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께서 다치셨다고요? 어떻게요? 얼마나요?”
그랬다. 이 아가씨는….
“심한 부상은 아니니 염려 놓으시지요. 사제님의 치유를 받고 여관에서 쉬고 계십니다.”
“그래도 가봐야겠어요. 루이스 씨? 잠깐 다녀올게요.”
“그래. 갔다 오려무나.”
수리공 루이스가 망치를 든 손으로 손 인사를 하자 호프는 다급한 발걸음으로 감시탑을 빠져나갔고, 난 그녀의 눈빛을 훔쳐봤다.
기묘하군.
농부의 딸에게서 묘하게 날카로운 감각이 느껴졌기에 나는 궁금증을 풀어헤쳤다.
“혹시 말입니다.”
“왜 그러시오?”
“저 아가씨도 경비병의 일원입니까? 보직이 달라 보입니다만….”
“검을 드느냐, 이런 말씀이오?”
루이스 씨는 달려 나간 호프의 뒷모습을 멀거니 바라보다가 대수롭지 않은 듯 만지작거리던 제련품을 두드리며 리드미컬하게 대답했다.
“저 아이는 날벌레 하나 죽이지 못할 정도로 고운 성미를 지닌 아이입니다. 감시탑에 들어앉아있는 이유도 미력한 힘이나마 어떻게든 대장님을 돕고 싶기에 그런 것이고.”
“그렇습니까.”
묘한 감각을 두 번이나 느꼈기에 전투원으로 활동하는 줄 알았더니. 그저 착각인 모양이었다.
하긴 농부의 딸이 무슨 검을 들 거란 말인가. 나는 생각을 정리하자마자 루이스 씨에게 적당히 인사하고 바깥으로 나왔다.
그때 한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화려한 어깨 장식의 갑옷을 입은 그는 풍성한 수염과 머리카락을 지닌 늠름한 풍채의 중년 남성이었다. 범상치 않은 결기가 느껴지는군.
갑작스러운 마주침이었기에 걸음을 물려 피하려는 찰나, 중년의 사내가 나를 불렀다.
“이보시오.”
“왜 그러십니까?”
“감시의 언덕에서는 처음 뵙는 분이군요. 헌데 이렇듯 버젓이 다닌다는 것은 신원이 보증된 사람이라는 뜻이겠죠?”
“그런 것 같습니다. 혹시 스타우트멘틀 대장님이십니까?”
“그렇소.”
흠. 예상대로군.
그라이언 스타우트멘틀 대장이 나를 위 아래로 빠르게 훑어봤다.
“실례가 안 된다면 지금 어디서 묵고 계신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살딘 농장에 의탁하고 있습니다만…. 오래 머물 생각은 없습니다.”
“그럼 조만간 다른 곳으로 떠나신다는 말씀입니까?”
“그리 될 것 같습니다. 헌데 질문의 요지가 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선문답은 질색이었기에 말의 논점을 찌르자 스타우트멘틀 대장이 겸연쩍은 얼굴로 웃었다.
“하하! 미안합니다. 슬쩍 보니 체격이 훌륭하시더군요. 그래서 만약 괜찮으시다면 우리 경비대에 들어오실 생각이 없으신가 여쭤 볼 참이었습니다.”
“경비대요? 감시의 언덕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과거에는 목책이나 세워놓은 민병대로 출발했지만, 오늘날에는 스톰윈드의 지원을 받는 당당한 감시대로 편성되어있죠. 숙식 제공에 보수도 넉넉히 챙겨드리고 떠나시는 날에는 퇴직금도 마련해드리죠. 어떻습니까?”
구미가 당기는군.
만약 살딘 씨를 만나기 전이었다면 분명히 하겠다고 했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은.
“제안은 감사드리오나 며칠 안으로 서부 평야를 떠나야하는 입장이니 사양하겠습니다.”
“그렇습니까? 알겠습니다. 바쁘신 분 잡아둔 것 같군요.”
“아닙니다. 그런데 한 가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그러시죠.”
나는 스타우트멘틀 대장 옆에 묶여있는 한 남자를 가리켰다.
그 자리에는 나와 같은 남자가 형틀에 묶여있었다. 살딘 씨에게조차 묻기가 어려워 줄곧 입을 다물고 있었지만 감시탑을 올려다 볼 때마다 늘 궁금했던 사실이었다.
과연 이 늑대인간은 어째서 묶여있는 건가? 스톰윈드는 늑대인간을 표적으로 삼은건가? 듣기로는 스톰윈드와 길니아스가 동맹을 맺었다고 들었는데…. 그게 아니었단 말인가? 그렇다면 내 정체를 섣불리 밝혀도 괜찮은 걸까? 만약 내가 잡히면 그분을 어찌 뵌단 말인가?
