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천천히 피는 꽃
- 루비, 되고 싶어(하편)
- 8인의 정원사(상편)
- 8인의 정원사(중편)
- 8인의 정원사(하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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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해치웠습니다.
루비의 눈꺼풀을 덮치듯 밀려오는 수식의 압박을 어떻게든 견뎌냈어요.
도중에 포기하고 엎드리고 싶은 생각이 몇 번이나 들었지만, 생일을 맞이한 오늘부터는 지금까지의 루비와는 달라지겠다고 마음 먹었으니 힘을 냈습니다.
좌표평면에 이차함수 그래프를 그리는 수학교과서의 문제에서는 루비도 모르게 뮤즈의 뮤를 그리고 말았지만 말이죠. 하...수학 싫다아.
「루비쨩, 그럼 지는 AZALEA의 연습으로 먼저 가보겠어유.」
루비가 짧게 한숨을 쉬고 있으니 어느새 가방을 정리하고 갈 채비를 마친 하나마루쨩이 말을 걸어옵니다.
멋진 언니분들이랑 유닛이 된 걸 좋아했던 마루쨩은, 루비만큼이나 수학시간이 끝나는 걸 기다려왔거든요.
'엄청 미인이고 아름답고 왠지 꽃 향기가 나유' 하며 언니와 카난씨와 함께 첫 유닛연습을 마쳤던 하나마루쨩의 표정을 루비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속으로 두근두근 하고 있을 거에요.
「응, 마루쨩 연습 열심히 해.」
「즈라마루 벌써 가는 거야? 요하네도 슬슬 준비해야겠네.」
「루비쨩, 요시코쨩 나중에 봐유.」
마루쨩이 답지 않은 종종걸음으로 뒷문을 나가 사라집니다.
힘내, 마루쨩. 루비는 마루쨩이 긴장하지 않기를 마음 속으로 기도했습니다.
마루쨩이 가버리자 루비와 마찬가지로 마루쨩을 배웅했던 요시코쨩은 '그럼, 나도' 하며 가방에서 망토를 꺼내 몸에 두릅니다.
오늘은 Guilty Kiss가 요시코쨩의 자랑이자 심볼인 타천사 컨셉으로 포즈연습이라도 하려나 봐요. 루비는 궁금함에 말을 겁니다.
「요시코쨩, 반에서부터 입고 가는 거야?」
「리틀데몬 4호여. 타천사 요하네님이라고 불러 주지 않겠어?」
아...우쭐대기 시작했네요.
그래도 이럴 때에 요시코쨩은 순수하게 즐거워보이니까 루비도 어쩐지 기분이 좋습니다.
「으...으응. 요..요하네님도 지금부터 유닛연습에 가나요?」
「킄킄킄. 이 요하네가 몸소 Guilty한 Kiss를 전세계에 퍼뜨리러 가는 거야. 리리랑 마리는 내가 없으면 딸기가 빠진 쇼트케잌이니까 말이지.」
반응을 보니 요시코쨩도 마루쨩만큼이나 오늘의 유닛 연습을 기다려 온 모양입니다.
요시코쨩은 특히 Guilty Kiss의 이미지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으니, 더 기쁘겠죠.
만나기도 전부터 의상을 차려입는 걸 보면 틀림없습니다.
「그럼 강림을 기다릴 불쌍한 리틀데몬들을 위해 요하네님은 여기서 이만.」
팔을 크게 벌렸다가 반짝☆하는 포즈를 끝으로 요시코쨩도 문으로 발걸음을 옮깁니다.
「그래, 요시코쨩. 연습 힘 내!」
「그러니까.」
요하네라구! 라구! 교실 밖으로 사라지는 망토를 뒤로, 요시코쨩의 마지막 말이 복도에 메아리쳤습니다.
한껏 들떠있는 목소리.
어째서인지 신나게 운동장을 뛰어다니는 요시코쨩을 상상하며 루비는, 마루쨩에게 기도를 해줬던 것과 달리 요시코쨩에게는 잘 놀다와 하고 덧붙였습니다.
방과 후 교실에는 이제 루비만 남겨집니다.
소란스러웠던 요시코짱마저 사라지자 빈 교실은 더 조용하게 느껴졌습니다. 정적이 루비를 둘러쌉니다.
외롭지 않느냐구요?
