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모든 것이 완벽하다. 위화감이 들 정도로. 마음에 맞는 동료들과 편안해진 일, 그리고 취향에 정확히 맞춰진 커피의 온도. 지난 삶에선 찾기 힘들었던 완벽한 안락함이다.
"하지만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철혈과 그리폰의 최전선은 이쪽이 아니니까요. 지휘관님은 그냥 임무에 집중하시고, 가끔 침입해오는 철혈 찌끄러기정도나 쫓아내면 충분한 거예요."
그 날을 다시금 떠올린다. 그 말을 듣는 것이 무섭게 급격하게 꼬였던, 그리고 격렬했던 지난 3여년의 시간을 회상한다.
"너, 무슨 그런 아저씨 같은 소리를 하는 거야?"
옆에 앉아 있던 WA2000이 지휘관의 회상을 깬다. 모처럼 좋았던 분위기를 한방에 깨버린 WA를 한번 쏘아봐줄까 하다가 오늘은 참기로 한다. 그 날, 꿈꾸었던 안락한 삶이 실제로 구현된 지금에 그 정도는 참아줄 수 있다. 안락함은 사람의 도량을 넓게 만들어주니까. 편-안한 삶, 그리고 스프링필드의 커피는 그걸 충분히 가능케 해주는 마법이 있다.
그러한 헛소리를 옆에서 듣고 있던 WA2000은 눈썹을 찌푸리고 있었지만.
굳이 강조하기 위해 다시 설명하자면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지휘관이 바라오던 이상적인 순간이었다. 편안한 근무환경, 좋은 보수, 잡무는 카리나에게 맡기고 본인은 예쁜 전술인형들과 즐거운 한 때를 즐긴다. 너무나 완벽해서 흠잡을 데 없다.
그래서일까.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하는군..."
아무런 일이 없는 무난한 나날이 이어지는 와중에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그러한 불안감이 지휘관의 머리를 거치지 않고 바로 입으로 튀어나왔다.
"갑자기 또 무슨 소리야?"
방금 전까지 편안한 이상적인 근무환경에 대한 찬사를 늘어 놓고 있던 지휘관이 조울증에 걸린 것 마냥 갑자기 가라앉아 불안을 토로하는 모습을 보며 질린 듯한 표정을 짓고 있다.
"뭐 동지에게 아무 일 없는 나날이 이어지는 것도 좀 특이하긴 하지~?"
"힉!"
갑자기 등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WA가 깜짝 놀랐다. 아직 ATK의 방송은 끝나지 않았다. FN 소대를 필두로한 텔레비전파는 여전히 텔레비전에 시선을 집중하고 있다.
"왜 갑자기 불쑥 끼어드는 거야? 놀랐잖아!"
빨개진 얼굴로 화내는 WA와 그걸 능글맞은 웃음으로 구렁이 담넘어가듯 넘기는 모신나강의 모습이 있었다.
"왠지 WA동지가 지휘관 동지랑 즐겁게 대화하는 거 같아서 질투가 나서 말이지."
"무슨 헛소리야?!"
얼굴이 새빨개진 채 소리치는 WA, 그런 WA를 따스한 미소로 지켜보며, 스프링필드는 평소와 같이 재빠른 솜씨로 잔을 내놨다. 그것을 받아든 모신나강의 표정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스프링필드, 너무 적은 거 아니야?"
하지만 스프링필드는 변함 없는 미소를 지은 채 대답했다.
"아직 대낮이니까요 모신나강."
그리고 약간 그 미소가 어두워졌다.
"저번에 마시다가 깨먹은 것들 외상값 남아 있는 거 기억 하시죠? 카리나 씨가..."
"아, 알겠어! 이것만 마실게!"
당황하다 받아든 잔의 술을 그대로 원샷해 버린 모신나강. 그리고 왠일로 그대로 잔을 내려 놓았다. 모신나강 동지는 굳은 표정에 억지 웃음을 띄운다.
"것보다 지휘관 동지는 좀이 쑤셔?"
억지로 화제를 돌리는군. 대화를 듣고 있던 모두가 그리 생각했다. 지휘관은 그 말을 듣자마자 바로 받아친다.
"흠흠, 아니야, 가능하면 이런 상황이 오래 지속되었으면 좋겠는데?"
그 말을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는 것은 WA2000.
"전혀 그런 표정이 아닌데?"
아주 조금 움찔 했지만 평소처럼 초인적인 자제심으로 아무렇지 않은 척 한다.
"진짜야. 이렇게 평온한 나날이..."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를 부르는 목소리.
"지휘관님?"
지휘관의 말을 끊어먹은 목소리 쪽으로 일동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을 때엔 그곳에 있었던 것은 M4A1이었다.
"지휘관님한테 온 편지입니다."
M4A1은 당연한 일이라는듯 말했다. 물론 그녀에게는 당연한 일이겠지만 이 상황을 이해 못하는 것은 정작 당사자인 지휘관이었다.
"나한테?"
M4가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M4는 고개를 젓는다.
"저도 모르겠습니다."
M4의 짤막한 답변에서 뭣 하나 알아낼 수 있는 건 없었다. 하얀 편지봉투를 받아 들어 유심히 본다. 수신인에 쓰여진 이름은 지휘관의 이름은 맞았지만.
"발신인이 안 쓰여 있네?"
WA2000이 말한대로 수신인의 이름만 쓰여 있지 발신인의 이름은 쓰여 있지 않았다. 이래서야 자신에게 편지를 보낸 이유를 짐작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편지의 내용을 알아보는 것 뿐. 서슴없이 편지 봉투를 뜯었다. 봉투 안에 뭔가 이상한 물질이라도 있는 거 아닌가 했던 인형들의 염려가 허무하게도 그 안엔 정직하게 잘 접힌 편지가 한장 들어 있을 뿐이었다.
차라리 무슨 테러의 일환이라면 그러려니라도 할 텐데, 지휘관의 감대로 편지 안에는 아무런 것도 없었다. 정직하게 들어 있던 모든 것이었던 편지를 꺼낸다. 고이 접힌 면을 피려는 순간.
"너희들 뭐 하는 거야?"
어느새 ATK의 방송이 끝난 것인지 우르르 몰려와 지휘관의 뒤에 있었던 인형들의 존재를 깨달았다.
"너희들 남의 편지 훔쳐보는 거 아니다. 여기선 못 보겠구만. 읽고 다시 올 거니까 나 따라 나오지 마."
그러고 지휘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까짓거 보여준다고 닳는 것도 아니라는 말도 필요 없이 지휘관은 카페를 나가 복도에 섰다. 벽에 기대어 서 편지를 열어봤다. 누군가 자신에게 장난 편지라도 쓴 걸까 하다가 뇌리를 스쳐지나가는 건 하벨, 젤린스키, 안젤리아, 에이전트.
"...그런 건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괜히 이 편지를 열어 봤다가 그런 사람들과 또 엮이는 거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엄습한다. 편지를 열기 직전인 상태에서 잠시 고민에 잠겼다가 방법이 없으므로 다시 열어본다. 그 안에는 여전히 지휘관에게 보낸다는 내용은 있지만 자신의 이름을 명시해 놓은 부분은 없었다.
하지만 편지를 끝까지 읽었을 때 누가 보낸 건지 깨달을 수 있었다.
언젠가 기억 속에서도 사라져 버렸던 광경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오래 전에 잊어버렸던 듯한 노래가 기억났다.
그것은 실로 오랜만에 불쑥 찾아온, 연락이 끊겼던 친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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