생각과 생각이 꼬리를 물고 끝없는 질문을 토해내던 그때 스타우트멘틀 대장이 대답했다.
<24>
“제임스 해링턴 제독은 왕국을 향한 범죄의 칼날을 입에 물었소. 그 때문이오.”
“그가 늑대인간이라는 사실은 문제없는 겁니까?”
“늑대인간이라….”
늑대인간(Worgen)이라는 단어에서 스타우트멘틀 대장의 표정이 의뭉스럽게 변했다. 불쾌하지도 유쾌하지도 않은 중도의 표정이었다.
“동부 그늘숲의 늑대인간은 매우 잔인하고 흉포한 괴물로 알려져 있습니다만 길니아스의 그레이메인 국왕께서 얼라이언스 연합에 돌아오시면서 바리안 전하로부터 말단 병사에 이르기까지 늑대인간의 저주에 대한 선입견이 점차 희석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야기를 늘어놓던 스타우트멘틀 대장은 불현듯 떠올랐다는듯 한 줄의 이야기를 덧붙였다.
“그런 노력의 반증이랄지, 어떤 늑대인간이 그늘숲의 늑대인간들에게 이성을 되찾아주려는 노력을 한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사실 여부가 궁금한데 좀처럼 알아볼 기회가 없군요.”
“방금 그레이메인 국왕이라 하셨습니까?”
“그렇소.”
“혹시 그분을 만나보신적 있으십니까?”
“대화를 나눈 적은 없지만 왕궁에서 국왕 전하와 함께 계신 모습을 본 적 있었소. 그런데 어찌하여 그런 것을 물으시오? 길니아스 출신이십니까?”
“저는….”
밝혀야하나?
모르긴 몰라도 이 남자는 우리나라에 대해서 호의적인 입장을 가진 것 같았다. 하지만 목적을 이루기 전까지 내게 찾아오는 관심은 피해야했다. 하물며 이런 영향력있는 인물이라니.
“길니아스의 백성들이 모두 늑대인간은 아닙니다.”
“그 말씀은 길니아스 출신이긴 하지만 늑대인간은 아니라는 말씀이십니까?”
이 정도는 괜찮겠지.
“그렇습니다.”
“오! 정말입니까? 시간이 되신다면 식사에 초대하고 싶군요. 길니아스는 최근에 얼라이언스에 다시 편입된 국가이니만큼 수많은 진실이 베일에 감춰져 있습니다. 부디 고견을 들을 자리를 가졌으면 좋겠군요.”
“스톰윈드로 망명하는 길니아스인이 어디 저 뿐이겠습니까? 머지않아 좋은 기회가 찾아올 것입니다.”
내가 무례하지 않게 자리를 물리자 스타우트멘틀 대장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하. 알겠습니다. 그럼 떠나시는 길 무탈하길 바랍니다.”
이야기를 마친 스타우트멘틀 대장은 본래의 자리로 돌아갔고, 나는 감시의 언덕을 떠나 살딘 농장으로 향하는 길에 오를 수 있었다.
감시의 언덕에 머문 시간은 무척 짧았지만 제법 유익한 정보를 많이 들을 수 있었다. 살딘 부부에게 딸이 있다는 이야기도 놀라웠고 늑대인간에 대한 쓸데없는 오해가 사그라들고 있다는 사실도 고무적이었지만 무엇보다.
‘국왕 전하께서 스톰윈드 왕궁에 계신다.’
나는 주먹을 단단히 움켜쥐었다. 마치 그 소식이 끈이 달린 주머니에 들어있는 것처럼 나는 주먹을 단단히 쥐고 이야기가 세어나가지 않게 조심했다.
스톰윈드에 가야하는 이유가 더욱 확고해졌다.
<25>
농장에 돌아오니 살딘 부인과 멜베가 작물을 돌보고 있었고, 남은 하루를 그녀들과 보냈다.
외양간이나 부서진 난간을 수리하는 일은 소일거리에 가까운 작업이었고 들짐승을 쫓거나 강가에서 저녁 찬거리를 챙겨오는 일은 시시하지만 보람찬 일이었다.
하루하루를 이렇게 보낼 수 있다면 농부로 살아가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망상에 빠져들자 어느새 하루 해가 저물고 있었다.
멜베는 정말이지 서글서글하고 말주변이 좋은 아이였다.
살딘 부인의 곁에 찰싹 붙어서 하루 종일 하하호호 재잘재잘 화목함이 떠날 줄을 몰랐다. 그리고 해가 떨어지자 환하게 밝혀둔 부엌에서 함께 요리하면서 하루를 마치고 있었다.
