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는 금요일 밤이다.
하얗게 불태워도 출근을 할 필요가 없다는 안도감으로 모두가 행복하고 약간은 모험적으로 바뀐다. 하룻밤의 모험가들은 모험의 첫 발을 내 딛기 위해 동료를 구해야만 한다. 있다면야 바로 주린 배를 든든하게 채우기 위해 길거리에 널려있는 식당에 들어가 두 번째 단계를 마치면 된다. 하지만 혼자 왔으면 비슷한 처지의 탐험가들이 모이는 장소로 가야한다.
도시는 이런 독신자들을 위해 골목 구서구석마다 클럽, 바, 카페를 만들어 놓는다.
바이는 경호원들이 입는 검은 정장을 입고서 클럽 입구에서 경비를 서는 중이다.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을 통해 고래심장이 뛰는 것 같은 고동소리가 미약하게 올라온다.
그녀는 하품을 하고 입맛을 다신다. 계단의 벽면에는 비 맞아 쭈글쭈글해진 지난 공연의 포스터가 걸려있고, 찢어진 청태이프들도 보인다. 낙서도 빼 놓을 수 없다. 아무렇게나 휘갈긴 욕설도 있고, 헤어진 여자 친구 욕, 남자 여자를 가리지 않고 과장해서 그린 외설스런 그림, 우쭐주쭐 춤추는 벽화가 빼곡하게 들어서 있다.
몰려오는 졸음을 내쫓기 위해 바이는 계단을 따라 지하로 내려갔다. 바닥에 달라붙은 껌딱지들은 검게 변해서 점성을 잃었지만, 마르다가만 맥주자국이 신발바닥에 달라붙는다. 도로 올라오는 길에 바이는 깨진 병조각을 발견하고 계단 구석으로 밀어 놓았다.
[여, 오늘 수질은 좋냐?] 그녀가 지상으로 올라오자 친구인 잔나가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방금 전까지 일급수였는데, 이제 미꾸라지 한 마리가 와서 분탕 칠 거 같네.] 바이는 웃으면서 잔나의 엉덩이를 손바닥을 치고선 그의 바지 뒷주머니에 있는 담배를 꺼냈다.
[뭐 수확 좀 있어?]
[빈털털이야, 아는 약쟁이들한테 다 물어봤는데 전혀 감을 못 잡겠어.]
[징크스는?]
[똑같아, 이 근방에서 산거 같지는 않고 다른 구역이겠지 아마.]
[그래, 그럼 징크스는?]
[내가 외국어로 말했냐? 방금 말했잖아.]
[아니 그게 아니라 지금 어딨냐고. 찰떡같이 알아들어라 좀.] 바이는 머슥하게 한번 웃어보이고선 잔나의 어깨를 주먹으로 가볍게 쳤다.
[밑에, 바 일 하고있어.]
[그 키에?]
[만드는 건 쉬워. 주문이랑 서빙은 다른 애가 해.] 잔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언제 끝나?]
[내일 새벽이겠지 왜?]
[애들이 만나자고 해서.]
[단체로 까마귀 고기를 먹었나. 나 오늘 알바 뛰는 거 애들 몰라?]
[아는데, 급한건가봐.] 바이는 혀를 찼다. 한잔 걸쳤는지 왁자하게 떠드는 한 무리의 대학생들이 입장권을 사서 클럽으로 들어갔다. 문이 잠깐 열리자 엄청난 소음이 풀쩍 뛰쳐나왔다.
[일단 알겠어, 어디서 만날 건데.]
[동방.]
[뻔하지.]
[그럼 그때 보자.] 잔나는 등을 벽에서 떼고 자리를 뜨려했다. 그러자 바이의 손이 그의 뒷털미를 붙잡았다.
[어 딜도 망가? 일 좀 돕다 우리랑 같이 가야지.]
[뭔,]
[좆 뺑이치는데 넌 자빠져 자려고? 상도덕이 없네.] 경호원은 친구를 어깨동무하여 지하로 끌고 갔다. 잔나는 그 뒤 새벽이 올 때까지 클럽의 임시 알바생으로써 바닥에 퍼질러진 취객을 소파로 올리고, 테이블을 정리하고 창고에서 물건을 꺼내오는 일을 했다.
친구들이 노동을 하는 동안 다른 아이들도 마냥 놀고먹지 않고 동아리 방에 모여서 암호문을 해독하고 있었다.
바이에게로 온 편지는 난해하기 짝이 없었다. 천하의 바이가 누군가의 정성이 가득담긴 편지를 받았다는 사실 하나 만으로도 장내를 떠들썩하게 만들기엔 충분했지만, 워낙 충격적인 일이 한꺼번에 많이 일어나는 바람에 그만 묻혀버릴 뻔 한 것을 케이틀린이 건져냈다.
편지는, 딴에 정체를 감추고 최대한 효과적으로 겁을 주기 위해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신문을 오려 붙인 종이나, 피로 쓴 글씨, 반쯤 녹아내린 몸에 얼굴을 합성한 사진으로 구성되 있었다.
공포보다는 지리멸렬함을 더 진하다.
이즈리얼은 아는 마법을 총동원해보고, 오리아나는 컴퓨터와 과학책을 찾아보고, 케이틀린은 모렐로로미콘에게 상황을 최대한 설명해 발송인에 대한 작은 단서라도 찾아내려고 했지만, 말짱 꽝이었다.
그나마 건진게 있다면, 수취인이 위험에 빠졌다는 점이다. 이 놀라운 결과를 알려주기 위해 탐정들은 잔나를 통해 바이를 데려오려 했으나, 그가 함흥차사가 되었다.
마냥 기다리던 아이들은 결국 눈을 붙이고서는 새벽에 첫차를 타고 바이가 일하는 곳으로 가기로 했다.
차고지는 학교 내부에 있기 때문에 도심지에 도착하면 아침도 새벽도 아닌 어수선한 시간때이다.
밤을 하얗게 불태운 클럽은 문을 닫고 난장판이 된 내부정리를 거의 다 마쳤다. 네온이 꺼진 번화가엔 첫차를 기다리는 젊은이들이 드문드문 무리를 지어 붕 뜬 시간을 보낸다. 배가고픈 이는 패스트푸드점에 들어가서 간단하게 배를 채우고, 커피 한잔을 시켜놓고선 식탁에 엎드려서 잠깐 눈을 붙인다. 흩어져서 낚시에 나선 어부들은 공원에 모여 줄담배를 피우면서 놓친 대어에 대해 과장 섞인 농담을 주고받고, 성공한 어부는 침대에서 먼저 눈을 떠 천장을 바라보며 앞으로 생업을 포기 할지 아니면 물고기를 방생할지 고민한다. 활기찬 일상을 시작하기에는 가로등이 아직 켜있고, 지난밤 광란을 이어가기에는 가려줄 어둠이 너무 옅다.
[하, 좆 되네, 겁나게 힘들어.] 잔나가 허리를 비틀자 우드득 소리가 난다.
[그러다 다친다, 남자는 허리가 생명인데.] 바이가 병맥주를 들고 올라와선 잔나와 징크스에게 하나씩 건넨다. 그래도 세 개가 남는다.
[너도 참 대단하다, 이런 일을 주말마다 하는 거냐.]
[뭐 어때, 페이도 쎄게 주는데 뭐.]
[어련하시겠어, 일당이나 내놔라]
[왠 종일 노는거 다 낼게 콜?]
[딜, 근데 좀 자자 졸려.]
[일단 애들 좀 보고.]
[일단 가자.] 징크스가 휘적이면서 자리를 뜨자 두 친구가 따라간다.
[밥을 먹고 갈까 아니면 먹을 것 좀 사서 갈까?]
[사가자, 아님 다시 나올까?]
[나올 필이긴 한데.] 철야로 인해 피로한지 발걸음이 무겁다. 아이들은 먹자골목을 통해 정류장 쪽으로 갔다.
친구들이 오면 무엇을 먹을지 고르려는 의도도 있었지만,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골목은 길빵을 하면서 가도, 팔 물건에 재만 묻히지 않는다면 누구도 뭐라 하지 않는 다는 이점도 있었다. 다만 조심해야 하는 게 바닥이 오래되고 해묵은 기름이 끼어있어 넘어지기 쉽다는 점이다.
30년 전통의 개업한지 2년이 된 돼지고기 구이집을 끝으로 아이들은 대로로 나왔다. 도로엔 드문드문 휴일에도 일을 하러 나가는 노동자의 자동차 몇 대와 멀리서 도로를 청소하는 커다란 트럭이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정류장 쪽으로 다가오고 있다. 잔나는 담배가 떨어졌는지 오던 길을 되짚어 편의점으로 갔다. 그가 편의점에서 나올 때 케이틀린은 문 옆에 숨어 있다가 불쑥 튀어나왔다.
[왁!]
[억, 깜짝이야. 간 떨어지겠네.] 잔나가 가슴을 쓸어내리자 케이틀린은 베시시 웃는다.
[근데 왜 거기서 나오냐.]
[바이 일하는데 들렸는데 닫혀있더라고.]
[나머지는?]
[먼저 들어가 자리 잡고 있지. 밥 먹?]
[안 먹. 뭐 먹으려고?]
[알아서 골랐겠지.]
두 친구가 잡담을 나누면서 정류장 쪽으로 걸어갈 때 청소를 마무리 지은 차량이 서서히 속도를 높이면서 지나갔다.
[어 위험한데, 청소부가 뒤에 매달려 있네.] 케이틀린은 순진한 표정으로 이동하는 차량 뒤에 매달려 있는 청소부를 걱정해 주었다. 위험한 행동을 하는 사람치고는 방진마스크와 주황색 헬멧, 야광조끼, 두꺼운 가죽장갑까지 안전에 굉장히 신경 쓰는 사람 같다.
그리고 오른손에는 검은색 비닐 봉투가 들려 있었다.
잔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청소차는 바이와 징크스가 서 있는 정류장으로 확실하게 거리를 좁혀간다.
잔나는 수상한 낌세를 느꼈는지 손가락을 퉁겨서 바람을 던졌다. 송곳처럼 날아간 바람은 봉지손잡이를 끊어 버리고 환경미화원의 가죽 장갑을 베고 손등에 상처를 남겼다. 도로에 떨어진 봉투가 찢어지면서 불꽃과 힌연기가 다량으로 터져 나왔다.
[저 새끼 잡아!] 잔나가 고함을 쳤지만 어느새 속력을 높인 차량을 때마침 켜긴 파란신호를 받아 사거리를 유유히 건넜다.
잔나와 케이틀린은 후다닥 정거장으로 뛰어왔다. 호들갑을 떠는 친구들을 보면선 바이와 징크스는 태연자작 도로에서 피어오르는 불꽃과 연기를 구경하였다.
[개쩐다.]
[잉 케잉 언제 왔어?]
[넌 나한테 감사해야 되, 나 아니었으면 퍼그마냥 쭈글이가 될 뻔했어.]
[지랄. 근데 왜 갑자기 도로 가운데서 불이 나는지 모르겠다.] 잔나는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일단 밥이나 먹자. 어쩌면 말야, 범인을 잡을 단서를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는걸.] 바이와 징크스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그제야 피어오르는 연기가 어떤 상황을 암시하는지 눈치 체고선 입을 꾹 다물고 식당으로 갔다.