확실히 루비는 외로움을 잘 타는 편이긴 하지만, 다행히도 오늘은 할 일이 많으니 걱정없답니다.
다음 의상에 대한 아이디어도 내야 하고 어떤 재질의 옷감을 사용할지 결정도 해두어야 하거든요.
그리고 치카쨩이 교실에서 기다려 달라고 했으니까 여기서 계속 작업하고 있으면 나머지 CYaRon!의 멤버들이 찾아와서 또 빈 교실을 떠들석하게 만들어 줄거에요. 루비는 그저 남은 시간을 유용하게 사용하기만 하면 됩니다.
「흥흥~♪」
의상 연구는 루비가 가장 좋아하는 일들 중에 하나입니다.
아이디어를 내는 시간은 그동안 좋아해오던 스쿨아이돌들과 마주할 수 있기 때문이죠.
그리고 언니와 다다미 바닥에 누워서 뮤즈에 대한 이야기를 하던 추억들이 생각나는 이유도 있어요.
루비가 그 기억들을 어느 정도 소중히 하냐면, 지금처럼 책상에 앉아 노트를 이리저리 돌려가며 아이디어를 스케치하고 있을 때 자동적으로 뮤즈의 노래가 흘러 나올 정도랍니다.
스케치를 하고 있는 루비의 옆에는, 책상을 가득 메우고 있는 디자인 잡지와 스쿨아이돌 책들.
모두가 그 시절에 구매해두었던 것들이라, 루비가 가장 즐거웠던 기억들을 떠올리는 걸 돕습니다.
작업을 하면서 루비는 텐션이 계속 올라 팬들에게 최고의 무대를 보여주는 Aqours의 미래를 상상했습니다.
누마즈축제에서 불꽃놀이와 함께 강변을 수놓았던 9인9색의 미숙DREAMER같은 라이브를요.
그 날, 유성이 거꾸로 날아가는 것처럼 커다랗게 쏘아올려졌던 폭죽과 심장소리에 일렁이는 밤공기.
코를 찌르는 화약냄새와 수면에 비쳐 부서지는 빛의 기둥.
그리고 시작되는 반주 속, 언니와 함께 무대에 선다는 말로 하기 힘든 벅찬 감정.
아직까지도 눈 앞의 일처럼 생생합니다. 미숙DREAMER는 처음으로 Aqours가 9명 전부 모여서 노래했던 곡이기에 루비의 머릿 속에 인상 깊게 남아있는가봐요.
「그 의상 한 번 보러 갔다올까?」
상상이 꼬리를 문 탓인지, 루비는 갑자기 미숙DREAMER의 의상을 보고 싶어졌습니다.
부실에 잠들어 있는 의상을 깨우면 그 때의 감동이 다음 의상에 대한 힌트를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치카쨩 늦어지는 거 같고...빨리 다녀오면 괜찮겠지.」
마음이 앞서서, 역시 부실에 갔다오기로 합니다.
1학년 교실에서는 생각보다 부실이 가까우니 금방 갈 수 있어요. 한 계단을 내려가서 연결통로만 건너가면 바로 강당입니다.
나가기 전에는 혹시 몰라 책상에는 '부실에 갔음'하는 쪽지를 적어둡니다. 이렇게까지 하지 않더라도 요즘은 스마트폰이 있으니 별 문제는 안 되겠지만, 루비는 자주 덜렁대서 매사에 조심하라고 언니가 몇 번이나 그랬거든요. 잘못돼서 치카쨩과 엇갈릴 수도 있으니, 여기서는 언니바라기 여동생으로서 착실히 말을 따르는 것이 좋겠죠?
자, 그러면 이 쪽지를.
「얏호, 루비~」
「삐,삐기이이잇!!!」
우와아아아아아~~앙!!
죄, 죄송해요, 죄송해요, 죄송합니다아아, 제발 살려주세요오오,
언니 도와줘!!!
「Oh my god~. 루비? 괜찮은거야?」
「........」
「루비? 정신차려!」
「......아.」
목 주변을 스치는 이상한 감촉에 깜짝 놀라 몸을 한껏 웅크렸던 루비가 뒤를 돌자, 거기에는 루비만큼이나 놀랬는지 눈을 동그랗게 뜬 마리씨가.
