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여관에는 다이언을 제외한 모두가 모여 있었다. 라세인과 케이엘이 다급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타엘이 특히 흥미를 가졌고, 나머지도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에 동의했다. 헬레나는 말이 없이 무언가 적고 있었다. 채비를 마친 후, 다같이 서부 몰락지대로 갔다. 하스 혼자만이 남아 여관을 봤다.
많이 찾아볼 것도 없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두 사람을 볼 수 있었다. 한 사람은 검을 들고 있었고, 한 사람은 아무 것도 들고 있지 않았다.
“넌... 넌 내 아버지를 죽였어! 넌 죽어 마땅하다고! 죽어! 죽으라고!”
검을 든 자는 발악했다. 반면 검을 들지 않은 자는 평온해 보였다.
“찔러라. 이 10년에 걸친 악연을 끝내자꾸나.”
하지만 검을 든 자는 쉽게 찌르지 않았다. 그저 검만 들고 있을 뿐이었다.
“그… 그럼, 찌르기 전에, 하나만 물어보자. 왜... 그럼 왜 날 키운거야? 농락? 아, 아주 그냥 뼛속까지 농락하시겠다, 이 뜻이지?”
전사는 분노하고 있다. 하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분노를 억지로 끌어내는 것에 가까워 보였다.
“그건 아니야. 단지… 널 죽일 수 없었어. 널 버려둘 수도 없었어. 그리고 너에게 알리고 싶었던거야… 나의 악행을. 네가 나에게 복수할 수 있도록. 나는 악인이니까. 누군가는 나에게 복수를 할 수 있게… 그게, 나의 속죄니까. 하지만 하나만 믿어줘. 널 농락하려고 키운게 아니야.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고.”
“… 아냐! 그런거! 거짓말! 죽어! 죽으라고!”
케이엘은 전사를 보았다. 전사는 눈을 감았다. 꽉. 마치 앞에 일어날 일을 보고 싶지 않다는 듯이. 대부분의 여관 식구들도 마찬가지였다. 차마 이 앞에 일어날 일을 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전사는 잡고 있는 검을 더욱 강하게 잡았다. 앞에 있는 자를 향하여, 힘차게 밀어넣었다.
하지만 무언가에 막혔다.
천상의 보호막.
“그만 두시오, 다이언!”
성기사의 목소리는 주변 일대를 메웠다.
“살인은 복수가 될 수 없소! 그대의 아버지를 죽인 자의 말을 따르는 것이 복수가 될 것 같소? 이건 그가 원하는 일이오. 철저하게 그대를 파멸시킬 일이란 말이오!”
“넌 몰라! 당장 이거나 풀어!”
“그러지 않을 것이오! 복수를 하고 싶다면, 그저 저 자를 내버려두시오. 차라리 평생 죄책감에 빠져 살게 하란 말이오!”
“난 저 자식이 살아있는 꼴을 더는 보고 싶지 않다니까! 죽이고야 말꺼라고!”
다이언의 목소리엔 마치 진실을 애써 거부하는 듯한 말투가 담겨있었다.
그 때, 갑자기 양부는 헛기침을 했다.
“생각해 준건 고맙다, 성기사. 하지만, 난 오늘 어떻게든 죽기로 작정했다. 이런 일이 있더라도.”
그리고 천상의 보호막 안에서 어떤 모습이 반짝였다. 금속성의… ㄱ자의 무기. 권총.
“복수당하지 못한게 한이라면 한이군. 잘있거라. 그리고… 믿어주렴. 사랑한다.”
권총의 발포음.
작은 금속이 빛의 방벽과 부딛히는 소리. 천상의 보호막 안은 붉게 물들었고, 그 안의 형체는 마치 보호막에 기댄 것만 같았다. 케이엘은 그 광경을 마치 이 세상의 것이 아닌 양 멍하니 바라봤다. 타엘은 머리를 흔들었다. 헬레나는 그저 조용히 바라만 보았다. 다이언은 고개를 돌렸다.
여관은 여느 때와는 다르게 침울했다. 모두가 무기력하게 앉아만 있을 뿐, 그 누구도 말이 없었다. 하스조차도 어떤 일이 일어났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여관엔 두 사람이 없었다.
