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르의 생사 따윈 관심 없었다.
아르실 그녀의 관심사는 오로지 가온이었다.
만약 가온을 구출하기 어려울 거 같다면 그냥 죽게 나둘 것이다.
자신의 것이 안 될 바엔 죽는 게 낫다.
아르실은 가온의 온기가 남아있는 자신의 손바닥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넌 내꺼야, 가온, 누구에게도 주지 않을 거야.”
눈앞에 강렬한 불꽃이 넘실거린다.
“산장에 있을 민간인들은 이미 내 부하들이 처리했고 남은 건 너 뿐이다, 내 여신 님 앞에서 이만 사라져라.”
남자의 말과 함께 화염이 날 덮쳐온다.
막을 힘도 능력도 방법도 없다.
난 두 팔을 벌려 화염 앞을 가로막았다.
이대로 타버리면 죽겠지, 그래도 미르에게 조금이라도 피해가는 걸 막고 싶었다.
눈을 감고 이 순간이 빨리 지나가기를 빌었다.
모든 걸 체념하고 눈을 감은 내 귓가에.
두근.
또 다시 고동소리가 느껴졌다.
귓가로 들려오는 게 아닌 가슴으로 느껴지는 고동소리.
두근 두근 두근.
처음 들었을 땐 그저 내 심장 소리가 급격히 뛰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이건 내 고동소리가 아니다.
다른 누군가의 심장이 급격히 뛰는 소리다.
산장에서 괴한들의 습격을 받았을 때 들었던 미르, 그녀의 심장 소리와 똑같았다.
싸아아아아.
고동소리와 함께 불꽃의 뜨거움 대신 시원함이 내 몸을 감쌌다.
몸이 한 겹의 막이 씌워진 듯 더는 고통스럽지 않았다.
내 몸을 감싼 막은 차갑고도 시원했다.
‘시원하다고?’
불에 휩싸였을 텐데 시원함을 느끼는 건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난 살며시 눈을 떠보았다.
화르르륵.
몰아치던 불길은 날 덮치지 않고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내 몸에서 피어나오는 한기가 날 지키고 있었다.
내가 한 게 아니다.
노예인 내가 이런 불꽃을 막아낼 리가 없었다.
이건 분명, 미르의 능력이다.
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뒤에는 힘겹게 일어선 미르가 있었다.
당장이라도 고꾸라질 것만 같은 그녀가 날 지켜준 건가?
미르는 힘없이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멍청이 가온, 그러게 왜 왔어.”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
난 이를 악문 채 앞의 남자를 노려보았다.
미르가 일어난 이상 아직 모른다.
내가 주의를 끌고 그 사이 미르가 힘을 쓰면…….
“네놈!”
남자의 노호성이 내 귓가를 때렸다.
동시에 아까 와는 비교도 안 되는 거대한 불꽃의 파도가 엄청난 속도로 나를 덮쳤다.
불꽃은 내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한기를 뚫지는 못했지만, 통째로 나를 집어삼켰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나는 물론이고 미르조차 순식간에 잡혀버렸다.
“으윽.”
한기 사이로 침투하는 열기가 뜨거웠다.
난 시선을 돌렸다.
미르 그녀는 다행히도 불꽃의 파도에 덮쳐지지 않았다.
하지만 기운이 없는 지 그녀는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그래도 다행이다, 그녀에겐 피해가 가지 않았어.
안도하는 내게 남자의 격분한 목소리가 재차 들려왔다.
“네놈 뭐냐, 너 따위가 어떻게 내 여신님의 능력을?”
상대할 가치조차 없는 노예를 대하는 목소리가 아닌 적의 가득한 목소리다.
내 몸을 집어삼킨 불꽃 속에서 남자의 모습은 드러나지 않았다.
어딘지 모르지만, 관심을 끌 순 있다.
난 비아냥거리는 말투로 어딘가에 있을 남자에게 외쳤다.
“얼굴이나 보여주고 말하지, 왜 노예 상대로 겁이라도 나는 거야?”
콰악!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넘실거리는 불꽃의 파도가 반으로 갈라졌다.
