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문
일전에 개인 블로그에 [ 러브라이브! 브랜드의 근본 교리와 선샤인이 내포할 것으로 예상되는 면면들 ]이란 글을 작성해 본 적이 있습니다. 러브라이브! 선샤인!! (이하 선샤인) 애니메이션 제1화를 본 뒤에 생각해 본 바를 이래저래 두서없이 늘어놓은 게시물인데, 이 글에선 러브라이브! 브랜드의 시작점이었던 러브라이브! (이하 무인. 無印이란 뜻으로, 별다른 부제가 없는 시리즈 최초작들을 지칭하기 위한 단어.) 애니메이션이 갖는 핸디캡과 이를 타개하고자 취한 것으로 보이는 방향을 생각해 보고, 이어 선샤인 애니메이션 1화를 통해 이 애니메이션이 걸어갈 것으로 예상되는 경로를 나름대로 예상해 보았더랬습니다. 이에 따르면 제가 예상할 때 이 시점에서 선샤인은 다음과 같은 부분들이 눈에 띄었습니다.
- 러브라이브! 애니메이션은 족쇄가 되는 전제가 있다. 이건 선샤인도 달라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 이미 '스쿨 아이돌'이고 '9인으로 이뤄진 그룹'이란 전제를 깔고 들어가는 애니메이션이란 점. 다시 말해 '스쿨 아이돌'이란 것의 본질에 대해선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서 + '스쿨 아이돌'이 되어 자아 실현 할 거야! < 이 뜬구름 잡는 직종이 됨을 성공으로 여기는 캐릭터를 내보내야 한다는 점.
- 어지간한 능력자가 아니라면 족쇄를 찬 상태로 그럴싸한 진지함을 유지하기 어렵다. 그런데 선샤인은 1화부터 진지하려 든다.
: 스쿨 아이돌 활동을 하려는 이유에 대해, 전작인 무인처럼 '학교를 구할래'란 황당하지만 알기 쉬운- 그래서 유머러스하게 채색하기도 어쩌면 편한- 이유가 아니라 '자아 실현'쯤으로 정리할 수 있는 진지한 멘트를 하는 점. 즉, 말도 안 되(어 보이)는 수단을 가지고 말이 되는 진지한 목표를 달성하려는 거대한 격차를 이해시키려는 방향을 잡았다는 점.
- 부담을 줄이기 위해 '목표'를 바꾼 것은 좋은데, 여전히 '목표'에 이르는 길이 제시되지 않은 상태
: 치카는 '아무것도 아닌 자신이, 뭔가 했다는 걸 남기고 싶어서'라는 이유를 들어 스쿨 아이돌 활동이란 걸 한다는데 이것은 1. 위화감을 그나마 줄이고(학교 폐교를 막는다 + 스쿨 아이돌이란 두 초 위화감스런 소재가 퓨전까지 한 것이 러브라이브! 무인 최대의 난점이자 모든 무리의 시작이었으니) 2. 이야기 개연성 측면에서 좀 더 그럴싸하다는 인상을 줄 여지를 제공하긴 합니다. 그렇지만 앞서 논한대로의 난점, 그러니까 '스쿨 아이돌' 활동이란 게 대관절 무슨 이유와 모양새로 자신을 빛나게 하는 건지, 자아 실현을 시켜줄 건지 그것에 대해 선샤인 애니메이션은 제시할 수 있을려는지?
이후 일단 13화로 끝을 맺은- 이게 완전히 끝난 거라고는 생각하기 어렵지만 아무튼 한 호흡을 끝낸 건 사실이므로- 선샤인 애니메이션이 이 건들에 대해 어떤 답을 했는지, 개인적으로 생각해 본 그 점에 대해 논해 보는 게 본 게시물의 본론이 되겠습니다.