편지를 해독하려고한 아이들이나, 날밤을 새며 클럽에서 일을 한 아이들이나 제대로 먹고 자지 못한 건 매한가지였다. 먹자골목에서 식사를 하고 잠부터 자기로 하였다. 기사식당에서 백반으로 주린 배를 채우고선 아이들은 살아 있는 시체마냥 거리를 힘없이 걸어 카페 ‘개천’으로 갔다.
주인장이 열쇠를 숨겨 놓는 벽돌을 들어 열쇠를 주워 문을 연다. 눈을 붙이기 위해 소파를 옮겨 자리를 만들고, 비품실에 딸린 쪽방에 들어간다던지 아니면 염치 불구하고 주인이 자고 있는 2층에 올라가서 구석에 담요를 깔고선 쪽잠을 청하였다.
해가 중천을 지나고 세 시간 쯤 뒤에야, 주인장은 눈을 뜨고 침략자들을 확인했다. 자애로운 가주였기에, 불한당의 수괴 바이와 오리아나를 조용히 깨워 불법의 댓가로 영업준비를 도울 것을 명령했다.
[일어나자마자 또 일을 했더니 속이 부대끼네.] 잔나가 카운터에서 음료가 담긴 쟁반을 가지고 와선 한 잔 한 잔 나누어 주었다.
[우리가 준비하고 우리가 첫 손님이라니 뭔가 색다르다.]
[색다르긴 개뿔이.] 바이가 콧잔등을 찡그려보이곤 음료수잔을 들이켰다.
[진실로 색다른 경험이란 말이야 애송이들아, 사물함을 열었는데 너구리 목이 굴러 떨어지고, 저질스러운 협박장을 받아 빡치는데 일터에서 주정뱅이 놈들이 취한 척 하면서 몸을 더듬고 더러운 기분에 잠이나 자려고 하는데웬 미친 미화원이 염산 샤워를 시켜주려고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거야. 이 정도는 되야 신박하지.]
[낄낄낄, 출세했어, 벌써 목숨걱정이나 해야 하는 큰손이 되셨네.] 빈 깡통이 굴러가는 요란하고 텅 빈 목소리로 징크스가 웃었다.
[웃어? 미쳤니? 남 일 같냐 이 미친년아.]
[뭐 어때, 이른 나이에 명성을 떨치는 건데, 한 번에 동물 애호가, 애주가, 매드 사이언티스트에게 사랑받는 일이 흔한 일이야? 긍정적으로 보자고 긍정적으로.]
[대가리에 총 맞었어?]
[희망을 가져요, 얼굴에 구멍을 낼 뻔 하고, 협박장을 보내고, 너구리를 선물하고, 염산을 뿌리려는게 각자 다른 인물이라면, 적어도 주정뱅이는 바이의 적이 아니잖아요.]
[날 두 번 죽여라 아주.]
[이게 웃을 일은 아니잖아, 뭔가 대책을 좀 세워봐 얘들아.]
[그렇게 이야기해도 이건 진짜 답도 없다고.]
[뭔가 알아낸 거 없어? 작은 거라도?] 케이틀린의 질문에 잔나는 고개를 자우로 가로저었다.
[그나마 한 가지 힌트라고는 그 미화원 손등에 흉터를 남겼다는 거지, 어쩌면 잡을 수도 있겠어 그 녀석은, 너넨?]
[마찬가지야, 아무것도 없어 아무것도. 협박장에서 지문이 나와도 동사무소를 털지 않는 이상 이게 누구껀지도 모르고, 그렇다고 편지에 뭔 마법이 걸려있어 역으로 탐지를 할 수도 없고. 난해해.]
[이런 젠장할 머리가 6개면 뭐하냐.] 바이가 뱃속에 불이라도 붙었는지 물을 벌컥벌컥 들이켠다.
[저기, 바이, 그 있잖아 약쟁이들 한테는 뭘 물어봤어?]
[어? 이것저것 왜?]
[그 그냥, 정리하다 보면 뭐가 나올까 싶어서.]
[그런가?]
이즈리얼은 바이와 징크스가 캐온 이런저런 정보를 조리있게 정리하는 작업을 했다. 그러는 동안 잔나와 오리아나 케이틀린은 머리를 이리저리 굴려가며 바이를 위협하는 녀석이 과연 한명인지 혹은 그 이상인지, 일단 사람인지 아니면 알 수 없는 그 무엇인지 상상에 가까운 추리를 했다.
토요일 저녁이 다가오면서 가계는 점점 활기를 가지고 어른들을 받아 들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주머니 가벼운 아이들은 음료를 한잔씩 시켰을 뿐 나올 생각이 없다. 그리고 주인장은 너무나 자주 걸레로 책상을 훔치러 오거나, 추가적인 주문을 받으러 와서 눈치를 주는 사람도 아니었기에 아이들은 마음 놓고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때 한 쌍의 손님이 들어왔다. 그들은 꽉 찬 식당을 보고서는 곤혹스러워 했지만 이내 아는 일행을 발견하고서는 주저함 없이 다가갔다.
[요런 꼬맹이들, 너네한테 여기는 아직 이르지 않니?] 신드라는 천연덕스럽게 말을 붙이고선 제일 끄트머리 자리에 앉았다. 잔나가 엉덩이를 옆으로 조금 옮기니 자리가 쉽게 만들어진다.
[오 이런, 식당에 들어오는 것도 나이제한이 있는 줄은 몰랐네요. 정원에 제한이 있는 건 알았지만요.]
[미안해, 실례가 되지 않으면 합석을 해도 괜찮겠니?]
[교장선생님이면 언제든지 환영이에요.]
[교장선생님만? 이사장은 서럽단다.] 오리아나는 웃음으로 화답했다.
[그런데 너네, 생긴 것과는 다르게 꽤나 얌전하게 노는구나. 토요일 저녁에 우정을 쌓는 저녁식사라, 모범생들도 이렇게 놀진 않을 거다, 아 제드 내 껀 알아서 시켜.] 교장은 메뉴판을 잡고선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시간을 여유롭게 즐길 줄 아는 건 좋은 일이지. 우리도 하루빨리 그런 날이 왔으면 좋겠어. 요즘은 가을걷이철도 아닌데 말이야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은 심정이야. 젊은것들이 뭐가 그렇게 힘들다고.] 제드가 말꼬리를 흘렸지만, 소문에 언제나 고픈 귀들은 이미 게걸스럽게 거의 모든 문장을 먹은 후였으며, 뇌들은 되새김질까지 마쳤다.
[무슨 바쁘신 일이 있는가 보네요.]
[교장이나 이사장은 언제나 바쁘단다. 높은 직위엔 책무가 따르니까.]
[말만, 맨 날 소파에 궁둥이 파묻고 커피만 홀짝이면서.] 바이가 턱을 괸 체 말을 했기에 발음이 약간 우그러졌지만, 신드라의 신경을 건드리기엔 충분히 날카로웠다.
[그런데 교장선생님 방금 말은 진짜 노인들만 하는 말 같았어요. 나 때는 이랬는데, 요즘 애들은 근성이 없어, 에 잉 쯧쯧, 다음 생신 때는 탕건이라도 하나 맞춰 드려야겠네요.] 잔나가 헛기침을 하면서 없는 수염을 있는 듯 쓰다듬는 척을 했다. 우쭐주쭐한 그 모습이 우스웠는지 제드는 화를 내지 않았다.
[기왕이면, 전립으로 해주렴, 이래 뵈도 무관 출신이니까.] 그는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카운터로 걸어가 주문을 하고 돌아와 앉았다.
[이번 달만 해도 벌써 4명 째야. 시작은 우리 애였지.]
[말하려고?]
[너도 알잖아, 요 녀석들은 이미 깊게 관여했다고. 그리고 수학여행에서 내가 말 했던 것처럼, 이제는 그만두고 말고 할 수가 없는 처지들이니까. 게다가 학생들은 이런 종류의 소문에 정말 빠르니까 조만간 알게 될꺼야.]
[뭐지, 말하는 걸 들어보면 누가 또 자살한 거 같은데, 난 들은 적이 없어.]
[이하동문.] 거리의 소문에 밝은 잔나와 바이가 아무런 소문을 듣지 못했으니 다른 아이들은 물어볼 필요도 없다.
[운이 좋았다고 표현해야 하나, 네 명의 아이들을 제일 먼저 발견한건 교사나 경비였으니까. 풍문이 일어나는 것을 막기 쉬웠지. 뒷산, 수영장, 과학실, 도서관.]
[도서관?]
[책장 밑에 깔렸더라고. 사고인줄 알았는데 안주머니에서 유서가 나왔어. 책이 이렇게 위험한 물건이란다. 수영장은 손목을 긋고, 과학실에선 청산가리, 뒷산은 고전적으로 목 메달기, 아 예는 불쌍했어. 하필이면 주말에 해서 새들이 파먹어 꼴이 말이 아니었지.] 적포도주가 식욕을 돋우기 위해서 식탁에 올랐다.
[너희들은 저녁 안 먹니?] 신드라가 목을 축이고선 아이들에게 물었다.
[왜 사주시게?]
[어쩜, 요 맹랑한 녀석 말하는 예절 좀 보게. 하지만 오늘 난 관대하니까 후식정도는 사 줄 수 있지.]
[눈물이 나네, 하지만 그 제안 마음에 드는걸.] 바이와 잔나는 신이 나서 먹고 싶은 음식에 동그라미를 쳤다. 계산서를 들고 카운터에 건내고 온 오리아나가 자리에 앉았다.
[성배의 짓이라고 보시나요?]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제드는 눈썹을 올려 보이더니 반쯤 빈 포도주잔의 주둥이를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렸다.
[조사 중이야. 하지만 장담 못해.] 교장은 신중하게 단어를 고르기 위해 말을 끊었다.
[모렐로가 알려 줬듯이 성배는 야망 있는 녀석들에게 추파를 던져. 그런데 이 나라의 교육판이 어찌된 모양인지 춘추전국시대를 방불케 해서 야심가가 한둘이 아니야. 당장 내 맞은편에 앉은 여인도 야망으로는 전국을 삼킬 수 있는 배짱과 포부를 가졌지.]
[그 정돈 돼야 배가 부르지.]
[그래그래, 다이어트는 어떻게 되가나? 덮어두고 손가락만 빨 수는 없어서, 이 녀석 정도면 물불 가리지 않고 할 짓 못 할 짓 다 하고 다니겠다 싶은 녀석들 몇 명 추려낸 정도다. 그 정도야 지금은.]
제드의 말이 끝나자 아이들은 이제 자신들이 이야기 할 차례임을 알았지만, 누구 한명 섣부르게 말을 꺼내지 않았다. 서로 눈치를 보다가 케이틀린이 입을 열었다.
[혹시, 이번 일에 성배가 관련됐다는 증거가 있으신가요?]
[없지, 당연히.]
[저희도 나름 이것저것 알아 봤는데, 파면 팔수록 이게 과연 성배가 한 일인가 의문이 들어서요. 땅콩건만 해도 그건 범인이 누구인지 명확해 대입을 해보면. 농담같아요. 그 망할 녀석이 야망이 있어 성배의 꼬임을 받을만한 놈은 아니라, 그냥 쓰레기에요. 몇 일 전에는 바이의 앞으로 협박장이 날아 왔어요. 수학여행지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복수를 하겠다는 내용이었는데 멋진 선물까지 함께 와서 대단히 곤욕을 치뤘어요. 수학여행지에서 그런 못된 일을 한 사람 역시 성배에게 꼬임을 받았다는 느낌 보다는 그냥 포악한 냉혈안에 가까워 보이는데.]
