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체적으로 꽤 예전에 작성된 1장을 열심히 뜯어고치고 있습니다. 부족한 졸작이나마, 부디 많은 평가 부탁드립니다.
◇ Blog : https://blog.naver.com/n_sousi
◇ 이 졸작은 바탕체, 14px로 작성되어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나는 숙직실 안에서 얌전히 정좌를 취하고 있었다. 이는 마주앉은 선율이 또한 다르지 않았다. 미묘하게 일렁이는 눈빛으로 하여금 나를 곧게 바라보고 있었다.
내 자신은 여전히 선율이를 바라보는 것에 미묘한 거리낌이 있었다. 해소할 수 있는 것이라면 질이라도 나쁘지 않았겠지만, 내가 품고 있는 것은 이유 모를 거리낌이었다. 질 나쁘기 그지없었다.
거기에 뭔가 잘못한 것이 있는 듯한, 당당치 못한 선율이의 눈빛도 부담스럽기 마련이었다. 자신이 잘못한 거라도 있느냐 따지는 눈빛처럼도 느껴졌다.
“저기……제가 아저씨에게 실수 한 게 있나요?”
잘 봐. 물어보잖아.
“……에잇.”
“아윽. 왜 수도(手刀)를……”
“벌써 해도 다 져 가는데, 왜 돌아가지 않은 거야.”
“그야 아저씨가 돌아오지 않으셨으니까……아읏.”
그녀 특유의 맑은 목소리를 손날로 가르며, 그녀의 정수리에 손을 얹듯 두드렸다.
“폭력은 나빠요.”
“알고 있어.”
“모르시는 것 같은걸요. 게다가 두 번 때리셨어요!”
“시끄러. 누구든 그런 궤변을 들으면 이렇게 행동하게 될 거라고. 너에게도 어느 정도의 원인은 있어.”
내 논리 또한 단순한 궤변이었다. 단지 선율이와 아무런 주제 없이 단둘이 있게 되었을 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에 뱉은 궤변.
굳이 선율이 뿐만이 아니라, 누군가를 단둘이서 대할 때는 서투르기 짝이 없었다.
“……뭔가 아저씨가 저를 피하시는 것 같은.”
“에? 내가?”
“네. 아저씨에게 직접 말씀드릴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아냐. 차라리 그런 것은 본인에게 이야기해 주는 것이 더 편할지도 몰라. ……그리고 오해라구. 오해.”
“그런……가요?”
“애초에 내가 너를 피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 거야. 짚이지도 않아.”
“……귀찮아지셨다던가.”
“권태기 온 커플이냐.”
“ㅋ………커플이라뇨!”
선율이의 얼굴이 알기 쉬운 붉은색으로 물들었다.
“하여간. 오히려 이렇게 반응이 알기 쉬우면 재미있단 말이지.”
“우으, 놀리지 말아주세요. 정말……”
능글맞은 표정으로 말하는 내 자신과 노려보는 선율이. 과연 능글맞은 표정으로 보였을지가 의문이지만.
한차례의 농담이 지나간 이후의 공간은, 적막함이 찾아왔다.
“………….”
“………….”
아까도 느낄 수 있었던, 참으로 사람을 안절부절 하게 만드는 적막함이었다. 사람과 관계를 맺는 것이 어렵고 익숙지 않은 남녀 2명의 구성이었기에 어찌 생각하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리고 그 적막을 먼저 깨고 소리를 낸 것은 선율이 쪽이었다.
“아저씨는 친구분이 있으셨다고 하셨죠?”
“뭔가 질문의 뉘앙스가 묘한데……응. 방금도 친구들이랑 이야기를 나누다가 들어온 것뿐이고.”
“친구분들과 말씀이신가요?”
선율이는 다시 알기 쉽게 눈을 빛내며 나에게 다가왔다.
“친구분들과는 만나서 어떤 이야기를 주로 나누시는 건가요?”
“뭐……별거 없는 이야기들이지. 학교에서 과제가 어쨌느니 교수가 어쨌느니, 그런 푸념들이 70% 정도 일까나.”
“헤에……오늘도 같으셨나요?”
“……별다르지 않았을까나.”
아무 대책 없이 치고 들어오는 선율이의 이야기에 당황하여, 무심코 거짓말을 뱉어 버리고 말았다.
혜율도, 유라도 모르는 이야기지만 오늘의 내가 저런 제안을 하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내 앞에 있는 저 아가씨가 원인이었으니까.
단지 ‘이야기하는 것은 적어도 모두가 내 제안에 납득을 하고 나서’ 라는 생각을 되새김질하며, 입술 밖으로 나오려는 말을 도로 삼켰다.
