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난으로 계삭 되나 싶어서 눌러봤는데 진짜 되더라구요...
문체 몇몇 부분 수정해서 다시 올립니다
전작 링크입니다. 읽고 오시면 도움이 되실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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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 라스타칸이 얼라이언스에 의해 서거했다. 호드와 잔달라의 동맹을 끊기 위함이라 알려져 있지만, 로돈은 이해되지 않았다. 좀 더 평화적인 방법이 있지 않았을까. 전쟁이란 극단적이고 폭력적인 외교만이 최선이었을까. 그는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그 이후의 참상을 지켜보며 많은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장례식은 대족장 실바나스 윈드러너, 대부족장 바인 블러드후프, 이젠 여왕이 된 탈란지 공주의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다. 로돈은 수많은 조문객들 속에서 짧게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이어 밑의 계단쪽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 고개를 살며시 들고 아래쪽을 내려보았다. 그는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어...?"
혈기사단의 여군주 리아드린의 안내를 받으면서 오고 있는 이는, 아제로스를 위협하는 수많은 적들을 물리친 전설적인 용사이자 파멸의 인도자의 선택을 받은 대영주 팔렌 레이무스였다. 블러드 엘프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진 로돈이지만, 그에게만큼은 감히 존경을 표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인망이 높았다. 그가 지나가는 길의 양측에 있는 조문객들 대다수가 그를 알아보고 엄숙히 고개를 숙였다. 몇몇은 무릎까지 꿇고 두 손을 모으고 있었다.
'저 분이 어째서...?'
대영주 팔렌은 현재 호드를 탈퇴하고 빛의 성소에 거주하며, 양 진영간의 불화를 종식시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런 자가 얼라이언스에게 살해당한 호드 동맹국의 지도자의 장례식에 참여한다는 것 자체가 얼라이언스에게 큰 반발을 가져올 것이라는 걸 모를 리 없었다. 로돈은 뭔가 이유가 있을거라고만 추측할 뿐, 자세한 이유는 알 길이 없었다.
팔렌은 왕 라스타칸의 관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렸다. 이어 작은 빛 한 줄기가 내려오더니 라스타칸의 시신을 한번 감싸다 조심스럽게 흩어져갔다. 기도가 끝나자 탈란지는 팔렌의 손을 잡았다.
"대영주 님, 귀한 발걸음 해주셔서 영광입니다. 그리고 정말 감사드립니다."
"아닙니다. 공주님."
"대영주, 잠시 나 좀 보도록 하지."
로돈은 타이밍을 봐서 그에게 인사하려고 했지만 실바나스가 먼저 그를 가로챘다. 팔렌은 로돈을 미처 보지 못하고 실바나스에 이끌려갔다. 로돈은 그의 등 뒤에 차고 있는 거대한 파멸의 인도자를 바라보며 살짝 실망했지만 별 수 없다는 듯 장례식장을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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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로돈 씨. 꽤 자주 뵙는 것 같아요."
"아 그런가요? 하하!"
로돈은 멋쩍게 웃었다. 란사 그레이페더. 요즘 로돈이 부쩍 관심을 가지고 있는 높은산 출신의 타우렌이다. 명예결속단의 요원들이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면 그에 따른 보상과 보급품을 나눠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로돈 또한 칼림도어에서 활동한 경력 덕택에 잔달라에서도 마찬가지로 보급병의 임무를 맡고 있어 더욱 그녀와 자주 마주할 수 있었다. 로돈이 그녀에게 가지는 그녀는 단순히 호감부터 시작해서, 이제는 거의 밤잠을 제대로 못 이룰 정도까지 되었다. 물론 그녀의 심정은 알 수 없었지만.
"대단하시네요! 목록을 잠깐 살펴봤는데, 최근 한달 동안 로돈 씨가 임무 달성률이 제일 높으셔요. 이정도면 얼라이언스도 두렵지 않겠는걸요?"
"아닙니다, 마땅히 해야하는 일 아니겠습니까? 하하하..."
"자, 여기 이번 임무 보급품이예요.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아, 네 감사합니다."
란사는 보급품 상자를 양 손으로 들어서 그에게 건냈다. 로돈은 상자를 받다가 무심코 그녀의 손을 건드렸다.
"어맛!"
"어어!"
순간적으로 둘 사이에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로돈은 상자를 받고 재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크흠!"
로돈은 란사에게 살짝 곁눈질을 했다. 그녀도 쑥스러웠는지 로돈 쪽을 쉽게 쳐다보지 못하고 있었다. 로돈은 결심했다. 지금이 아니면 말할 수 없을 거라고. 이어 천근같은 입을 열었다.
"저기, 란사 씨?
"네?"
"혹시 시간 되시면..."
"로돈! 여기서 다 보는구만!"
누군가 그의 이름을 크게 외치면서 갑자기 그에게 어깨동무를 걸었다. 로돈은 순간 깜짝 놀라서 보급품 상자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어어... 대영주 님?"
팔렌이었다. 너무 친근하고 갑작스럽게 다가와서 로돈은 그를 보고 계속 어안이 벙벙했다.
"대영주... 팔렌 레이무스! 정말 대영주 님이신가요?"
란사는 팔렌을 알아보고는 얼굴꽃이 한껏 피어올랐다.
"저는 란사 그레이페더라고 합니다. 저번에 높은산에서 정말 감사했어요. 정말, 대영주 님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저흰 전부 드로그바들에게 몰살당했을거예요."
"아닙니다. 높은산 용사들의 용기가 아니었다면, 저 혼자서도 할 수 없을 일이었습니다."