2. 본문
A. 선샤인 애니메이션에서 예상되던 것들
일단 선샤인 애니메이션은 이 브랜드의 발족 시기에 비추어 다소 빠른 듯한 애니메이션화에 대한 일종의 변명(?)이 필요했을 거라 보입니다. 또한 전작인 무인 브랜드 활동의 좀 황망한 맺음과 그에 따른 팬들의 혼란/어리둥절/어쩌면 분노나 실망을 다독일 필요가 있었다보니 러브라이브! 무인의 그림자를 다소 드리울 필요가 있었을 것이며, 이걸 너무 추하지는 않게 '스포츠 석세스 스토리의 후속 시리즈물에서 아주 흔하게 채용되는' 모양새로 미화하며 시작부터 끝까지 종종 되새기는 식으로 부연하는 것은 나름대로 그럴싸한 모양새였다고 생각합니다. 프로 선수였던 아버지를 동경하여 아들이 야구공을 잡는다는 식의 서두와 훈련이 힘들고 그 길에 회의가 들었을 때 아버지를 떠올린다는 식의 전개는 진부하지만 효과적이니 오래 쓰인 거고 오래 쓰였으니까 진부한 거니까. 이 부분은 1화에서도 이미 언급된 바를 통해 추정했을 때도, 그리고 13화까지 실제로 보았을 때도 속속들이 구현되었고 일단은 애니메이션 제작진 나름의 배려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모양새를 받아들이는 측의 감상이야 다들 다르겠지만.
단지 문제는 1화부터 그림자를 드리운 무인 때문에 다음과 같은 우려가 추가되었다는 것이겠습니다.
- '뮤즈의 후광을 빌려 어설프게 스쿨 아이돌은 그냥 빛나는 것이라고 얼렁뚱땅 치고 지나가는 건 아닐까?' : 시작부터 폐교 저지라는 단순하지만 아무튼 눈에 보이는 목적이 아니라 '뮤즈에 대한 동경', '빛나고 싶다'는 이유로 시작한 스쿨 아이돌 활동을 어떻게 그럴싸하게 포장해 주느냐, 그럴 설명을 할 러닝타임과 능력이 있느냐.
- '결국 제대로 밝히는 것 없는 어설픈 진지함 때문에 이야기도 캐릭터도 못 잡고 어중간해지는 건 아닐까?' : 이 브랜드에 관심 있는 사람은 누구나 알고 있듯, 요새 대부분의 일본 TVA가 라노벨 홍보 영상으로 전락한 것과 마찬가지로 선샤인 애니메이션도 냉정하게 말해 선샤인 브랜드 홍보 영상일 따름입니다. 따라서 제작 목적은 확고합니다. '가상 아이돌 캐릭터 아홉 명을 어떻게든 사람들의 뇌리에 남게 만든다.' 그런데 자칫 진지한 정극을 추구하다 캐릭터팔이란 목적을 잃고 뒤늦게 캐릭터팔이를 어거지로 끼워넣다가 정극도 뭣도 아닌 어중간한 이야기가 되지는 않을까?
선샤인 애니메이션이 진짜 이야기적으로 진지하려 했다면 '자아 실현을 위해 스쿨 아이돌이 되겠다.'는 소리를 하는 게 아니라 우선 '스쿨 아이돌이 대체 뭔가, 그 실체와 그걸 통한 실질적인 우위점, 보상 이런 게 뭔가'를 먼저 최대한 그럴싸하게 늘어놔서 시청자들에게 납득시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입장에서, 1화의 치카의 발언이나 이후 초반에 해당하는 3화까지의 흐름- 요우, 리코가 나름대로의 이유로 참가하고 초반 매듭을 지었던 부분- 은 여전히 정말 중요한 건 얼버무리는 무인의 전략을 답습하되 무인만큼 기분 좋게 얼버무리는 게 아니고 뭔가 나사를 잘못 끼운 어색함이 혼재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었습니다. 즉, 능력이 안 되면 아예 진지해지질 말고 캐릭터 팔이에 최대한 열중하여 완벽한 써커스를 만들고/ 굳이 이야기를 납득시키려고 한다면 그럴만한 능력을 갖추는 게 좋다는 입장에서 볼 때는 고개를 갸웃하게 만들었다 이런 이야기. 이에 대해서는 본 게시판에서도 [ 러브라이브! 선샤인이 72분에 걸쳐 한 이야기의 부족한 점 ]이라는 게시글로 논해본 적도 있기도 합니다.