[요점이 뭐니?] 케이틀린이 숨을 고른다.
[범인이 뭔 진 모르지만 잡으면 어떻게 하실꺼에요?]
[처리라......, 성배면 내가 가져야겠지.]
[얼라리요, 의외야. 나는 당신이면 당연히 부수어 버릴 줄 알고선 벌써 빼돌릴 작전까지 구상해 놓았는데.]
[부술 수 있으면 그렇게 하겠지만, 그렇게 하긴 힘들겠지. 내가 가지고 있으면서 파괴하는 방법을 연구하겠어.]
[흥, 다른 꿍꿍이가 있는지 누가 알아.] 바이가 핀잔을 주자, 신드라가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건 내 이야기야 꼬마야. 욕망을 채워준다니, 상상만 해도 가슴이 벅차올라! 게다가 램프처럼 제한도 없으니 이보다 더 날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물건이 있을까. 당근 없지.] 그녀는 말을 하면서 가슴위에 손을 올렸다.
[만약, 조금만 더 빨리 알았다면 우리들이 갈라서는 일도 없었을 텐데.]
[하긴, 그럴 수도 있겠어.] 제드가 신드라의 가슴골을 지긋이 바라본다.
[교장선생님이 찾기를 빌어야 겠는데.]
[이사장님 설마 교장선생님이 찾았는데 강제로 뺏거나 그러시지는 않을꺼죠?]
[뭐 하러? 더 해, 왜 그렇게 생각하지?]
[평소에 워낙 도덕적으로 살아서.]
[맹랑하구나.]
[베~] 징크스가 혀를 쭉 내밀어 보인다.
[한대 콱 쥐어박고 싶어지네, 걱정하지 마. 그렇게 절박한 상황도 아니니까.]
[휴, 역시 친구한테까지 손을 댈 정도로 타락하시진 않으셨어.] 케이틀린의 순수한 발언에 제드는 쓴웃음을 지었다.
[나도 그렇게 믿고 싶지만, 신드라는 뭘 어떻게 해도 나보다 오래 살꺼야. 그렇지 신드라? 내가 죽으면 유품으로 받을 생각 아니야?]
[어.]
[욕심하고는.]
[방금 절대 못찾는 곳에 숨겨야 겠군 이라 생각했지.]
[밥이나 먹자. 그리고 일단 내 텃밭에다가는 절어어얼대 안 숨길꺼야.]
[왜, 젊었을 땐 다람쥐마냥 빨간책도 탄통에 넣어서 숨겨놓았잖아.] 제드는 피자 한 조각을 두루말이럼 말아서 베어 물었다.
[애들 앞에서 위신 떨어지게 말이야.]
[차라리 저희가 먼저 찾아내는 게 났겠네요. 왜 그런 위험한 물건을 가지고 있으려고 하시는거에요. 아무리 교장선생님이 올곧으셔도 성배의 꼬임에 넘어가지 않을 거라는 보장이 없는데, 그럴 바에야 차라리 부술 방법을 찾으시지 마시고 망망대해 한 가운데에 버리셔요. 저희가 계획한 것 처럼요.]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야, 그 귀한 걸 왜 버려.] 바이가 벌컥 화를 낸다.
[버려야지요.]
[이래서 곱게 자라신 분은 안 된다니까. 세상을 조금 더 넓게 보는 시각을 가지는게 어때? 팔아야지.]
[바보 같은 생각이에요.]
[진퉁배기 바보는 너야. 누구 좋으라고 그런 보배를 바다에 가져다 버려?]
[모두를 위해서요.]
[헛소리야. 고생을 했으면 댓가를 받아야지, 팔아서 팔자 좀 펴자. 제발 공익이네 정의네 도리네 짖지말고 현실을 보자고. 여기 앉아있는 여섯명 평생 일해도 못벌 금액이 순식간에 통장으로 뙇. 어떄?]
[솔깃한데?] 잔나가 맞장구를 쳐 주자 바이의 어깨가 올라갔다.
[거 봐. 얼간이들아 너네는 어떻냐? 두말할 필요도 없이 파는게 났지 않냐?] 이즈리얼은 어깨너머로 음식을 받느라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난 한번 소원 빌어보려 했는데.] 케이틀린이 한마디 던지고서는 화장실을 가는 바람에 바이는 면박을 줄 타이밍을 놓쳤다.
볼일을 보고 돌아온 케이틀린이 치마에 손을 쓱싹 문지르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너 평소에 맹한 표정으로 다니더니 흉계를 꾸미고 있었구나.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오른다더니.] 신드라가 생글생글 웃으며 접시에 놓인 디저트를 나누어 주는 케이틀린을 바라보았다.
[케이틀린 그건 안되요. 그게 어떤 물건인줄 알고 쓰겠다는거에요.]
[야, 어리바리, 그건 아니다. 나도 맨 처음엔 차라리 내 소원을 빌어볼까 생각도 해 보았는데, 위험해. 세상에서 제일 못 믿을 놈이 나란걸 알거든.]
[다들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성배는 내가 원하는 걸 다 들어준다면서, 그렇다면 세계평화 같은 일도 빌면 이뤄주겠지.]
[그럴싸한 개소리네. 핵 같은거 터트려서 평화로운 세계를 만들어 줄지 누가 알아. 너같이 4차원으로 생각하는 녀석 손아귀에 들어가면 멸망의 종으로 되겠지.] 잔나가 웃는다.
[오호.]
[오호는 얼어죽을.]
[케이틀린 말에도 일리가 있어. 좋은 소원을 빌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이즈리얼이 비꼬임을 당하는 케이틀린을 돕기위해 의견에 동의를 했다.
[어휴, 순진한 년 놈이 붙어다니더니 맛이 갔구나.]
[둘이 사귀나?] 제드가 물었다. 케이틀린과 이즈리얼을 서로를 바라 보고선 대답을 했다.
[아니요, 그냥 친구에요.]
[그렇구나.]
[풋풋하다야, 그래도 제법 창의적인 이야기야. 물론 실패하겠지만. 너희가 어떤 방식으로 찾든 발견한 뒤 구워먹던 삶아먹던 그건 내 알바가 아니지만 그래도 조언을 하자면 모렐로의 말을 잘 들어.] 신드라가 보라색 매니큐어가 칠해진 손가락으로 이즈리얼의 앞에 있는 낡은 고서를 가르켰다.
[아는 게 많으니까. 말 들어서 손해 볼 일은 없지.] 이사장은 포크로 미트볼을 찍어 입에 넣었다. 이즈리얼은 모랠로를 살피고서는 케이틀린에게 펼처진 페이지를 손가락으로 가르켰다. 마치 자신이 본 게 믿겨지지 않아 재치 확인을 받으려는 것 같았다.
[모렐로씨가 또 이상한 말을 하네, 아테나를 내버려 두어 줘, 그녀는 할 일을 한 것 뿐이야. 라는데?]
[가제는 게 편이야.] 잔나가 웃으면서 교장선생님이 건네주는 피자 조각을 받았다.
[아무래도 나랑 제드가 먼저 성물을 찾을 거 같네, 너넨 아직 찾아서 어떻게 처리할지 정하지도 못했잖니.]
[쪽수는 우리가 더 많거든.]
[그래, 잘해보렴.] 신드라가 광대가 볼록 튀어나오게 웃어보였다.
사람들이 더 들어오고 식당은 북적인다. 휴일이 하루 더 남은 날 밤은 모두의 가슴에 넉넉한 여유를 불어넣어주었다.
[하지만 반듯이 범인이 성배일까? 단순히 미친놈 일 수도 있잖아.]
[그러면 우리야 고맙지. 그냥 경찰에 넘기면 되니까. 머리 붙들어 싸매면서 속에 능구렁이 100마리는 들어 앉아 있을 법한 영감탱이들 떠보는 것보다는 미친년 놈 한 마리 잡아 족치는게 훨씬 편하니까.]
[동감이야.]
[그 점은 마음에 드는데. 그세끼가 만약 사람이면 날 만나게 된 다음엔 떡이 되어있을 꺼야.]
[동감이에요.] 오리아나가 바이의 말에 맞장구를 쳐 주었다.
[토끼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우릴 괴롭힌 댓가를 반듯이 치루게 해주겠어요.] 대부분의 아이들은 앞서 이야기한 성배보다는 조금 맛 이간 사람이 악당의 역활을 맡아서 인진 몰라도, 조금 과격하게 복수를 맹세하였다. 한 명만 빼고.
[굳이 그렇게 하지말고 나한테 맏겨 줘.]
[엉?]
[아니 나 말고 모렐로가 그러는데 나도 어느 정도는 말야, 굳이 그렇게 죽일 각오로......,]
[여물어.]
[모렐로는 자기한테 맡겨달래 그러면......,]
[그거하나 제대로 못 읽냐, 이리 내놔 봐.] 징크스는 이즈리얼의 손에서 고서를 낚아 체 바이에게 넘겼다.
[골 때리네 이거, 사역마로 부리겠다고?]
[어허 지금 당장 불 맛을 보고 싶다는 건가?] 잔나가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손가락 사이에서 굴렸다. 징크스가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서는 천천히 고서를 읽기 시작했다.
[잘 생각해 보라고, 그녀석 만약 사람이면 두 손 두 발 다 들 정도로 맛이 간 녀석일꺼 아니야, 사로잡은 다음 흠씬 두들겨 패서 떡을 만들던 곤죽을 만들던 난 상관하지 않아. 다만 나에게 줘. 사역마로 부리면서 정말 이타적이고 착하게 사는 그런 모범시민으로 만들어 놓겠어.] [개소리하네, 우리가 왜 니 말을 처 듣니,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 하지 마.]
[말 잘했다 징쓰, 저런 종이 쪼가리한테 끌러 다닐 필요는 없지.]
[끌리는 제안인데, 하지만 사양이야, 그냥 법에 맡기고 다른 학교로 전학을 보내면 만사태평인데 굳이 그렇게 할 필요는 없지. 호랑이에게 날개를 달아줄 일도 없고.]
[갑자기 나 무서워졌어. 모렐로 다시 봐야 겠어.]
[누누이 눈치를 줬잖니, 모렐로는 그래.] 제드는 웃는지 우는지 모를 얼굴로 아이들을 훑어보고선 신드라에게 다른 나라 말로 말을 걸었다. 어른들은 이제 자기들끼리만 공감하는 이야기를 나눈다.
선생님들한테 디저트를 얻어먹은 아이들도 먹을 게 떨어지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당은 여전히 붐비고, 주인장은 케이틀린과 오리아나에게 잡일을 도와줄 수 있는지 물었고 그들은 흔쾌히 부탁을 받아드리고 나머지 아이들은 각자 볼일을 보러 흩어졌다.
숙명이라는 것은 분명히 있다.
인간은 장소, 시대, 환경을 골라서 태어날 수가 없기에 태어난 순간부터 각각의 인간은 살아갈 조건이 다르다. 이것이 숙명이고 그렇기에 삶은 잔인하다.
이렇게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억울함에 미쳐버릴 수도 있다.
