전초함의 공격을 대신 받으며 최대한 할 수 있는 모든 역할을 다하다가 바다 밑으로 가라앉는 운명이었다. 이사드의 눈에는 아르덴티우스호의 운명이 그래 보였다.
갑판 위의 선원들도 별다를 건 없었다. 꾀죄죄한 행색의 남녀 무리가 무질서하게 뒤섞여 일하면서 보급품이나 화물을 싣는 일보다 욕설과 협박을 주고받는 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었다. 선원들의 수는 다 합쳐 60명이 채 안 되었다. 이사드는 이를 드러내며 혐오감을 내비쳤다.
그녀는 냉소를 지어 보였다. 그녀가 받은 지원은 형편없었지만 상관없었다. 하찮은 도구로 이뤄낸 정복은 더 가치 있을 것이었다.
"거기 당신." 이사드가 모여있는 선원들에게 명령을 내리던 현장 관리자에게 말을 걸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가죽 방한 외투의 깃을 바로잡고는 여유 있게 씩 웃으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의 웃음은 이사드를 자극했다.
"당장 떠날 채비를 하도록 해. 내 배가 더 이상 지체하지 않았으면 좋겠으니까." 이사드가 딱 잘라 말했다.
"'내' 배라고 했소?" 남자의 목소리는 걸걸한 중저음이었다. 그는 잠시 얼굴을 찡그리다 무언가를 깨달았다. "아, 당신이 녹서스의 기린아라 불리는 그분이로군? 배야 당신이 원할 때 언제든 출발시킬 수 있소. 그렇게 보채지만 않는다면 준비가 끝나는 대로 출항할 거요."
"네 놈이 감히..." 이사드가 그의 건방진 태도에 얼굴을 붉히며 허리춤의 화려하게 장식된 칼자루에 손을 가져갔다. "이름이 뭔가?"
"오딜론." 그가 별로 개의치 않는다는 듯이 답했다. "동료들은 니앤더라고 부르지만."
"니앤더 오딜론." 이사드가 이름을 되뇌었다. 그러는 와중 아르덴티우스호에 포박줄, 올가미, 짐승 우리라고 적힌 화물들이 실리고 있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야수 조련사?"
"아, 들어본 적이 있나 보군요."
수도에서 그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제국을 위해 싸우느라 바쁜 몸이기에 투기장에서 시간을 보낸 적은 별로 없지만, 이사드는 오딜론이라는 이름이 곧 관중의 함성 속에서 맹수들의 극적인 전투를 상징하는 야수 조련사와 동의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걸까?
이사드가 평정심을 되찾았다. "당신이 같은 배에 탈 거라는 말은 없었어."
"뭐, 와버린 걸 어쩐담." 오딜론이 오디츠 선장의 낙관이 찍힌 두루마리를 이사드에게 건넸다. 그는 이사드가 노려보고 있는 것을 눈치채고는 이를 다 드러낸 채 음흉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왕 한배를 탔으니 잘 지내봅시다."
이사드는 뱃머리에 서서 지평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배가 출발하자 강어귀를 빠져나가 바다로 향하려는 다른 배들의 행렬 속에 묻히게 되었다. 이렇게 몇 시간을 대기하는 동안 녹서스로 들어가는 바닷길목을 지키는 요새에 배치된 군인들이 무뚝뚝한 태도로 배를 자세히 검문했다. 그들은 아르덴티우스호의 구석구석을 확인하고 이사드의 명령서를 적어도 여섯 번은 읽어본 뒤 결국 통과 허가를 내렸다.
이사드는 바다를 본 적이 많았지만, 자신이 직접 배를 이끌고 나가 본 적은 없었다. 끝없이 펼쳐진 짙푸른 바다는 한낮의 태양이 내뿜는 열기로 인해 하늘과 갈라져 보였고, 이 광경은 그녀에게 언제나 충격적이면서도 아름답게 다가왔다.
그리고 지금, 이 앞 어딘가에 이사드의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탐험하고 정복할, 녹서스 제국의 영토가 될 미지의 땅이.
그녀는 과거에 칼로 영광을 맛보았지만, 역사에 길이 남을 정도의 위업은 아니었다. 아무리 잊어보려 노력한들 가슴에는 항상 세상을 등지고 거리를 떠돌던 유년 시절의 기억이 남아 있었고, 그로 인해 조직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다거나 누군가를 진정으로 신뢰할 수 없었다. 믿을 수 있는 건 오로지 자신뿐이었다.
그렇게 되기까지 그녀의 삶은 치열했다.
갑판에서 둔탁한 발소리가 들리자 이사드는 어깨너머로 고개를 돌렸다. 야수 조련사가 다가오는 소리였다. 그녀는 낡아 빠진 가죽 일기장에 마지막 메모를 빠르게 적은 후 외투 주머니에 넣었다.
"멋진 풍경이오. 안 그렇소?" 오딜론이 난간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이사드가 발끈했다. "당신은 도대체 왜 여기 있는 거지?
"배가 필요했소."
"이건 내 배야. 내 여정이고. 그것만 기억해 둬. 그럼 우리 사이에 문제 될 건 없을 거야." 이사드가 말했다.
오딜론이 어깨를 으쓱했다. "원하는 게 군인 놀이라면 그렇게 하시오. 나한테 중요한 건 도착지까지 안전하게 가는 거고, 내가 놈을 찾는 동안 당신의 간섭을 받지 않는 거니까."
이사드가 그에게로 몸을 돌렸다. "그게 뭐지?"
"괴물이오." 오딜론이 미소지으며 말했다. "엄청난 놈이지. 그놈을 잡으면 내 죽음을 면할 수 있을 것이오."
망망대해를 항해한 지 삼 주째. 마침내 배가 바다뱀 삼각주의 끝자락에 도착했다. 이곳에는 겨우 발 딛고 설 수 있을 만큼 자그마한 모래사장과 덤불 지대부터 마을이 들어설 만한 커다란 섬까지 많은 땅들이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바다뱀 군도는 슈리마 대륙 남부, 그리고 동부의 미개척 지역으로 향하는 길을 이어주는 역할을 했다.
수로는 작은 배와 뗏목, 그리고 물물교환을 원하는 어부와 현지 상인들로 들어차 있었다. 녹서스 제국의 선박이 이곳에 들어오는 건 흔치 않은 일이었고, 심지어 아르덴티우스호 같은 호위선일지라도 소란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군도의 강가에 사는 주민들에게는 물물교환을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선실에서 주갑판으로 나온 이사드는 배가 현지인들로 둘러싸인 것을 발견했다. 남녀 할 것 없이 흔들리는 배를 타고 서서 생선 묶음과 각종 장신구를 손에 들고 난간에서 내려다보는 군인들과 선원들을 향해 시끄럽게 소리치고 있었다. 오딜론이 현지인들 사이에서 그들의 말로 대화하는 동안 수하의 덫 사냥꾼들이 물물교환을 하며 가지고 있는 지도와 현지인들의 지리 정보를 비교했다.
"이럴 시간이 없어." 이사드가 중얼거렸다. 그녀는 길을 막는 현지인들의 배를 대포로 날려버릴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내 마음을 접었다. 안 그래도 부족한 물자를 그런 데에 쓰기엔 낭비였고, 그녀에게도 득이 될 건 없었다.
"가만히 계시오." 오딜론이 세밀하게 깎아 만든 나무 조각품을 살펴보며 이사드에게 외쳤다. 그가 조각품을 상인에게 돌려주자 상인은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여길 지나면 물길이 거세집니다. 호의를 그렇게 외면하지 마시지요."
이사드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식량, 식수, 안내인. 우리가 여기서 얻어야 할 건 그뿐이야. 아무도 육지에 내려서는 안 돼."
오딜론은 거슬릴 정도로 진지하게 경례를 한 번 하고서는 현지인들과 말을 이어갔다. 이사드는 배 위를 돌며 녹서스 해군 기간병들의 경계 태세를 확인하면서 야수 조련사를 머릿속에서 떨쳐냈다. 대포와 포수들의 상태를 확인하는 일을 마치자 오딜론이 현지인의 배에서 지도 하나를 갑판으로 가져오는 모습이 보였다.
"안내인을 찾았소." 안내인이 오딜론에게 현지어로 무언가를 얘기하자 그가 몸을 숙였다. "바다뱀 군도에 온 것을 환영한답니다. 강 상류로 데려가 줄 수 있다고 하는군요."