B. 그럼 실제 모양새는?
이후 선샤인 애니메이션을 13화까지 전부 본 시점에서 이 애니메이션은 개인적인 의문과 예상에 다음과 같은 모양새를 취했습니다.
- '스쿨 아이돌에 대한 설명, 스쿨 아이돌이란 직종의 필요성, 그게 왜 빛남으로 연결되는지에 대한 설명을 했는가?' : '아니오'
- 치카가 추구한 '빛남'은 무엇인지 설명을 했는가? : '네'. 단, 그게 시청자에게 이해가 되는지는 별개로 치고.
- 진지한 정극이 되었는가? : 위 두 가지 이유로, 개인적인 최종 판단으로는 '아니오'.
- 그럼 캐릭터 세일즈에는 충실했는가? : '글쎄요'. 하려고는 한 거 같지만 제대로 신나게 하질 못한 것 같아서.
그러니 결론은 뿌뿌- 데스와!... 가 아니라 그렇게 생각한 이유를 서술하는 게 인지상정이겠고 그게 이 항목의 목적입니다.
ㄱ. 스쿨 아이돌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나 설정 플랜에 대해 나오는 게 없는 건 따로 그렇게 생각한 이유를 서술하고 말고 할 것도 없고 그냥 사실. 단지 이게 왜 '빛나다'로 연결되는지에 대해선 11화부터 열심히 치카의 입을 빌려 말하기는 합니다. 그런데 치카의 말은 잘 생각해보면 꼭 스쿨 아이돌이 되어서 빛나는 게 아니라 학생 스포츠 중 그 어떤 종목으로도 가능한 일인 게 문제.
다시말해 치어 리더부를 했어도, 합창부를 했어도, 취주악부를 했어도, '포기하지 않고', '자아를 실현하고', '모두와 함께', '열심히 노력해서', '0에서 1을 만드는' 건 가능합니다. 오히려 스쿨 아이돌이라는 특활도 아니고 직업도 아닌 정체불명의 활동이 저 깔끔쌈빡한 정의에 접근하는 걸 시종일관 흐릿하게 만들고 있을 따름. 결과물을 내겠다는 건지, 결과란 건 인기를 얻겠다는 건지, 퍼포먼스를 갈고닦아 보여주는 걸로 만족하겠다는 건지. 그럼 대체 왜 1이라도 좋아해주는 사람수에 집착하고 있는 건지, 치카의 이야기를 들은 주역 9인의 그룹 아쿠아 멤버들은 다들 이해한 모양이지만 시청자의 한 사람인 저는 도무지 이해도 공감도 어렵군요.
ㄴ. 치카가 추구한, 당연히 제작진이 말하고자 했던 선샤인 애니메이션 최대의 명제 '빛나다'는 무엇인가에 대해선 일단 정의하자면 전술한 내용(포기하지 않고~ 0에서 1을 만드는 < 이 부분)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렇게 다 해낸 자신이 빛난다라고 생각하는 거야 자유이고 제3자가 볼 때도 최소한 목표를 향해 매진해 가는 모습은 그 목표가 설령 정체불명의 학생 아이돌 쇼에 나가는 거라고 해도 폄훼할 기분은 들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게 빛나는 것임을 되도록 수많은 시청자에게 이해시키려 하느냐는 것인데, 최소한 제가 볼 때 치카와 제작진은 이걸 제대로 하려고 들지 않습니다. 이걸 얼마나 그럴싸하게 끊임없이 잘 전달하느냐란 의무가 있었는데- 그 의무도 제작진 자신들이 설정한 것입니다. 무인처럼 학교를 살리자, 내가 즐거우니 하자, 같은 단순함과 써커스틱한 모양새를 깔지 않고 일부러 1화부터 '빛나자'는 목표를 진지하게 말했으니까- 선샤인 애니메이션 13화에 걸쳐 치카가 추구한 '빛남'은 여전히 모호할 따름입니다. 그러니까 '포기하지 않고', '자아를 실현하고', '모두와 함께', '열심히 노력해서', <<< 스쿨 아이돌 활동으로 >>>. '0에서 1을 만드는' 게 대체 왜 '빛나는' 걸까요? 치카야 그게 빛난다고 설정했으니까 당연하다고 믿겠지만 창작물에서 캐릭터만 자기 정의를 믿고 나가면 독자는 소외됩니다.