란사는 팔렌의 손을 부여잡고 계속 감사하다는 말만 반복하고 있었다. 로돈은 계속 뚱한 표정을 지으면서 먼 곳만 바라보고 있었고 팔렌은 바닥에 떨어진 상자를 주워서 그에게 건넸다.
"거, 이 친구 참. 아직도 이렇게 칠칠치 못하면 안되지!"
"아 감사합니다..."
"근데, 두 분은 서로 아는 사이신가요?"
"아, 네. 제가 이 친구에게 신세를 좀 졌죠. 안 그런가?"
팔렌은 활짝 웃음 지으며 다시 로돈을 끌고 어깨동무를 했다. 로돈은 상당히 불편한 미소를 지었다.
"아하하, 아닙니다. 신세는 오히려 제가 더 많이 졌죠."
"오호호호, 두 분 다 재밌으시군요."
"그럼 전 이만, 이 친구랑 한 잔 하러 가봐야겠습니다. 만나서 정말 반가웠습니다."
"네 조심히 가세요. 저도 만나뵈서 정말 영광이었습니다."
"안쉬의 가호가 함께하길."
팔렌은 로돈을 거의 반강제적으로 이끌고 항구를 나왔다. 흥얼거리는 팔렌과 달리 로돈은 아까부터 계속 뚱한 표정만 짓고 있었다.
"전쟁 속에서 피는 사랑이라... 참 아름답고 애틋하지. 그만큼 비극적이기도 하고 말이야. 안 그런가?"
팔렌은 뒤를 흘깃 보았지만 로돈은 대답하지 않았고 그와 눈을 마주치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팔렌은 그에게 성큼성큼 다가가서 귓속말을 했다.
'뒤를 보게.'
그 말에 로돈은 살짝 고개를 돌렸다. 저 멀찍이 란사가 그 둘의 가는 모습을 쭉 지켜보고 있다가 고개를 돌린 로돈과 눈이 마주쳤다. 눈이 마주친 그녀는 그를 향해 살짝 윙크를 하자 순간 로돈의 얼굴이 새빨개져서 고개를 휙 돌렸다.
"어어어... 어어..."
당황스러워서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모르는 로돈 옆에 팔렌이 다시 어깨동무를 했다.
"전에 얘기했는지 모르겠지만, 난 죽은 자들에 대한 애도와 산 자들의 행복은 별개라고 생각한다네. 판단은 자네 몫이고."
"으으... 기억 납니다."
"그 때와 지금의 생각이 다르다 한들 난 자네를 비난할 생각은 없네. 앞으로도 그럴 것이고."
팔렌은 로돈의 어깨를 살며시 두드려주고는 앞장서서 걸어갔다.
"계속 얼굴 붉히면서 서 있을건가? 한 잔 하러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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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칼로. 다자알로를 중심으로 북동쪽에 자리잡은 시장길이다. 근처에 가까운 술집이 많은데 로돈은 왜 굳이 여기까지 왔는지 궁금해했다.
"대영주 님, 왜 여기로..."
"아, 아까 경비병들에게 물어봤는데 이 근처에서 파는 맥주가 괜찮다고 하더군."
"맥주 드실겁니까?"
"그래, 그렇게 빨리 취하고 싶지는 않아서 말이지."
팔렌과 로돈은 '술 취한 북장이'라는 곳에 발을 딛었다. 그리 많지 않은 손님들이 곳곳에 앉아있었다.
"어서오세요! 대충 자리 잡고 앉으시지요."
종업원으로 보이는 트롤이 큰 소리로 그들을 반겼다.
"맥주는 제일 좋은 거로 두 잔, 안주는 제일 빨리 나오는 걸로."
"잠시만 기다리세요!"
주문을 받은 종업원이 멀어져갔다. 맥주가 나올 동안 팔렌은 앉아서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수천년 가까이 이어져온 고대 문명의 흔적이라... 나름의 매력이 있군. 굉장히 원시적이지만."
"저, 대영주 님?"
"응?"
"그렇게 눈치주셔야겠습니까? 그냥 터놓고 말해도 된다고 했잖아요."
"후후후, 그렇게 티 났나?"
"이젠 지겨울 정도로요."
로돈과 팔렌은 대격변이 일어나고 아제로스 전체가 많이 혼란스러웠을 시기부터 서로 동고동락하며 지내왔다. 팔렌은 로돈의 선배이자 스승격인 역할을 하며 조언을 많이 해주었고 처음에 꺼려하던 로돈도 그에게는 점차 마음을 열며 돈독한 사이를 유지하게 되었다. 사이가 가깝다보니 각자 습관이나 주고받는 고유의 신호도 쉽게 파악할 정도까지 되었다.
"그래 맞아. 지금 심정이 좀 많이 복잡하다네."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건 취한 다음에 이야기하고 싶군."
"빨리 취하고 싶지 않다면서요?"
"이 친구야. 그거 말고 할 얘기가 없는 줄 아나?"
"그럼... 아까 대족장님하고 어떤 얘기를 나누셨습니까?"
"아, 그건..."
"술 나왔습니다. 맛있게 드세요!"
종업원이 제법 큰 잔에 맥주를 가득 담아왔다. 로돈과 팔렌은 잔을 들고 가볍게 부딪혀 건배한 다음 들이마셨다. 목구멍으로 시원한 맥주가 넘어가자 감탄이 절로 나왔다.
"크하, 좋구만."
팔렌은 잔을 반 정도 비우고 식탁에 내려놓았다.