“그럼 아저씨도 푸념이라던가……말씀하시는 게 있으신가요?”
“푸념…말이지.”
지금의 한유진이 품고 사는 푸념이라고 한다면 역시 자금난에 대한 것 정도일까. 사촌 동생이 대량으로 보내준 칼로리바란스는 그만 먹고 싶다. 물리는 것도 정도가 있는 음식이었다.
자금난을 제외한 내가 가진 푸념은……
…………
………
……
“………아저씨?”
“에? 왜 그래?”
“안색이 안 좋으세요. 괜찮으세요?”
“아냐아냐. 왠전 괘안아. 걱정 안 해줘도 괜찮아.”
“……당황하셔서 말씀이 꼬이셨는데도 말인가요?”
“시꺼……뭐, 굳이 대답한다면, 내 푸념은 자금난 정도 일까나. 가끔은 맛있는 것을 먹고 싶다거나, 그런 사춘기 소녀와도 같은 소소한 욕망이 있지.”
“아하하, 평소에는 어떤 걸 드시고 지내시는 건가요?”
선율이는 숙직실에 작게 마련된 주방을 바라보고서는 물어보았다. 나는 그 무의미한 시선을 보곤 피식 웃으며 반 봉지가 남은 칼로리바란스를 선율이의 앞에 던져주었다.
“이건 뭔가요?”
“칼로리바란스. 약칭 칼바. 적은 양으로도 충분한 포만감을 느끼게 해주기 위한 용도로 만들어진 비상식 중에 하나지.”
“비상식이신가요?”
“………아뇨. 주식이 되어버렸습니다.”
“먹어봐도 괜찮은가요?”
나는 긴 말을 하지 않고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고사리 같은 가늘고 작은 손가락으로 능숙하게 포장을 뜯은 선율이는 칼바를 요리조리 만져보더니, 조심스레 3/1 분량을 입에 넣었다.
선율이는 시간이 지날 때마다 입안의 칼바를 우물거리는 속도가 점차 느려졌고, 천천히 목구멍 뒤로 넘긴 뒤 입을 열었다.
“맛이 어때?”
굳이 물어보았다. 대답은 이미 나와 있는 느낌이었지만.
“……오래 먹을 만한 음식은 아닌 것 같아요. 매일 이걸 드시는 건가요?”
“애석하게도. 가난하거든.”
“칼로리바란스 였나요? 아저씨에게 듣기로는 저렴한 듯 들립니다만…….”
“사촌동생에게 공짜로 얻어온 거니까 먹는 거야. 이런 것 돈 주고 사 먹기엔 아깝다고.”
제 돈 주고 사서 먹는 사람들을 보면 대부분 운동과 다이어트를 병행하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막말로 나는 빼야 할 살이 거의 없었다. 오히려 자기 관리라면 나의 몇 안 되는 자랑거리이기도 했다.
“사촌 동생이 계셨군요.”
“응. 올해로 고등학교 2학년에 글을 쓰는 녀석이 있어.”
“아저씨는 그림을 그리시고 동생분은 글을 쓰시는 건가요? 뭔가 대단하게 느껴져요.”
“그 녀석도 그림을 그리던 놈이었지만 말이지. 지금은 내 시나리오 작업을 도……”
아.
나는 내뱉은 말을 자각하는데 성공했지만, 이미 한참 늦은 뒤였다.
“시나리오 말씀이신가요?”
선율이는 호기심에 가득 찬 눈동자를 내 시선과 맞추었다.
그리고 그런 선율이의 요구를 예상하는 일 따위는 어렵지 않았다.
“가지고 계시다면 보고 싶어요.”
“안 돼. 게다가 뻔해! 조금은 예상을 빗나간 대답을 들려달라고!”
“어째서인가요……”
“……작업 중인 것은 보여주지 않은 주의라고.”
급하게 둘러댄 핑계거리였지만, 거짓은 아니었다.
“그럼 완성된 후의 시나리오는 저도 읽어볼 수 있는 걸까요?”
“약속할게.”
선율이가 저렇게 눈을 빛내면서 기대하고 있지만, 오히려 완성된 뒤의 시나리오는 내 쪽에서 먼저 보여주고 싶을 정도였다. 약간의 수치심은 감수하고서 말이다. ‘딱 봐도 자신을 히로인으로 한 것 같은 시나리오’를 읽고 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할지는 불 보듯 뻔했으니까.
“……단지 몰입도를 올려주기 위한 인물의 설정이니까…… 단지 그런 거니까 말이야…….”
“아저씨?”