중간고사시험기간 동안 일진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부정행위를 저지른다. 공범의 대다수는 반에서 흔히 호구라고 불리는 아이들의 이름이 연루되어 있다. 가장 고전적인게 앞자리에 공부만 할 줄 아는 호구를 앉히고 뒤에서 떡하니 팔짱을 끼고 있으면 아니 이럴 수가! 어느새 그의 OMR카드가 이름과 교번이 적히지 않은 먹음직스런 자태를 뽐내며 일진의 책상위에 대령된다.
다만, 눈 돌아가는 소리를 기가 막히게 잡아내는 선생님이나 정말로 눈이 4개정도는 있어서 모두를 원활하게 감시하는 선생일 경우엔 일진은 더 더욱 사악한 방법을 강요한다.
OMR카드에 이름을 서로 바꿔 적어서 걷는 것이다. 버스나 교실의 맨 뒷자리는 대부분 수업에 관심이 적은 아이들의 몫이 되곤 하니까, 답안지를 회수할 때 밑장빼기를 해 순서를 바꾸기 쉽다. 손모가지가 날아가는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손은 눈보다 빠르기도 하고.
성적은 이런 식으로 위조되고 기록된다.
어곳은 요즘 기분이 점잖게 말해서 좋지 않았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불망나니가 따로 없다.
길가다 지나가는 여자애들 어깨빵 치고 욕하기, 동네 초딩들 삥 뜯기, 신발장 신발들 가져다 버리기, 온갖 공들 송곳으로 빵꾸 뚫어 놓기, 자동차 사이드미러 메직으로 검게 칠해놓기 등 유치하면서 사람 속 긁는 온갖 패악질을 벌이고 다녔다.
물론 이건 보이는 일에만 한정이 되어 있었고 평소에 그가 괴롭히는 아이들에게 있어선 더 엿 같은 일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빵셔틀일을 하는 아이는 평소처럼 일진이 짱박혀 담배를 뻑뻑태우는 동안 인산인해를 이루는 매점에서 빵을 사와야 했다. 늘 그랬듯이.
오늘 어곳은 기분이 안 좋았고 그래서 빵에서 나온 스티커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니면 거꾸로 마음이 불편해서 모든 게 시궁창 같아 짜증이 났거나. 뭐가 되었든 물개는 트집을 잡혀 얻어맞고 걷어차이고 혓바닥에 담뱃재가 털리는 수모를 당했다.
[새끼야, 공부 좀 해라. 쪽팔리게 89점이 뭐냐. 시발 지는 그래 놓고 95점이나 맞더라.] 대다수의 선생은 시험을 치면 모든 아이들의 점수를 출력해 모두에게 돌려보게 해서 점수는 공유된다.
한참 화풀이를 하던 어곳은 마무리로 뒤통수를 세게 후려쳤다.
피해자는 발걸음 소리가 멀어질 때까지 기다렸다. 간혹 간척하고 억하심정을 욕으로 풀때를 잡아서 더 패고 가는 경우도 왕왕 있었기 때문이다. 확실히 가해자가 떠난 것을 보고 그는 자리에서 비굴하게 일어섰다. 바닥에 내팽겨진 마이를 주워 먼지를 털고 걸쳤다.
[어휴 저 밉상, 남 트집은 겁나게 잘 잡아요. 지나 똑바로 살지 괜찮아?] 이즈리얼과 잔나가 모퉁이에서 나와서 그에게 다가왔다.
[원래는 나서서 한방 먹여 줄려 했는데 얘가 말리더라.]
[미......, 미안, 그게 원래 저런 녀석은 그 있잖아, 괜히 잔나가 간섭한다고 느끼면 더 악랄해 져서 더 못살게 구니까. 알지? 내가 무슨 말 하려는지.]
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잔나는 등과 바지 밑단에서 흙먼지를 털어 주었다.
[이크, 못생긴 얼굴이 더 못생겨 졌네, 따라와 대충 빨간약 발라 줄게.]
[그, 보건실은.]
[아냐 아냐, 보건실에 가는 게 아니라 우리 동아리 방에 갈꺼야. 거기에 웬만한 약은 다 준비가 되어있어.] 보건실에 엉망진창이된 꼴로 나타나면 어쩌다 그렇게 됐냐는 질문을 피할 수가 없다. 사실을 말하면 문제를 크게 만드는 학생으로 낙인이 찍히고, 그게 싫어 대충 얼버무리면 당하고도 가해자를 두둔해 줘야하는 억울함에 가슴앓이를 해야한다. 그래서 보건실은 피해야한다.
잔나가 앞장선다. 그러나 이즈리얼과 부상자는 움직이지 않았다.
[뭐해 두고 간다.]
[고맙지만 괜찮아, 내가 알아서 할게.]
[뭘 알아서 한다는 거야. 고집피우지 말고.]
[너희들은 수업 들어가야 하지 않아? 조금 있으면 시작이야.]
[수업? 내가 왜 그걸 들어야 하지? 괜찮아 신경 안 써도 돼. 우리야 수업 땡땡이를 밥 먹듯이 하는 애들이니......, 이즈 넌?] 잔나가 그의 짧은 금발을 기울이면서 이즈리얼의 안색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교실에서 유명한 땡땡이 삼총사에는 이즈리얼은 포함되지 않는다.
[괜찮아.] 그가 약간 주저하는 목소리로 대꾸하자 잔나가 화색이 돼서 어깨에 손을 올렸다. 순수한 천사를 타락 시키는 데에서 오는 흥분감을 감추지 못하고 연신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래, 탈주도 한번 해 보고, 숙제도 째고, 결석도 해보고 다 해봐야지 고삐리 생활 잘 한거지 맞제?]
[말투가 어색해, 하지 마.]
[야, 정색할 필요는 없잖아. 상처받았어, 아무튼 들었지?] 금발의 두 아이가 웃는다. 그들의 눈에는 서로를 신뢰하는 우정이 굳건하게 박혀있다.
다만 누구의 눈에는 정겨운 우정의 표현도 꺼림칙해 보였다. 호의를 받아들이기에는 욕설의 벽돌과 폭력의 타르로 다져진 마음의 벽은 너무나 두껍고 높았다. 꾸준하게 사람들에게서 상처를 받다보니 인간에 대한 믿음, 부모의 자비로움, 친구들 간의 의리, 선생들의 공명정대함 같은 기대들은 전부 산산 조각이 나버렸고, 그 외에도 삶을 풍요롭게 해주는 많은 것들이 깨져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믿음을 버리지 못했다. 삶은 살아볼 가치가 있고 언젠간 이 고통에서 벋어 날 수 있다는 믿음.
이들을 지키기 위해 그는 태산보다 높은, 빙하보다 두꺼운, 강철만큼 단단한 벽을 세워야만 했다.
[괜찮아, 신경쓰지 마, 내가 알아서 할게.] 그는 호의를 거절하고선 몸을 돌려 그들에게서 멀어져갔다. 하지만 잔나는 그렇게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었다. 어쩌면 일말의 죄책감을 느끼고 이 기회에 그 무게를 어떻게든 줄이고 싶었는지 모른다.
잔나는 강경한 수를 두었다. 앞을 막아선 다음 손가락을 뻗어서 눈물을 조금 찍었다.
[이 맛은! 거짓말을 하는 맛이구나!] 그는 혀로 눈물의 맛을 보았다. 상식에서 벗어난 행동이었지만, 그 광경을 바라보던 두 사람은 피식 헛웃음을 지었다.
[너무 빡빡하게 굴지 마, 이정도 까지 했으면 한번정도는 따라 오는 게 어때? 혹시 바이나 징크스 때문에 그런 거면 걱정 안 해도 되 그 녀석들 오늘 학교 자체를 안 왔어.]
[그냥 치료만 하고 곧장 나오니까 시간도 그렇게 걸리지 않을 테니, 가자.]
지극이면 정성이랴, 두 아이의 호의 공세는 경계심을 누그러트렸다.
[오리아나 아무리 찾아봐도 그럴싸한 기록이 나오지 않아, 차라리 이럴 시간에 바이처럼 학교를 샅샅이 뒤져보는 게 어때?]
[으흠, 어쩌면 그게 나을 지도 모르겠네요. 학교도서관이 무척 커서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찾아봤는데 정말 자료가 없네요.]
[맞아, 있다 해도 요기선 요렇쿵, 저기선 저렇쿵, 내용이 완전 엿장수 마음대로야.]
[이번에 빌린 책에도 별 다른 게 없으면 그냥 무작정 학교를 거닐어 볼까요?]
[바이랑 같이 다니자.] 케이틀린과 오리아나는 책을 한 아름 끌어안고도 등에 도서를 꽉꽉 눌러 담아 네모나게 변한 가방을 매고 동아리방으로 향했다.
방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발가락 끝으로 미닫이 문을 밀어 제쳤는데 평소 안 쓰던 근육을 쓰는 바람에 쥐가 났다.
[아야야야야, 쥐, 쥐.] 케이틀린은 저린 발을 옆으로 비스듬하게 들고 참새처럼 총총히 뛰어 들어왔다. 소파를 다급하게 찾고 있었고 조급함은 시야를 좁혀서 나란히 앉아서 어설픈 의술을 펼치는 잔나를 보지 못했다.
[으으으, 아파라.] 약도 없는 고통을 줄이기 위해 그녀는 몸을 뒤집어서 다리를 쭉 피고 놀란 근육을 풀어주려 했다. 그제서야 익숙한 얼굴들 사이에서 낮선 이방인을 발견하고는 고개를 소파에 파묻었다.
[어, 알지 케이틀린이야. 너도 얘 알지? 서로 같은 반이잖아.] 솜털, 반창고 껍데기, 실수로 흘린 빨간약을 지운 휴지 따위의 잡쓰레기를 이즈리얼에게 건네주고선 잔나는 일어나 구급상자를 제자리에 놓았다.
그러는 사이에 케이틀린은 상황이 심각한것처럼 꾸미기 엎어져서 가만히 있었다. 반면 오리아나는 살짝 눈인사를 나누고 마실 것을 내오기 위해 탕비실로 들어갔다.
탕비실에서 각자의 음료가 담긴 잔들이 나오는 것을 본 환자는 안색이 급격하게 나빠졌다. 그의 눈에는 저것들이야 말로 건전한 사교모임의 상징, 서로를 알아가는 대화의 전초, 감정을 들추는 손짓의 조짐 이였다. 그는 치료를 받으러 온것이지 깊은 관계를 맺으러 온것이 아니였다.
[아, 고마워. 난 그럼 가 볼게.]
[어딜, 들어올 땐 마음대로였지만, 나갈 때는 아니란다.] 잔나가 잽싸게 그의 앞길을 막아섰다.
[어? 그런데 웬일? 수업 안가?] 이즈리얼이 그제서야 오리아나와 케이틀린에게 물었다.
[오늘 결근했데, 어디가 아프다나?] 케이틀린이 대답을 하고 오리아나에게서 컵을 받아 들었다. 그는 대답을 이해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들었지? 시간은 많아. 우리 천천히 서로를 알아가 보자고.]
[혀는 왜 뱀처럼 날름거리는데?] 강 건너 불구경 하듯 케이틀린이 말했다.
[아, 알겠으니까. 잠깐 화장실 좀.] 그는 거의 잔나를 밀치다 시피해서 빠져나갔다.