"무슨 얘기 했는지는 뻔하지. 앞뒤 다 자르고 요약하자면, 다시 호드로 돌아오라고."
"아, 너무 뻔한 얘기군요."
"나 참, 난 어디까지나 호드를 위로하기 위해 온 게 아니라 내 오랜 벗인 리아드린의 간청으로 왔을 뿐인데 말이야."
"그래도 이젠 슬슬 적응 될 얘기 아닙니까?'
"그래, 이젠 좀 흔들릴까 말까 싶을 정도로 뻔한 얘기였지. 얼라이언스 놈들이 '그런 짓'까지 했는데도 계속 중립으로 남겠다는 건 그저 바보같은 고집으로밖에 안보인다고 하더군."
"'그런 짓'이라뇨? 제가 여기 있는 동안 밖의 소식은 제대로 듣지 못해서... 무슨 일 있었습니까?"
"흐으음..."
팔렌은 한 손으로는 잔을 매만지고 다른 한 손으로는 식탁을 톡톡 두들기며 딴청을 피웠다. 로돈은 한 숨을 푹 내쉬었다.
"하아, 알겠어요. 제가 살게요."
"그, 무슨 일이 있었냐면..."
"헌금 내느라고 사비도 뭣도 없을 양반이 술 마시자고 할때부터 알아봤어야..."
"하하하!"
갑자기 돌변하는 팔렌의 태도를 보고서 로돈은 질렸다는 듯이 잔을 들고 벌컥벌컥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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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도 알다시피, 빛의 성소는 빛의 길을 따르는 모든 성기사들에게 열려있는 곳이지. 호드나 얼라이언스를 따질 것 없이 말이야. 물론 처음에는 얼라이언스들에게만 열려있었다고는 하지만, 스컬지와 불타는 군단에 서로 힘을 합쳐 맞서면서 깨달았지. 우리가 함께 걷고 있는 빛의 길 앞에 진영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는 걸. 은빛 여명회를 시작으로 선대 대영주인 티리온 폴드링 경에 의해 창설된 은빛십자군, 마라아드의 고귀한 희생을 짊어진 보로스의 구원자, 나의 오랜 벗이자 조언자인 리아드린의 혈기사, 자네가 속해있는 아포니의 태양길잡이. 모두가 한 마음이었지. 지금 생각해봐도 그들이 나를 믿어주지 않았다면, 과연 지금의 내가 존재하고 있을지... 내가 대영주가 되었어도 아제로스를 위한다는 대의는 변하지 않았다네. 하지만 내 주변이 급격하게 달라지고 있었지.
각 진영의 많은 인재들이 성기사를 지망하며 찾아오지. 인간, 드워프, 드레나이, 타우렌, 블러드 엘프... 난 그들에게 성기사로써의 책임, 의무,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에 대해 조언해주는 역할을 맡고 있네. 그건 내가 중립으로 남아있기에 가능한 일이야. 만약 내가 호드에 계속 있었다면, 빛의 길 앞에 하나로 뭉쳐야 하는 신조에 모순이 생겨버리니까. 자랑거리는 아니지만 얼라이언스에서도 존경을 표하기도 한다네. 하지만 존경 뒤에는 경외심 또한 숨어있기 마련이고, 경외를 넘어서 질투와 시기로 변해 나에게 오기도 하지.
뭐, 새로운 인재들이 찾아오는 건 언제나 반가운 일이야. 그들이 어떤 삶을 살아왔고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있던 간에, 난 항상 모든 걸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다네. 그게 아무리 호전적이고 과격한 검은무쇠 드워프들일지라도. 그들은 나를 처음 마주할때부터 보는 눈빛이 그리 좋지 않았다네. 단지 그것뿐이었다면, 그렇게 크게 벌어질 사건도 아니었을테지. 하지만 도를 넘을거라는 예상은 불행히도 맞아떨어지고 말았다네.
세례를 마친 검은무쇠 드워프 둘이 있었지. 그들은 모두가 빠져나간 예배당의 한쪽에 모였고, 정말 우연찮게도 난 그들이 하는 험담을 듣고 있었어.
"호드라니! 얼라이언스는 부끄러운 줄 모르고 있군. 왜 저런 귀쟁이 따위한테 굽신거리고 있어야 하는거지?"
"언젠가 이 곳도 호드 놈들이 다 차지해버리겠지? 하, 그렇게 된다면 죽은 폴드링 경이 땅을 치고 통곡을 하겠군!"
"불만이 많은 것 같은데. 내 앞에서 하지 그러나?"
"억?"
그 둘은 내가 듣고 있었다는 걸 눈치채지 못해서 잠시 당황한 듯 했지만 오히려 당당하게 나왔지. 아무래도 자신들이 기선을 잡아야된다고 판단한 모양이야.
"당신이 지금은 중립을 표방하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표면적일 뿐이라는 걸 나는 알고 있소. 다른 이들은 다 속일지라도 우리는 절대로 못 속여!"
"증거라도 있나?"
"증거? 그런 걸 찾게 내버려 둘 동안 당신은 우릴 내쫒을 궁리나 하고 있겠지! 그걸 시작으로 얼라이언스 전체를 여기서 내쫒을거고 말이야. 안 그런가?"
"그렇고 말고. 혹시 몰라? 제이나 프라우드무어처럼 돌변해버릴지!"
"제이나 프라우드무어처럼이라..."
도를 넘는 발언에 순간 화를 낼 뻔했지만 애써 억눌렀지. 그리고 그 둘에게 가까이 다가갔다네.