ㄷ. 상기 ㄱ과 ㄴ을 열심히 추구하여 설명하고 궁구했다면 충분히 진지한 정극이 될 수 있었던 선샤인 애니메이션은 갑자기 '폐교 저지'라는 어디서 많이 본 목표가 중간에 슬라이딩하여 끼어들면서 혼란스러워집니다. 중후반, 3학년들이 주역 그룹에 참가하는 이유를 부여하기 위함인지 시종일관 치카만의 '빛나다'만으로 많은 캐릭터를 움직이는 게 힘들었는지 둘 다 인지 몰라도 슬그머니 끼어 든 이 목표는 '빛나다'란 뜬구름 잡는 것보단 눈에 보이게 설명하기 쉽다는 점은 강점이고 아마 '빛나다'를 보다 실체를 가진 결과물로 보여주기 위한 장치였을지도 모릅니다.(폐교가 진짜 저지가 될지, 아니면 저지가 안 되더라도 노력은 했다는 걸로 만족할지는 아직 모르지만)
하지만 이 '뭔가 실체를 가진 목표'가 끼어들면서, 진지하게 정극을 추구하려고 했던 것 같은 구름 위의 신선 같은 모양새는 다시 속세 레벨로 떨어지고 시청자들은 '또 폐교 저지야?'라고 한숨을 쉬면서 폐교를 저지할까 못할까에 신경쓰게 되버립니다. 애초에 선샤인 브랜드 기반 설정처럼 '폐교가 확정된 학교'에서 마지막 유종의 미라든지 의미있는 활동을 남긴다든지 하는 식이라도 충분히 '빛난다'라는 주제 의식과 연결지을 수도 있고 어쩌면 좀 더 아름답게 포장할 수 있는 이야기는 이로써 다시 '이 광대놀음이 통할까 통하지 않을까'란 레벨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 때문에, 애써 얼버무려 놨던 '스쿨 아이돌'에 대해 사람들이 다시 생각하게 만듭니다. '스쿨 아이돌이 어떻게 인기를 끄는 것이고, 어떻게 끌기에 진학 희망자가 어떻게 모인다는 걸까?'란 원초적 의문을 굳이 얼버무려 놨는데 왜 또 생각나게 만드는 걸까요.
3학년 세 사람이 초중반까지의 모습대로 조언자, 나름의 건조한 방관자, 다소 발랄한 참견자 정도의 포지션으로 끝까지 남고 주역 그룹에 참가하지 않았다면 굳이 폐교 카드를 꺼내지 않아도 되고 캐릭터성 어필이나 이야기 셋팅에도 훨씬 여유가 있었을 것입니다만 안타깝게도 선샤인 애니의 주역 그룹 아쿠아는 이미 9인 그룹으로 설정된 상황이라 제작진에게 그런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 핸디 속에서 3학년들의 참가를 꽤 그럴싸하게 만든 것은 좋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위해 선택한 카드는 글쎄올시다 스럽습니다.
ㄹ. 캐릭터 세일즈는 이 애니메이션의 절대 목적이자 대전제입니다만, 상기 ㄷ으로 연결되는 문제를 낳는 핸디캡이기도 합니다. 캐릭터의 기이한 행동과 특이한 모양새나 몸짓으로 캐릭터성을 설파하고 시청자들의 기억에 남게 하려는 시도는 당연히 한정된 러닝 타임에서 진지한 이야기를 할 시간을 빼앗습니다. 하지만 이걸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선샤인 애니메이션에서 주역 그룹 아쿠아 멤버 9명에 대한 캐릭터성 어필은 물론 빠지지는 않았다고 보입니다. 하지만 그 어필 빈도가 잦았건 그렇지 않았건, 공통적으로 뭔가 '신선하지 않다' 그리고 '신나지 않는다'는 감상이 남았습니다. 물론 이건 제 기준이니까, 그게 나쁘다고 판결하는 요소가 되지는 않습니다. 단지 ㄱ에서 내린 판단과 함께 계속 생각해볼 여지를 낳았을 뿐입니다. 즉, ㄱ에서는 '이야기의 전달성', 여기서는 '캐릭터의 전달성'에 대해 각각 애매하였다는 이야기입니다.