휴, 다..다행이다아.. 루비는 영락없이 귀신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미안미안, 루비가 책상에서 꼼지락거리고 있길래, 그게 so cute해서.」
데헷페로한 표정을 하고 있는 마리씨가 사과를 해옵니다.
천진난만한 얼굴로 볼 때 아마 책상 위에 쪽지를 올려두고 있는 루비를 놀래키려고 했었나봐요.
어깨에 스산한 기운이 느껴져서 으앙, 귀신이다, 살려주세요 하고 움츠러들었던 루비가 갑자기 바보처럼 느껴집니다.
「그, 그런데 어째서 여기에?」
「요시코가 오질 않아서 seek and find하러 왔지. 여기에는 루비 밖에는 없는 것 같지만?」
「요시코쨩? 요시코쨩이라면 한참 전에 나갔는데 이상하네요.」
「뭐, 이젠 아무래도 좋아. 루비를 만났으니까 그걸로 same-same인걸로 할래.」
마리 씨는 요시코쨩을 기다리다가 직접 찾으러 왔나봅니다. 말투가 여기까지 온 것 치고는 크게 찾을 기색이 아니지만 말이죠.
요시코쨩에게 연락하지 않고 '우선 몸부터 움직여 봤어♡' 하는 느낌인데다가 리코쨩은 홀로 남겨두고 온걸로 보이는데, 루비를 향한 얼굴에는 태평한 미소가 걸려있어서 혼란스러웠습니다.
그러고보니 마리 씨는 생각할수록 특이하면서도 동시에 또 그게 매력적입니다.
일개 학생이 이사장 자리에 오른 점이나 금발에 하프인 점도 그 특별한 점을 부각시키는데 한 몫 하지만,
그런 것을 둘째치고라도 주변에 휩쓸리지 않고 언제나 마이페이스인 점이라던가 장난기 있는 얼굴 뒤에 사실은 명가의 아가씨다운 위엄있는 모습을 숨기고 있다는 점,
때로는 진지하게 감정을 올곧게 전달한다는 점 등. 사람들을 사로잡는 마력을 많이 갖고 있어요.
팬들을 열광시키기 위해 아이돌에게 필수인 이런 다채로운 매력들이 루비는 탐이 납니다.
「이게 new costume인거야?」
「아직은 그냥 그려보고 있는 단계에요.」
상급생을 향한 루비의 반짝반짝한 시선에 싱긋 웃어 보인 마리씨가 루비의 스케치를 들여다 봅니다.
고스로리 풍의, 요시코쨩이 좋아할만한 의상인데 마리씨도 꽤나 마음에 든 기색이었습니다. 어쩌면 같은 유닛 내의 멤버는 서로를 닮아가는 건지도 모르겠네요.
그건 그렇고 요시코쨩도 참, 그렇게 신나서 망토까지 휘두르며 나갔는데 도대체 어디로 가버린 걸까요. 정말로 운동장에 놀러갔나?
...아, 맞다. 어차피 나가려고 했으니까 마리씨와 같이 요시코짱을 찾아보면 되겠네요. 요시코쨩이 오늘 등교할 때 Guilty Kiss 연습이 엄청나다고 자랑했었으니 견학과 구경도 할 겸 해서요.
「저,,그것 말고는 아직 새로 그린 게 없어서...일단 같이 나가요. 루비는 지금 부실에 갈까 하고 있었거든요. 요시코쨩 찾는 것도 도울게요.」
「으, 응? 아니야아니야. 이제 요시코는 상관없어. 그래, 상관없으니까...hm...어쩌지...」
「...?」
응? 이게 무슨 일일까요. 마리씨가 말을 삼켰습니다.
눈썹은 있는대로 찌그러져 고민스러워 보입니다.
방금 전에 루비가 말실수를 저지른 거 같지는 않았는데...머리를 굴려봐도 뭐가 마리씨의 미간을 찡그리게 만드는지 짐작이 가질 않네요.
...설마, 요시코쨩에게 문제가?
루비는 걱정이 되어서 물어보기로 합니다.
「저기...마.」
「루비쨩?! 그리고 마리? 미안한데 잠깐 도와줄래?」
「삐!...아, 아, 안녕?」
「oh?! 카~난!!」
마리씨와 루비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정적을 깨고 난데없이 복도쪽 뒷문에 카난씨가 고개를 빼꼼하며 나타났습니다.
