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실이 가리킨 방향에는 거대한 불길 속에서 비틀거리는 루 아케르의 인영이 보였다.
아르실의 환상의 영향 때문에 괴로워하는 게 아니었다.
“크으으윽.”
루 아케르는 목을 부여잡은 채 괴로워했다.
아르실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쓰러진 가온에게로 달려갔다.
가온의 머리에 손을 대던 아르실의 입가엔 찢어질 듯한 미소가 번졌다.
“그래, 역시 그럴 줄 알았어, 역시 내 가온이야, 항상 내 기대를 넘는 성과를 보여줘.”
가온은 몽혼초의 효력이 담긴 나무 조각을 루 아르케에게 스치게 했다.
어떤 공격도 먹히지 않는 괴물이지만, 방심했을 때 먹힌 몽혼초의 효력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안 그래도 미르와의 싸움으로 지친 몸에 몽혼초의 효력까지 더해졌다.
지금 루 아케르는 상당히 무리하고 있었다.
아르실은 고통어린 신음을 하는 가온에게 속삭였다.
“잠깐만 눈을 감고 쉬고 있어, 곧 모든 게 끝날 거야.”
“……미르.”
“일단은 최선을 다해볼게.”
아르실은 따뜻한 미소를 지은 채 가온의 눈을 감겨줬다.
완전히 눈이 감긴 가온은 눈이 감긴 뒤에도 조용히 중얼거렸다.
“미르……미르.”
휘청거리는 루 아케르는 번뜩이는 눈으로 땅에 서 있는 모든 이들 노려보았다.
전부 자신에게 대적하는 벌레만도 못한 놈들이다.
그런 벌레만도 못한 놈들에게 그는 한 방 먹었다.
이방인인 계집은 능력으로 자신을 잠시나마 환상에 빠뜨렸고 노인네는 그 틈을 타 자신의 목을 노렸다.
앞의 두 녀석의 건방진 행동에 분노했지만, 가장 열이 받는 건 노예 놈이었다.
겨우 나무 조각 하나에 찔린 것만으로도 이렇게 몸이 약해지다니.
원래는 안 통했을 계집의 환상에 당한 것도 노예 놈의 일격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루 아케르는 더더욱 분노했다.
“크으윽, 이 벌레 같은 놈들이, 모조리 다 태워 버려주마!”
그런 루 아케르에게 아르실은 태연히 다가가며 말했다.
“이제 그만하시지, 댁이 엄청 무리하고 있다는 거 알고 있다고.”
“시끄럽다, 건방진 계집, 그래서 어쩌라는 거냐? 내가 조금 지쳤다고 이대로 포기하고 도망갈 거 같냐?”
“그건 아니겠지, 하지만 적어도 서로 협상은 할 수 있을 걸?”
아르실은 싱긋 웃으며 가온을 가리켰다.
“가온을 줘, 그럼 미르 언니는 포기할 게.”
“뭐?”
“애초에 여기까지 부하들을 끌고 온 목적이 그거잖아? 미르 언니를 만나려고 말이야, 우리 이방인들 사이에서 네가 미르 언니에게 집착하고 있다는 건 익히 들었어.”
“네 년, 무슨 꿍꿍이냐.”
루 아케르는 흔들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매섭게 물었다.
잠시나마 자신에게 환상을 일으킨 영악한 계집이다.
이것 또한 계략일 수 있을 터.
그러나 루 아케르의 생각과는 달리 아르실은 순진한 표정으로 간단히 답했다.
“꿍꿍이? 아르실은 그런 거 모르겠는 걸? 그냥 가져가 가온은 멀쩡히 두고 말이야.”
“진심으로 하는 소리냐? 내 여신 또한 데려가려고 여기에 온 게 아니냐?”
“아닌데, 난 가온을 구하려고 여길 왔지, 뭐 미르 언니도 구하면 좋지만, 아무래도 미르 언니까지 구하려면 너랑 목숨 걸고 싸워야 할 거 같아서 말이야.”
“…….”
루 아케르는 아르실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녀의 입가에 살며시 지어진 미소, 어쩔 수 없이 미르를 포기하는 게 아니었다.
일부러 그녀를 포기하는 게 분명했다.
이유는 모르지만, 루 아케르에겐 나쁜 제안은 아니었다.
그러나 순순히 협상을 하기는 루 아케르의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건방진 것, 감히 누구와 협상을 하고자 하는 거지, 내 여신도, 저 노예 놈도 어떤 것도 주지 못한다.”
“아 좀, 쫌생이처럼 굴지 말고, 시원하게 가자, 어차피 의뢰주에게 미르를 넘길 생각은 없잖아? 미르를 독차지할 생각으로 가득한 너잖아? 가온이 없어도 적당히 비슷한 노예 한 명으로 대신하면 되고.”