"좋아." 이사드가 어서 출발하고 싶다는 듯 재빨리 답했다.
안내인이 오딜론에게 다시 무언가를 말했다. "그런데 왜 강 상류로 가려는지 묻는군요. 거기로 가려는 이유가 뭐요?"
"임무가 끝나면 그곳이 녹서스의 땅이 될 거라고 얘기해." 이사드의 표정은 사뭇 진지했다.
기이한 현지 과일과 말린 생선으로 식량을 보충한 원정대는 수상 교역소를 지나 항해를 이어갔다. 군도는 갈수록 협소해졌고 섬과 섬 사이의 미로와도 같은 길도 점점 줄어들었다. 마침내 아르덴티우스호는 깊숙한 정글로 이어지는 넓고 짙은 빛깔의 강으로 들어섰다. 그게 지나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미지의 야생이 원정대를 맞이했고, 별다른 일 없는 나날이 흘러갔다. 이사드는 자신과 자신의 선원들이 이처럼 길들지 않은 땅에 발을 내디딘 최초의 녹서스인이라는 생각에 가슴이 뛰었다. 이곳은 실로 아름다웠다. 우뚝 솟은 나무들이 빽빽하게 우거져 있었고, 형형색색의 화려한 꽃을 피워내고 있었다. 그야말로 생기가 가득한 곳이었다.
그뿐만은 아니었지만.
안내인은 내키지 않았지만 주요 지형지물을 설명하고 암초와 얕은 곳을 피해 원정대를 정글 안쪽으로 이끌었다. 불현듯 이사드는 가려움을 느꼈다. 처음엔 기분 탓인 줄 알았지만 가려움은 계속되었다. 강 주변은 마치 보이지 않고 느낄 수만 있는 그림자에 삼켜진 것처럼 짙은 어둠이 깔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이사드는 손이 무의식적으로 허리춤에 찬 칼로 가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손을 다시 거두고는 일부러 팔짱을 끼고 집중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침묵의 공포감이 계속 남아 주변에 보이는 모든 것을 물들였다.
이사드는 의식을 날카롭게 유지하기 위해 항해사와 함께 항로 지도를 만들고 물자를 점검했다. 그녀가 자기 몫으로 배급된 블러드클리프 건빵에서 쥐바구미를 떼어내며 주갑판으로 올라가던 중 갑작스런 고함이 들렸다.
"무슨 일이야?" 그녀가 주갑판으로 올라가며 물었다.
오딜론이 안내인의 말을 듣고는 답했다. "더 못 가겠다는군요."
이사드가 얼굴을 찌푸렸다. "이제 와서?" 주위를 둘러보자 지금까지 지나온 강과 정글의 모습과 별다른 바가 없었다. 하지만 안내인은 마치 보이지 않는 경계를 뚫고 들어오지 말아야 할 곳에 들어왔다는 듯이 공황 상태에 빠져 있었다.
안내인은 벌벌 떨며 주변의 선원들을 가리켰다. 선원들의 몸에 빨간 반점 같은 것이 나 있었고, 진물이 흐르고 있었다. 이사드는 이 증상이 선원들 사이에 퍼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원인을 밝히려 했지만 알아낼 수 없었다. 심지어 그녀의 몸에도 똑같은 증상이 나타나고 있었다.
"정글의 저주랍니다." 안내인이 소리치는 말을 오딜론이 통역해 주었다. "우리가 벌을 받는 거라고, 정글이 우리를 들여 보내주지 않을 거라는군요."
'겁쟁이 같으니.' 이사드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녀가 오딜론을 보며 말했다. "어쩔 수 없지. 배에서 내리라고 해. 물에 던져버리든가. 우리는 돌아가지 않는다."
아르덴티우스호가 정글 안쪽으로 물살을 가르며 나아간 지도 이제 일주일이 지났다. 그동안은 돛에 바람 한 점 불지 않은 탓에 이사드의 명령에 따라 몇몇 선원들이 배에서 내려 어깨까지 물에 잠긴 채 밧줄과 쇠사슬로 배를 끌어당겼다. 여기에 엄청난 인력이 동원되었고, 강둑의 지형이 가는 곳마다 달라졌기 때문에 위험천만했다. 물살이 흐르는 곳에 도착했을 때는 선원 수가 아홉 명이나 줄어있었다.
안개가 강을 뒤덮고 시야를 가렸다. 야생목들이 물 위로 가지를 늘어뜨려 강둑의 끝과 끝을 덮개처럼 이었고, 빛의 흔적을 거의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사방이 깜깜했다. 이사드는 배가 앞으로 나아가는 게 아니라 아래로 가라앉고 있음을 분명히 느꼈다. 배는 이 수수께끼 같은 땅의 밑바닥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정글이 그들을 삼키고 있던 것이다.
예고 없이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며칠간 계속되었다. 빗방울은 빽빽한 나무 지붕을 뚫고 내려와 아르덴티우스호 선원들의 몸을 뼛속까지 적셨다. 정글은 마치 이곳에 함부로 침입한 그들에게 벌을 주듯, 그들의 몸과 정신을 황폐하게 했다. 선원들도 그렇게 믿었다.
먹구름으로 인한 우울함과 떠나버린 안내인의 모습이 계속 그들을 괴롭혔다. 미신을 많이 믿는 선원들은 어두운 강물 위로 배가 나아가며 만들어내는 잔물결과 눈에 보이는 모든 나무마저도 불길하다며 중얼거렸다. 심지어 가장 냉소적인 성격의 수병들도 신경이 곤두섰고 한동안 횡설수설하더니 같은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이러다간 곧 선원들이 미쳐버릴 거라는 사실을 이사드는 잘 알고 있었다. 누군가 본보기를 보여야 했다. 그렇게 생각하고 바라던 찰나, 그녀의 예상이 들어맞았다.
"뱃머리를 돌려!" 겁에 질린 목소리로 누군가 소리쳤다. "지금 당장!"
"진정해, 크로스." 오딜론이 최대한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건 죽음의 배야. 저주받은 배라고." 크로스가 오딜론에게 빠르게 다가가 그가 입고 있는 방한 외투의 옷깃을 부여잡으며 말했다. "안내인이 한 말 들었지? 이 정글에 한번 들어오면 아무도 살아나갈 수 없어. 아무도!"
오딜론은 주변에 모여있는 선원들 쪽을 힐끗 쳐다봤다. 그가 쓴 낡고 빛바랜 모자챙 끝으로 굵은 빗방울이 흘러내렸다. 그들 모두 크로스와 같은 눈빛이었다.
"그만해." 그가 크로스를 뒤로 밀치며 쏘아붙이듯이 말했다. "여기선 저주의 저 자도 꺼내지 마. 정신 차려."
"돌아가야 한다고!" 크로스가 눈을 크게 뜨고 애걸복걸했다. "돌아가야 하—"
크로스는 미처 문장을 다 끝내지 못하고 헉 소리를 내며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이사드는 더러워진 자신의 칼을 닦아냈다. 옳은 것을 추구하는 것은 때로 무거운 짐을 짊어지는 것과도 같았다.
"당신이 지금껏 살아온 인생보다 더 긴 시간을 저 녀석과 함께하며 짐승을 사냥해 왔소." 오딜론이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도대체 당신이 무슨 권한으로—"
"우릴 막을 수 없어." 이사드가 냉정하게 말했다. "그게 무엇이든, 누구든 간에."
배가 무언가에 쓸리는 소리가 들리자 이사드는 침상에서 벌떡 일어나 무기를 차고 갑판으로 뛰어나갔다.
배는 뜻밖에도 강 끝에 도착해 있었다. 정글 혹은 진흙땅 아래에서 흘러나온 물줄기가 만나 형성된 작은 만은 마치 덩굴과 매끈한 나무가 완전히 에워싸고 있는 것 같았다.
"강이 막혔소." 오딜론이 뱃길을 가로막고 있는 나무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돌아가야 할 것 같구려. 다른 강줄기를 찾아보시오."
이사드가 작은 망원경을 들고 앞쪽을 살폈다. 아르덴티우스호를 끌고 다른 길을 찾는 데는 시간이 꽤 걸릴 터, 그러기엔 상황이 촉박했다. 이사드는 모여있는 병력과 선임 선원들의 행색을 보고는 과연 지칠 대로 지친 이들이 배를 끌고 갈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했다.