“아무것도 아니야. 영양가라고는 한 치도 찾아볼 수 없는 이야기였으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아.”
“아하하………네.”
─둥둥둥 ─둥둥둥
1층의 괘종시계에서 익숙한 소리가 들려왔다. 18시가 됨을 알리는 고전적인 소리였다. 동시에 그녀가 귀가할 시간이기도 했다.
선율이가 돌아가는 시간은 오후 6시로 암묵적으로 정해져 있는 듯했다. 실제로 그녀는 자신이 탁상에 꺼내 놓았던 대본이나 노트를 주섬주섬 정리하고 있었다.
“돌아가는구나.”
“아, 네. 이제 해가 지고 있을 테니까요.”
“오늘은 꽤나 이야기했네. 생각보다 막연했었는데.”
“……그러네요. 아저씨가 친구들과 하는 이야기가 이런 것들이었을까요?”
“뭐, 다르긴 하지만, 그렇게 멀지도 않으려나.”
오늘 하루 동안의 그녀를 지켜보면서 느낀 것은, 그녀는 나와 이야기하는 것 자체에 약한 동경의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단순히 말해 부러움이 묻은 눈빛이었다.
그녀가 친구들과 멀어져, 이런 일상적인 대화조차 동경의 눈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는 불행한 이야기가 되어버리기 때문에 크게 의식하지 않으려고 했다……만, 다시 가방을 챙기는 그녀의 그림자에는 또다시 미묘한 미련이 묻어있는 듯 보였다.
“흠…….”
한숨. 잘 들리지 않게 내뱉었다.
저런 귀여운 여자아이가 이런저런 표정을 지어버리면 난감해지는 것이 남자라는 생물이겠지,
그리고 지금 내 성별이 그 남자라는 것에 대해 조금은 분노한다.
내 머릿속은 과제만으로 가득 차 있던 상태에서 ‘저 아이를 어떻게 해 주어야 마음이 풀릴까.’ 만을 생각하게 되어버렸다.
그렇게 지독하게 생각하던 문제인데. 정말로 간단하게 생각이 정돈된 느낌이 들었다.
“같이 나가자. 바래다줄게.”
“아, 네. …………예?”
가볍게 던진 한마디에 선율이는 평소처럼 대답하지만, 바로 돌을 맞은 개구리처럼 ‘네.’ 라는 대답을 뒤집었다.
“싫으면 말로 하지……아, 말로 했구나.”
“아 아아아아 아뇨! 싫은 것 따위가 아니고! ……갑자기 왜, 어째서요?!”
“아니, 생각해보면 당연하잖아. 해가 지는 시간이라고? 초등학생이라고? 여자아이라고? 무책임하게 대문 닫고 끝이라는 상황이 되레 이상하지 않아? 집이 먼 곳인지 가까운 곳인지는 모르겠지만.”
“굳이 말씀드리자면 가까운 거리는 결코 아니지만……아뇨아뇨, 민폐라구요. 저따위에게 할애하는 시간은………아읏. 때리지 말아 주세요.”
“시꺼. 또 ‘저 따위’ 라는 말하기만 해봐. 두개골 모양을 영구적으로 비틀어 줄 테니까.”
“흐으으, 그런 살벌한 말씀을 하시다니.”
“진심으로 화내서 말한 거라고. 정말로 하지 마. 알았지?”
“……네. 죄송해요.”
“그리고……걸어갈 수 있지? 못 걸어갈 정도로 먼 곳이야?”
“아뇨 걸어가기 충분해요. 그런데 그런 걸 물으시는 이유가……”
“그냥……보고 싶은 게 있어서. 잠깐 옆길로 세도 괜찮지? 시간 괜찮아?”
“………네!”
그녀는 드물 정도로 밝게 대답했다. 나 혼자 보기 아까운 미소와 함께.
……이런 밝은 미소도 충분히 지을 수 있는 아이일 텐데.
나는 그녀와 만난 이후 처음으로, 어른스러움을 강요받으며 살아온 것 같은 그녀를 안타깝게 생각했다.
언제나 얼굴에 품고 있는 어른스러운 은은한 미소가 아닌, 저런 나이에 어울리는 빛나는 미소를 자주 볼 수 있게 되면 좋겠다고,
남몰래 생각한다.
◇◆◇◆◇◆◇◆◇◆◇
“와아, 만개했군요.”
“………아아. 화려하게도 떨어지네.”
노을이 지평선을 천천히 넘어가면서, 하늘은 두 가지 색을 같이 퍼뜨려가며 덮을 담요를 바꾼다.