“…….”
“같은 이방인끼리 좋게좋게 하자고? 한때 같은 세상에서 살았던 동지잖아? 난 같은 동지끼리 죽이고 죽이는 싸움은 안 하고 싶거든.”
아르실은 살며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미소를 짓고 있지만, 말뜻에 담긴 의미는 결코 곱지 않았다.
귀찮게 하지 말고 빨리 꺼져라.
그 말뜻의 담긴 의미를 모를 리가 없는 루 아케르다.
하지만 더 자존심을 내세우기는 몸 상태가 최악이었다.
루 아케르는 흔들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아르실에게 물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물어보지, 네 년은 그만한 능력을 갖고 있으면서도 왜 이런 촌구석에 있는 거지?”
“응? 나한테 한 질문이야? 난 조용한 게 좋아, 다른 이방인들처럼 피비린내 나는 싸움은 싫어한다고.”
“그런 놈이 이런 노예를 돕다니, 더 말이 안 되는데.”
“헤, 너도 우리 가온한테 관심이 생긴 거야? 흐으음, 말하기 복잡한데, 간단히 말해주자면.”
아르실은 귀엽게 한 쪽 눈을 찡긋거리며 활기차게 외쳤다.
“난 가온한테 엄청나게 관심이 있거든! 이 재미없는 세상에서 날 재밌게 해줄 유일한 녀석이야.”
“미친 것.”
“네가 할 소리는 아닌 거 같은데, 아차, 산장에 온 네 부하들은 우리가 전부 죽였어, 네 힘이 좀 줄었겠지만, 그 정도는 괜찮지?”
“……상관없다, 어차피 맹목적으로 날 따르던 소모품에 불과한 녀석들이니, 그런 권속들은 언제든지 늘릴 수 있다.”
화르르륵.
루 아케르에게서 뿜어 나오던 불길이 미르에게로 덮쳤다.
그녀를 죽이려는 게 아니다.
귀중품을 다루듯 불길은 손의 형태를 띤 채 미르를 조심스레 잡아들었다.
손의 형태를 띤 불길은 미르를 잡아든 채 루 아케르에게로 다가갔다.
루 아케르는 미르를 바라보며 그녀의 붉은 머리칼을 만지작거렸다..
“드디어, 다시 내게로 와줬어, 나의 여신.”
정말 애타게 찾았다.
그녀의 소식을 들었을 때 루 아케르는 온갖 수단을 동원해 그녀를 찾았다.
그리고 결국 이렇게 그녀를 다시 만질 수 있게 되었다.
한동안 미르를 뚫어지게 쳐다보던 루 아케르는 손가락을 튕겼다.
미르와 불길이 함께 사라졌다.
미르를 어딘가로 보낸 루 아케르는 고개를 돌렸다.
아쉽지만, 여기서 만족해야겠지.
루 아케르는 아르실을 노려보며 조용히 말했다.
“이번엔 여기서 물러난다만, 또 만나면 그땐 봐주지 않고 죽일 거다.”
“헹, 그러던가, 빨리 꺼지라고.”
“……거기 노예한테도 똑똑히 말해둬라, 덤빌 생각 말고 노예답게 조용히 살라고.”
“말은 해둘게, 그러니 빨리 꺼져.”
아르실의 당돌한 외침에 루 아케르는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다른 말은 하지 않고 자신또한 불길에 휩싸이더니 자리에서 사라졌다.
루 아케르가 사라진 걸 확인하자마자 아르실은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휘유, 진짜 한숨 돌렸네.”
옆에 있던 핸슨이 인자한 미소를 지은 채 한 마디 했다.
“확실히 이방인이란 존재는 언제 봐도 대단하군요.”
“이방인이 대단한 게 아니라 저놈이 괴물인거야, 가온이 한 건 안 해줬으면 몰살당할 뻔 했어.”
아르실은 이마에서 흐르는 땀방울을 닦았다.
정말 위험했다.
보는 것만으로도 압도당하는 강대한 적, 미르와 싸움에서 힘을 빼지 않고 가온에게 한방 먹지 않았다면 자신과 핸슨은 한순간에 불타 사라졌을 것이다.
핸슨은 도끼를 집어넣은 채 씁쓸한 표정으로 아르실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결국 젊은 손님은 보내버렸군요, 계획하신 겁니까?”
“그으을세? 난 계획 같은 거 세울 줄은 몰라서 말이야, 아차 이제 가온을 깨워야겠어.”
아르실은 순진한 척 어린아이 같은 미소를 지은 채 가온에게 달려갔다.
“가온! 이제 일어나, 다 끝났어.”
“…….”
“가온? 정신이 들어?”
“……미르, 미르는?”
정신이 들고서 내가 가장 먼저 입에 담은 단어는 미르였다.
온 몸이 미친 듯이 아프다.