"내가 프라우드무어 여군주... 아니, 프라우드무어 대제독처럼 변하게 된다면... 얼라이언스에서는 가로쉬 헬스크림이라도 나오게 된다는 말인가?"
"뭐, 뭐야?"
"나는 그녀를 잘 알고 있지. 달라란에서의 시작된 인연으로, 평화를 위한다는 신념으로 우린 이어졌으니까. 그렇기에 테라모어가 몰락했을때, 나는 누구보다 가로쉬에게 분노했고 누구보다 그녀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가 날 죽여야 한다면, 마땅히 내 목숨을 내놓을 수 있을 정도로. 그렇기에 난 단 한순간도 얼라이언스를 선택한 그녀를 원망한 적 없었고, 앞으로도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럼 자네들은? 마지막까지 평화를 위해 싸우겠다는 사람이 하나도 남지 않길 바라나? 가로쉬보다 더한 자가 나와서 진정 내가 다시 호드로 돌아가길 바라는건가? 다시 이 곳에 진정으로 빛을 따르는 자 없이, 그저 빛의 힘을 빌려 서로 싸우는 것 만이 진정 폴드링 경이 원하는 바라고 생각하나?"
"그, 그건..."
"나는 대영주 팔렌 레이무스다. 호드도, 얼라이언스도 아닌 오로지 빛만을 섬기지. 이런 내가 불만인가? 그럼 정당한 방법으로 파멸의 인도자의 선택을 받아라!"
나는 그들이 서 있는 바닥에 파멸의 인도자를 꺼내서 박아넣었지. 그러자 결국 그 둘은 아무런 반박조차 하지 못하고 주춤하다가 도망치듯 성소를 빠져나갔다네.
"쳇, 두고 보자고!"
그들이 완전히 떠나고서야 다리에 힘이 풀려버렸지. 그렇게 한참을 예배당 맨 뒤에 앉아있었다네. 이게 과연 최선이었을까? 그 생각밖에 들지 않더군.
단순한 해프닝으로 끝나지 않을거라고는 예상했지만, 정말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커져갔다네. 물론 상황은 감히 대영주를 모욕한 그 둘에 대한 비난으로 흘러갔지. 나는 그 둘에 대해서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다네. 단지 빛의 성소에 있는 시간보다 내 처소에 머무는 시간이 좀 더 많아졌을 뿐. 그리고 며칠 있다가, 찾아올 손님이 찾아왔지.
"대영주 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손님?"
"모이라 타우릿산 입니다."
"지금 안 계시다고 전해드려라."
"그... 안에 계시다고 먼저 말씀드려서..."
"아, 그럼 지금은 아무도 마주하고 싶은 심정이 아니라고 전해드려라."
"알겠습니다."
딱 봐도 어떤 의도로 날 찾아왔는지 뻔했지. 얼라이언스의 신입 성기사들이 대영주를 모욕한 것에 대해, 호드가 외교적으로 걸고 넘어뜨릴 명분이 만들어지기 전에 어떻게든 무마시키려는. 그렇게 생각하니 정말 내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네. 중립으로서 누구보다 양 진영을 신뢰해야되는 내가 냉정하지 못했다는 것에 대해 말이야. 그렇게 생각하니 또 궁금해지더군. 티리온 경이었다면 어떤 심정이었을까? 어쨌든 결국 모이라 타우릿산은 떠나갔으니, 그들 입장만 훨씬 더 난처해지고 말았다네.
그리고 일주일인가 정도 있다가... 그때는 정말 생각지도 못한 손님이 찾아왔다네. 예배를 끝마친 직후에.
"대, 대영주 님!"
"또 손님이 찾아오셨는가?"
"그... 그게... 얼라이언스 국왕님이...!"
"모셔오거라."
조금 당황하긴 했지만 애써 표정을 감추었지. 그가 걸어오는 걸 지켜봤어. 정예병을 사이에 두고 정복 차림으로 성큼성큼 걸어오는게, 언뜻 아직 어린 듯 해도 그의 아버지를 많이 닮았지. 바리안 린이 지금 그의 나이였다면 저런 모습이지 않았을까, 싶었을 정도로.
"얼라이언스의 지도자이자 스톰윈드의 국왕, 안두인 린 입니다. 대영주 님을 뵙습니다."
"대영주 팔렌 레이무스, 국왕님을 뵙습니다. 제가 직접 찾아뵙지 못해 송구스러울 따름입니다."
"아닙니다. 마땅히 제가 찾아뵈어야 할 이유가 있었으니까요."
매우 예의있고 절도있는 모습이었지. 감히 다른 의도를 캐내기 무서울 정도로.
"대영주 님, 대영주 님에게 있었던 사건에 대해 얼라이언스의 대표로써 진심으로 사죄드리고자 찾아왔습니다. 대영주 님을 모욕했던 그 두 명의 드워프들은 현재 성기사직을 완전박탈 당하고 중징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얼라이언스의 문제는 오롯이 얼라이언스의 것이니, 제가 감히 관여할 문제가 아닌 듯 합니다."
"얼라이언스는 대영주 님의 활약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리치 왕과 가로쉬 헬스크림을 타도하였으며, 부서진 섬과 아르거스의 불타는 군단을 물리쳤던 대영주 님을 말입니다. 저 또한 판다리아에서 받았던 배려에 여전히 감사하고 있습니다.
"과찬이십니다."