C. 선샤인의 캐릭터적 신선도?
앞선 항목의 ㄹ에서 연결되는 이야기. 전작인 무인은 시종일관 써커스 같은 이야기 전개 속에서 여기저기 구멍이랄 헛점도 많고 그 한편으론 '별달리 심각한 이유도 없이 시도때도 없이 화끈하게 망가지는' 우미 같이 스토리 텔링할 시간을 줄여서라도 캐릭터에 올인하는 것은 우뚝 솟은 봉우리 같은 특성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무인의 캐릭터 셋팅이나 소위 '모에력 설정'이 무슨 엄청나게 획기적인 건 아니었는데 그래도 많은 사람들에게 어필한 것은 '학교 생활을 비교적 묘사할 여유가 있는 스쿨 아이돌이란 셋팅의 얼마 안 되는 장점'과 '학생이면서도 아이돌로 나서는 일종의 기묘한 갭' 같은 걸 들고 나온 캐릭터들이 없었다는 신선함- 프로 아이돌물은 '학교 생활 묘사는 거의 없거나 뒷전이고 '아이돌'이란 묘사만 길었으니까- 에도 이유가 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익숙한 모에 요소 + 학교 일상 + 아이돌이 적절히 블렌딩 되어 화학반응을 일으켰달까.
하지만 이런 무인의 뒤를 이은 선샤인에서 이미 이 강점은 퇴색된 거나 다를 바 없습니다. 학교에서 아이돌이라는 일종의 기상천외한 설정의 힘은 이미 전작의 캐릭터들이 모두 흡수해 버린 상태인 것입니다. 따라서 선샤인 캐릭터들이 부각되려면 뭔가 더 신선한 무언가를 들고 나오거나 아니면 최소한 훨씬 숙성된 모습을 보였어야 하지만 아무래도 선샤인 애니의 캐릭터성 어필은 전작을 그냥 엇비슷하게 답습하고 있는 모양새입니다. 진지하게 하려고 했던 이야기와 엮어서 캐릭터성을 부여하려던 3학년 세 명의 시도는 좋았다고 봅니다만(실제로 그 정점인 9화가 긍정적인 의견이 많은 것은 이 셋의 캐릭터 메이킹이 1화부터 조금씩 베이스를 까는 형태로 쌓아올려졌기 때문일 것이고) 불행히도 다른 여섯 명의 주역들은 3학년 셋 만큼의 기반을 쌓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마구 망가지는 것도 아닌 좋게 말해 얌전하고 나쁘게 말해 칙칙한 캐릭터성 어필을 보여주는 느낌이라. 또한 3학년 셋에 한해서 말해도 이야기적으로 정합성을 보여주는 캐릭터란 것과 캐릭터성의 어필은 좀 다른 문제입니다. 전자를 충족시키는 건 '수긍', 후자는 '호감'을 원하는 제스처라고 하겠습니다. 수긍이 호감으로 갈 수는 있지만 거기엔 어떤 촉매와 충분한 연출/ 대사/ 화면 노출의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특히 어필 시간이 모자란 캐릭터 세일즈물에선 쉽게 추구되지 않고 유려하게 추구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또다른 문제를 낳았는데, 바로 선샤인 애니메이션 자체가 '별 굴곡 없는 평지'같은 컨텐츠가 되었다는 것. 전술했듯이 전작인 무인은 이야기 측면에서 구멍 투성이였지만 캐릭터 어필이나 '써커스를 보는 듯한 분위기'란 측면에선 우뚝 솟아서 개인적으로는 보다보면 시종일관 상당히 오르락내리락 청룡열차 타는 기분을 제공했습니다.(이건 또다른 의미로 세일즈에 장점도 되었는데 이야기의 헛점에 대해 지적하는 측이나 이를 변론하는 측이나 다같이 애니와 캐릭터를 되새김질 하게 되고 종래에는 다들 컨텐츠를 소비하는 층으로 진입시킨다는 부가효과가 있었습니다.) 