한 명은 다이언이었다.
다이언은 쪼그려 앉아있었다. 지금 자기가 느끼는 감정을 애써 부정하며, 혼잣말을 하고 있다.
“… 왜… 그 새끼는 죽었는데… 그토록 바라던 일인데… 뭐가 문제지…… 내가 직접 못 죽여선가… 아니.. 이건 달라… 그런게 아니야…”
다이언의 눈에선 눈물이 반짝였다.
다이언이 처음 여관에 온 날은, 그의 아버지가 죽은지 10년이 되는 날이었고, 그가 복수하기로 다짐했던 날이기도 했다. 하지만 다이언은 쉽사리 복수를 하지 못했다.
그의 아버지는, 두 분 다, 좋은 사람이었다.
또 한명은, 헬레나였다.
헬레나는 전날부터 무언가를 고심중이었다. 그녀 또한, 암살자였다. 떠들며 웃는 것으로 그 일을 잊으려 해보았지만, 남들을 돕는 것으로 그저 지나쳐보려 했지만, 암살자의 이야기가 그녀를 붙잡았다. 과거의 행적이 되살아나 그녀에게 죄를 물었다.
그녀는 사람들을 죽여놓고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에 죄책감을 느꼈다. 쾌활하게 지냈던 나날에 죄책감을 느꼈다. 사람을 죽였는데도 아무 감정이 없던 것에 죄책감을 느꼈다.
그녀는 죄책감을 느끼지 않던 것에 죄책감을 느꼈다.
여관 사람들은 말이 없었다. 고블린은 여관의 예산을 정산하는 일로, 노움은 여관의 비품을 수리하는 일로 침울함을 잊어보려고 했다. 하지만 나머지는 그러한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케이엘은 침울하게 앉아 있다가 얼핏 어떤 종이 쪽지를 보았다. 헬레나가 평소 앉던 자리 쪽이었다. 펼쳐 보았다. 헬레나의 글씨체였다. 그 쪽지를 보자마자 황급히 여관을 빠져나왔다.
“헬레나!”
19년째 쓰고 있던 단도를 자기 자신에게 가져가던 도적은 순간 멈칫했다. 평생 처음으로 마음 속 깊이 있는 말을 나눌 수 있던 친구가 그녀 앞에 서있었다. 잠시 멈칫하던 도적은 하던 일을 계속했다. 단도를 거꾸로 잡고, 몸 한가운데로—
쨍그랑!
“안돼. 내가 허락 못해!”
냉철한 눈의 마법사가 말하였다. 도적의 발 밑에서는, 깨진 물약병이 사라지며 카드가 되었다.
혹한의 물약.
“왜 나는 생각도 안하고! 네가 죽어버리면 나는, 나는 뭐가 되냐고!”
마법사의 냉철한 눈에서는, 눈물이 맺히고 있었다. 마법사에 의해 얼었던 도적은, 곧 녹았다.
“… 미안. 하지만… 나 안될 것 같아. 나, 살아있던 적이 없었는데, 그걸 너무 늦게 깨달은 것 같아…”
“그렇다고 왜 바로 죽어버리는데! 살아있던 적이 없으면, 이제부터라도 살면 되는거 아니야!”
“… 아니야. 난 이미 죽었는걸. 그리고, 난 더 살 수 없어… 난 더 살아서는 안돼…”
도적은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하지만 그 눈에선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죗값을 치러야할 시간이야… 그럼 안녕…”
“안돼! 헬레나!”
도적은 듣지 않았다. 단검을 들고, 자기 자신을 향해 찔렀다.
하지만 누군가가 저지했다.
“이제… 알았어… 죗값은… 죽음으로 치르는게 아니라는걸…”
도적에게 돌진한 자가 말했다.
“죄책감을 느끼며 사는 것… 그것이… 진정 죗값을 치르는 길. 죽어버리는 것은, 그걸 회피하는거야… 그 새끼는 죗값을 치른다 말만 하고선, 결국 말만으로 끝났지… 멍청하기는… 너. 죗값, 치를꺼면 똑바로 치러라. 멍청이는 그놈 하나면 족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