땀을 흘리며 '안녕!' 하는 카난씨. 어째서 카난씨까지 여기에? 루비의 머리가 카난씨의 포니테일만큼이나 빙빙 돕니다.
1학년 교실에 또 다시 상급생이 등장하다니. 루비가 여태까지 3학년 교실에 앉아 있었던 건 아니겠..죠?
그리고 다들 유닛연습을 하는 중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상하네.
「카~난! 무슨 일이야?」
마리씨와 루비가 여전히 문 쪽으로 고개만 내밀고 있는 복도 위 카난씨를 향해 나아갑니다.
가까이 다가가자 보이는 산더미만큼 많은 하얀 종이들. 카난씨는 손에 한가득 서류 같은 것은 끌어안고 있었습니다.
「실은 부실에 물품이 쌓인 선반이 무너져 내려서 말이지. 임시로 지금 학생회실로 옮기고 있는 중이야.」
용케도 얼굴이 보였구나 싶을 정도로 상당한 양에, 서둘러 종이를 건네받습니다.
루비가 1/4 마리씨가 1/4. 고작 1/4분의 양에도 무게가 무거워 루비는 휘청휘청할 것 같았어요. 나머지 절반을 다소 손쉽게 들고 있는 카난씨가 존경스러웠습니다.
「루비쨩, 들 수 있겠어? 너무 많으면 다시 줘도 상관없는데.」
「완전 괜찮아요.」
와아, 카난씨!
루비의 2배정도 되는 양을 들고서도 오히려 루비를 걱정해주는 마음씀씀이에 소소한 감동을 받았습니다. 카난씨가 많은 여성 팬들을 갖고 있는 것이 단숨에 이해가 되었네요. 상대방을 자연스레 배려하는 미남스러운 어투며, 무거운 짐도 나르는 힘이며 뭐 하나 빠지는 게 없습니다.
「카~난♡. 난 좀 무거운걸?」
「그만큼도 안들면 팔의 근력이 약해질거야. 그리고 나도 무거워.」
「에~이, 카난은 나도 들 수 있으면서.」
「잠깐, 마리. 그 얘기 지금 여기서 할 필요있어?」
「그렇게 터프하게 공주님 안기 할 수 있는 걸, 고작 종이 옮기는거 도와달라고 하면서 굳이 숨길 필요는 있구?」
「야!」
가시 돋친 짧은 고함과 함께 카난씨의 얼굴에는 붉은 기운이 맴돌았습니다.
방금 전에 도발은 두 강대국 사이에 끼인 중립국 루비마저도 동요할 정도였네요.
그래도 고개까지 푹 숙인 모습을 볼 때, 카난씨는 화가난 게 아니라 아마 부끄러워 하고 있는 것이겠죠.
그간 루비가 품고 있던 카난씨에 대한 이미지와의 갭에 놀라면서, 감춰왔던 언니들만의 일상을 엿본 것 같아 루비도 얼굴이 빨개질 것 같았습니다.
이쯤에서 서류로 얼굴을 가리는 편이 좋겠어요. 루비의 머릿 속에서 카난왕자님이 마리씨를 공주님 안기 하는 망상이 떠올려던 참이었거든요.
카난씨와 루비가 나란히 침묵하자 처음부터 의도했던 것인지 마리 씨는 별 말 없이 종이를 내려놓고 두 손으로 '잘먹었습니다'하고 합장.
그리고 히죽히죽 웃으며 고양이 입을 한 상태로 '그럼 난 실례!'하며 서류를 다시 주어들고 복도를 달려서 사라졌습니다.
흔히 말하는 게릴라전술이라는 게, 바로 이런 것일까요.
「...그, 그럼 가볼까.」
「..네.」
이후, '하하' 하고 웃음으로 쑥스러움을 털어낸 카난씨와 함께, 학생회실을 향해 걸었습니다.
'요즘, 수업은 어때? 재미있어?' 하고 묻는, 어른스럽고 믿음직한 카난씨가 금새 돌아왔지만, 그 전에 잠깐 씰룩거렸던 카난씨의 입꼬리를 루비는 놓치지 않았습니다.
마리씨가 우라노호시에 돌아온 것을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는 카난씨의 속마음을요.