헌데 선샤인은? 이야기 측면에서 이른바 '족쇄'에도 불구하고 건투한 건 사실이며 몇 가지 아주 근본적인 문제를 회피한 것 외엔 전체적인 모양새는 그럴싸합니다.(최소한 캐릭터 행동 양식이 말은 되게 만들어 놨습니다.) 그러니까 전작의 구멍들을 묵묵히 메워 놨지요. 그런데 그러다보니 캐릭터에 대한 부각이 상대적으로 평평해져서... 제게 있어 선샤인 애니메이션은 마치 평지를 걷는 기분을 제공하더군요. 단점도 많지만 강점을 튀게 만드는 메이킹이 아니라 단점도 강점도 없는 식으로. 이게 나쁘다는 건 아닙니다. 다만 자극과 고양감이 별로 없고 가끔 고양되려다가도 툭툭 끊기는 부분들이 있었다는 감상일 따름이지요.
D. 선샤인만의 시도들
다만 개인적으로 선샤인 애니메이션은... 말하자면 자극과 고양감은 별로 없어도 마치 가정 주부의 요리처럼 평범하게 먹을 수 있는 음식 같이 되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전작인 무인이 호불호가 많이 갈리는 상당히 독특한 요리였다고 한다면 선샤인은 마치 집밥 반찬 같은 음식이라는 거지요.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 선샤인은 라이브에 일종의 스토리 견인감을 부여하고자 한 것 같다.
= 중도에 중지하고 다소 어설프나마 심리 표출이 되는 3화의 라이브라든가, 그 외에도 선샤인의 라이브는 에피소드의 집대성이라는 느낌이 들도록 설계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고민, 방황, 다툼 같은 게 모두 모여 라이브로 승화된다 이런 느낌. 덕분에 라이브가 캐릭터와 그룹, 노래 및 춤 어필의 최전선이 아니라 이야기의 매조지 같은 위치로 변화(혹은 그쪽 색채를 더 띄게)하였다.
- 라이브를 이야기 견인 영역으로 끌어오면서 동시에 무인과 달리 몇 가지 이야기 구성적인 핸디를 보완한다.
= 무인에선 없다시피 한 '악역'을 비교적 선명하게 설정, 이 '악역'을 통해 주역들이 대치되는 목표도 제시, 이를 통해 비록 '스쿨 아이돌'과 '폐교를 막는다'는 대전제는 여전히 와닿게 하기 어려워도 '악역'과 '현실적 장벽'을 대처하는 모양새만은 그럴듯하게 와닿게 만든다. 이런 느낌은 전작에 비해 상당히 현실적인 무대장치나 연출을 가미한 선샤인 애니의 라이브 경향에서도 피로된다.
여기에 덤으로 선샤인 애니메이션은 (이야기상)'현실적 장벽'을 전작에 비해 좀 더 선명하게(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 선명하게) 제시하면서 좀 더 전체적인 이야기를 그럴싸하게 만들려는 움직임을 보였다고 생각합니다. 이때문에 선샤인 애니메이션은 의도했건 하지 않았건 캐릭터성의 부각이 전작에 비해 상대적으로 희미해진 대신 형태가 아직 분명하지는 않은(악역과의 제대로 된 교전도 아직 없고, 나름의 주제의식의 설파 역시 진행형이며, 애초에 폐교 저지란 캐릭터들의 목적도 가타부타 결론이 나지 않았으므로) 이야기적 합일점을 일단 제시하여 그 속에 속한 캐릭터들을 덩달아 빛나게 보이려는 모양새를 취하고 있는 시도를 한 것으로 보이고, 최소한 이 점에서 나름대로 먹을만한 가정식이 되었다는 생각이 드네요.