하늘이 덮은 담요의 색을 주홍색에서 진청색으로 바꿔갈 즈음엔, 우리가 걷고 있는 무심천에서도 벌레들을 유혹하는 가로등의 빛이 산책로를 비추었다.
그리고 자연의 달빛과 인조의 형광빛을 동시에 받아 꽃잎을 빛내고 있는 벚나무 또한 스산 거리는 바람에 가지를 흔들며 한 폭의 회화를 만드는 듯, 단지 그 자리에 존재했다.
성주대교 아래 무심천 산책로를 나란히 걷는 띠동갑의 남녀, 나 한유진과 한선율은 단지 떨어지는 벚잎을, 흔들리는 벚나무의 일렬을 눈에 담았다.
풍성했던 작년과 재작년에 비교해도, 훌륭할 정도로 풍성한 벚나무의 꽃잎. 그리고 자신을 희생하여 아름다움을 자아내는 그 꽃잎은 조그마한 바람에도 술술 떨어져 내린다.
표정을 일그러뜨리고 싶은 것을 애써 참았다.
그럼에도 아름다웠기에.
“올해도 아름다워요. 정말……”
감정에 겨운 듯하는 선율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선율이를 집까지 바래다주는 도중, 겸사겸사 아르바이트를 출근하는 도중, 말했던 대로 옆길로 센 우리는 성주시의 자랑이자 중심인 무심천 가로수 벚꽃 길에 들렸다.
마치 뭉게구름과도 같이 풍성한 왕벚나무들의 일렬은 웅장하고 아름답기 짝이 없다.
웅장하고 활기차게 잎을 떨구며 눈앞의 시야를 가득 채우는 압도적인 아름다움을 묵시하며─비슷한 아름다움을 그녀에게서 찾을 수 있었다.
“……어울리는구나.”
“네?”
“아냐. 혼잣말이야.”
“…감사……합니다.”
“뭐야, 들었으면 그런 반응하지 말라고.”
낮 뜨거움에 뺨을 긁으며 조금 올라온 것 같은 홍조를 어둠 속에 숨겼다. 일부러 가로등의 빛이 얕은 곳을 밟아가며.
“일부러 이렇게 옆길로 세자고 하실 정도면……아저씨는 꽤 벚꽃을 좋아하시는 분이셨나 봐요.”
“……미묘해.”
“미묘?”
“……아마 싫어하는 쪽일지도.”
“에?”
선율이는 당황했다. 당황한 표정이라기보다는 난처한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나라도 그랬을 거다. 미묘하면서, 알 수 없는 이야기를 한 것은 확실했으니.
“벚꽃은 아름다워. 좋아해. 마음을 꽉 채워주는 이 느낌은 버릴 수가 없어. 빈 공간이 있다면 채워주고, 이미 꽉 찬 마음이라고 하더라도 터질 것 같은 아름다움을 느껴. ……하지만.”
웃는 표정을 유지할 수 없었다.
“벚잎이 떨어지는 건 받아들일 수 없어. 정말로 싫어.”
“벚잎이 떨어지는 것 말씀이신가요……?”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는 도중에도, 내 표정이 일그러지는 도중에도, 여전히 벚잎은 떨어지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다. 시간이라도 멈추지 않는 이상. 벚나무의 의미가 완전히 바뀌지 않는 이상.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벚의 꽃잎은 중력에 몸을 맡겨 팔랑팔랑 떨어질 것이다. 그것이 세상의 당연한 이치라는 것이기에.
단지 당연한 이치라고 자연이 말하기에 벚나무는 그것을 당연하다 여기며, 자신의 몸을 희생하며 아름다움을 자아낼 것이겠지.
“……벚나무의 눈물일까요.”
“글쎄……눈물하곤 다르겠지만. 울적하게 되는걸. 그래서 싫어.”
“싫단 말이야……기적이라도 일어나지 않는 이상. 벚잎은 계속 떨어질 테니까. 그러니까 벚꽃을 싫어할 수밖에 없잖아.”
“기적…….”
선율이는 소란스러운 주변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단지 입을 꼭 다물었다. 그녀와 내 자신에게 밖에 집중을 하지 않는 나는 소란스러운 주위의 소리가 소거되어 들리지 않게 된 것만 같아진다.
그녀는……초등학교 5학년이라고는 절대 설명할 수 없을 표정을 지으며, 단지 많은 것을 떠올리며 벚나무를 올려다본다. 그 모습은 눈에 익은 회화의 광경과……겹쳐 보일 수밖에 없었다.
“저는 벚꽃을 좋아한답니다. 제가 처음 본, 가장 잘 기억하고 있는 벚꽃은 여기서 본 벚꽃하고는 좀 달랐지만요.”