그리고 갈라진 파도 속에서 튀어 나온 남자의 손이 내 목을 움켜잡았다.
남자는 당장이라도 날 죽일 듯이 위햅혔다.
“대체 어떻게, 그녀의 힘을 쓴 거냐?”
“무슨……헛소리야.”
“바른대로 말해라! 내 불꽃을 아무런 방비도 없이 버틸 리가 없다, 지금 느껴지는 한기, 분명 그녀의 힘이지, 대체 어떻게!”
“미친 자식.”
남자의 이상한 말에 난 기가 찼다.
내가 했다고? 이런 농담을 하다니 정말 악질인 녀석이다.
난 노예다, 아무런 능력도 없고 천하디 천한 노예, 그런 내가 저런 불꽃 속에서 도움 없이 멀쩡했을 리가 없다.
아까전도 그렇고 지금의 자신이 불꽃 속에서 무사한 것도 미르가 도와준 것이다.
난 어이없다는 듯 남자를 노려보며 한 마디 했다.
“머리는 장식인가 보지? 미르가 살 살리려고 쓴 힘이다.”
“뭐?”
“미르! 바보 같이 서 있기만 하지 말고 지금이야!”
난 내 목을 남자의 팔목을 잡았다.
지금이다.
남자의 모든 시선이 내게 쏠려 있는 지금!
지금이라면 미르의 공격이 분명 통할 것이다.
난 다시금 외쳤다.
“멍청아! 얼음 가시든 집만 한 기둥을 소환하든 이 개자식한테 한방 먹여!”
여관에서처럼 방심한 남자에게 미르가 한방 먹이기만 한다면.
그러면 승산이 있다.
난 더욱 강하게 남자의 팔목을 잡았다.
…….
…….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넘실거리는 불꽃의 파도는 건재했고 불꽃의 바깥에 있을 미르는 조용했다.
남자는 고개를 갸우뚱해하며 의아해했다.
“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뭐야, 미르! 지금 뭐하는 거야! 멍청하게 가만히 서 있기만 할 거냐고!”
“머리가 이상한 건 네놈인가보군, 그녀가 쓰러진 걸 두 눈으로 못 본 거냐?”
“헛소리, 미르가 일어난 걸 못 본 거냐?”
“일어나? 하, 하하핫!”
남자는 비웃는 게 아닌 농담을 들은 양 유쾌하게 웃어댔다.
내 목을 잡았던 손을 푼 남자는 손가락을 튕겼다.
탓.
화아악!
불꽃의 파도가 사라졌다.
파도가 사라지고 드러난 주위 풍경이 드러났다.
엉망이 된 땅바닥엔 미르가 누워있었다.
남자는 쓰러진 미르를 가리키며 다시 한 번 물었다.
“방금 뭐라 했지, 그녀가 일어났다고?”
“뭐, 뭐야, 분, 분명 내 눈으로 직접, 그녀가 일어난 걸 봤는데.”
“내가 걸어둔 환상의 영향을 받았나보군, 멍청한 것, 그녀는 이미 나와의 싸움에서 모든 기력을 다 소비했다, 힘을 쓰기는커녕 말도 못할 거야.”
“거짓말!”
거짓말이다.
분명 그녀는 일어난 걸 내 눈으로 봤다.
심지어 그녀의 목소리마저 들렸다.
애당초 그녀가 일어나지 못한다면 지금 내 몸에 나오는 한기는 무어란 말인가.
혼란스러워하는 내 표정을 남자는 재밌다는 듯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환상의 영향이라고 하기는 이상하고, 진심으로 말하는 거 같은데, 노예 주제에 그녀를 이름으로 편하게 부르는 것도 그렇고 설마?”
중얼거리던 남자는 돌연 입가에 미소를 띠웠다.
남자는 광기어린 미소를 지은 채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
“하, 하하하! 정말 설마 했지만, 그녀가 처음으로 선택한 게 바로 너였다고?”
“뭐?”
“그래, 그래, 그래! 이제야 알겠군! 나와의 싸움에서 그녀가 제 힘을 발휘하지 않았는지!”
“무슨 소리를.”