"지금의 저는 얼라이언스의 편에 서 있지만, 저 또한 빛을 섬긴다는 것은 변함 없습니다. 대영주 님 뜻을 항상 존중하고 응원하고 있습니다. 평화로운 세상이 언젠가 찾아올거라는 희망을 절대 놓지 않겠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이야기했고, 그렇게 떠나갔지. 하지만 내 생각을 바꾸기엔 부족했어. 제아무리 지도자가 찾아왔다 한들, 결국에는 모이라 타우릿산과 같은 의도였을테니까. 하지만 직접 찾아왔다는 정성이 있었으니, 그녀처럼 대놓고 의심할 수는 없었다네.
사실 아무래도 좋았어. 호드가 뭘로 걸고 넘어뜨리던, 그것 때문에 얼라이언스가 얼마나 곤란한 입정이던, 난 아무 상관 없었지. 중립으로 남겠다는 건 진영 간의 외교 문제에 낄 필요가 없다는 것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나를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나와 뜻을 함께하는 성기사들마저 떠나간다는 거였지. 이번 사건으로 인해 얼라이언스에 악감정을 가지게 된 성기사들이 호드로 떠나고 말았지. 그들의 선택을 존중하는 입장으로써, 마지막으로 다시 생각해줄 수 없겠냐고 묻는게 전부였다네. 남은 이들 사이에서도, 진영이라는 근본적인 소속 때문에 갈등이 일어나려고 하고 있네. 바로 그 사건 때문에 말이지.
이번 사건으로 나는 더 이상 존중받기에는 글렀을지도 몰라. 겉으로는 아제로스의 영웅이니, 대영주니 받들지 모르지만, 내 위치 때문에 많은 부분에서 나라는 존재는 결국 걸림돌이겠지. 단순히 머리로만 알고 있다가, 이젠 정말 온 몸에 와닿고 말았어. 그렇기 때문에... 힘들다고 밖에 더 할 말이 없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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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마치자 팔렌은 남은 술을 비우고 잔을 치켜들었다.
"여기 한 잔 더!"
"예, 갑니다!"
"흠... 그런 일이 있었군요. 안두인 국왕이 직접 찾아와야 할 정도로 파급력이 커지다니."
팔렌은 빈 잔을 들고 게슴츠레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나 참, 많이 안 마신 것 같은데 벌써 알딸딸하네."
"제 거까지 뺏어마셔놓고 그런 말 하면 어떡합니까?"
"마음 터놓고 술 마신지가 정말 오랜만이라서 그렇다네. 자네 보니까 반갑기도 하고."
"제 지갑은 그렇지 않다는데요?"
"그건 그렇고... 그 아이랑은 잘 만났나?"
로돈은 잠시 멈칫했다. 레아나. 그녀와 노스렌드에서 있었던 일들이 머릿속에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뭐, 잘 만났죠. 정말 별난 친구였습니다. 왈가닥에, 무대포에... 정말이지 옛날의 대영주 님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무슨 숨겨둔 자식이라도 되는 줄 알았다니까요?"
"하하하하, 머리색부터 다른데 숨겨둔 자식은 무슨. 뭐, 나 닮은 딸아이라도 있었다면 저렇지 않았을까 싶기도 했지. 그래서 더 아끼는 친구기도 하고. 좀 미안하긴 했네. 자네가 엘프를 싫어하는 걸 내가 잘 아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차츰 대화해보니까 여러모로 통하는 구석이 있더군요."
"그거 다행이군."
"주문하신 안주 나왔습니다! 맛있게 드세요!"
종업원이 안주랑 맥주를 식탁에 가득히 올려놓고 갔다. 로돈과 팔렌은 다시 가볍게 건배를 하고 들이마셨다. 팔렌은 잔을 내려놓고 잠시 생각에 잠긴 듯 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 아이는 정말 나랑 닮았어. 털털하고 자유분방하고 자신의 길을 찾아 헤매는 것 까지. 참 재밌게도 지금은 내가 헤매고 있네."
"그 사건 때문입니까?"
"아니. 차라리 그 사건 때문이었다면 이렇게까지 마음고생하지도 않았어."
"또 무슨 일입니까?"
"자넨 내가 왜 대영주가 되었다고 생각하나?"
그 말에 로돈은 잠시 턱을 매만지면서 생각하더니 곧이어 대답했다.
"그야... 대영주 님 밖에 없지 않습니까? 리치 왕을 잡고 가로쉬를 타도하고 아르거스에서 불타는 군단까지... 그 수많은 업적과 명예들이 증명하고 있잖습니까. 게다가 티리온 경에게 직접 후계로 선택받으신 것만 해도 더 할 말은 없다고 봅니다."
팔렌은 대답을 하지 않고 그저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로돈은 그 뜻을 알 수가 없었다.
"그래... 나 밖에 없었지. 정확히 말하자면, 나만 남았기 때문이랄까..."
"예?"
"트몬 레더후프라는 타우렌을 알고있나?"
"아뇨... 잘..."
"그럼 만록이라는 오크는?"
"그 자도 잘..."
"자넨 아는게 뭔가?"
로돈은 도끼눈을 하고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럼 죽음군주는 누군지 알고있겠지?"
"어... 그 드레나이 죽음의 기사 말입니까? 데스윙 토벌 공격대의 선봉대장이었다던..."
"잘 아는군. 한때 이름 없는 성기사였던 그녀가 죽음군주가 되어 나타났을땐 모두를 놀라게 했었지."
"그... 서로 무슨 공통점이라도 있습니까? 언뜻 별 상관 없어 보이는데..."
"그래...?"