“지금 이 무심천의 벚보다는 왜소했지만……더 빛나고 있던 것처럼 보였어요. 마치 그림과 같이 보였고…….”
그녀는 사색에 잠겼다. 마치 긴 세월의 기억을 더듬는 것과 같이 느껴졌다.
“저는 말이죠. 이번 학교에 오기 전에 꽤 오랫동안 학교를 쉬었답니다.”
“어째서?”
“글쎄요, 저도 잘 모른답니다. 기억나는 건 그 당시 알고 지냈던 한 예술가에 대해서예요.”
“……예술가?”
“네. 그 예술가는 벚꽃을 참 좋아했답니다. 벚꽃 그림만을 계속 그렸어요. 코를 찌르는 기름 냄새와 함께 붓을 슥슥 움직이면 벚잎이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었어요. 그때의 저는 그게 단지 신기했었던 거라고 생각해요.”
선율이는 말을 이어가며 허공에 손을 뻗었다. 그녀의 손 위에 벚잎이 살포시 몸을 내려놓더니, 흩날리는 그녀의 흑발에 치여 다시 허공을 날았다.
“말 없는 그 예술가를 따라간 뒤에는 벚꽃의 길이 제 눈앞에 펼쳐져 있어서………응. 그때 본 벚꽃이 가장 아름다운 벚꽃이랍니다. 그 예술가는 저에게 벚꽃의 아름다움을 알려주셨어요.”
“그렇구나. 아직도 서로 연락이라도 하고 지내는 거야?”
“아뇨, 그분은 죽었답니다.”
“……헤?”
담담하게,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죽음을 입에 담은 그녀의 목소리는 아직 따스하기 그지없었다. 피부의 표면으로도 느껴지는 이성과 감성의 괴리에 몸을 경직시켰다.
내 앞을 걸으며 보폭을 맞추던 그녀 또한 제 자리에 멈춰 선다.
“그분은 이제 없습니다. 벚꽃을 본다 한들 그분을 다시 느낄 수도 없고, 떠올릴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분의 작품은, 아직도 가까이 남아 있답니다.”
그녀는 입가에 웃음을 머금었다.
아까처럼 빛나는 미소와는 다른, 벚잎의 색처럼 은은한 분홍빛의 미소. 부드럽고 아름답다고 밖에 표현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보기엔 그것은 ‘폭력적으로 아름답다’ 라고도 표현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리고 나는──이미 없을 그 예술가에게 알 수 없는 질투심을 느끼고 있었다.
“……아아. 그 예술가는 분명 멋진 사람이었겠지.”
선율이의 미소를 보고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벚꽃을 보게 되는 것 자체가, 그분에 대한 공양이 될 수 있을까요.”
“……글쎄. 하지만 하나 확실한 것은”
“………?”
“네가, 그 예술가가 죽기 전에, 그런 미소를 한 번이라도 보여주었다면, 필시……필시 그 예술가는 몇 백번 죽어서라도 너를 기억할 수 있을 거야.”
“………그…럴까요.”
“응.”
벚꽃 앞에서는 이상하게 솔직해질 수 있었다.
익숙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이 풍경이 그렇게 시키는 것일까.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 잊어서는 안 되는 것.
그녀가 저렇게 아름다운 미소를 지을 수 있게 된 것은, 대부분 그 예술가의 덕택이었다는 것이다.
감사할 수밖에 없었다. 선율이의 마음속에 남은 그 예술가를 향해서. 적어도 많은 사람들 중에 내 자신은, 벚을 닮은 그녀의 미소를 보아 이 기억 속에 남길 수 있었으니까.
그렇기에, 필시 그 예술가 또한 선율이를 마음속 깊이 기억하고 있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정말로 그 자가 벚꽃을 사랑했다면, 정말로 그 자가 예술가였다면. 그럴 것이라고. 반드시 그럴 것이리라……
그렇기에, 그녀가 아름다운 벚을 바라보며, 벚을 닮은 아름다운 미소를 짓는 것만으로도 그 예술가에 대한 공양이 될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적어도, 나에게는 충분하다 못해 과분하다 느낄 정도로, 행복감을 낳는 미소였으리라.
“………그런 말씀 하지 말아 주세요.”
“……에?”
그녀는 무채색과 같은 목소리로, 혼잣말을 속삭였다.
“………아저씨가 그런 말씀을 남기시면, 저는 어떻게 생각하면 좋은 거예요?”
“이런……가슴이 뜯겨져 나가는 기분을 받는 것이, 당연한 저의 업보일까요.”
“……….”