지금까지 열 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중 한 명은 자신의 역할을 거부하다 처형당했고, 여섯 명은 기이한 전염병에 사망했다. 그리고 나머지 세 명은 야밤에 자취를 감추었다. 동이 트고 근무 교대를 하던 인원들이 그들을 찾아보았지만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최소한의 인원만 남기고 간다." 이사드가 병력을 모아놓고 말했다. "제국에 보고할 만한 걸 찾아내거나, 전초 기지를 세워 더 깊은 내륙 쪽을 탐색하는 것이 우리의 계획이다. 스탐, 선발대 병사들에게 칼을 나눠주도록."
스탐이 망설였다. "사령관님... 석궁이나 폭탄은 안 가져갑니까?"
이사드가 칼을 꺼내 들더니 선발대 전원에게 말했다. "덤불 지대에서는 쓸모가 없으니 구식으로 하는 수밖에 없어." 그녀가 오딜론을 쳐다보았다. 그는 자신만의 사냥단을 꾸리고 있던 참이었다. "야수 조련사, 이것 때문에 여기에 왔다고 했지?"
사냥의 달인 오딜론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강을 건너며 큰 고생을 했음에도 자신감으로 충만해 보였다. "제군들, 우리가 노리는 건 큰 놈이다. 사냥과 포획에 필요한 모든 짐을 챙긴 후 모두가 나눠 든다. 사령관이 이끄는 선발대가 출발하면 우리도 출발할 수 있도록 준비해. 같이 움직이는 거다."
오딜론의 동료들이 해산하자 이사드가 그에게 다가갔다. "놀랍군. 우리가 뜻을 같이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정글은 말 그대로 지옥이었다. 이사드의 머릿속에 다른 말은 떠오르지 않았다. 온갖 고초를 겪었던 강도 정글에 비하면 낙원이었다.
선발대는 굵은 덩굴과 초목을 베며 나아가야 했다. 정글 안은 숨이 막혔다. 짙고 습한 안개만이 목구멍과 눈을 찔렀다. 얼마 안 가 그들은 피로를 느끼기 시작했다.
이사드는 무언가로부터 감시당하는 듯한 꺼림칙한 느낌을 받았다. 사방에서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던 와중 대열의 뒤쪽과 양옆에서 한 명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대부분은 조용히 사라졌지만 몇몇은 도와달라고 소리치며 덤불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몇 시간이 흐르자 서른 명이었던 이사드의 선발대와 사냥꾼들은 그 수가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흩어지지 마!" 이사드가 눈가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소매로 닦아내며 소리쳤다. 그녀는 온몸에 퍼진 붉은 반점 때문에 따가운 통증을 느꼈고 머리는 어지러웠지만 온 힘을 다해 정신을 집중했다. 여기서 멈출 수는 없었다. 아니, 여기서 멈추기는 '싫었다'. 계속 움직여야만 했다.
선두에 있던 정찰병이 부르는 소리가 들려오자 이사드는 대열 앞쪽으로 터덜터덜 힘없이 걸어갔다. 그들 앞쪽에 작은 구멍 하나가 나 있었고, 그 가운데에는 검은 물로 채워진 얕은 웅덩이가 있었다. 비록 비좁긴 했지만 지금까지 지나온 길보다는 훨씬 개방된 곳이었다.
"저 물은 건드리지 마." 이사드 역시 갈증을 느꼈음에도 병사들에게 명령했다. "잠시 휴식을 취한 뒤 이동한다."
이사드는 자리에 앉으며 오딜론을 올려다보았다. 그가 낡은 술병을 그녀에게 건넸다. 잠시 후 그녀는 마지못해 술병을 받아들었고, 그 옆으로 오딜론이 힘없이 털썩 주저앉았다. 여정 내내 그가 보였던 침착한 모습이 사라지고 신경이 날카로워진 것 같았다.
"너무 감정에 휩싸이지 마시오." 오딜론이 말했다. "당신이 있건 없건 간에 난 이 저주받은 곳에 왔을 거요. 나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소."
이사드가 인상을 찌푸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오딜론은 다른 이들에게 말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그녀 쪽으로 몸을 더 가까이 기울였다.
"난 파산했소." 그가 속삭였다. "그나마 남은 돈도 여기 오는 데 다 써버렸지. 내 목숨을 살릴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으니까. 이제 난 짐승을 잡아 투기장에 넘겨 빚을 갚거나, 아예 돌아가지 못하거나, 둘 중에 하나요."
오딜론이 한숨을 내쉬며 술병을 다시 가져가 한 모금 들이켰다.
"당신은 왜 여기에 온 거요?"
"임무가 있어." 이사드가 정글 쪽을 바라보며 답했다. "여기서 복귀한 후 이 지역을 녹서스에 병합시키면 내 이름이 붙게 될 거야. '대장군' 스웨인이 나타나 숙청을 시작하기 전까지만 해도... 모두가 고귀한 토미리가의 이름을 알았지. 새로운 땅을 정복하면 내 위업이 두고두고 회자될 거야."
"허영심으로 가득 찬 사람이라더니." 오딜론이 싱긋 웃어 보였다. "이런 헛고생을 시킨 걸 보니 그들도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었나 보군. 이제 그 사람들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가 가는구려." 그가 이상할 정도로 나긋하게 말했다. "참 안 됐소..."
"잠깐." 이사드는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려고 애쓰며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는 와중에 갑자기 물이 첨벙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물은 건드리지 말라니까!" 그녀가 화난 투로 소리쳤다.
"우리가 건드린 게 아니오." 오딜론이 정글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웅덩이 위로 나무들이 흔들리는 모습이 비쳤다. 나뭇가지가 꺾여 부러지더니 땅과 웅덩이로 떨어졌다.
그 순간 어떤 소리가 들렸다.
쿵쿵대는 발걸음 소리, 나무가 쪼개지는 소리, 우르르 거리는 낮은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정글에서 어떤 형체가 나타나더니 빽빽한 밀림 사이를 뚫고 지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 형체가 고개를 들자 엄니가 달린 커다란 머리가 나타났다.
이사드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바실리스크를 본 적은 있었다. 보통 탈것이나 노역용으로 쓰이는 짐승이었다. 성체 중 어떤 것은 크기가 엄청나게 커 포위당한 도시의 성벽을 무너뜨릴 정도의 파괴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나타난 것은 그보다 더 큰 놈이었다.
놈은 그들을 노려보더니 서 있는 사람을 넘어뜨릴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큰 소리로 포효했다.
"좋아!"
기세에 찬 목소리가 충격에 빠져있던 이사드를 깨웠다. 그녀가 고개를 돌리자 야수 조련사 오딜론이 작살과 올가미를 꺼내 들고는 짐승을 향해 웃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요 귀여운 녀석. 자, 어디 한번 덤벼 봐!" 오딜론이 사냥용 도구를 빙글빙글 휘두르며 크게 소리쳤다. 그의 목소리에는 광기가 서려 있었다. "누가 더 큰지 한번 보자고!"
이사드는 짐승이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땅이 요동치는 것을 느꼈다. 넘어질 정도로 강력한 진동이었다. 이내 바실리스크의 원시적인 포효와 사냥꾼들의 외침이 들려왔다. 물론 그 유명한 야수 조련사의 목소리도 함께였다.
하지만 그녀는 그를 남겨둔 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반대 방향으로 도망쳤다.
이사드는 빈터의 끝자락에 다다라서야 멈춰 섰다. 나무를 한 손으로 짚어 몸을 지탱한 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더이상 오딜론과 바실리스크가 싸우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결국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상상은 할 수 있었다. 그녀는 숨을 몇 번 크게 들이쉰 후 고개를 들어 남은 인원들을 살펴보았다.
이사드를 포함해 총 여섯이었다. 녹초가 된 그들은 공포에 질려있었다. 무기를 들고 있는 건 세 명이 전부였다. 오딜론의 사냥단은 그의 곁에 남아 마지막까지 함께 싸웠다. 이사드는 절망감에 휩싸였고, 이는 마치 실제로 얻어맞은 듯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무릎을 꿇고 털썩 주저앉고 싶은 것을 애써 참았다.
"저길 보십시오!" 병사 중 한 명이 칼로 방향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이사드가 빈터를 자세히 살펴보자 무언가가 보였다. 그것은 아치 모양이었고, 주변에는 덩굴이 잔뜩 자라 있었지만 분명히 이 숨 막힐 듯한 공간에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돌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돌로 된 구조물이었다. 그들은 덩굴과 가시덤불을 헤치며 구조물 쪽으로 서둘러 다가갔다.