이런 되메우기 작업을 통해, 선샤인 애니메이션은 굳이 아이돌에 열광하지 않더라도 캐릭터들의 기이한 행동거지를 재밌어하지 않더라도 나름대로 볼만한 구석이 있고 즐길만한 구석이 있는 애니메이션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전작의 후광이 아직 있으니 선샤인은 이야기의 여유를 갖고 캐릭터를 이정도만 굴려도(?) 된다고 생각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하여간 13화까지 본 시점에서 개인적으로 꼽는 선샤인 애니의 볼만한 점은 이 부분입니다. 다만 캐릭터 세일즈 애니로서 이것이 효과적인지 문제는 글쎄, 적어도 현 시점에선 판단하기 어렵네요. 대중의 기호에 맞는 최저한의 허들(소설에 있어서 이야기의 그럴싸함이라는 부분)은 통과했지만, 그게 기억에 남는 것이 되는지는 또 별개의 문제이니까요.
3. 결문
이 글은 선샤인 애니메이션에 대해 어디까지나 지극히 개인적인 관심사와 관점을 가지고 논한 것입니다. 여기에 우열미추의 판정은 없습니다. 다만 그러했다고 무감동하게 (개인적인 관점과 판단으로) 정의할 따름입니다. 다만 이 나름 장문의 글을 작성해 볼 생각이 든 이유는 선샤인 애니메이션이 뭔가, 전작인 무인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보다, 신나지를 않았기 때문이긴 합니다.
물론 이러한 감상의 근저에는 개인적인 성향이 반영된 것이고 보는 분에 따라선 선샤인 애니메이션의 작법이 전작에 비해 훨씬 안정적이어서 좋았다는 감상도 얼마든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극, 고양감, 카타르시스를 일정치 이상 원하는 사람도 있고 아닌 사람도 있고, 그 일정치의 기준도 사람마다 다르니 거기에 대해 굳이 '덜 신난다'는 제 감각을 주입시키려는 생각도 물론 하지 않습니다. 다만 굳이 아쉽다면 아쉬운 것은... 전작인 무인이 아무도 누군지 모르는 상황에서 몸개그도 불사하며 인지도를 올렸던 것과 달리, 선샤인은 이미 전작의 후광으로 인지도를 벌어놓은 상태라서 뭐랄까 너무 우아한 입장을 고수하는 느낌이란 점이겠습니다. 남들 앞에서 노래와 춤을 보여주는 아이돌이란 직종은 어딘가 진지하게 용감하지 않으면 안 될 거라고 생각하는 평범한 일반인 입장에서 볼 때 선샤인 애니메이션 속 캐릭터들은 뭐랄까, 너무 점잖습니다.(적어도 무인 애니메이션을 보고 나서 이걸 보면 그런 생각이 듭니다. 저만 그런지도 모르겠지만) 이 캐릭터들의 행동거지를 통해 서술되는 이야기의 흐름 역시도 평범한 가정식처럼 좋게 보자면 익숙하지만 나쁘게 보자면 무덤덤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차피 이 애니를 보는 모든 사람은 결국 아홉 명이 아쿠아란 그룹을 형성하리란 결론을 알고 보는 것입니다.(진짜로 아무것도 모르고 채널 돌리다 접했더라도 매 화마다 보여주는 오프닝만 봐도 알 수 있는 노릇) 따라서 이 애니가 설정한 방향으로 보이는 이른바 '스포츠 석세스물'에서 어떤 캐릭터가 아군이냐 적이냐 여부로 중반까지의 긴장감을 유지시키는, 그리고 그것을 통해 이야기의 상업성(긴장감을 잡아주는 요소가 하나라도 많은 이야기가 잘 팔리는 건 동서고금에 당연한 것입니다.)도 견인하는 모양새를 취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 취할 수 있는 것은 어차피 역사적 결론을 다 알고 보지만 그 행적에 다이내믹하게 살을 덧붙여 흥취를 자아내는, 예를 들면 삼국지연의식 전개일 텐데 선샤인 애니는 이런 식의 주역 캐릭터 개개인의 스타일을 부여하는 것과 그것을 통해 이야기 전체의 흥미까지도 견인하는 시도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게 딱히 개성적이거나 뛰어나게 느껴지지는 않았습니다. 적어도 제가 볼 때에는.