“아저씨!”
“헤?! ……아, 응! 왜?”
“같이, 걸어요.”
“……응.”
그녀는 말했다. 확실히 말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필시 귀로 하여금 듣지 못했다. 바람과 함께 울리는 벚잎의 시가 그 소리를 확실히 묻어버렸기 때문이리라.
그렇기에 나는 가슴속으로 그녀의 말을 묻어, 확실히 되새기고 있었다. 내가 아닌 누군가에게 말하는 것 같은 그 말들을.
그저 그녀와 보폭을 맞춰 걷는다. 그것만이 의미를 가진다.
적어도 “그런 말씀 하지 말아주세요” 라고 말하는 그녀는, 주변의 회화와 같은 광경 속에서조차 독보적으로 빛나 보일 정도로, 줄곧 아름다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분했다.
내가 다시 붓을 잡아, 저 미소를 닮은 벚나무를 그리고 싶어졌다는 그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며, 입가에 어울리지 않는 웃음을 머금었기 때문에.
◇◆◇◆◇◆◇◆◇◆◇
“흥흐응~후흐흐~♪”
계단을 한 발짝 한 발짝씩 내려오면서 주체할 수 없는 기분을 밖으로 터뜨려낸다. 그리고 그 주체할 수 없는 기분은 콧노래가 되었다. 만일 그 층에 사람이 있었다면 어렴풋이 들릴 수도 있었을 듯한 큰 소리로.
분명 평소라면 조금은 부끄러웠거나… 아니, 정말 부끄러워서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한 채로 갈 길을 갔겠지만……
……왜일까, 내 자신의 감정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이 이런 느낌일까…?
무엇 하나 전부 새로워서…
「선율이의 연기는 정말 좋았어. 무언가 정말로 짜내는 것만 같았고, 자신이 느끼고 있는 감정의 의미를 강하게 표현하려 했던 것만큼은 정말로…아무것도 모르는 나라도 느낄 수 있었어. 목소리도 맑았고.」
“흐으으…♬”
아직도 완전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아저씨가 나에게 해주신 그 말씀의 한 글자도 빠트리지 않고 완전히, 말이다.
………잊기는커녕, 그저께 해주신 아저씨의 그 한마디가 계속 머릿속에서 자동으로 울리고 반복되어서 하루 종일 일과 시간의 집중이 힘들 정도였다. 내 목소리를 들어주곤 정말로 진지하게 대답해 준 것은 아저씨가 처음이셨으니까.
물론, 그 이후에 아저씨와 나눈 대화중에는, 이제 와서 생각하면 낮 뜨거워질 몇몇 말들이 있었다만, 자신의 그런 배려심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대화주제 마저 진지하게 생각해주시며 대답해주시는 아저씨의 모습이 너무나도 빛나 보이셨기에……
「네가, 그 예술가가 죽기 전에, 그런 미소를 한 번이라도 보여주었다면, 필시……필시 그 예술가는 몇 백번 죽어서라도 너를 기억할 수 있을 거야.」
조금은, 심한 말을 들어버렸지만요.
정말로, 배려심이라곤 한 스푼도 찾아볼 수 없는 말씀을, 미워할 수 없는 목소리로. 표정으로. 분위기로. 그 배경을 포로 삼아.
……그리고, 아저씨는 나의 무엇 하나도 부정해 주시지 않으셨다. 물론 방향성의 제시 정도는 해 주셨지만, 제가 하고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해 부정을 표하지 않아주셨다. 오히려 따스하게 감싸주시며 이해해주셨을 뿐.
‘정말로 내가 말하는 것 무엇 하나 이해하지 못하는 게 없으신 걸까?’ 라고 의심할 정도로, ‘괜히 사탕 발린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닐까?’ 라고 의심하여 아저씨에게 꾸중을 듣게 될 정도로.
……내가 모르는 어른이란 그런 대단한 존재인 걸까요? 아니면 아저씨가 말씀하신 대로 정말로 아저씨와 나는 생각하는 것이 닮거나 똑같아서 그런 것일……까?
절 부정하시기만 했던 어른들과는 전혀 다른 대답으로 절 놀라게 해주셨던 아저씨. 과연 아저씨가 어른이 아닐 것일까요, 아니면 아저씨와 다른 어른들이 어른들과 거리가 먼 것일까.
“흐흐…후흐흐……”
사실 관계와 상관없이, 어느 무엇의 생각 하나하나가 너무 기분이 좋았고 마음에 들었다. 솔직히 어느 쪽의 아저씨라도 상관없던 것이 아니었나 싶기도 했다.