서로를 위하는 두 사람의 끈끈한 우정이, 뉘엿 넘어가는 해가 그림자를 던지는 복도에 넘쳐 루비의 가슴에도 살며시 들어왔습니다.
무척이나 따뜻한 그 마음의 색에 행복감을 느끼며, 루비는 Aqours 멤버들 간의 우정도 카난씨와 마리씨만큼 시간에 지지 않는 영원한 것이기를 바랐습니다.
「거기에 두면 될거야.」
「OK~.」
학생회실. 회장인 언니가 학생들을 대표해서 학교의 업무를 보는 공간.
루비 같은 일반학생이 이곳에 찾아오는 경우는 드물지만 일단 방문한 학생은 누구나 왠지 모를 심리적인 압박감에 시달리게 되는 이 공간에, 오늘은 마리씨 카난씨와 함께 루비가 와있습니다.
그런데 안주인은 안 계시는 걸까요. 똑똑하고 노크를 해보았지만 아무 대답이 없는 학생회실의 문을 여니, 언니의 자리는 텅 비어있었습니다.
자리를 비운 언니를 대신해서 가져온 서류들을 세 명이서 차곡차곡 정리합니다.
어딘지 부회장처럼 느껴지는 카난씨가 책상 구석에 자리를 지정하자, 이사장님일 터인 마리씨가 그 주변에 놓인 온갖 다양한 서류들을 종류별로 나누고 서랍에 넣어 정리.
시키는 사람과 일하는 사람이 뒤바뀐 느낌이 들지만 이미 익숙하다는 듯이 움직이는 두 분 언니의 모습에 루비는, 언니가 바쁠 때의 학생회실은 줄곧 이런 형태였겠구나 하고 상상합니다.
예를 들면 학교에 보고 하는 일을 마치고 언니가 학생회실에 돌아왔을 때,
학생회부원도 아니면서 회실 내의 언니의 일을 분담해서 벌써 끝내 놓은 카난씨와 마리씨 두 분 언니가 손을 흔들고 있는 거에요.
그리고 그런 친구들을 향해, 눈가가 촉촉해진 걸 애써 숨기며 수줍게 미소 짓는 언니가 달려갑니다.
어서와, 다녀왔어 같은 평범한 인사 속에서도, 마음은 전부 통해 있어서 굳이 고맙다는 말을 꺼내지 않는 그런 관계일거라고 루비는 생각합니다.
「얘, 루비.」
「?」
「다이야는 후배들 사이에서 어떤 이미지야?」
보이지 않는 세 언니들의 관계성에 대해서 그리고 있던 루비에게, 서류를 다 정리하고 심심했던건지 마리씨가 질문해왔습니다.
'후배들 사이에서'라고 조건을 달아놓았으니, 일반적으로 동생들에게 인기가 있나 없나가 궁금한걸까요.
빙긋하고 웃는 마리씨의 얼굴에는 자연스러운 보조개가 떠올라, 어딘지 장난 궃은 표정이 된 채로 답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음...그게.」
「그게?」
말끝을 흐리면서 루비는 다시 생각에 잠겼습니다.
여동생으로서 학교에서 만나는 언니는, 평상시의 루비를 위해 존재하는 사랑스럽고 자상한 언니는 아니에요.
엄격하게 루비의 개인적인 공부를 봐주던 귀신선생님도 아니죠.
여기에 있는 언니는..어느쪽이냐면, 하급생들에게 존경받고 선생님들에게도 똑부러지게 도움이 되는..만화책 속 인물 같은 존재?
유능하고 성실한 모범생이라고 하면 되겠네요. 아마, 그게 1,2학년들이 느끼는 언니에 대한 일반적인 이미지일 것입니다.
게다가 학생회장이라는 중책 때문인지, 학교 여기저기에는 '쿠로사와 다이야'라는 이름 자체에 존재감이 녹아 있습니다.
그걸 느낄 때마다 루비는 '그 우수한 사람이 내 언니에요.' 하고 자랑하고 싶어져요.
언니에 비해 상대적으로 초라한 루비가 여동생이라는 것이 드러나, 다른 사람들이 언니마저 흉볼까봐 걱정되기도 하지만요.
「모범생일까요?」
「역시 그렇겠지?」
「..저...3학년 선배들은 어떤가요?」
예상했다는 듯한 대답에 루비는 역으로 동급생들이 보는 언니는 어떤지 물어보았습니다.