[갔다 와!] 그가 고개를 내밀고 복도에 소릴 쳤다. 잔나는 소파에 걸터앉아서 한숨을 쉬고는 고개를 뒤로 넘겼다.
[안돌아 오겠지? 너무 밀어 붙였나?]
[조금 그랬어, 혹시 옛날에 때리거나 놀린 적 있어?]
[너넨 종종 내가 전학생인 걸 까먹는 경향이 있어.]
[아 맞네, 그럼 왜 우리를 피하는 거지?]
[낸들 알아, 하 진짜......., 야 이즈 왜 그때 막았냐?]
[말했잖아.]
[왜 뭔 일 있었어?]
[하, 어곳 그 세끼가 또 지랄하고 있더라고, 근데 이즈가 나가서 도와주지 말라 하더라.]
[우와, 이즈 못됐다.]
[잘했어요.] 동아리의 대부처럼 무개감이 있는 오리아나가 지지해주었다.
[아마, 이즈리얼은 어떻게든 그 친구를 도와주고 싶었을 테니까요. 어곳 같이 남 기분 헤아리는 방법을 모르는 사람은 자신의 감정이 거부당했을 때 어떤 짓을 할지 몰라요.]
[오호, 잘 아는 걸? 그럼 해결책도 한번 내놔보시지.]
[관심이 다른 데로 돌아가길 기다리거나, 한번 본때를 보여주면 돼요.]
[내가 하려던 일이 바로 그거지.] 잔나가 따지며 양쪽팔을 번쩍 들어보였다.
[스스로 해야 의미가 있어요. 애들을 한번 보면 알 수 있거든요, 집에서 기르는 온순한 개에게는 꼬집고 물고 때리고 별 일을 다 하는데, 성질 까칠한 고양이는 건들지 않아요. 할퀴니까요.] 오리아나는 찻잔을 계속 내려보며 말을 이어갔다.
[약자는 간혹 인내하는 자신이 미덕을 가지고 있다고 스스로를 속여요. 현실은 그저 겁쟁이 일 뿐인데요. 자신이 그런 상태임을 깨닫지 못한다면, 평생 오류의 늪에 빠져 불행하게 살겠죠. 알에서 태어나는 병아리는 스스로의 부리로 껍질을 깨고 나와야만 해요.]
[참 꼬름하다. 지금 저 셋키 보고 어곳이랑 처 싸우라는 소리야? 체급도 맞지 않는데 그게 무슨 헛소리야. 그럼 이즈는 스스로를 도와서 지금 우리랑 어울려? 다 바이 그 미친년이 펼친 판이잖아.]
이즈리얼은 자신의 이야기가 예시로 나올 것을 짐작하고 있었는지 애써 모른 척 하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같은 처지의 동류를 돕지 못한 죄책감, 섣부르게 도왔다 같이 불행해 질것이라는 염려가 뒤섞인 상태로 애써 흘려듣는다.
[맞아, 이즈는 우리가 안 챙겨 줬음 여전히 홀애비처럼 처량하게 살고 있을 게야. 애당초
걷지도 못하는데 뜀박질을 어떻게 해, 어불성설이야. 맞지 이즈?] 케이틀린의 갑작스런 질문에 이즈리얼은 당황했다.
[인간은 다양해요, 그리고 어떤 개체는 악행이 자신의 힘 인줄 착각하기도 해요. 이미 한두 번 바이 때문에 자존심을 구겼고 입지가 좁아졌어요. 이 상황에서 잘못 자극했다가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세끼가 해봤자 뭘 하겠어, 끽해야 즈그 애비 똥꼬 빠는 게 전부겠지.]
[사람을 죽이려 햇다는 사실을 잊으면 않되요, 그게 고의든 아니든 중요하지 않아요. 녀석은 생명의 무게를 깃털처럼 보는 인간이에요.]
방안의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어곳은 장난으로 알러지가 있는 아이의 도시락에 땅콩을 섞어 놓은 전력이 실제로 있었다.
각자의 마음속에 피어난 공포는 형체가 없지 않고, 실제로 숨결이 닿는 곳에 두 눈을 형형이며 있다.
[인생은 실전이에요, 지금도 저희는 충분히 위험한 일들을 많이 하고 상황이기에 도울 수 없어요, 불가능하기도 하고요. 이게 현실이에요.] 오리아나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에이씨! 담배 피우러......, 이런 젠장. 되는 게 하나도 없네.] 잔나는 머리를 벅벅 긁으면서 동아리 방을 나갔다.
아이들이 주로 모여서 담배를 피는 장소중 하나인 옥상은 늘 잠겨있다. 특히 자살사건이 일어난 다음부터는 경첩을 박아서 2중으로 잠금 장치를 해 놓아 출입이 더더욱 어려워 졌다. 하지만 열 사람이 한 도둑 못 막듯이 맘만 먹으면 들어갈 방법이야 많다. 직접 따는 방법도 있지만, 교무실에 들어가 하루정도 열쇠를 빌려가 복제해서 가지고 다니는 방법도 있다. 잔나는 주머니에서 여벌의 열쇠를 꺼내 문을 열었다.
[얼랄라, 너네는 뭐냐?]
[누가 할 소릴.] 옥상엔 먼저 온 손님이 있었다. 어곳과 그의 졸개들은 난간에 기댄 체 잡담은 나누는 중이다.
[여벌의 키를 우리만 가지고 있던 게 아니였었 보네.]
[하지만 올라올 때는 잠겨있었어.]
[반대쪽으로 올라 왔겠지]
[뭘 둘이서 그렇게 쑥떡거려, 볼일 없으면 꺼져.] 어곳이 가레를 돋우어 뱉는다. 바이였으면 진작에 주먹을 던졌겠지만, 잔나는 어곳과 그렇게 앙숙도 아니다.
[아, 그래 좋은시간 보내고 나는 다른데 가서 필게.]
[야, 이즈리얼 일로 와봐] 어곳은 바이나 징크스가 따라 올라오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서는 이즈리얼을 불러 세웠다. 이즈리얼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고 말았다.
[이리와 보라고.]
[그, 그게, 무슨 일 인데.]
[이 세끼가 튀어 오라면 튀어 올 것이지 뭔 말이 그렇게 많아 씹세꺄.] 이즈리얼은 안절부절 하면서 뒤어 서 있는 잔나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친구는 팔짱을 단단히 끼고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의 눈빛에서 도움을 기대 할 수 없다는 것을 눈치 챈 이즈리얼은 더더욱 혼란에 빠져버렸다.
[셋 센다, 튀어 와라.]
[하나]
[둘] 어곳은 과장되게 함숨을 푹 내쉬고선 셋을 세려 했다.
[시, 싫어.]
[오]
[쩌는데.] 뒤쪽에 있던 어곳을 졸개들이 비아냥거리며 이즈리얼에게 조롱을 던졌다.
[뭐라고? 이게 미쳤나.]
[싫다고. 하, 할 말이 있으면 거기서 해.]
[하, 이 세끼 한동안 안 처맞아서, 감을 잃었나.] 우르곳이 주머니에 손을 꼿은체 걸어 슬금슬금 걸어왔다. 이즈리얼은 뒷걸음질을 치다가 잔나랑 부딪쳤다. 그는 절벽처럼 버티고 있었지만 얼굴은 웃고있었다.
[어떻하지 잔나?]
[화 많이 났나 본데.]
[나, 나도 알아.]
[알아서 해, 근데 나라면 싸우든가 도망치던가 하겠어, 너 마법이 있잖아.]
이즈리얼은 그제서야 자신의 능력을 깨닳았다. 그는 어곳의 손아귀에 붙들리기 전에 마법을 사용해서 눈앞에서 사라졌다.
어곳은 이즈리얼이 눈앞에서 사라지자 당황해 주변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하지만 털끝하나 이즈리얼과 관련된 흔적을 찾을 수는 없었다. 꿩 대신 닭인지 우르곳은 잔나를 찢어죽일 기세로 노려본다. 맞서 잔나는 몸을 공중으로 살짝 띄웠다.
[이세끼 어디갔어. 말해 디지기 싫으면.] 우르곳은 손가락을 우드득꺽으면서 위협했다.
[글세, 가고 싶은데 가지 않았을까? 너네가 여기 있는 것처럼 말이야.]
[시발 세끼가 말장난 하지 말고 불어라.]
[이 세끼가 주둥이 함부로 놀리다 죽고 싶냐?] 잔나가 으르렁 거리며 어곳을 노려봤다.
[재수 없는 세끼가 오자마자 바이 쌍년과 붙어먹을 때부터 맘에 않 들었는데 어디 오늘한 번 다이다이 깨자.]
[그래 이 터진 만두 세끼야. 오늘이 니 기일이다.] 두 사람은 서로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았다. 옥상에서 분위가가 험악해 졌거늘 구경하는 다른 두 명은 오히려 재미있는 일이 생겼다고 여기는지 히죽이며 구경을 한다.
[어곳 적당히 해. 너 지금 완전히 찍혔잖아.]
[아버지가 소방관도 아니신데 말야, 한 까치 빌린다.] 조무래기 한 명이 어곳의 마의를 뒤적이더니 담배를 한 개비 빌렸다.
어곳과 잔나는 서로를 노려보면서 작은 원을 그리기 시작했다. 원은 점점 좁아져서 서로 팔만 내지르면 싸움을 시작할 수 있는 거리에 도달했다.
[아악!]
짧은 폭팔음이 들리고서는 우르곳의 담배를 빌려핀 건달이 얼굴을 부여잡고서는 절규하기 시작했다.
[아악 따가워 시발, 아프다고.]
[뭐야 미친, 야 손 치워봐.] 옆에 있던 동료는 얼굴을 부여잡은 손을 강제로 때 내려다 흠칫 놀라 뒤로 물러섰다. 오른손 검지와 중지 두 마디가 날아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게 뭔 일이야!]
[갑자기 폭팔이.] 창백해진 건달이 정신을 못 차리며 대답하자 어곳이 정강이를 걷어찼다.
[등신아 얼 탈때냐.] 양호실로 튀어가, 병원에 전화하고. 어곳은 바닥에 엎드린체 계속 울부짖는 패거리를 일으켜 세워서 어깨동무를 했다. 그리고선 잔나에게 신경도 쓰지 않고 계단을 따라 내려갔다.
잔나는 어곳과 정면으로 대치하고 있었기에 어떻게 일이 벌어졌는지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잔나는 어곳이 두고 간 상의에서 담배 곽을 꺼내 주머니에 넣었다.
승리의 여신은 딱히 성별을 가리지 않으셨다. 바이의 짐승 같은 촉은 교장을 자세하게 관찰하면 된다고 속삭였고 그녀는 본능에 충실했다.
성실한 과학자처럼 능력이 닿는 한 교장의 일거수일투족을 밀착하여 관찰했다. 예컨대 새벽에 교정청소하는 모습을 조깅하며 살폈고, 교사회의 때는 교무실 쓰레기통을 비우는 척하며 도청, 쉬는 시간엔 난간에 팔을 걸치고 누구누구와 대화를 나누는지 확인했다. 심지어 화장실에 불건전한 수단을 서치하기 위해 오리아나에게 자문을 구했다가 뺀찌를 먹었다.
그녀의 노력은 지구상의 어떤 과실과도 비교 할 수 없이 빠르게, 단 3일 만에 결실을 맺었다. 사건은 교무실에서 벌어졌다.