항상 망상을 하던 내 자신이지만, 이 기분은 여태까지 항상 상상하던 것과는 차원이 달랐던……외톨이인 채로는 더 이상 상상할 수 없는 웃음.
망상의 나래와 생각의 태풍에 눈치챌 수 없이 벌써 1층의 바닥을 밟아갑니다.
그리고 어둠이 나려 바닥이 잘 보이지 않는 지하 층계에 고민 없이 발을 내딛었……
“………기분전환, 기분전환~”
중앙 현관에 크게 설치된 전신 거울에 머리를 빼꼼 내밀어 봤다. 그리곤 주변을 세심히 살핀 뒤에 전신거울 앞에 당당하게 서,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몸을 확인했다.
삐져나온 앞머리 따윈 없이 잘 정돈되었는지, 옷에 이상한 것이 묻는 것은 없는지, 누군가가 가방에 또 이상한 물건이나 이물질을 붙여 놓았다던가, 등에 무언가가 붙어 있다던가.
아저씨의 앞에서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거울 앞에서 전신을 살피듯 빙글빙글.
……문제없음!
“우으으……좋았어!”
조금은 두근거리는 마음을 먹곤, 거울 앞을 떠나 지하 층계의 세계로 발을 내딛어 갑니다.
지하에 점점 더 가까워 질 때 마다 발자국의 메아리가 더욱더 오래 울려 퍼지며, 잠시 문 앞에서 머뭇머뭇.
자연스럽게 손잡이에 손이 옮겨지던 현상을 인지하곤 멈칫, 저 혼자 얼굴이 빨개져 버렸다.
“우으, 실수하지 말자 율이율이!”
긴 머리카락이 팔락팔락 거리도록 고개를 좌우로 격하게 흔들었다.
다시금 정신을 차리고 손잡이에 손을 얹어 옆으로 밀 듯 힘을 불어넣었다.
“실례합니다…….”
숙직실의 안은 조명이 전부 꺼져있었다. 빛이 들지 않는 실내는 어둡기 짝이 없어, 열쇠를 찾으며 어느 정도 어둠에 익숙해진 동공으로도 많은 것을 보고 느끼기 힘들 정도였다.
깨끗하게 정돈된 방 안에 천천히 발을 들였을 때, 발끝에 이불의 감촉이 슬며시 닿았습니다.
폭신폭신하게.
“……아…아저씨이?”
어둠에 천천히 익숙해지기 시작한 시야에 들어온 것은, 머리를 제외한 전신에 이불을 뒤집어쓰시곤 허리를 굽혀 곤히 잠을 청하고 있는 아저씨의 모습이었다.
정돈된 얼굴로 무방비하게 새근새근 잠에 빠져든 아저씨의 얼굴이 눈에 들어옵니다. 평소의 날카로운 눈매가 힘이 풀린 듯 감겨 잠에 폭 빠진 부드러운 모습이……
…………내 어린 마음을 조금씩 유혹하기 시작했다.
솔직하게. 가까이 가서 보고 싶어져버립니다…… 평소엔 바라보는 것도 두근거려서 부담스러웠는데, 저를 전혀 신경 쓰지 않으시는 무방비한 표정으로 저렇게…
“아우으……안되는데에에…….”
나중에 후회할 일을 만들면 안 된다고 하셨던 어머니의 말씀이 떠오르지만……
……어머니 죄송해요. 저, 몇 백번 고쳐 생각해 보아도 후회하지 않을 것 같아요.
‘죄송합니다아아.’
속으로 몇 백번 고쳐 외치며 허리의 옷매무새를 정리한 뒤, 천천히 이불 위에 앉아 가까운 위치에 있는 아저씨의 잠든 얼굴을 계속 바라보았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에 가려진 평소의 얼굴과는 다르게 옆머리에 꽂힌, 여자아이 같은 헤어 핀으로 정리되어 보이는 얼굴이 색다르게만 느껴졌다.
그런 평소에 보이지 않는 유진 씨의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터져 나온 미소라고 해야 더 정확할까.
……그리곤 얼굴이 조금씩 뜨거워지는 느낌도 들었다.
어떤 욕심인 걸까. 손가락을 들고 유진 씨의 얼굴을 조금씩, 조금씩 찔러 보았다.
처음에는 볼, 이마. 그리고………입술.
몰래몰래 도둑질하는 느낌이 들지만……멈춰 설 수 없는 듯하는 이 느낌은 어떤 감정일까……?
조금씩 몸이 뜨거워지면서, 내 상체를 받쳐주던 반대쪽 팔의 힘이 조금씩, 아주 천천히 풀려만 갔다.