구조물의 형태는 단순했고, 완전히 초목에 뒤덮여 있었다. 굵은 덩굴이 부서진 돌을 휘감고 있었는데, 아마 구조물을 지탱해 주는 유일한 지지대 역할을 하는 것 같았다. 덩굴은 마치 이 장소가 구조물을 집어삼켜 가루로 만들어버리기라도 하려는 듯 비정상적으로 무성하게 자라있었다.
생존자들은 각자 흩어져 식물로 뒤덮인 정육면체 석조물의 내부와 주변을 살폈다. 이사드가 구조물 앞에 서자 알 수 없는 오묘한 감정이 북받쳐 오르더니 목이 메어왔다. 구조물의 표면을 뒤덮은 덩굴을 떼어내자 거기에 적힌 글자가 보였다. 이는 이사드가 어릴 적부터 평생을 알고 있던 언어로 쓰여 있었다.
"이건..." 그녀는 말라붙은 혀로 애써 말을 내뱉었다. "녹스토라잖아..."
이사드는 속이 울렁거렸다. 그녀의 원정대는 이 땅을 밟은 최초의 녹서스인들이 아니었다. 이전에도 이곳에 온 다른 녹서스인들이 있었고, 그녀가 지금껏 지나온 여정과 이 전초 기지의 상태로 보아 그들이 맞이한 운명은 분명했다. 그리고 그녀의 운명 또한 분명했다.
그녀가 이곳에 보내진 건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
이사드는 그토록 원했던 명령을 받고 세상의 끝, 한번 들어가면 다신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온 것이다. 그녀는 위업을 남기기 위해 전력을 쏟아부었다.
하지만 그녀는 토미리가의 이름이 역사에서 지워질지도 모를 벼랑 끝에 서 있었다. 숨 막히는 이 척박한 땅에서.
버려진 전초 기지에서 그들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사드는 생존자들을 이끌고 무성히 자란 덤불을 헤쳐 새로운 길을 만들며 다시 정글로 향했다. 마음이 초조해서였는지 헤쳐놓은 식물 뿌리와 덩굴이 마치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 같았다.
그들이 아르덴티우스호를 발견한 건 거의 우연이었다. 그들의 눈앞에 뱃머리가 나타났다.
배는 초목에 완전히 뒤덮여 있었고, 심지어는 주변의 작은 만에도 식물이 자라나고 있었다. 마치 정글에서 배가 생겨난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이사드의 눈에 마치 부러진 기둥처럼 갑판 위로 무언가 삐져나와 있는 것이 보였다.
그녀의 피가 차가워졌다.
선원들이었다. 배와 마찬가지로 그들도 초목에 집어 삼켜진 것이다. 그들은 모두 덩굴에 뒤덮인 동상처럼 제자리에 서 있었다.
"정글..." 그녀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정글에 갇힌 거야."
나머지 병사들은 이 광경을 보고 공황 상태에 빠지기 시작했다. "이제 어떻게 합니까?" 무장병 스탐이 소리쳤다. "뭘 어떻게 해야 하냐고요!"
"강으로 가자." 이사드가 웅얼거리듯 말했다. "강둑으로 가는 길을 찾은 다음 삼각주로 돌아가는 거야."
"여기서 걸어 나갈 순 없습니다. 다들 어떻게 됐는지 눈으로 확인했잖습니까, 사령관님. 정글은—"
"정글, 정글, 정글!" 그녀가 쏘아붙이듯 말했다. "그냥 나무와 덩굴, 곤충과 짐승이 있는 곳일 뿐이다. 그리고 넌 녹서스의 병사다. 여기서 널 쓰러뜨릴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그렇게 말했지만 솔직히 그녀 자신도 확신이 서지 않았다. 이곳은 다른 곳과는 무언가 달랐다. 이곳엔 무언가 어둡고 불가능할 것만 같은 것이 존재했다. 제국의 힘으로도 길들일 수 없는 무언가가.
하지만 절망에 무릎 꿇을 순 없었다.
"여기서 혼자 아무도 모르게 죽고 싶다면 그렇게 해." 그녀는 마지막 남은 힘을 짜냈다. "난 그런 운명을 받아들이지 않을 테니까. 따라올 힘이 남은 사람은 따라와도 좋다. 이게 이사드 토미리의 마지막이 될 순 없어."
배에서 나는 꼬르륵 소리와 함께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가족 생각에 소년은 강둑에 쭈그려 앉으며 낚싯줄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그러자 곧 낚싯줄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소년은 기쁨의 환호성을 내지르며 물고기를 낚았다. 꿈틀거리는 물고기가 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어떤 형체가 물에 뜬 채 소년에게 다가오고 있었지만, 노의 길이만큼 가까이 다가오기 전까지는 눈치챌 수 없었다.
물체가 더 가까이 다가오자 소년은 바구니 속의 물고기는 잊은 채 얼굴을 찌푸렸다. 무른 강바닥으로 걸어간 소년은 그 물체를 끌어당겨 강둑으로 가져왔다. 유목은 마을에서 유용하게 쓰였고, 돈을 받고 팔 수도 있었다. 물론 집으로 가져갈 수만 있다면 말이다.
그런데 그것은 유목이 아니었다. 덩굴과 이끼 사이로 사람의 형체가 보이자 깜짝 놀란 소년은 숨이 턱 막혔다.
여자인지 남자인지는 분간할 수 없었지만, 죽은 것은 분명했다. 소년은 그 모습이 마을에서 매해 조상들을 위한 축제를 벌일 때 본 미라 같다고 생각했다. 그는 검은빛이 감도는 낡고 부서진 갑옷을 입고 있었다. 갑옷의 끄트머리는 빛바랜 붉은색을 띠고 있었으며 녹슨 문양으로 장식되어 있었지만, 소년은 그 의미를 알지 못했다.
창백하고 쭈글쭈글한 손에는 무언가가 들려있었다. 소년은 간신히 그 물건을 빼냈다.
작은 책이었다. 책은 흠뻑 젖은 낡은 가죽 안에 단단히 싸여 있었다.
소년이 책장을 넘기려는 순간 물에 떠 있던 형체에서 푸른 빛의 녹색 덩굴이 스르륵 빠져나왔다. 이어서 반짝거리는 포자 같은 것이 뿜어져 나오자 소년은 콜록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소년은 책을 쥐고 내달렸다. 잡은 물고기는 까맣게 잊은 채, 목 뒤를 벅벅 긁으며 집으로 도망쳤다.
니코 단편소설: 칼두가 전초 기지의 괴물
https://universe.leagueoflegends.com/ko_KR/story/neeko-color-story/
니코는 인간의 모습에 익숙했다. 인간은 양말을 신는 등 특이한 면이 있기는 했지만, 니코는 인간을 그렇게까지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칼두가 전초 기지의 사건을 겪기 전까지는.
그 흉측한 기지는 '녹서스인'이라고 불리는 인간 부족이 정글 외곽 지대 근처에 있는 절벽을 깎아 만든 것이었다. 짜증스럽지만 익숙하다는 듯 일과를 수행하는 모습을 통해 그들이 한동안 이 전초 기지에서 상주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니코는 궁금했다. 저들은 우호적인 인간일까? 치즈 빵을 즐겨 먹을까? 다른 그 무엇보다도 이 두 가지가 가장 궁금했던 니코는 직접 그 답을 확인하기로 했다.
니코는 밤을 틈타 그림자 속을 살금살금 드나들며 기지 입구까지 도달했다. 경비병은 한 명뿐이었다. 이 정도는 식은 죽 먹기였다. 니코는 변신을 좋아했으니까! 다른 존재의 모습을 취한다는 건 그 대상의 감정과 최근의 기억들이 복잡하게 얽힌 '쇼마'를 공유하는 것을 의미했다.
니코는 자신의 쇼마를 멀리 뻗어 경비병의 기운을 더듬었다. 니코의 정신이 경비병의 정신에 닿자 마음속에 이름 하나가 떠올랐다. 이와이. 사막 너머에서 온 자였다. 그다음에는 맛을 지닌 색깔이 떠올랐다. 돌아갈 수 없는 고향에 대한 씁쓸한 주황색이 이와이의 마음을 물들였고, 주둔지에 대한 원성은 짭짤한 푸른색으로 느껴졌다. '전략적 가치가 없는 후미진 전초 기지지만, 사령관님에게 말해 봤자 바뀌는 건 없겠지.' 이렇게 생각하는 이와이라는 인간은 짙은 피부와 아름다운 타원형 눈을 지니고 있었다. 그녀는 강했지만, 일반 병사라는 이유로 대부분의 이들에게 무시당했다. 흥미를 느낀 니코는 본래의 카멜레온 같은 외모에서 이와이의 모습으로 탈피했다.