[야, 이즈, 잘 보고있냐?] 바이가 그에게 물었다. 그녀가 잠시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고 올 동안 이즈리얼은 교장실을 감시했다. 그는 제드의 방으로 나방한마리가 들어간 걸 봤는데 그걸 알려줘야 할지 고민을 했다.
[어, 잘 보고 있었어.] 틀린 말은 아니라며 그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흐음, 슬슬 따분해 진다. 이거나 먹어.] 빵을 던진 다음 바이는 기지개를 켜고선 창틀에 팔을 괴었다.
금요일 저녁 자습은, 불타는 금요일을 어른들끼리 즐기는 게 항상 못마땅한 학생들에게 있어선 극복해야할 불평등의 상징이었고, 억압의 상징이었다. 상징은 으레 그렇듯 박살이 나거나 무시된다.
야자의 감독도 절대로 복도를 어슬렁거리는 한량을 조상을 둔 분이 아니셨고 거의 대다수의 아이들은 자의 반 타의 반 자율학습을 쨌다.
그래서 바이와 이즈리얼은 창틀에 붙어서 교장실을 여유롭게 감시할 수 있었다. 징크스는 교실에서 책상을 이어 붙이고 그 위에 누워서 자고있다.
[그런데 바이 그, 뭣 좀 물어봐도 되?] 적막속에서 이즈리얼이 말을 건넨다.
[쓰리싸이즈?]
[그게 뭔데? 아무튼 그게 아니라, 범인을 잡으면 어떻게 할 꺼야?]
[쳇, 이래서 범생이들은 놀려먹기도 어려워. 뭘 어떻게 해, 공포의 쓴맛을 보여 줘야지.]
[뭐가 됬든?]
[뭐가 됬든.]
[그렇구나......., 근데 바이 안 무서워?]
[내가? 주먹다짐도 못해서 연장에 의존하는 그런 세끼를? 그 비겁한 세끼는 보나마나 비실이에 멸치에다가 사회부적응자며 냄새까지 나는 총체적인 난국인 쓰레기것지.] 바이는 생각만해도 피가 거꾸로 솓는지 목청을 돋우었다.
[넌 좋겠다, 힘도 있고 용감해서. 반면 나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겁쟁이야.]
[잘 아네.] 바이는 사악하게 웃었고 밑동이 약간 노란 송곳니가 드러났다. 이즈리얼은 자조적인 웃음을 보였다.
[니가 한 말이 다 맞아. 특히 힘도 세고 용감한 점은 말야. 앞으로는 미인이라는 수식어도 붙여. 다만, 나도 그닥 쓸모가 있는 건 아니야. 넌 공부 잘 하잖아.]
[외우는 걸 잘 할 뿐이야. 누구나 다 할 수 있어.]
[없어, 날 봐. 징크스도 보고. 공부는 잘 하고 볼일, 잘생기면 지화자, 덮어두고 돈은 많으면 장땡. 그리고 쓸모가 있네 없네 따지는 게 웃기지 않아? 누굴 노가다판 공구리들로 보는 것도 아니고. 아니지 가다 아제들도 망치로 톱질은 안하니까.]
[뭔 소리야.]
[아, 개소리야. 그냥 꼰대들 뻘 소리를 하도 듣다보니 생긴 개똥철학. 뭐 기죽지 말고 살자 우리.] 바이가 솥뚜껑같은 손으로 볼을 꼬집자 빠져 나오려고 몸부림쳤다.
[염병 드라마 찍네, 시끄러.] 교실에서 징크스가 휘적거리며 나온다.
[가서 잠이나 더 퍼 주무셔.]
[돼지 목 따는 소리로 우는데 어떻게 처 자.] 아이들이 농담을 주고받자, 일순 유리창이 깨지는 소리가 난입을 해 주의를 끌었다.
자석에 철가루가 붙듯 세 명의 아이들은 창가에 달라붙었고, 교장실에서 신드라와 제드가 뛰어내리는 품위 없는 장면을 보고야 말았다. 두 사람은 바닥에 고양이처럼 날렵하게 착지 했고 곧장 뛰었다.
바이의 시선이 마침 그림자 속으로 숨는 제 3의 인물, 즉 두 교사의 표적이 된 누군가의 바지를 보았다.
교실이 술렁이자 바이는 창가에 붙어있는 두 친구의 손을 잡아끌고 무관심한 척 입술 끝을 내리고선 화장실 쪽으로 복도를 걸었다.
아이들은 호기심을 자극한 무언가를 해명하기 위해 천재가 된다.
대중의 시선에서 벗어나자마자 바이는 뛰었고, 그녀의 뒤통수만 보고 쫓아가자 신박하게도 그들은 제드와 신드라가 서있는 학교 뒷산 중턱에 도착했다. 아이들은 수풀에 숨어서 주의를 귀에 집중했다.
[이쯤에서 끝내자. 더 이상 도망갈 곳은 없어.]
[쳇, 넌 너무 나이브해.] 신드라가 제드의 말에 투덜거렸다.
[정말 끈질기네.]
[일이니까.]
[위선자 같으니라고, 역겨워.] 하필이면 밤 구름이 잔뜩 낀 날이라 달빛도 없을 뿐더러 학교의 구닥다리 가로등빛으로는 범인의 인상착의의 실루엣조차 밝혀내지 못했다. 그렇지만 먹구름이 머금은 습도는 목소리를 한결 더 멀리 보내 주었다.
[일? 왜 하필이면 지금만 일을 하는데? 장애인 하나 죽으니까 정신이 번쩍 든건가? 아니면 이제야 발등에 불이 떨어진 걸 눈치챘어?] 과장이 잔뜩 들어가고 억양이 올라갔다 내려갔다 심하게 요동치는 그의 문장은 상대방을 원망하는지 조롱하는 모를 모양새였다.
[어린놈 말 버릇봐라.] 신드라는 공중에 살짝 떠서 어른을 우습게 아는 이에게 본때를 보여주려 했다.
[눈치는 이전부터 챘지만, 저번에 고양이 사건 때부터 감을 잡았지. 그를 놓아줘.]
[쯧.] 그가 가볍게 혀를 찼다.
[이래서 일처리는 깔끔해야 돼, 이번에도 내말 듣길 잘하지 않았어?]
[시끄러, 저번 작전도 네 녀석에게서 나온거야.]
[교장, 어째서 우릴 이렇게 방해 하는 거지? 우리가 한 일이라고는 아주 사소한 것들이 아닌가? 이럴 시간에 가서 자서전이나 집필하는 게 당신 미래에 더 도움이 될거 같은데?] 조금전 조롱을 던진 사람이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제드를 트릿하게 비꼬는 목소리는 차분했다.
그 때문에 숨어 듣던 아이들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분명 한 명일줄 알았는데 목소리는 두 개였다.
[사소한 일은 아니지, 우선 내가 아끼는 토끼들을 아주 작살을 내 놓았더군.]
[하하, 뭐 어때 어차피 우리에서 갇혀서 살만 뒤룩뒤룩 찐 체 죽을 녀석들인데. 동물은 우리에게 기쁨을 주려 있는거 아냐? 아 혹시 배상을 원해? 얼마든지 해 줄게.]
[하하하, 말이 통하는 친구였네. 뭘 배상까지해 학생이 철모르고 한일인데.] 공중에서 부유하던 이사장이 호쾌하게 웃으면서 손사례를 쳤다.
[몸으로 때워, 한 팔다리 부러트리는 정도로?]
[그걸론 쫌 모자란 듯싶은데, 쇠뿔도 단김에 뽑지. 고양이건도 있어.]
[이거 영, 교사가 아니라 이거 사채업자네.]
수풀에 조용히 있던 바이가 옆자리에 있던 이즈리얼의 어깨를 툭툭 치더니 손가락 끝으로 그의 옆에 있던 감자크기의 짱돌을 가리켰다. 돌을 건네받은 그녀는 소리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깨에 힘을 뺀 뒤 양팔을 머리 위로 들어 올리고선 순식간에 같이 올린 다리를 항구에 정박하기 위해 떨어진 닻처럼 힘차고 빠르게 내려, 그와 동시에 있는 힘껏 돌을 던졌다.
[윽.] 그림자 속으로 빨려 들어간 돌에 범인이 맞았다.
[이거나 먹어라! 감히 이 몸에게 바람구멍을 내려 시도하고서도 살아남을 줄 알았냐!] 바이는 범인이 반사적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음을 알고선 검지 아래에 엄지를 끼우고선 깔린 손가락을 상하로 움직였다.
[빌여먹을 또 너야 날날이? 기다려라 반듯이 앙갚음을 해주마.]
[또 너네들이냐? 따른 애들은 불금이다 해서 땡땡이치는데, 왜 꼭 이런 날엔 학교에 붙어있어.] 제드가 신경질을 낸다.
[어렸을 때 먹을 게 없어서 청개구리만 먹었거든.] 징크스의 재치있는 대답에 이즈리얼은 미간에 손을 얹고 주무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당부했으면 좀 알아들었으면 했는데.] 제드가 원망섞인 목소리로 아이들을 비난한다.
[아아, 너무 심통내지마, 난 관대하니까. 저 새끼 팬다며? 나도 끼워줘 그럼 입을 조개마냥 꽉 닫고 있을게. 개인적인 원한이 좀 있거든. 알지?] 바이는 부당거래에 알맞게 눈썹을 위 아래로 움직여 보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범인의 처지는 독안에 든 쥐였기에 교사와 선생은 여유롭게 있었고 방심했다. 그래서 비장의 카드를 꺼내는 손을 비틀지 못했다.
품속에서 자그마한 유리병을 꺼내더니 바이가 있는 곳으로 힘껏 던진다. 징크스는 잽싸게 몸을 날려 피했지만, 한창을 떠들던 바이는 반응이 조금 늦었다. 옆에 있던 이즈리얼이 그녀의 손을 잡고 당겼고 바이가 넘어져 아래에 깔렸을 뿐이다.
[저 도끼로 마빡을 까부술 놈이, 성대를 뽑아 피리를 불어줘?] 바이가 격분해서 튀어 오르려 했지만 곧장 다른 유리병이 날아오는 것을 보고 바닥에 바짝 붙었다.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나자 곧바로 기름이 부글부글 끓는 솥에 물이 떨어진 것 마냥 폭팔하는 소리와 시큼한, 레몬이나 오렌지에서 흔히 맛볼 수 있는 입에 침을 고이게 하는 기분 좋은 신맛이 아니라 부패물에서 흔히 풍겨오는 기분 나쁜 쉰내가 주변을 압도했다.
유리병이 깨진 곳을 중심으로 불길이 번지기 시작했다. 그 소동 속에서 징크스는 달박음질 소리를 들었다.
[저 세끼 튄다. 잡아!]
[지랄말고 너나 튀어 통구이 되고 싶냐?]
[귤 까라 그래.] 징크스는 불길에서 떨어지기 위해 발을 옮기려했다. 하지만 별안간 피부위에 지네가 지나가는 느낌이 들더니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눈은 바늘로 찌르는 듯 따가워서 눈물이 쉴 세 없이 흘러 나왔고 코로는 콧물이 흘렀다. 호흡은 점점 더 힘들어져 숨을 크게 크게 쉬어야 했으며 나중에는 그마저도 여의치 않아 마른기침을 했다.