팔렌은 말없이 웃다가 살짝 머뭇거리더니 말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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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왕관 성채에서의 기억은 더할 나위 없이 끔찍했지. 한 때 생명이었다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을 정도로 흉측하고 일그러진 언데드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던 것 밖에 기억이 없었으니까. 그래도 트몬의 방패 뒤에 있었으면 무서울 건 없었다네. 절대 무너지지 않는 방패. 허나 그 믿음이 깨져버리는 순간의 절망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네.
퓨트리사이드. 꿈에서도 만나기 끔찍했어. 냄새만으로 콧속을 전부 녹여내릴 정도로 지독한 역병을 다뤘지. 차마 닿기 조차 두려웠던 역병을 온 몸으로, 그것도 방패만으로 막겠다면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했을까. 나라면 나의 동료들을 위해 기꺼이 몸을 던질 수 있었을까? 아니, 난 절대 그렇게 하지 못했을거야. 그렇기 때문에 트몬은 대단했고 나는 그를 절대 잊을 수 없지.
하지만 대가는 컸다네. 오른팔 전체에 감염된 역병이 온 몸으로 퍼지기 전에 잘라내는 것 밖에는 방법이 없었어. 빛의 힘으로도 그의 상처를 치료하기엔 턱없이 부족했으니까. 결국 우리는 그를 오그리마로 돌려보내자는 결정을 내렸지만 그는 남은 한 팔로 나를 붙잡았지. 자신에게는 아직 이 왼팔이 남았다고. 칼을 쥘 순 없어도 방패만이라도 들게 해달라고. 부디 나를 버리지 말아달라고. 누구보다 용감했고, 누구보다 절실했지.
결국 오그리마로 향하는 차원문은 열리지 않았다네. 응급처치밖에 받을 수 없었던 트몬이지만, 그는 여전히 굳건한 방패였지. 하지만 그 굳건한 방패도, 신드라고사의 숨결까지는 막을 수 없었어. 신드라고사가 날아오르기 전에 재빨리 죽일 수 있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지도 몰라. 하지만 그때는 너무 늦고 말았어.
온몸의 피가 얼고 피부가 괴사해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는 상태에서 트몬이 입모양으로 전한 유언은 길지 않았어.
'고맙다. 끝까지 함께 할 수 있어서...'
성채에서 함께했던 모든 동료들은 그에게 목숨을 빚진거야. 트몬이 아니었다면, 리치 왕과 대면하지 못하고 전멸했을테니까. 그리고 그의 죽음을 함께 지켜본 이가 나 말고 하나 더 있었지. 그 놈하고는 사소한 문제로 항상 티격태격했어. 시비가 끊이질 않아서 다른 이들도 우리 둘이 싸우면 말리기 바빴지. 근데 이상하게도 함께 싸울때는 죽이 잘 맞더군. 그런 식으로 미운 정이 든 놈이야.
자존심 세고 호전적이고 단검을 끝내주게 잘 다뤘던 만록은 트몬이 죽는 순간에 애써 눈물을 감췄지. 리치 왕과 대면하기 직전까지 그는 단검을 계속 갈고 있었어. 복수해주겠다면서. 복수를 못한다면 차라리 내가 먼저 죽어서 트몬에게 뒤따라가겠다고 했지. 나 역시 같은 마음이었고, 우린 극적으로 리치 왕에게 복수하는데 성공했지.
그리고 리치 왕이 죽은 이후 우린 헤어졌고, 한동안 만나는 일 없이 시간은 흘러갔지. 오그리마 공성전이 일어나기 전까지 말이야. 그 거대한 강철 전갈을 때려잡고 오그리마의 시민들을 구출하는 와중에 내 뒤를 밟는 놈을 제압했지. 만록이었어. 녀석은 예상보다 무력하게 제압당했고, 난 차마 죽이지 못해 심문을 핑계삼아 생포하라는 명령을 내려놨지. 당연히 연합에서는 반발이 나왔어.
"코르크론 놈들은 가로쉬에 대한 충성도가 이미 하늘을 찌르고 있습니다. 게다가 가로쉬를 처단하기 위한 필수적인 정보들은 이미 전부 확보했어요. 저 자를 살려두는 건... 무의미합니다."
"그런가..."
"왜 저 자를 살려두려는 겁니까, 팔렌?"
"...함께 했던 동료다."
"예?"
"내 손으로 끝내게 해다오."
나는 만록을 끌고 오그리마 구석에 갔지. 무릎을 꿇고 나를 노려보는 그 녀석과 차마 눈을 마주치지 못했어. 반면에, 녀석은 날 완전히 꿰뚫어보고 있었지.
"왜 코르크론에 붙었지? 대답해."
"흥, 노스렌드의 겁쟁이가 어디 안 갔군. 안 그러냐?"
"내가 가로쉬 따위에게 겁먹었다고 생각하나?"
"당연히 아니겠지."
"뭐?"
"아직도 이해가 안가나? 내가 왜 네놈을 겁쟁이라고 하는지."
"...유감이군."
나는 칼을 뽑아서 놈의 목에 겨누었지만 녀석은 조금도 움츠러들지 않았어. 오히려 당당했지. 녀석이 죽는 걸 차마 두 눈뜨고 볼 수 없어서 눈을 감고 말았어. 그걸 본 녀석은 소리쳤지.
"정말이지 네놈은 끝까지 도망치려고 하는구나! 내가 죽는게 두렵나? 아니면 한때 동료였던 녀석을 죽여야 해서? 내가 후회하는 것 처럼 보이나? 너와 나는 적이다! 지난 일 따위가 뭐가 중요하냐! 나를 살려두면, 난 다시 네녀석의 등을 노릴 것이다. 정녕 그렇게 되길 바라나?"