죽을 듯이 정말 미칠 듯이, 각인을 건드리고 다치고 또 다쳤다.
죽지 않은 게 용할 정도였다.
내가 다친 부상이나 고통은 괜찮다.
이런 고통은 한두 번 당하는 게 아니다.
미르, 그녀만 무사하면 된다.
난 힘겹게 몸을 일으켜 세우려 하지만 고통이 심했다.
여전히 누운 채 난 고개를 돌렸다.
눈앞엔 방긋 웃고 있는 아르실과 인자한 미소를 지은 핸슨이 있었다.
두 사람, 무사했구나, 다행이지만, 난 그보다 미르의 행방이 우선이다.
난 다급히 물었다.
“미르, 미르는?”
“나중에 찾아, 일단은 네 건강부터 챙겨.”
“미르 어디 있어.”
“……말해도 넌 못 찾아.”
아르실의 그 말에 난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고통 따윈 아랑곳하지 않았다.
난 사방을 둘러보았다.
사방 그 어디에도 미르는 존재하지 않았다.
격렬한 싸움이 있었다는 흔적만 존재할 뿐, 그녀는 이 자리에 없었다.
털썩.
무릎을 꿇고 난 고개를 숙였다.
입에서 비릿한 맛이 느껴진다.
뚝뚝.
입은 물론 머리와 몸에서 피가 떨어졌다.
출혈을 본 아르실이 깜짝 놀라며 걱정했다.
“야! 너 지금 몸이!”
“……미르, 어디 갔는데.”
“미르 언니는 이제 없어, 그 미친 자식한테 끌려갔다고, 나랑 핸슨이 힘을 써봤지만, 널 지키는 게 다였어, 미안해.”
아르실은 두 눈에 눈물방울을 떨어뜨리며 내게 사과했다.
목숨이 위험한 와중에도 여기까지 와준 건 정말 고마웠다.
미르만 무사했다면 난 평생 아르실에게 감사했겠지.
하지만 그녀는 이 자리에 없다.
그럼 아무 의미가 없다.
난 아르실을 쳐다보며 조용히 물었다.
“그 남자, 어디로 갔는지 알고 있어?”
내 물음에 아르실의 표정이 굳었다.
방금 전까지 울면서 사과하고 있던 녀석 같지 않았다.
아르실의 급작스러운 표정 변화에도 난 눈 하나 깜짝이지 않았다.
아르실은 굳은 얼굴로 내게 경고했다.
“가면 죽을 거야, 어디 있는지는 알고 있어? 흔적을 뒤쫓는 것만으로도 목숨이 위험할 걸,”
“상관없어.”
“죽는 걸로 안 끝나고 평생 고문만 당할지도 몰라, 지금 네가 겪는 아픔보다 훨씬 심한 고통 말이야.”
“괜찮아.”
아르실의 경고에도 난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아르실은 내 단호한 대답에 눈살을 찌푸렸다.
“대체 왜 그렇게 미르 언니한테 집착하는 거야? 미르 언니가 좋은 사람인건 알아, 근데 그 이유가 목숨 걸고 쫓아갈 이유는 안 돼.”
아르실의 비난어린 말에 난 입을 다물었다.
확실히 그렇게 보일 수도 있다.
미르와 내가 만난 지 이제 한 달도 되지 않았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한 달이란 시간은 짧고도 빈약했다.
친해 질수도 있지만, 쉽게 헤어질 수 있는 관계.
특히나 누구와도 깊은 관계를 맺지 못한 노예인 내겐 더더욱 빈약한 관계였다.
그러나 그녀는 다른 이들과는 달랐다.
난 단순하면서도 목소리에 힘을 담아 말했다.
“은인이야.”
평생 날 가축 이하의 취급을 해왔던 빌어먹을 세상.
그런 세상에서 처음으로 날 사람처럼 대해준 사람.
한 달도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난 그녀로부터 살면서 처음으로 행복함을 느꼈다.
잠깐이나마 행복함을 느끼고 미소도 지을 수 있게 되었다.
내게 삶의 이유를 준 사람.
목숨 걸 이유는 그거면 충분했다.
난 입에서 흐르는 피를 닦으며 아르실의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난, 미르를 되찾을 거야, 누가 가로막아도 누가 방해해도.”
“너 그 말조심 하는 게 좋을 걸, 누가 배후에 있는지도 모르는데, 만약 이 나라의 황제가 내린 명령이라면? 그래도 나설 수 있겠어?”
“누구든, 가로막는 놈은 가만 안 둘 거야.”
놓칠 수 없다.
용서할 수 없다.
미르를 앗아간 저 남자를 난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
미르를 찾는 길에 가로막는 게 귀족이든, 기사든 설령 황제 아니면 이 나라 그 자체라도.
항상 봐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