“정말, 이런 무방비한 얼굴로 주무시면서……안 일어나신 다니깐……. 이렇게나 잔뜩 장난치고 있는데….”
나는 조금 더 욕심을 부려, 유진 씨가 바라보는 방향에. 아저씨가 숨소리를 새근새근 내고 있는 방향에──
──아저씨와 같이 가로누워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는 만행을 저질러봅니다.
“으윽. 이제 와서 생각난 거지만, 부끄러워서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아…….”
그러면서도 자신의 붉은 홍채는, 아저씨의 얼굴만을 계속 주시하고 있었다.
……잠시도, 조금도 눈을 뗄 수 없었기에.
저는 이렇게 진하게 당신을 바라보고 있는데. 당신은 전혀 눈치챌 수 없어요.
하지만…… 이런 느낌도 나쁘지 않다고 느껴버렸다.
오히려 두근두근하는 이 느낌이 너무 새롭고 자극적이기에…… 멈출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조금 더 몸을 가까이.
이미 땀으로 인해 뜨겁고 촉촉하게 적셔진 손으로 내 가슴 앞에 접힌 아저씨의 손가락을 쥐어본다.
콧잔등 앞에 아저씨의 조용한 숨소리가 느껴지고, 아저씨의 손끝에서 느껴지는 맥박의 고요한 움직임에, 내 심장의 박동 수가 세 배는 더 빠르게 느껴져 온다.
“아저…씨…….”
“(이렇게 해도… 안 일어나실 거죠?)”
지금의 아저씨는 안 일어나시는 거죠?
조금의 움직임도 없이 깨어나지 않으시는 거죠?
잠들어 있는 왕자님 같은…… 그런 거죠?
아저씨가 머리를 베고 있는 베개의 끄트머리에 내 머리칼이 쓸려 내려간다.
조금씩 조금씩 가까워지는 것이 느껴진다.
학교의 수학 시간에 배우는.
정말로 체감이 되지 않던 숫자.
1mm라는 것의 하나하나가.
피부의 겉으로 하여금.
속속들이 느껴져만 갔다.
『선율이 너는 나와 정말로 닮았구나. 이젠 신기할 정도야.』
『응원해 주고 싶어.』
더 가까이 더 가까이.
멈추지 못하는 급경사 내리막길의 세발자전거와 같이…….
어째서……왜 멈추지 못하는 걸까.
더 가까이,
조금 더 더 가까이.
서로의 코끝이 닿아버려.
이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심장이 미동도 하지 않을 정도로.
『그렇다면… 나도 너와 같을지도 몰라.』
더.
조금만 더.
조금씩 뜨거운 입김을 겹쳐가며,
아저씨의 말라버려 트인 아랫입술이 정전기를 내뿜듯 스쳐 닿을 듯하게.
더…
조금만 더……
코끝의 정전기를 넘어서 조금 더 안으로……
아
아아.
조금만이라도 더 가까워지고 싶어.
이런 극단적인 방법일지라도……
저를…
저를……
“율이라고……불러주세요…….”
─끼익
─
─쨍그랑
◇◆◇◆◇◆◇◆◇◆◇
잠들어 있던 내 귀에 무언가가 찢어지는 듯 하는, 날카로운 굉음이 들려왔다.
아니, 무언가…… 확실히 그렇게까지 큰 소리는 아니겠지만, 굉장히 자극적인, 누군가의 감정이 들어있는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
피곤함에 몸을 쉽게 움직일 수 없던 나는 천천히 눈을 뜬다.
흐릿하게 잡혀가는 초점.
어둠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눈앞에 맺히는 살색과 검은색의 상.
조금만 더 눈에 힘이 들어갔을 때엔, 더 이상 가까워질 수 없어 보이는… 중력에 몸을 맡겨 쓸려 내려간 정돈된 앞머리에 놀란 듯, 취한 듯 크게 뜬 눈과 그 흰자 안에서 춤추듯 흔들거리는 눈동자.
그리고 내 손목과 검지를 휘감는 부드럽고 따스하고도 촉촉한 느낌.
비몽사몽 고개를 굉음의 부화장으로 돌려보면……바닥에 추락한 듯한 모양새의, 어디서 많이 본 디자인의 검은색 비닐 봉투.
그리고 신장이 큰 역광의 그림자 속의, 봄옷을 말쑥하게 차려입은 실루엣의 여성.
옆에 쓰러져 있는 검은색과 흰 배색의 실내화 가방.
“………으억?”
잠깐만.
잠깐만.
잠깐만.
잠깐만.
잠깐만.
…잠깐만.
……잠깐만.
…………잠깐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