[야 뭐해 빨리, 켘, 이게 뭔, 켁켁, 냄세야?] 바이가 고함을 치기 위해 입을 크게 벌렸다 칼을 삼킨 것 같은 통증에 놀랐다. 그녀는 마의를 훌렁 벗어 입을 틀어막았다.
[빨리 나와!] 제드가 옆으로 와서 옷깃을 붙잡아 당겼다. 바이와 이즈리얼은 징크스가 저 안에 있다고 설명을 하려 했지만, 정체를 알 수 없는 위험한 연기 때문에 목소리를 낼 수가 없었다.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이즈리얼은 바이의 손에서 마의를 낚아채더니 순간이동을 써 두 사람의 눈에서 사라졌다. 제드는 이즈리얼이 자신의 도움을 받기 부끄러워서 스스로 능력을 사용해서 탈출 한줄 알고 바이를 화마의 구덩이에서 끌고 나왔다. 범인은 추적자들의 관심사가 불길과 가스로 옮겨진 틈을 타서 도망치는데 성공을 했다.
그러나 그는 기쁘지 않았다.
화학약품을 사용한 시점에서 자신의 꼬리가 드러난 것과 다름이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어두운 숲속을 질주하던 그는 숨이 막히는지 한 고목에 등을 기대고서 숨을 몰아쉬었다. 한동안 숨을 고른 그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보았다. 어두컴컴한 하늘에는 먹구름들이 가득한 게 금방이라도 한바탕 소나기를 퍼부을 것 같다.
[거 도망치기 딱 좋은 날이구만.]
[어디로?]
[낸들알어, 시망, 그 분홍 대가리년은 끝까지 지랄이네. 머리 색깔 만큼 멍청해.] 두꺼운 가죽 장갑이 크게 불평을 했다. 장갑의 검지몸통 부분에는 불에 덴 흔적이 있는데 이것은 불에 데 화상의 자국이긴 하지만, 직화가 아닌 화학 약품이 닿아 생긴 흉터다.
[혹시나 해서 내가 따라오길 잘했지, 아 물론 이제 붙잡히는 건 시간문제겠지만.] 큰일을 마친 그가 오지를 놀려서 기지개를 켰다. 특급순도를 가진 물질을 다룬다는 중압감에서 벗어나 한결 홀가분해 보인다.
[안 잡힐 수는 없나?] 허리춤에서 사냥용 칼이 물었다.
[뭐......, 조심하긴 했으니 그럴 수도 있지만, 알잖아 우리의 실력. 경찰이 진짜 각 잡고 수사에 나선다면 우리도 몰랐던 실수 때문에 꼬리 밟히는 일은 시간문제지. 짭세들은 생각보다 유능해.]
[쯧, 손을 빌려야겠네.]
[아아, 그래야지. 조금 있으면 고2이고 고3이 되니까 그때까지 조금 시간을 끌면 지위로 찍어 누르고 결국 흐지부지 해 지겠지. 고3은 벼슬이니까.]
[그렇게 한다 해도 한 가지 문제가 남아.] 칼집에서 나온 칼은 범인의 손 위에서 널뛰기를 했다. 어두운 밤이었지만 높게 떠오른 칼은 언뜻언뜻 창백한 얼굴을 공중에서 비췄다.
그의 단단한 몸통을 범인은 꽉 잡았다.
[놈들에게는 돌려줄게 꽤 많지 않아?]
[확실하지, 하지만 문제는 시간이 없어. 녀석들도 이제 더 바싹 약이 올라 눈에 불을 키고 우릴 찾아. 복수는 나중으로 미루는 게 어때?]
[으흠......, 나쁘지 않은 생각이야.]
가죽장갑과 칼은 의견의 합의를 보았지만, 정작 행동으로 옮기는 한 사람은 계속 듣고만 있었다. 그는 장갑을 조심스럽게 벗어 주머니에 넣고 칼을 집으로 되돌려 보냈다.
도망자는 소굴로 돌아가는 길 내내 바이와 그 주변부 인물들을 최대한 포함한 어떤 계획을 세우며 자신의 다짐을 공고히 했다.
습한 날이었고 때문, 불길은 크게 번지지 못했다. 금요일당직과 야자감독을 하던 선생들은 삽을 들고 갑작스러운 산불을 진압하는데 동원이 되었다.
산불은 금방 꺼졌지만, 들불처럼 소문이 일어나는 것까지는 막지 못했다. 금요일이라 야자를 하는 아이들이 적게 남았던 탓인지 화재의 원인에 대한 빈약한 설명은 주말 동안 부족한 부분을 상상력으로 충원해서 월요일쯤에는 그 크기를 원배의 4곱절은 키워 돌아 왔다.
이즈리얼과 징크스는 현장에서 꽤나 멀리 떨어진 곳에서 발견되었다. 그의 생존본능은 위기의 순간에 가장 편한 곳을 생각해 버렸고 동아리방에서 컵라면을 까먹던 잔나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바람에 그에게 가벼운 화상과 억울함, 그리고 세탁비를 안겨주었다.
[가 머 때문에 이러능 아무도 날 이해 모테! 난 한번만이라도 행보카고시픙데 왜 나 꽈찌쭈는 햄보칼수가업서!] 세탁비용을 본 잔나가 하늘에 대고 외쳤다.
놀이터는 나이를 불문하고 좋은 곳이다. 낮에는 아이들이 밤에는 갈 곳 없는 청소년들이 쉬러온다.
[계가 그럴 일이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케이틀린이 놀이터 그네에 걸터앉아 몸을 앞뒤로 조금씩 움직이자 녹슨 사슬들이 삐걱인다. 잔나는 맞은편에 있는 안전철봉에 앉아있다.
[징크스랑 바이 완전히 헛다리짚었네, 아직도 약쟁이들 찾아서 정보를 캐내는 중 아니야?]
[아니 제드랑 신드라에게 찰싹 달라붙어서 이것저것 물어보고 있지.]
[하진, 그 두 사람은 확실하게 봤을 테니까. 이걸 알려야 할까?]
[뭘. 얼굴에 빵꾸를 뚫은 놈이 누구인지 알아낸 거 같다고 알려주려고?] 말이 거칠게 나오자 케이틀린은 고개를 떨궜다.
[초상난다. 일단은 한동안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게 내버려 둬야지.]
[그 다음엔?] 케이틀린의 물음에 잔나는 답 없이 엄지손톱을 물어뜯는다.
[잘 모르겠어. 이걸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말이야. 이제 가닥을 잡은 꼴이야. 당장에 뭘 어떻게 할 수가 없어.]
[하지만, 아테나가.]
[그럼 너가 방법을 내 놓아봐.] 성난 말이 두 사람 사이를 가로질러 달려간다.
[미안, 말이 심하게 나왔어.]
[괜찮아.] 잔나가 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내 손가락사이로 굴린다. 미꾸라지처럼 유연하게 손가락 사이를 누비던 동전은 실수로 떨어져 모래사장 속으로 사라졌다. 잔나도 굳이 찾으려고 하지 않았다.
[아테나가 걱정이 되는 것도 그 녀석이 걱정 되는 것도 이해 해. 그렇다고 해서 지금 우리가 별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고.]
[손 놓고 지켜보기에는 잔나, 이사장님과 교장선생님도 마음에 걸려. 바이네가 이야기해준걸 들어보면 두 분은 범인이 누구인지 알아.]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야.]
[하지만, 선생님이셔. 우리보다 할 수 있는 게 더 많을 꺼라고. 우리가 하고 싶지 않은 것들도 하시겠지.] 잔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특히 이사장은, 무슨 일을 할지 몰라.]
[그래, 더 늦기 전에 뭐라도 해야겠지.]
[내 말이.]
[하지만 뭘? 고작해야 고등학생인데.]
[잘 생각해보면 우리 선에서 끝낼 수 있는 방법이 있지 않을까?]
[우리?] 잔나가 되묻는다.
[넌 그 불쌍한 녀석을 어떻게 하고 싶은데?]
[어떻하긴 구해줘야지.]
[그 구해준다는 의미에 사지를 못 놀릴 정도로 팬다는 의미는 없지? 바이 성격상 곱게 구해줄 거 같진 않은데, 모렐로는 사역마로 쓰겟다고 뭔 수작을 부릴지 몰라. 그래 구했다 치고 성배는 어떻게 할껀데, 가지고 소원을 빌꺼냐? 오리아나는 죽자고 부셔버리거나 가져다 버리려고 할 텐데. 우리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다르다고.]
[넌 어때?]
[나야......, 구해주긴 할 꺼야, 성배는, 관심 없어 어떻게 되던지 말야. 한낱 마도구 따위.]
[그럼 날 도와줘. 날 도와서 그 녀석을 하고 성배를 사용하는 걸 도와줘.] 케이틀린이 두 눈을 똘망똘망하게 뜨고 잔나를 바라보았다. 잔나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이 세상물정 모르는 아가씨가. 알았어 도와줄게.]
[예스, 아직 계획은 없지만 곧 생길꺼야.]
[그래야지, 그런데 소원은 뭘 빌지 생각 했어?]
[아니 생각 안 해봤는데. 세계평화정도면 괜찮지 않을까?]
[괜찮네.]
잔나는 손을 내밀어 케이틀린이 그네에서 일어나는 것을 도와주었다. 두 사람이 떠난 다음 한밤중의 놀이터는 조용해 졌다.
해가지고 해가 떳다.
평범한 하루가 지나가서 어느덧 청소시간이다. 케이틀린은 과학실로 가서 청소를 도와주고 나머지 아이들은 사육장으로 갔다. 예전에 비해 썰렁한 뒷산의 토끼우리엔 오리아나와 케이틀린이 지극정성으로 살린 토끼들이 돌아다닌다.
[쳇, 이사장 쩨쩨하게 그거하나 알려주지 않고 말이야.] 바이가 볼맨소리를 낸다.
[당연하지 핑신아, 거꾸로 생각해 봐라, 너라면 알려 줘?]
[절대. 내가 꿀꺽해야 하는데 경쟁업자에게 알려주겠어.]
[매번 이야기 하지만 혹시라도 손에 넣게 되면 반듯이 가져다 버려야해요.]
[눼눼눼, 어련하시겠어요.] 바이가 혀를 쑥 내밀고 손사례를 친다.
오리아나가 사육장 문을 열고 들어가 물그릇을 가지고 나오자 다리를 쩔뚝이면서 토끼 한 마리가 따라 나온다.
[야 한 마리 나왔다.]
[쩔뚝이라 도망못가, 냅 둬.]
[그건 또 그렇네.] 징크스는 사육장 주위에 있는 강아지풀을 꺾어서 토끼 앞에 대고 바람개비처럼 돌렸다. 뭉특한 코가 풀을 쫓아 돈다.
오리아나는 우리 옆에 있는 사료 주머니에서 사료을 퍼서 그릇에 담고 물을 갈아주고 잔나는 집게를 들고서 썩기 시작한 건초들을 꺼내서 밖에 버린다. 친구들이 일을 하는 동안 징크스와 바이는 철조망 속에서 분주히 움직인 토끼들을 구경한다.
정리가 마무리될 때 쯤 구두가 흙을 밟는 소리가 오솔길을 타고 올라왔다. 제드다. 교장은 아이들과 안부 인사를 조금 주고받더니 말없이 사육장 안을 보았다.