자기 좋을 대로 웃는 남자를 난 매섭게 노려보았다.
그녀가 제 힘을 발휘하지 않았다니.
이건 또 무슨 헛소린가.
남자는 미친 듯이 지껄였다.
“전부 너 때문이었어, 너로 인해 그녀의 본성이 억눌려진 거야! 나와 그녀 같은 이방인의 힘의 원천은 감정이지, 그냥 감정이 아닌 능력에 걸 맞는 감정!”
“감정?”
“그래, 감정! 그녀의 힘의 원천이자 본성은 바로 냉혹함이지, 살아있는 것의 가치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의 목숨을 길가에서 발에 치이는 돌멩이보다 하찮게 보는 게 그녀의 본성이다!”
내게 있어선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그녀와 같이 지내면서 능력에 관한 이야기는 단 한 번도 듣지 못했다.
이방인의 능력은 그냥 주어진 게 아니었던가.
능력의 원천이라는 건 대체 또 뭔가.
머릿속이 혼란스럽다.
남자는 분위기에 취해 자기 좋을 대로 떠들기 시작했다.
“주어진 능력의 제약 따윈 없어, 쓰면 쓸수록 강해지지! 하지만 한 가지 사소한 문제가 있지, 능력을 쓸수록 그 감정에 잡아먹힌다! 하지만 감정에 사로잡힐수록 힘은 더욱 강해지니 오히려 좋은 거지, 반대로 그 감정을 억누르면 힘 또한 억눌러진다.”
“헛소리도 적당히 해 이상한 소리만 해대고.”
“그녀가 아무 말도 안 해줬나? 하긴 그럴 만도 하지, 그녀가 제 힘을 냈다간 본성이 드러날 테니, 피도 눈물도 없는 잔혹한 얼음 마녀가! 이 세상에서 모든 쾌락을 맛보고 질린 내가 매료되었던 그녀의 진정한 모습이!”
“작작하라고!”
난 냅다 외쳤다.
뭐, 그녀의 본성?
내가 아는 그녀는 숨겨진 본성 따윈 없었다.
순진한 바보 그 자체인 여자 주위 사람들의 칭찬에 쉽게 웃고 바가지를 당해도 웃는 여자.
하지만 남을 위해 이 세상 가장 밑바닥에 있는 날 구하겠다고 모든 걸 건 여자다.
이 빌어먹을 세상에서 내게 삶의 의미를 가져다 준 미르에겐 숨겨진 본성 따윈 없다.
난 거친 목소리로 남자에게 외쳤다.
“또 그딴 소리를 지껄이기만 해봐!”
“크하하핫! 좋은 모습이야, 그래 이렇게 나와야지 말해주는 맛이 나지!”
내 발악에도 남자는 오히려 즐거워했다.
철도 안 든 어린아이에게 산타의 진실을 말해주기라도 하는 양 광기어린 남자의 말은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강해, 본심을 낸다면 이방인 중에서 최강이라 불리는 나와 자웅을 겨룰만하지, 그런 그녀가 내게 무력하게 진 이유가 뭔지 알아?”
“…….”
“바로 너 때문이야, 너에게 본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 힘을 제대로 못 썼고 그래서 나한테 진거지!”
“닥쳐.”
내 욕설에 남자의 입가가 살짝 꿈틀거렸다.
남자가 손가락을 튕기자 작은 불꽃 칼날이 튀어나왔다.
피잇.
칼날은 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일부러 내 얼굴을 스치게끔 했다.
겁이라도 줄 생각인가.
남자는 매서운 눈빛으로 날 노려보며 경고했다.
“흐흐, 절망어린 표정을 보는 건 좋지만, 그래도 너무 나대지는 마라, 하마터면 목을 뚫을 뻔 했잖아.”
“어차피 죽일 거라며 빨리 죽여.”
내 외침에 남자는 비웃는 양 피식 웃었다.
명백히 날 조롱하는 시선으로 그는 비아냥거렸다.
“넌 내 이야기를 뭐로 들은 거지? 넌 그녀의 구속 구다.”
“구속 구?”