"닥쳐...!"
"네놈이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자리에 있는게 아니었냐. 그게 아니라면, 너는 지금 왜 여기 있는거지?"
"닥쳐!"
칼을 내리치는 순간에 감은 눈을 떴고... 녀석이 칼에 베어 피투성이가 된 모습을 두 눈뜨고 지켜봤지. 녀석의 말대로 말이야. 그 죽는 순간까지 녀석은 말을 이어갔어.
"눈을 감지 마... 똑똑히 보아라... 그리고... 절대... 도망치지... 마라...!"
만록의 피가 나를 덮었고, 나는 한동안 녀석의 시체를 바라봤지. 죽어서 초점이 없었지만 녀석의 눈은 여전히 부릅뜨고 있었어. 마치 나를 노려보는 것 처럼. 끝내 나는 결심했고, 녀석의 눈을 감겨주고는 연합에 돌아갔지.
"팔렌, 여기 상황은 대부분 정리됬습니다. 이제 곧 후속대가..."
"정예 용사들은 출격했나?"
"네, 이제 막 가로쉬를 잡으러..."
"나도 간다."
"예?"
"나도... 가로쉬를 죽이러 가겠다."
당연히 화가 났지. 하지만 그건 만록을 죽이게 만든 가로쉬에 대한 분노가 아니었어. 스스로에 대한... 끝끝내 도망치려는 내 자신에 대한 분노였지. 참 엉뚱하게도 그걸 가로쉬에게 돌려버렸지만.
가로쉬가 재판 중에 도망치고 나서야 전후 사정을 듣게 됬다네. 가로쉬가, 정확히는 말코록이 만록의 둘뿐인 동생들을 인질로 잡고 협박했다더군. 하지만 신변을 보장해준다는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었고, 만록의 동생들은 이미 전쟁이 시작되기도 전에 암살당했지. 만록이 그걸 모르고 있었다면 차라리 다행이었겠지만, 만약 알고 있었다면... 녀석이 죽은 이유가 대충 이해가 되더라고.
그 녀석은 가로쉬를 위해, 자신의 가족을 위해 죽은게 아니라, 바로 나를... 나약했던 나를 바로잡아주기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던졌지. 그게 옳다고 믿었기 때문에, 단 한 점의 후회도 남기지 않은 채로.
그렇게 여차저차해서 대영주가 된 이후로 엄청나게 바빴지. 매 순간이 목숨을 건 전투였으니까. 킬제덴이 죽고 나서 좀 여유로워지나 싶었는데 대뜸 아르거스가 떡하니 나타나고... 일리단 스톰레이지... 그 새끼가 진정한 원흉이 아니었나... 그놈을 죽이는게 차라리 낫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 좀 혼란스러웠지.
아르거스에서 그 고생을 실컷하고 살아있는 내가 어지간히 질긴 목숨이구나... 라고 스스로를 조소하던 찰나에 죽음군주를 만나게 됬지. 마크아리의 보랏빛 들판에서 말이야. 나는 그녀를 마주하자마자 파멸의 인도자를 겨누었어.
"여기서 만나는 군. 죽음군주여."
"대영주..."
물론 서로의 입장이라는게 있었으니까 무기를 겨누었지만, 동시에 서로 굳이 부딪힐 이유도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무기를 내려놓았지. 우리는 그 자리에 나란히 앉아서 잠시 대화했어.
"고향에 돌아온 기분이 어떻지?"
"...이 곳을 말하는 건가?"
"자네 드레나이들이 그토록 오고 싶어하는 곳이 아니었나?"
"그랬지... 이왕이면... 살아 숨쉬고 있을때 오고 싶었지만..."
그녀는 들판의 마른 풀을 매만졌어.
"지금 내게는... 이런 감각조차 남아있지 않아. 그러니... 반갑다는 느낌조차 나지 않을 수밖에."
"그럼 왜 여기 있는거지? 고향에 돌아오고 싶었다는 기억 하나만으로?"
"그것만으로는 부족하지... 그것마저 한동안 잊어버렸으니까."
그녀는 풀 한가닥을 뜯어서 한 손으로 매만졌지. 마른 풀은 그녀의 손에 쉽게 부스러지고 말았어.
"친구를... 죽인 적이 있었나?"
"......"
"이 세상은 아직 지킬 가치가 있다고... 아르거스를 기억하라고... 그 말 한 마디가 날 흔들리게 만들었지. 어느 순간 그저 맹목적인 믿음으로 변해버렸고, 수많은 생명을 죽이고 죽는 걸 지켜봐오면서... 결국에는 나 혼자 이 곳으로 돌아오고 말았어. 바로 이 자리에서, 발로크는 나와 도망쳤고... 드레노어에서 살아남아 아제로스로... 결국 우리 둘 다 죽었지만... 끝내 돌아온 건 나 하나 뿐이지... 그 모든게... 기억나고 말았어. 기억해서는 안되는 것들까지... 내가 살아있다면... 아니, 감정이 있다면... 난 기뻐해야되는 걸까? 아니면... 나는 지금..."
그녀는 손에 바스라진 풀조각들을 내려놓았지만 미처 떠나지 못하고 손에 남아있던 풀조각들을 멍하니 바라보았지.
"결국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어. 그저... 짊어지고 있는 희생의 무게만이 더... 선명하게 느껴질 뿐. 내가 죽이고 나를 위해 죽었던 모든 이들의... 감히 떨쳐내지 못할 희생의 무게만이..."
그녀는 그대로 손을 쥐고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등을 돌렸지.