니코의 몸이 변하며 피부가 소용돌이쳤다.변신하는 동안 니코는 간지러웠지만, 이와이는 어지러움을 느꼈다. 완벽히 정체를 숨긴 니코는 이와이가 혼미한 사이에 슬쩍 입구를 통과해 조용한 전초 기지의 통로로 들어갔다.
"이와이!"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네 자리로 돌아가!" 흉갑 아래로 뱃살이 튀어나온 뚱뚱한 남자는 화들짝 놀란 것처럼 보였다. 그의 팔에는 구운 타파 뿌리 몇 개와 노릇노릇한 빵 두 덩이가 안겨 있었다.
"소리가 들렸습니다." 니코는 최대한 이와이의 목소리를 흉내 냈다.
"망할 털꼬리들이겠지. 잡아서 털꼬리 파이를 해 먹어야겠군."
"털꼬리가 아닙니다!" 니코는 그 신기하고 재미있는 작은 생물을 먹고 싶지 않았다.
"그럼 침입자가 있다는 말인가?" 남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니코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 그래서 어깨를 으쓱하고 그렇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니코는 이 동작이 곤란한 상황을 초래할 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야인들이군. 정찰대일 수도 있겠어. 여기서 뭐 하는 거야? 경보를 울려!"
"그게… 어디에 있죠?"
"정신 나갔나, 이와이? 내가 하지. 이번 일이 끝나면 군의관한테 가 보라고."
뚱뚱한 남자는 간식을 주머니에 쑤셔 넣으며 황급히 자리를 떴다. 니코는 그가 사라지기 전에 자신의 정신을 그의 정신과 섞어 이와이의 모습에서 그의 모습으로 탈피했다. 이자의 이름은… '유버스'?
"유버스라니!" 유버스의 모습을 한 니코가 크게 외쳤다. 재미있는 이름이었다. 전쟁의 최전방에 있는 것을 싫어했던 유버스는 조용한 칼두가에 배치된 것이 기꺼웠다. 그의 힘은 제국의 힘에 상응했다. 그는 야인들이 공격해 온다는 생각에 고무 맛 나는 잿빛 노란색으로 물들어 두려워하고 있었다. 니코는 이 남자가 마음에 들었지만, 남성적인 쇼마의 느낌은 별로였다. 너무… 니코 자신과는 달랐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식품 저장실을 턴 후 다른 병사와 마주쳐 당황한 유버스의 감정을 니코가 느꼈다는 사실이었다. 음식이 근처에 있었다.
니코는 문으로 가득한 복도를 따라 내려갔다. 그 문 어딘가에 식품 저장실이 있었다. 그때 바깥 연병장에서 소동이 벌어졌다. 큰 고함이 들렸다. 니코는 가장 가까운 창문으로 달려가 밖을 내다봤다. 진짜 유버스가 진짜 이와이에게 소리치고 있었다. 이런.
부우우우웅! 부우우우우우웅! 아주 시끄럽게 울리는 경보 소리에 유버스의 모습을 한 니코가 움찔했다.
복도에 있는 문이 전부 쾅 하고 열렸다. 옷도 제대로 입지 못한 녹서스인 여럿이 잠을 깨기 위해 눈을 깜빡이며 뛰쳐나왔다. 니코는 그 인파를 피하지 못하고 휩쓸려 식품 저장실에서 멀어졌다. 유버스의 모습을 한 니코는 어느새 무장한 병사 수십 명과 함께 연병장으로 밀려 나와 있었다.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습니다!" 이와이는 짜증스럽고 반항적인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전 밤새도록 보초를 서고 있었다고요!"
"아까 병영에 있었잖아." 두 병사를 옆에 대동한 유버스가 이와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근무지 이탈이다. 이 자식을 가둬."
그때 일이 터졌다. 유버스가 유버스의 모습을 한 니코를 본 것이다.
유버스와 다른 병사들이 밤이 늦어 헛것을 본 것인지 아닌지 파악하기도 전에 니코는 또 다른 사람이 되어 유유히 사라졌다.
이번에는 세다라는 이름의 전사였다. 그녀는 잔인하기 짝이 없는 살인 병기였다! 매콤한 분홍빛이 느껴졌다! 세다는 신발을 신는 것마저 깜빡했을 정도로 재빨리 연병장에 뛰어나왔다. 하지만 니코처럼 맨발을 좋아하는 세다는 개의치 않았다. 맨발은 세다에게 태양이 이글거리는 고향을 떠올리게 했다. 활기차고 조용한 그곳을…
니코가 세다의 모습에 만족한 바로 그 순간, 진짜 세다가 달려들었다.
두 명의 세다가 혼란에 빠진 병사들 사이에서 서로 싸우고 잡아당기며 씨름했다. 소동이 가라앉자 한 명의 세다만이 남아 있었다. 물론 그건 진짜 세다였지만, 유버스는 세다를 사슬로 묶으라고 지시했다. 세다가 유버스도 두 명이었다는 사실을 지적하자 유버스 역시 사슬에 묶였다. 그다음은 이와이였다.
한동안 이런 상황이 계속됐다. 사슬이 채워지고 풀리고를 반복했다. 아무도 누가 누구인지, 누가 누가 아닌지, 사실 다른 사람인데 아니라고 거짓말하고 있는 것이 누구인지 확신하지 못했다. 심지어 전초 기지의 사령관조차 이 소동의 원인을 파악하지 못한 것 같았다. 게다가 니코는 한 번도 사령관의 모습으로 변하지 않았다! 병사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되자 의심은 더욱 커졌다. 사령관이 은밀히 어떤 괴물을 숨기고 있던 게 아닐까?
니코는 모두의 모습으로 변하면서 사령관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 사령관은 너무 비밀스럽고 우유부단했다. 그는 중요한 전투에서 패배하는 바람에 이와이가 말하는 소위 '전략적 가치가 없는 후미진 전초 기지'로 좌천되었다. 모두가 사령관에게 달려들었고, 사령관은 첫 번째 희생양이 되었다.
그때부터 상황은 더욱 난장판이 되었다. 병사들을 소리 지르고 싸우며 서로를 비난했다. 어떤 병사들은 영혼을 먹는 악마가 모두를 홀린 것이라 믿었다. 한 고참 병사는 덩굴을 이용해 사람들을 텅 빈 껍데기로 만들어 버리는 정글의 끔찍한 괴식물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훈련 중 있었던 사소한 일에 관한 추궁과 비난 '배신자'라고 외치는 소리가 뒤섞인 가운데, 니코가 병사들을 진정시키려고 나섰다.
"만약에 괴물이 아니라면?" 톰시라는 이름의 요리사로 변한 니코가 말했다. "길을 잃어 살짝 겁먹은 착한 누군가가 그저 친구를 사귀고 치즈 빵을 먹고 싶은 게 아닐까? 응?"
그 순간 칼두가 전초 기지에 있는 모든 병사는 이 자가 그 괴물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검이 뽑히고 엄청난 소동이 벌어졌다. 동이 틀 무렵에는 단 네 명의 병사만이 살아남아 있었다. 그들은 푹 꺼진 눈으로 사령관의 시체와 서로를 바라보았다. 니코는 식품 저장실에서 숨어 그들을 지켜봤다.
"사령관님은 우리가 기지를 떠나지 않길 원했지." 세다가 말했다. 세다는 죽은 사령관 옆에 무릎을 꿇고 녹서스인의 방식으로 그의 명복을 빌었다. "우리는 추방되거나 사형당하고 말 거야."
잠시 흉흉하고 사나운 바람이 지나가듯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게 근처에는 타파 꽃이 만발해 있었다.