선샤인은 무인의 단점들을 전부 메꾸려고 시도한 걸로 보입니다. 유복한 애들이 적도 굴곡도 없이 애매모호한 목표를 위해 이리저리 뛰는 게 영 어설프다는 사람들을 위해, 천둥 벌거숭이들이 약간의 뻘밭에서 구르다 나름의 목적을 찾아 매진하는 모양새를 갖추었고 이 과정에서 제작진은 이러한 일련의 이야기가 뭔가 그럴싸하게 말이 되도록 노력하는 모습도 보여줬습니다. 헌데 약점은 대충 다 보강한 거 같은데 그러다보니 확 끌리는 특징마저도 모호해진 느낌입니다. 굴곡 있는 산길은 짧아도 기억에 오래 남지만 평지를 걸은 것은 엥간히 길게 오래 걷지 않는 한 기억에 남지 않는 것처럼, 단점을 대충이나마 때운 선샤인 애니는 그때문에 이야기도 캐릭터도 '그냥 적당히 잘 됐네' 정도이고 자신들이 추구한 '빛남'은 발견했을지 몰라도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는 현실의 '빛남'은 제대로 취득했는지 다소 의문이 들었습니다. 어쨌든 전 아직 치카가 추구한 '빛나다'를 수긍하지 않습니다. 다만 스쿨아이돌의 모호함만큼이나 그런가보다 하고 일단 제쳐두고 있을 뿐.
작품외적으로 좀 원론적인 부분을 건드리자면,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선샤인을 비롯란 러브라이브 브랜드 애니의 최대 장점은 '(스쿨 아이돌이라는)이런 엉뚱한 일을 하는 데도, 바보 취급하지 않고 받아들여주고 같이 즐기고 웃어주는 사람들이 있다 + 그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순진한 애들을 보면서 얻는 일종의 안도감이나 위안'이 아닐까 합니다. 이세계로 날아가 깽판을 치는 고등학생 이야기에 질색하지만 시간 때우기건 뭐건 소비하는 층이 생기는 것을 좀 우아하게 다듬으면 튀어나오는 게 아닐까 싶은 저러한 심리는, 좀 더 확대하면 일반 사람들이 보기엔 자못 엉뚱한 문화에 열광하는 서브 컬처 마니아로선 스쿨 아이돌만큼이나 일반인에게는 설명하기 어려운 정체불명이고 엉뚱한 취미 생활인 이 취향을 인정받고 싶어하는 심리가 크건작건 대부분 존재하는데, 무인 애니는 시종일관 그 바람이 이뤄지는 모습을 잘 그려내고 거기서 위안을 얻는 심리를 찌르는 게 아닐까 하는 해석도 가능한 게 아닐까 싶었습니다만... 선샤인은 이걸 염두하고 만들고 있는 걸까요?
현실성, 그럴싸함을 보강하려고 노력한 건 알겠습니다. 단점으로 지적된 걸 보강하려고 라이브 연출만 해도 뮤지컬 타입의 환상적으로 확확 변하는 무대는 별로 없습니다. 하지만 이때문에 이미 '환상'의 약을 먹어버린 기존 러브라이브 브랜드 팬들과 시청자들을 얼마나 '선샤인'의 (그나름의)현실색으로 녹이려는 시도가 효과가 있을지, 제대로 약효가 들을지, 의미가 있을지는 좀 의문스럽습니다. 이 방향이 전작만큼 많은 사람에게 맞는다면, 선샤인도 그만큼 혹은 더 흥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그건 그 때 가서 생각해 볼 일이겠지요. 어쨌든 저는 러브라이브! 선샤인!! 제작위원회에 투자한 바도 없고 이해관계도 없습니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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