이건 줄곧 궁금했던건데...가족으로서 왠지 알고 싶은 그런거 있잖아요, 밖에서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하는.
루비가 없는 동안 언니가 학교에서 보냈던 2년이라는 기간을, 루비는 들여다 보고 싶습니다.
「hm...나는 여기에 오랫동안 없었으니까 동급생으로서는 말하기 좀 그렇지만... 친구로서 내가 아는 다이야는 믿음직하고 부지런해.」
「부지런하지. 동급생들이 볼 때는 뭐든 잘 해내는 노력파이고. 친구로서는 모든 걸 맡길 수 있는 정도고.」음음
「..그리고 꼭 빼먹지 말아야 할 게 아주 가끔은 허당인 점?」
카난씨가 맞장구를 치고 나서 마리씨가 의외인 점에 대해서 얘기하자, 두 언니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마리씨의 높은 목소리와 카난씨의 다소 낮은 웃음소리가 조화스럽게 학생회실을 메웁니다.
아아, 그런데 모든 걸 맡길 수 있다는 건, 최고의 칭찬인거죠? 근사하네요.
귀엽게 약올리는 부분마저도, 세 분의 친분 속에서 존재하는 나름의 칭찬인 것을 알기에 기분이 좋았습니다.
「루비는 다이야를 많이 닮았을지도.」
「..네? 아..동생이니까요.」
「그런게 아니라, 두려운게 많아도 언제나 노력하는 점이나, 부지런하게 모두를 챙기는 점도 전부.」
「of course! 루비도 자신감만 더 있다면, 미래에는 다이야를 능가하는 학생회장이 될 거라구!」
「..저....」
「후후, 사실이니까 좀 더 자신을 믿어봐.」
으으, 부족함 투성이인 루비에게 언니를 뛰어넘는 학생회장이라니. 갑작스럽고도 너무 과한 칭찬에 루비는 몸이 배배 꼬이는 것 같았습니다.
물론, 루비가 가장 동경하는 사람은 언니이고, 그렇기에 루비는 언제나 그 등을 보며 좇아왔어요. 그러나 루비는 언니처럼 대단한 사람이 되고자 노력했던 것은 아니에요.
루비는 그저 어제보다 나은 자신을 꿈꾸며 조금씩, 아주 조금씩 하루를 쌓아 올리는 게 고작이었는걸요.
그저 조금 더 용기 있는 루비가 되기를, 쉽게 포기하지 않는 루비가 되기를...1초 전보다는 더 좋은 루비가 되기를 바래왔던 것 뿐.
그러니까 언니에게 가장 가까운 두 사람으로부터 이런 말을 들을 거라고는 조금도 생각치 못했습니다. 루비도 깨닫지 못한 사이에 되고 싶은 자신에게 조금 더 다가선걸지도 모르겠어요. 생일인 오늘부터는 힘내서 더 열심히 분발루비! 해야 겠습니다.
(위이이잉)
「oh? 라인 알림이? 드디어 때가 되었나봐, 카난!」
「우리의 역할도 여기까지네.」
「? 언니한테서 문자가 온건가요?」
「맞아, 그럼 루비쨩 아까 부실 가려고 했으니까 지금부터 같이 가볼까?」
응? '우리의 역할'이라는게 뭐지?
언니의 문자는 얘기해주지도 않고, 갑자기 부실로?
유닛활동을 내팽겨치고 온 카난씨나 마리씨 그리고 학생회실에서 했던 이상한 대화의 흐름에서부터 대부분의 사람들은 알아차렸겠지만, 이 때의 루비는 아직 눈치채지 못한 상황이었습니다.
조금 후에 있을, 더 감사한 일들을요.
부실을 향해 걷습니다.
어느새 태양마저 숨어버린 고요한 학교.
대부분의 방과후 활동이 끝나 조용해진 복도를 건너갑니다. 뚜벅뚜벅 발소리만 메아리쳐 조금은 쓸쓸합니다.