"굳이 이해를 바라는 건 아니야. 시간 뺏어서 미안하군."
그녀가 떠나가고 느낀 건, 결국에는 나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거야. 죽음군주라는 칭호 뒤에 감춰진 모든 업적들... 그게 한순간에 얻어질 리 없지. 결국 명예도 업적도 모두 뒤에 감춰진 희생과 헌신이 아니었다면 리치 왕도, 데스윙도, 가로쉬도... 그들을 막을 수 있었을까? 그 이전에... 대영주와 죽음군주의 칭호를 찬양하는 모든 이들이 과연 우리를 진정으로 이해하는 것일까?
짊어진 자들의 무게... 그건 짊어진 자들이 아니면... 누가 알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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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영주 님, 여기 계셨군요!"
잔달라 정예병들이었다. 서너명이 술집에 발을 들여서 대영주를 찾고 있었다.
"탈란지 님께서 대영주 님을 만나뵙길 바라고 계십니다."
"지금?"
팔렌은 의문을 품었지만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 여기까지 마시는걸로 하지. 더 마셨다간 제대로 잠들지 못할 것 같기도 하고."
"그렇게 하죠."
"오늘 잘 마셨네. 내일 돌아가기 전에 한번 얼굴 보는걸로 하지."
"알겠습니다."
팔렌은 정예병들의 안내에 따라 술집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나가기 전에 로돈을 불렀다.
"로돈."
"네?"
팔렌은 로돈을 부르면서 차고 있던 파멸의 인도자를 꺼내들었다.
"이 파멸의 인도자보다 훨씬 무거운 무게. 상상이 가나?"
"하, 글쎄요?"
"후후후..."
팔렌이 떠나가고 로돈은 자리에 앉아 그가 했던 말을 곱씹었다.
"희생의... 무게라..."
"저, 손님?"
"예?"
"500골드입니다."
"예...?"
로돈은 종업원이 쥐고 있던 계산서를 재빨리 낚아챘다. 정확이 500골드였다.
"...아."
다음 날 이른 아침. 로돈과 팔렌은 항구에 발을 딛었다.
"차원문으로 가면 되는 걸 왜 굳이 배 타고 가시는지 이해가 안됩니다."
"나름 성의라는게 있지 않은가. 메아리 섬이 아니라 아예 동부 왕국 쪽으로 간다고 하니 거절할 수 있어야 말이지."
"그렇군요."
팔렌은 로돈의 어깨를 살며서 두드렸다.
"언제든 돌아오게. 자네 같은 인재는 얼마든지 환영하니까."
"하하, 감사합니다."
"아 그리고 희소식 하나."
"예?"
"잔달라 트롤 중에서도 성기사를 희망하는 인재들이 많은 모양이야. 로아 레잔의 사망을 기리고 싶다더군."
"아, 그럼 어제 공주님께 불려가신 이유가..."
"맞네. 그것 때문이지."
"그리고 술값은 500골드가..."
"음... 이만 가도록 하지."
팔렌은 재빨리 등을 돌려 배로 올라갔다. 로돈도 등을 돌리려는 찰나에 팔렌은 그를 한번 더 불렀다.
"로돈?"
"예, 대영주님."
"희생의 무게라는 건... 어디까지나 짊어진 자의 몫일세. 알고 있어주는 것만으로 참 고맙지만, 굳이 이해하고 공감해줄 필요까지는 없어."
로돈은 잠시 고개를 돌려 팔렌을 쳐다보았다. 팔렌은 개운한 듯 활짝 웃고 있었다.
"그럼 다음에 보도록 하지!"
배는 곧 떠나갔고, 로돈은 쉽사리 발이 떨어지지 않아 배가 멀리 사라질때까지 그 자리에서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배가 눈 앞에서 사라지자 로돈도 슬며시 미소지으며 곧바로 항구를 벗어났다.
"음, 이만 다자알로로 가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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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크고 흉측한 사원이 꼭 나와야 해."
"응, 정말 원시적이라니까?"
"자 찍는다. 하나 둘..."
블러드 엘프 커플 한 쌍이 다자알로의 거대한 사원을 배경으로 두고 기념사진을 찍고 그걸 아니꼽게 보고 있는 경비병은 바닥에 침을 뱉었다.
"퉷, 엘프들이란..."
"그러게요... 정말이지..."
"억?"
어느 순간 다른 블러드 엘프 하나가 경비병 옆에 와서 동조하고 있었다. 미처 눈치채지 못한 경비병은 놀란 눈치였지만 정작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팔짱을 끼고 경비병 옆에서 벌레 씹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지금 상황이 어떤 상황인데 이런데 와서 관광이나 하고 있는건지... 뇌는 뭐하러 달고 다니나..."
"저기... 그쪽도 엘프..."
"제가 뭐요? 설마 저도 지금 저놈들하고 같은 부류라고 하는거예요? 하이고, 뭘 모르시네. 저기 죄송한데 저런 쫌생이들하고 비교하는 건 좀 안하셨으면 하거든요?"
"어... 제가 보기엔 별로 다를게..."
"뭐? 너 말 다 했냐! 너 몇 살이야!"
블러드 엘프는 그대로 시비가 붙어서 경비병의 머리채를 붙잡고 잡아당겼다. 그 커플은 진작에 떠나간 줄 모르고 한참을 치고받다가 소란이 커졌다.
"뭐지?"
로돈은 소란이 일어나는 쪽으로 발길을 옮기며 점점 그 둘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 블러드 엘프와 눈이 마주쳤다.
"어?"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