유버스가 몸을 똑바로 일으켰다. "사령부에 박쥐로 이렇게 전언을 보내는 거야. '야인들이 칼두가를 습격했다. 살아남지 못하겠지만 녹서스의 영광을 위해 죽겠다.' 그리고 기지를 떠나는 거지. 시체들은 그대로 두고. 세다, 너는 북쪽으로 가라. 거넥은 동쪽, 이와이는 서쪽. 나는 남쪽으로 간다. 길에서 서로를 마주친다면 한쪽이 죽을 때까지 싸우는 거야. 너희 중 하나가—"
이와이가 경계하는 눈으로 유버스를 쏘아보았다. "아니면 당신이..."
"변장한 괴물일 테니."
병사들은 한 시간 후에 떠났다. 그들은 서로의 정체를 의심한 채 버려진 기지나 서로를 돌아보지 않고 각자의 길을 갔다.
'인간은 참 이상한 생물이야.' 니코는 생각했다.
니달리 배경 이야기 업데이트
https://universe.leagueoflegends.com/ko_KR/story/champion/nidalee/
수많은 산맥과 초원을 지나 거친 대사막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슈리마의 동부, 그곳에는 거대한 정글이 자리 잡고 있다. 수수께끼로 뒤덮인 이곳은 신비로운 야수들과 온갖 생명의 힘이 가득한 밀림이자, 그 아름다움의 이면에 죽음과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곳이다.
어쩌다가 니달리가 정글 한가운데에 홀로 남게 된 것인지 아무도 알 수 없다. 누더기를 걸친 어린아이가 잎이 무성한 땅 위에 버려져 있었고, 아이의 울음소리는 나무 틈 사이로 울려 퍼졌다.
쿠거 무리가 이를 놓칠 리 없었다.
새끼들과 함께 움직이던 어미 쿠거 한 마리가 니달리에게 다가왔다. 어미 쿠거는 아이에게서 어딘가 익숙한 냄새를 맡았고, 살려둘 가치가 있다고 여겼다. 어미는 주저 없이 니달리의 등을 물고는 질질 끌어다가 자신들이 지내는 동굴에 데려다 놓았다.
그렇게 어린 니달리는 쿠거 가족의 일원이 됐다. 인간은 물론 인간 사회와의 접촉은 일절 없는 환경 속에서, 새로운 형제자매들과 함께 뒹굴고 놀며 시간을 보냈다. 쿠거 무리는 니달리를 한 마리의 야수로 키웠고 시간이 지나자 그녀는 어엿한 사냥꾼으로 성장했다. 쿠거들은 이빨과 발톱을 무기로 사용했지만, 니달리는 주변 환경에서 쓸만한 것들을 찾아 자기 것으로 만들어나가야 했다. 니달리는 꿀열매로 상처를 치료하거나 밤의 어둠을 밝혀주는 신비한 꽃을 발견하기도 했고, 폭발성 씨앗으로 어스름 늑대 무리를 날려 버리기도 했다.
간혹 니달리는 자기 뜻대로 몸을 통제할 수 없었다. 니달리의 손과 발은 아무런 예고도 없이 인간과 야수의 형태를 오고 갔다. 열이 오른 탓에 정신을 잃고 동굴 속에서 몸져누워 있는 때도 많았다. 그럴 때면 흐릿한 윤곽의 두 낯선 인물이 니달리를 찾아와 속삭이곤 했다. 목소리가 선명하진 않았지만, 포근했다. 그들이 니달리에게 따뜻한 안정감을 준 건 사실이지만, 쿠거는 니달리에게 외부인을 늘 경계해야 한다고 일렀다.
거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여름비가 한창 쏟아질 무렵에 니달리는 처음으로 킬라쉬족을 만나게 됐다. 킬라쉬족은 바스타야의 사냥꾼 부족으로, 자신들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 사시사철 진귀한 사냥감과 전리품을 노리고 다니는 무리였다. 어미 쿠거는 킬라쉬족을 몰아내려고 했지만, 결국 이들의 칼날과 창에 상처를 입고 말았다.
킬라쉬족이 어미 쿠거의 숨통을 끊으려 하는 순간, 니달리가 덤불에서 뛰쳐나와 분노와 비탄이 섞인 괴성을 퍼부었다. 그 순간 니달리는 자신이 어딘가 달라졌음을 직감했다. 내면에서 쿠거의 혼을 느낄 수 있었고, 육체도 예전의 모습이 아니었다. 야수로 변한 니달리는 가장 가까이 있던 킬라쉬족 사냥꾼에게 달려들어 날카로운 발톱으로 쓰러뜨린 뒤 다시 인간의 모습으로 변해 창을 낚아챘다. 다른 킬라쉬족의 사냥꾼들이 이 광경을 보고 괴성을 질러댔고, 놀랍게도 니달리는 이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어느 정도 알아들을 수 있었다.
킬라쉬족은 그들의 조상인 바스타야샤이레이의 이름을 들먹이며 니달리에게 온갖 저주와 악담을 퍼부었고, 결국 전리품 하나 얻지 못한 채로 물러나야 했다.
니달리는 창을 내팽개치고 죽어가는 어미 쿠거를 힘껏 끌어안았다. 니달리의 형제자매들도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어미 쿠거가 세상을 떠나자, 쿠거 무리는 니달리를 새로운 우두머리로 추대했다. 그날 이후 니달리는 굳게 맹세했다. 자신을 받아준 야생을 외부의 약탈자들로부터 기필코 지켜낼 것을.
시간이 지나자 니달리는 자신의 힘을 제대로 다룰 수 있게 됐고, 인간과 야수의 형상을 자유롭게 취할 수 있게 됐다. 니달리는 자신과 같은 부류의 존재를 찾고자 하는 열망이 있었고, 이 열망이 정처 없이 떠돌던 카멜레온 니코와의 연으로 이어지게 됐다. 둘은 한동안 각별한 사이로 지냈다. 니달리는 호기심 많은 니코에게 아낌없이 조언을 해주었고, 함께 정글 속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어느 날 니코는 자신의 운명을 따라 슈리마의 해안 너머로 홀로 떠났다.
이곳은 오늘날까지도 야생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한 유일한 정글이자, 니달리 조차 알 수 없는 신비로운 비밀이 가득한 세계이다. 아직도 니달리는 혼자 조용히 생각에 잠기곤 한다. 자신의 출생, 킬라쉬족과의 만남, 그리고 이 모든 것의 진실에 대해서 말이다.
니달리 단편소설: 인간의 피
https://universe.leagueoflegends.com/ko_KR/story/nidalee-color-story/
시끄러운 총성. 기름과 연기, 화약의 악취.
이 소리와 냄새는 숲에서 날 만한 것이 아니었다.
니달리는 창을 들고 소리가 난 곳을 향해 달려갔다. 그녀는 매캐한 냄새를 따라 나무줄기와 빽빽한 덤불이 미로처럼 얽힌 곳을 지나갔다.
머지않아 니달리는 익숙한 장소에 도착했다. 개울 기슭에 있는 자그마한 공터였다. 생명이 넘쳐 나는 이 조용한 공간을 얕은 개울이 빠른 속도로 흘러 가로질렀다. 새끼 짐승도 어설픈 발짓으로 물고기를 잡을 수 있을 만큼 물고기가 풍부한 곳이었다. 잔잔한 대기에 무언가, 혹은 누군가가 고통스럽게 울부짖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니달리는 조심스레 창을 숨기고 개울가에 있는 두꺼운 나무 뒤에 자리를 잡았다. 개울 건너편에 파충류의 모습을 한 바스타야 남성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는 어깨를 움켜잡고 고통에 신음했지만, 그의 두 눈은 분노로 타올랐다. 니달리는 그의 긴 꼬리가 덫에 걸린 것을 보았다. 거대한 금속 톱니가 비늘로 뒤덮인 그의 피부에 박힌 상태였다.
인간 하나가 길고 괴상한 무기를 든 채 그에게 다가갔다. 니달리는 금속을 감싸고 있는 반질반질한 나무 막대기 같은 무기를 바라보았다. 예전에도 본 적이 있는 것이었다. 저 물건은 표적을 손쉽게 관통하는 치명적인 씨앗을 발사했다. 니달리의 눈으로 좇을 수 없을 만큼 빠른 씨앗이었다.
니달리는 일부러 낙엽을 밟아 으스러뜨리며 나무 뒤에서 나왔다. 인간 남자는 다친 바스타야에게 무기를 겨눈 채 니달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니달리의 창을 보지 못했다.
"이런, 이런. 이게 뭐야?" 인간은 굶주린 눈으로 니달리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길을 잃었나, 아가씨?"