바깥은 가을로 접어든 탓인지 금새 어둑어둑해지고 바람마저 불어와 적막해진 풍경이 가득. 그 풍경이 어렸을 적 동화책에서 읽었던 마녀의 숲 같아서, 슬슬 무서워 지려는 루비에게 두 사람은 말을 걸어주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루비의 생일이네. 저녁에는 쿠로사와 가에 멤버들 모두가 모이는 거였지?」
「네! 두근두근하고 있어요.」
「dokidoki? 구체적으로 어떤 게?」
「언니가 어제 푸딩을 엄청 사온 걸 봐버렸거든요.」
「하하, 그런걸 봐버리면 확실히 두근두근하겠네. 루비는 푸딩도 언니도 엄청 좋아하니까.」
「에헤헤.」
다행이에요.
이런 으스스함 속에서도 곁에 누군가가, 그것도 루비의 생일을 기억해줄 정도로 루비를 잘 아는 누군가가 근처에 있다는 사실에 다시 두려움을 이겨냅니다. 부실에 다다른 발소리도 행진곡의 박자로 들릴만큼요.
「있잖아, 루비쨩.」
「?」
무슨 일일까. 부실 문을 몇 걸음 앞두고 카난씨가 멈춥니다.
「혹시 지금 당장 바라는 거 있어?」
그 질문에 왜인지 '아, 여기서 말하면 반드시 이루어져' 하는 강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눈 앞에 있는 두 사람이 딱히 램프의 요정도, 마법사도 아닌데 어째서였을까요. 루비는 그대로 소원을 빌고 싶은 강한 충동에 휩싸였습니다.
「아...」
그런데 막상 무언가를 빌려고 하자, 평소에는 그렇게 원하던 것들이 왜인지 중요하지 않게 느껴졌습니다.
꼭 입어보고 싶던 옷도,
갖고 싶던 스쿨아이돌 잡지도,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고
하나마루쨩처럼 용기있고 똑똑한 자신이 되고 싶다던가,
요시코쨩처럼 스타일 좋고 개성 있는 자신이 되고 싶다던가,
치카짱처럼 긍정적이고 밝은 미소를 전할 수 있는 자신이 되고 싶다던가,
요우짱처럼 운동신경이 뛰어나고 활기찬 자신이 되고 싶다던가,
리코짱처럼 다소곳하고 감수성 깊은 자신이 되고 싶다던가,
마리씨처럼 감정에 진실하고 매력있는 자신이 되고 싶다던가,
카난씨처럼 어른스럽고 믿음직한 자신이 되고 싶다던가,
언니처럼 성실하고 우수한 자신이 되고 싶다던가,
하는 생각들도 자연스레 사라졌습니다.
그 대신에,
학생회실을 나와서부터 끝없이 소원했던 마음 속 단 한마디가
가득 루비를 채워, 넘쳐 흐릅니다.
「...모두가 보고 싶어요.」
....그리고.
(드르륵)
(펑!! 펑!! 펑!!)
「「「「「「「「루비(쨩), 생일 축하해!!!」」」」」」」」
그 다음 루비가 본 것은 기적이 일어나는 순간.
그 찰나에, 부실로부터 루비에게 쏟아지는 모두의 축하였습니다.
「으우....모두!」
이건 꿈일까요. 오늘 아침에 늦잠을 잤었던 것 같은데, 설마 아직도 잠에 취해 있는 걸까요
창문으로 비치는 아침햇살같은 모두의 상냥한 미소가, 루비의 눈에 따스하게 스며들어 그 사이에서 뜨거운 빛이 비어져 나옵니다.
시야가 희뿌옇게 바래져, 보고 싶었던 멤버들이 몽클한 하나의 푸딩처럼 한데 뒤섞였습니다.
「루비!」
「...언니!」
「생일 축하해요!!」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언니가 무척이나 소중하다는 듯이, 몇 번이나 다정한 손길로 루비의 얼굴에서 눈물을 훔쳐갑니다.
다시 맑아진 눈동자에, 루비가 가장 원하고 있던 모두가 또렷이 되살아났습니다.
「생일 축하해, 루비!」
「루비쨩!」
「축하해유, 루비쨩!」
이런 행복한 꿈이라면 절대 깨지 않기를 바라며.
생일케잌의 촛불처럼 루비를 환하게 밝혀주는 모두의 얼굴에.
루비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소원을 빌었습니다.
「모두 정말 좋아해!!」
올 한 해도.
아니,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Aqours의 모두와 함께하는 루비가 될 수 있기를.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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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_ _) | 17.09.23 08:46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