“그래, 여기서 널 죽였다간 나중에 그 사실을 깨달은 그녀가 날 죽이려 들겠지, 게다가 홧김에 죽일 뻔했지만, 의뢰 내용대로라면 넌 멀쩡히 살아있는 채로 의뢰 주에게 갖다 바쳐야하니, 말이 길어졌군, 이제 일의 마무리를 지어볼까.”
화르르륵!
남자의 손에서 타오르는 밧줄이 생성되었다.
밧줄은 나와 쓰러진 미르를 포박했다.
뜨겁진 않지만, 밧줄은 무척이나 억셌다.
평범한 방법으로는 풀리지 않을 것이다.
남자는 밧줄에 묶인 날 보며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원망스러운가? 원망할거면 내가 아닌 너라는 노예 자신을 탓해라, 힘도 능력도 없는 짐승보다 못한 녀석.”
“미르, 미르는 어떻게 되는 거지?”
“그녀는 걱정할 필요 없다, 기력이 다해 쓰러졌을 뿐 시간만 지나면 기운을 찾을 테니.”
“그거 말고……그녀는 잡혀가도 무사한 거 맞지?”
난 어찌되든 상관없다.
미르, 그녀가 없는 이상 날 사람처럼 대우해주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
내 목숨, 내 삶 따윈 어떻게 되는 상관없다.
그저 미르의 안위만 생각할 뿐이었다.
내 간곡한 물음에 남자는 피식 웃었다.
콱!
남자는 거침없이 내 얼굴을 밟았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는 군, 넌 노예다, 짐승보다 못한 네가 감히 나와 눈을 마주치며 대화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그래, 남자의 말이 맞다.
미르와 함께 하느라 나도 모르게 자신의 신분을 망각하고 말았다.
난 고개를 숙이며 비굴하게 굴었다.
“……죄송합니다, 부디 이 하찮은 노예에게 자비의 대답을 해주시길.”
“그래, 이제 좀 말을 듣는 군, 그녀 걱정은 할 필요 없다,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
“……감사합니다.”
“그럼 감사해야지, 애초에 노예 따위가 이방인인 나와 그녀와 말을 섞은 것만으로도 영광으로 알아야 할 거야, 뭐 노예지만, 너에겐 여러모로 감사한다, 본래라면 결코 쉽지 않았던 상대인 그녀를 이렇게나 쉽게 가지다니, 크흐흐, 이제 그녀는 내 것이야.”
남자는 음흉한 미소를 지은 채 내 얼굴에서 발을 뗐다.
남자의 발이 떼어지고 난 내 표정은 죽어 있었다.
한 때 마나 어리석은 꿈을 꿨다.
노예인 내가 이방인인 그녀와 함께하는 상상을 했었다.
어리석고 멍청했다.
노예인 내겐 이런 대우가 어울렸다.
저항할 생각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미르는 쓰러졌고 노예인 나로선 이 상황에서 벗어날 방도가 없다.
난 힘없이 고개를 들어 쓰러진 미르를 응시했다.
남자가 지껄인 그녀의 본성 이야기는 신경쓰지도 않았다.
그저 미르에게 미안할 뿐이었다.
‘미안해, 정말로, 정말로.’
몸에 씌워진 막이 사라지면서 뜨거운 밧줄의 열기가 느껴진다.
잠시나마 사라졌던 몸의 고통 또한 되살아났다.
뜨겁고 아프다.
혼미해지는 정신 속에서 남자는 손에 불꽃 칼날은 든 채 서서히 다가왔다.
“죽이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이 몸에게 덤빈 대가는 똑똑히 치러줘야겠지, 이송하기 전에 사지를 절단해주마.”
남자의 자비 없는 칼질이 내 팔을 자르기 직전이었다.
“그만해.”
어디선가 들려온 차가운 목소리.
그 목소리에 난 힘겹게 고개를 돌렸다.
분화구처럼 깊게 파인 산 정상 위, 그곳엔 이 장소와 어울리지 않는 작고도 여린 소녀 한 명이 서 있었다.
아르실, 나보다 어리고 약한 꼬마가 지금 이 자리에 서 있었다.
항상 봐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