“수고 많으셨어요.”
외양간 수리를 마치고 사다리를 타고 내려오던 중 살딘 부인이 다가왔다.
“소일거리죠. 수고랄 것도 없었습니다.”
“남편이 홀스타인 씨에게 전하는 이야기가 있어요.”
“살딘 씨께서요? 어떤 이야기죠?”
살딘 부인은 생각을 정리하다가 짧게 대답했다.
“오늘 밤. 자기를 만났다가 떠나라고 하셨답니다.”
뭐라고?!
만났다가 떠나라니? 이분께는 이야기한 적이 없었는데….
“어떻게 알고 계셨습니까?”
살딘 부인은 살풋 웃음 지었다.
“서부평야의 밤은 조용한 편이죠.”
“이런. 그랬습니까.”
나는 사다리를 완전히 내려와 아직 불이 환하게 밝혀진 집안을 바라봤다.
“외람된 부탁입니다만, 멜베를 잠시 동안 맡아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저 아이를 아끼시는군요?”
“네. 그렇게 되었습니다.”
“사랑하시나요?”
살딘 부인의 질문에 나는 헛기침을 터뜨릴 뻔했다.
“…연인 간의 사랑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아닙니다.”
“허면 두 사람이 만난 시간이 무척 짧은 걸로 아는데, 어찌 그리 챙기시는 건가요?”
나는 외양간에 몸을 기댔다.
한쪽 눈으로는 멜베를 떠올렸고 다른 한쪽 눈으로는 미처 잡아주지 못하고 떠나 보내야했던 과거를 떠올렸다.
짧지 않은 시간이 흘렀을 때 나는 얼떨결에 대답했다.
“딸이 있었습니다.”
그래. 그랬지.
“길니아스에 있었을 때 말입니다.”
<26>
그날 밤도 오늘 같았다.
만약 그날 밤 살딘 씨를 만나지 못했다면 나는 어찌 됐을까? 최악의 사태를 맞이했을까?
자정이 얼마 남지 않은 늦은 시각. 나는 감시의 언덕으로 돌아왔다.
이목을 잡아 끌 필요는 없었다. 성벽을 따라 돌던 중 적당한 틈새를 발견했을 때 나는 그림자 속에 몸을 숨겼다. 그리고 으슥한 어둠을 따라 여관 안으로 숨어들어갔다.
한걸음 옮길 때마다, 낡은 문을 열어젖힐 때마다 나무 바닥이 귀를 찌르는 소음으로 요동쳤으나 나는 신경 쓰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이곳에 다시 돌아올 일 따위는 없었다.
그로부터 잠시 후. 어둠에 익숙해진 눈으로 살딘 씨를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어서 오시죠. 홀스타인 씨.”
“마지막 수업입니까?”
“그렇게 되겠군요. 앉으시죠.”
살딘 씨는 나를 반대편 침대에 앉히더니 곧장 이야기를 시작했다.
“오늘입니까?”
“네. 오늘이 예정했던 날입니다.”
“스톰윈드의 성벽은 어찌 넘으실 계획이십니까?”
“대지진이 일어나기 며칠 전, 거대한 용의 파괴 행위로 스톰윈드 일부가 무너져 내렸다고 들었습니다. 그리로 가기 위해서는 서부 해안을 따라 올라가면 된다고 하더군요.”
“허어. 그런 이야기를 어디서…?”
“스톰윈드 출신의 유랑민들에게 들었습니다. 그것도 여러 사람이 떠들어대는 너절한 소문을 이어 붙인 것에 불과하죠. 사실입니까?”
“저도 실제로 보지를 못했으니 단언하기는 힘듭니다만… 늑대인간의 신체 능력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래도 개인 역량에 따라 갈라질 거라 생각되는군요.”
살딘 씨는 아직 몸이 불편한 듯 침대에 비스듬하게 누워서 중얼거렸다.
“그 아이에게는 말씀하셨습니까?”
“아뇨. 목적을 이루기 전에는 의미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모든 진상이 드러나면 섭섭해 하겠군요.”
“어쩔 수 없죠. 그래서 말인데… 계획이 성사되는 즉시 돌아올 테니 그때까지만 멜베를 맡아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알겠습니다. 뭐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그럼 마지막 수업을 시작해보죠.”
살딘 씨는 촛불에 불을 밝혔다.
그리고 손가락을 뻗어 스톰윈드의 개략적인 지도를 그리며 설명을 덧붙였다. 그림은 무척 간결했고 부연 설명도 길지 않았지만 내게는 억만금의 가치가있는 정보였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렇게 몇 시간이 흘렀을 때, 나는 촛불의 불을 꺼버렸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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