니달리는 이런 자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인간들은 니달리의 모습에 쉽게 경계를 풀었다. 그들의 눈에는 니달리의 부드러운 모습만 비쳤다. 니달리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고 자신과 인간 사이의 거리를 재며 창을 바로 쥐었다. 니달리의 시선이 그의 손에 들린 무기에 머물렀다.
니달리의 침묵을 공포로 이해한 그는 니달리를 향해 능글맞게 웃었다. "이런 건 처음 보나? 가까이 와서 봐. 해치지 않을 테니까." 그가 구슬렸다. 그는 사냥감에게서 몸을 돌려 무기를 내밀었다.
그가 바스타야에게 겨눈 무기를 거두자마자 니달리가 나무 뒤에서 튀어나왔다. 니달리는 남자의 몸통을 향해 창을 던진 후 맹렬한 야생의 마법에 휩싸인 채 개울을 가로질렀다. 순식간에 니달리의 모습이 변했다. 날카롭고 단단한 발톱이 생기고, 밝은 황갈색 털이 돋았으며, 호리호리한 맹수의 모습으로 변했다.
인간은 너무 느렸다. 그는 위팔에 창을 맞자 뒤로 넘어졌다. 니달리는 유연한 쿠거의 몸으로 그의 몸 위에 착지했다. 날카로운 발톱이 그의 얇은 옷을 파고들었다. 니달리가 앞발로 방금 생긴 상처를 꾹 누르자 고통스러운 비명이 울려 퍼졌다.
쿠거는 몸을 숙여 입을 크게 벌리고 날카로운 이빨을 그의 목에 갖다 댔다. 죽지는 않을 정도로 목을 살며시 물자 피가 흘러나왔고 그가 비명을 질렀다. 잠시 후 그녀는 물었던 목을 놓고 붉게 물든 이빨을 드러내며 그의 눈앞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또 다른 마법의 소용돌이가 니달리를 휩쌌다. 니달리는 다시 여자의 모습으로 돌아왔지만, 날카로운 이빨은 변함없이 위협적이었다. 니달리는 몸을 숙이고 밝은 에메랄드빛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떠나지 않으면 죽는다. 알았나?"
니달리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녀는 인간의 옷에서 천 조각을 찢어 다친 바스타야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의 꼬리에 걸려 있는 함정을 순식간에 해제했다. 그는 함정에서 풀려난 순간 인간에게 달려들었다.
니달리는 바스타야의 팔을 잡아 제지했다. 공포에 얼어붙어 있던 인간은 도망갈 기회를 엿보다 황급히 기어서 달아났다.
파충류의 모습을 한 바스타야는 니달리의 손을 뿌리치고 씩씩거리며 니달리가 모르는 언어로 욕을 퍼부었다. 그러고 나서 익숙한 언어로 따졌다. "왜 놔 줬지?"
니달리는 인간이 도망친 방향에 떨어져 있는 선명하고 붉은 핏자국을 가리켰다. "놈을 따라갈 거야. 다른 인간들이 있다면 놈이 우리를 그곳으로 안내하겠지. 약속을 어기면 다 죽는 거야."
바스타야는 썩 만족스럽진 않았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니달리는 개울 옆에 무릎을 꿇고 인간의 옷에서 찢은 천을 씻었다.
"인간이라니..." 그는 이상한 혀 짧은소리로 말했다. 입이 아주 큰 그는 말하는 사이사이 끝이 갈라진 혀를 날름거렸다.
니달리는 축축하게 젖은 깨끗한 천을 그의 어깨에 감았다. "그래."
"너는 인간이 아닌가?"
"그래. 나는 당신과 같아."
"너 같은 바스타야는 없어. 넌 인간이야."
니달리가 그의 어깨에 메인 천을 꽉 당기자 그가 고통에 쉭쉭 거리는 소리를 냈다. 니달리는 이로 매듭을 단단히 매며 웃음을 감추었다.
"내 이름은 니달리야. 그쪽은?"
"쿠울칸."
"쿠울칸. 오늘 밤 우리 가족은 사냥에 나설 거야. 우리와 함께하자."
바스타야는 팔을 움직여 붕대가 잘 감겼는지 확인했다. 꽉 매였지만 움직임에 방해가 되지는 않았다. 그는 팔짱을 끼고 앞에 서 있는 니달리를 올려다봤다.
쿠울칸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닥불 옆에 앉아 있는 퍼시의 얼굴은 새빨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아드레날린과 맥주의 영향도 있었지만, 가장 큰 원인은 수치스러움 때문이었다. 그가 야생의 여자에 대해 말하자 세 동료는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한 명이 기타를 들고 모닥불 주변을 돌며 '정글의 여왕'에게 바치는 외설적인 노래를 부르자 나머지 둘이 시끄럽게 웃으며 춤을 췄다.
"조용히 좀 해, 이 멍청이들아." 그의 말에 더 큰 웃음소리가 터졌다. "그 여자가 듣겠어."
맥주를 과하게 마신 퍼시는 조롱에 진저리를 치며 소변을 보기 위해 동료 사냥꾼들 틈에서 살짝 빠져나왔다. 상처는 여전히 격하게 아팠고, 아무리 술을 마셔도 그녀가 목을 물었을 때의 감각이 잊히지 않았다.
벨트를 다시 채운 그는 노래와 웃음소리가 멈췄다는 것을 깨달았다. 바람이 멎었다. 낙엽이 바스락거리거나 가지가 흔들리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낮게 타오르는 모닥불의 희미한 빛을 제외하면 야영지는 완전한 어둠에 둘러싸여 있었다. 야영지 저 너머에 있는 그림자 속에서 무엇인가 번득였다. 퍼시는 두 눈을 비비고 가느다란 눈으로 어둠 속을 응시했다.
갑자기 덤불이 일제히 들썩이며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사방의 초목 잎이 흔들렸다. 어둠 속에서 수없이 많은 눈이 나타나더니 으르렁거리는 소리와 고양잇과 맹수 특유의 쉭쉭 거리는 소리가 뒤섞여 그의 귀를 먹먹하게 했다.
퍼시는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에메랄드빛 눈을 알아봤다. 그 눈에는 이제 인간성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았다. 두 눈이 깜빡이더니 사라졌다. 그의 귓가에서 한 목소리가 으르렁거렸다.
"경고했을 텐데."
그가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날카로운 이빨이 목에 닿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피를 흘려도 놓아 주지 않았다.
렝가 배경 이야기 업데이트
https://universe.leagueoflegends.com/ko_KR/story/champion/rengar/
포악한 기질의 렝가는 바스타야 종족으로, 난폭하고 사나운 생명체를 추적하고 처치하는 순간의 짜릿한 전율을 삶의 낙으로 여기는 전리품 수집가다. 그는 강하고 무시무시한 괴물을 사냥하기 위해 온 세상을 샅샅이 뒤진다. 그중에서도 그가 가장 찾고자 하는 사냥감은 그의 한쪽 눈을 앗아간 공허의 약탈자 카직스다. 렝가가 사냥을 하는 이유는 굶주린 배를 채우기 위함도, 영광을 누리기 위함도 아니다. 그는 사냥 그 자체의 즐거움을 만끽하기 위해 오늘도 먹잇감을 찾아 나선다.
렝가는 바스타야 중에서도 슈리마의 킬라쉬 부족 출신이다. 킬라쉬는 사냥을 숭배하는 부족이었기 때문에 뛰어난 사냥꾼들은 부족 내에서 큰 영예를 누렸다. 렝가는 킬라쉬의 부족장 폰자프의 자식으로 태어났으나 형제들 중 가장 약하고 몸집이 작았다. 눈에 띌 만큼 왜소한 렝가가 사냥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할 거라고 판단한 폰자프는 렝가를 자식으로 인정하지 않고 굶어 죽도록 내버려 두었다.
결국 어린 렝가는 자신의 존재가 아버지를 실망시켰다는 수치심에 부족을 떠났다. 몇 주 동안 애벌레와 풀만 먹으며 겨우 목숨을 이어가던 어느 날, 렝가는 전설적인 사냥꾼 마콘과 마주쳤다. 인간인 마콘은 즉시 렝가를 해치우려다가 기묘한 생명체의 초라한 행색에 안쓰러움을 느껴 칼을 거두었다. 굶주리고 연약한 바스타야에게 굳이 마콘의 칼을 쓸 필요는 없어 보였다.
렝가는 수개월 동안 마콘을 따라다니며 그가 사냥하고 남긴 시체로 배를 채웠다. 렝가는 언젠가는 반드시 자신의 부족이 있는 마을로 다시 돌아가리라 마음먹었기 때문에 마콘이 사냥하는 모습을 신중하게 관찰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자 마콘은 한심한 킬라쉬가 그를 졸졸 따라다니는 게 귀찮아졌다. 그는 렝가의 목에 칼을 들이대고는 사냥꾼이 되는 유일한 방법은 사냥을 하는 것이라고 일러주었다. 마콘은 렝가에게 칼을 던져 준 뒤 그를 발로 차 협곡 아래로 떨어뜨렸다. 그곳에서 렝가는 생존을 위해 생애 최초의 사냥을 시작했다.
렝가는 끝없이 자신의 한계를 시험하며 수년 동안 혹독한 훈련을 계속했다. 그는 가장 강하고 난폭한 먹잇감을 찾기 위해 슈리마를 샅샅이 뒤졌다. 렝가는 자신의 몸이 다른 킬라쉬들만큼 커질 수는 없겠지만 그들보다 두 배는 더 사나운 사냥꾼이 되겠다고 결심했다. 시간이 갈수록 사냥에서 상처를 입는 횟수가 적어졌고, 전리품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렝가는 사냥한 모래매의 두개골을 닦아 윤을 내기도 하고, 자신이 죽인 비명괴물의 이빨로 머리를 장식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렝가는 이제는 진정한 사냥꾼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며 부족 마을로 돌아갔다.
그러나 폰자프는 렝가와 그의 전리품을 비웃었다. 그러고는 악명 높은 공허의 생명체인 카직스의 목을 가지고 돌아와야만 렝가를 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겠다고 선포했다.
부족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열망에 마음이 너무 앞섰던 렝가는 교활한 괴물이 먼저 공격을 하도록 틈을 주고 말았다. 공허의 생명체는 렝가의 한쪽 눈을 앗아갔다. 분노와 패배감에 사로잡힌 렝가는 폰자프를 찾아가 자신의 패배를 인정했다. 예상했던 대로 폰자프는 렝가를 호되게 꾸짖었다.
폰자프의 꾸지람을 듣고 있던 렝가는 문득 아버지의 막사를 장식하고 있는 전리품들이 모두 낡고 오래됐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부족의 추장인 폰자프는 아주 오랫동안 사냥에서 손을 떼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렝가에게 카직스를 추적하도록 명령한 것도 직접 그 괴물을 사냥하기가 너무 두려웠기 때문이었을 터였다.
렝가는 아버지의 말을 중간에 끊고 비겁하다고 소리쳤다. 킬라쉬족 대부분은 강건한 몸을 타고났고 안락한 집에서 생활하는 행운을 누렸다. 그러나 렝가는 태어나자마자 죽음에 직면했다. 사냥하는 법을 스스로 터득했고, 열심히 모은 전리품과 사냥 중에 생긴 상처를 통해 자신이 진정한 사냥꾼이 됐음을 증명해 보이려 했다. 눈의 상처 또한 그의 전리품이었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약점을 안고 태어났으나 결코 포기하지 않는 렝가의 의지를 증명해주는 진정한 전리품이었다.
렝가는 단숨에 늙은 부족장을 제압했다. 킬라쉬족의 용맹한 사냥꾼들이 렝가에게 불꽃장미 왕관을 씌워주며 렝가를 그들의 새로운 족장으로 추대했다.
그러나 렝가는 이제 더 이상 부족의 인정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가 원하는 것은 오직 사냥감을 추격할 때 솟구치는 아드레날린뿐이었다. 렝가는 폰자프에게서 어떠한 전리품도 수집하지 않았다. 기억할 만한 가치도 없는 사냥감이었기 때문이다. 렝가는 자신을 장님으로 만들려 했던 공허의 생명체를 찾아 반드시 처치하고 말겠다고 다짐하며 마을을 떠났다.
킬라쉬족에게 인정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그의 만족을 위해.
자이라 배경 이야기 업데이트
https://universe.leagueoflegends.com/ko_KR/story/champion/zyra/
자이라의 기억은 길고, 대지의 뿌리만큼 깊은 곳에서 흐른다. 창조의 열쇠를 손에 넣기 위해 필멸자 군대가 서로 싸웠던 룬 전쟁이 휘몰아쳤을 때 자이라의 종족은 그 역사가 길지 않았다.
쿠뭉구 남쪽 정글에 숨겨진, 슈리마 동부를 가로지르는 거대한 강줄기 사이 어딘가에 전설 속에 나오는 자이르의 정원이 자리했다. 원소 마법은 그곳의 흙을 이상하고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바꿔 놓았고, 주변을 헤매는 생물을 잡아먹는 흉포한 식육 생물을 탄생시켰다. 그것들은 필멸자들의 싸움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고, 그저 숲과 늪지대를 덩굴로 휘감는 것에 만족하며 번식하고 포식했다. 그것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모두가 자이라였다. 전쟁 중에도 양분은 풍족했다.
한 병사 무리가 지금은 잊힌 뭔가를 찾아 그 땅으로 나아갔다. 그들의 충성심은 세월이 흘러 사라진 지 오래였다. 야심 가득한 여자 마법사가 부대를 이끌었지만, 고향에서 멀리 떨어져 있던 그들은 그 저주받은 곳의 유독 가스와 포자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정원의 서식자들은 가시 박힌 덩굴손으로 그들을 무참히 공격했다. 전사들은 용맹하게 싸웠지만 오래 버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마법사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마법사는 힘을 모아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무성히 자란 가시투성이 덩굴들이 다가오던 그 순간, 룬 문자들이 대기를 불태우며 섬뜩한 빛을 내뿜었다.
바로 그때, 불꽃이 가스를 내뿜는 늪지대에 튀어 마법 폭발이 일어나자 그 주변 일대에 있는 모든 생명체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룬 전쟁 이후 흩어진 생존자들은 자이르의 정원에 어떤 운명이 닥쳤는지 알지 못했다.
수 세기가 흘렀다. 전투가 벌어졌던 땅은 생명체 하나 없이 텅 비어 있었지만… 그 아래 깊숙한 곳에서는 무엇인가 꿈틀거렸다. 시간이 흘러 그곳에서 분출된 힘은 낙진을 양분 삼아 뿌리내리고 응어리졌다. 새싹 꼬투리 하나가 괴이하게 고동치며 부풀더니 안에서 한 생명체가 뚫고 나왔다. 그 생명체는 숨을 가쁘게 쉬며 혼란스러워했다.
새로운 생명력과 생각으로 가득 찬 그것은 망가지고 변한 세상을 바라보았다. 비옥한 땅에서 미숙한 의식 속으로 끌어당겨진 그것의 마음에는 상충되는 기억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그것은 태양의 따스함과 비의 맛, 힘의 언어, 백여 명의 필멸자가 느낀 죽음의 고통을 기억해 낼 수 있었다.
그것, 아니 그녀는 자기 자신을 자이라라고 불렀다. 그 이유는 그녀도 알지 못했다.
탄생한 곳 너머에 펼쳐진 황무지로 나선 자이라는 그곳에서 마주친 생명체들과 자신이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필멸자들은 무시무시하고 기분 나쁜 존재였고, 그보다 더 영묘한 존재들은 변덕스럽거나 오만했다. 존재 자체만으로 모든 것을 파괴하며, 그 누구도 자신이 사는 땅을 존중하지 않는 것 같았다. 자이라의 마음에는 분노와 경멸이 차올랐다. 놀랍게도 자이라가 가는 길마다 새로운 생명이 솟아올랐다. 독 가시를 퍼붓고 엄청난 속도로 새로운 덩굴을 싹 틔우는 탐욕스러운 식물들은 자이라의 손길에 변화하고 진화했다.
뿌리를 내리지 않고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자이라와 그 위험한 후손들은 다른 생명체를 질식시켜 자신의 양분으로 삼는다. 지나간 자리에 항상 끔찍한 식물 군락을 남기는 자이라는 경작지와 마을을 파괴하고 자신에게 맞설 정도로 용감하거나 멍청한 전사들을 으스러뜨렸다.
슈리마의 강이 다시 흐르기 시작하자 강기슭에서는 이상한 식물 군락이 발견되었다. 이 군락은 계절이 흐를수록 서서히 서쪽으로 퍼졌다. 아무리 뽑거나 불태워 없애도 군락의 성장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