[생각보다 많이 살렸구나.]
[그렇죠.]
[한 다섯 마리정도 되니?]
[네 마리요.]
[그렇구나. 징크스는 어떻니? 이즈리얼은 괜찮아 보이는 거 같던데.]
[뒤졌으면 여기 서있겠어?]
[넌 혓바닥으로 망할꺼야.] 바이가 징크스의 옆구리를 쥐어박았다.
[이제 사육장 정리를 마쳤는데, 저희는 먼저 내려가 볼께요.]
[바이는 괜찮니?]
[나? 나야 뭐 워낙 튼튼하니까.]
[잔나는?]
[어? 난 그때 없었는데. 굳이 따지자면 이즈리얼이 머리 위에 떨어져서 화상이랑 타박상 입은거 정도, 근데 그렇게 심하지 않아.] 교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니 다행이구나. 언제 한번 단체로 신드라에게 가서 검진을 받아 보거라. 화학약품에 뭐가 섞여 있을지 모르니까 말야, 계중에는 시간을 두고 질환이 나타나는 것도 있으니까.]
[이사장한테요?]
[간호쪽에 경력이 많아. 의외지?]
[사양할래, 몸에 뭔 일을 벌여놓을지 알아.] 바이를 필두로 대다수의 아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추어가 만든 거라서, 그렇게 정밀한 검진이 필요할까 싶지만 일단 알고 있을게요.]
[글쎄다. 반듯이 가렴.] 교장은 뒤로 돌아 학교를 바라보았다.
[여기는 참 넓지. 역사도 깊고 말이야. 본격적으로 학교로 사용되기 전에는 별의 별 시설들이 들어와 있었고. 마법연구소, 훈련소, 공학제련소, 무기고, 관제소......, 위치가 워낙 좋았고 한 번 시설을 짓기 시작하더니 한군데 뭉쳐있는 게 좋다고 판단했는지 계속게속 뭐가 들어왔다고 하는 구나. 정권이 바뀌어도 말이야. 그 과정에서 서류상 잊혀버린 시설들이 생기게 되었지.] 교장은 한명 한명의 얼굴을 세심하게 살피었다.
[그래서 방심할 수 가 없구나. 그 약을 학교애서 구했다면 너네가 생각하는 거 이상일 꺼다. 그러니 신드라에게 가 보렴.]
[예, 그런데 교장선생님 그렇게 비밀스런 장소가 많은데 굳이 학교를 지었는지 아셔요?] 오리아나의 백색눈동자를 제드가 들여다보았다.
[전쟁이 한창이던 시절엔 학생도 곧 병력이었으니까.]
[끔찍하네요, 혹시 그런 무서운 장소 몇 곳을 알려 주실 수 있나요? 함부로 들어가지 않게요.]
[하하하, 이미 내가 찾은 곳은 막아 놓았으니까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꺼다.]
[그럼 다행이네요.]
[아, 혹시 모르지 다른 입구가 있을지. 건물들은 비슷한 기능을 하는 구역끼리 모여 있으니까 과학실에 어쩌면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나중에 한번 찾아 봐야겠어.] 교장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더니 오솔길을 따라 내려갔다.
[도대체 왜 온거지 교장?]
[토끼 보러 왔겠지. 근데 진짜 한번 신드라한테 가봐야 하는 거 아냐?]
[웩, 난 차라리 죽음을 선택하겠다.]
[한번 가보는 것도 좋겠죠.] 오리아나가 멀어져가는 제드의 뒤통수를 보면서 툭 던졌다. 그러자 아이들은 서로 눈치를 보앗다.
[오리아나, 이런 말 해서 미안한데, 넌 갈 필요가 없을 거 같다. 그 화학은 그 뭐냐 아마 너한텐 안 통할꺼야.]
[바이러스도 아니니까.] 오리아나는 고개를 돌려 친구들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그리고는 싱긋 웃었다.
야간 자율학습은 2200쯤에 끝나고 고학년들은 한 시간을 더 한다. 학생과 선생들이 완전히 빠져나가 학교가 완전한 적막에 휩싸이는 시간은 대략 자정쯤이다.
[의외야.]
[그러게. 이사장이라서 퇴근하기 전에 오라고 할 줄 알았는데 말이야, 시간이 남아도나?]
[노처녀라 그렇지 뭐.]
[처녀? 그럴리가, 제드가 있잖아.]
[아오, 책 좀 읽어라 맨날 둥둥 떠댕기다 보니 뇌도 떠다니냐. 표현이잖아 표현.]
[지랄, 넌 읽냐.]
[안 읽어도 너 보단 났다.]
자정이 가까워지자 아이들은 동아리 방의 문을 닫고선 발걸음을 평소와는 반대 방향인 이사장실로 향했다.
이사장은 아이들의 검진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아이들 입장에서는 해줘도 그만 않 해줘도 그만인 일이여서 아무 생각이 없었기에 승낙해 주자 그제서야 당혹감을 느끼었다. 신드라가 타인의 부탁을 들어줄 성격이라 생각하지 않았다는 점이 한 몫했다.
[영 찝찝하단 말이야. 아무튼 갔다올께.]
[무슨일 생기면 도망쳐.]
[싸워야지 무슨,]
[아서라, 질꺼같다.] 바이와 잔나는 동아리 방에서 나올때 부터 시작한 농담따먹기를 이어가며 본관으로 올라갔다. 그 뒤를 징크스와 이즈리얼이 따라가고 오리아나와 케이틀린은 교정에 남아서 친구들을 기다리기로 하였다.
동아리 방에서 수다는 다 떨었기에 마땅히 할 일이 없었다. 신발코로 바닥을 두드려보거나 고개를 들어 하늘의 몇 없는 별중에서 뭐가 인공위성인지 구별해 보는것으로 시간을 때우고있었다.
[어?] 케이틀린의 시선이 과학실에 가서 멈추자 오리아나도 그녀의 눈동자 끝을 쫓아서 어두컴컴한 실험실을 본다.
[오리아나, 방금 봤어? 과학실에서 뭔가 움직이지 않았어?]
[얼핏 본거 같기도 한데요. 학교 괴담 중에 한 밤중만 되면 인체해부 모형이 복되에서 달리기를 한다고 하던데 보러갈까요?]
[싫어, 무서운건 딱 질색이야.]
[귀신같은거요?]
[응, 알 수없는것들, 보이지 않는 건 정말 싫어.]
[모렐로노미콘처럼 마도구 일 수도 있고, 장난을 좋아하는 친구가 뭔가를 꾸밀 지도 모르니까, 꼭 귀신은 아닐꺼에요.]
케이틀린은 듣고 싶지 않은지 딴청을 피웠다. 그렇다고 오리아나도 꼭 과학실로 가서 무슨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싶은 모양은 아니였는지 그 이상 케이틀린을 꼬시지 않았다.
신드라가 진료를 잘 봐주는지 이사장의 방에서는 불빛만 새어나올뿐 별다른 소동이 생기진 않았다.
[저기 오리아나, 저번에 산속에서 불 났을때 얼굴 봤어?]
[아니요, 목소리만 기억해요.]
[불이난 이유가 이것저것 섞은 화학 약품이라고 했지? 그래서 지금 뭐가 들어 있을지 몰라서 신드라가 진료를 봐주는거고.] 그제서야 오리아나는 케이틀린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눈치를 챘다.
두 아이는 숨을 죽이고 본관으로 들어가는 문을 열었다.
제 아무리 발 뒷꿈치를 들어도 해묵은 목재로된 복도의 삐걱이는 소리를 막을 수 가 없다. 미행을 하기에 그렇게 좋은 장소는 아니다.
[돌아가서 잔나를 불러 올까?]
[생각보다 안 크게 들리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그리고 혼자만 오겠어요?] 케이틀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과학실 앞에 당도한 두 아이는 한동안 숨을 죽인체 귀에 온 신경을 집중하였으나, 안쪽은 쥐 죽은듯 조용했다.
오리아나가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의안을 꺼냈다. 그리고 케이틀린에게 고개를 돌리라고 손짓을 해보였다.
작은 자물쇠가 풀리는 소리가 나고선 오리아나는 한동안 눈을 감고 있었다. 바뀐 왼쪽 눈동자는 청색이다.
오리아나는 한동안 벽을 바라보다 자리에서 일어나 과학실의 문을 열었다.
[케이틀린, 여기 종종 왔죠?]
[어? 어. 청소 좀 도와주러 왔지, 왜 사육장일이 한동안 없었을때.]
[혹시 안쪽에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나요?]
[그런건 본 적이 없는데.] 오리아나는 왼쪽눈을 손으로 가린채 과학실 불을 켰다.
[뭐 바뀐게 있나요?]
[아니 딱히. 그리고 그걸 알 정도로 자세하게 아는건 아닌데....., 눈아파?]
[갈아끼우면 처음엔 좀 그래요.]
[손가락 끝 같은데에 좀 작게 달아 놓으면 안되?]
[도촬취미가 있었으면 했죠.]
[아. 근데 안에 아무도 없는데, 오기전에 이미 나갔나.] 케이틀린이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 보았다. 어두운 교정엔 쥐새끼 한마리 얼씬 거리지 않는다.
[누가 있었어요, 이 근방에서 쭈그리고 앉아서 뭘 하더니 지하로 천천히 걸어 내려 가는게 보였으니까요.]
[오, 그쪽 눈은 그게 보였어? 대박. 신기방기한데. 나도 나중에 돈 모아서 보철 수술이나 받을까, 멋져.]
[시집 못 가요.]
오리아나가 실험기구가 놓여져있는 찬장 아랫서랍을 열자 지하입구가 먼지를 하얗게 뒤집어 쓴 이빨을 드러내며 주둥이를 벌렸다. 오리아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엉금엉금기어 들어갔다.
카강 카강, 계단을 두드리는 발자국 소리가 먼저 지하로 내려가고 그 뒤를 소녀들이 따른다. 푸르스름한 조명밑으로 끝이 보이지 않는 복도가 나타났다. 오른편으로 문들이 나있고 그중 한 곳에서 빛이 새어나온다. 오리아나와 케이틀린은 발바닥을 돌바닥에 붙인뒤 미끄러지듯 인적이 느껴지는 방 앞에 섰다.
[이거이거 못 쓰겠는데, 어디에서 틀린거지?]
[용해가 제되로 안된거 같은데, 색을 봐.]
[아니면 분리기 회전수가 부족했을 수 도 있지.]
[실험삼아 한번 불 붙여 볼까?]
[죽고 싶음.]
최소한 3명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오리아나는 왼눈을 살며시 떴다 눈살을 찌부리더니 눈알을 뽑아 교체하였다. 그녀는 일을 마치고 손바닥을 활짝 펴 보였다. 다섯손가락을 오분인지, 다섯명을 의미하는지 확실하지 않았지만 케이틀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도 허탕이네.] 고무패드가 바닥을 긁는 소리가 나고 큰 덩어리가 쓰레기통으로 털썩 떨어진다.
[이럴땐 폼나게 담배라도 하나 꼬나 물면 멋저 보이려나?]
[하하하, 안그래도 빻은 상판데기에 화상자국도 하나 추가 하시려고.]
[아아, 걸작이었지. 그렇게 잘 될줄은 몰랐는데.]
[아쉬운점이 있다면, 잔챙이들이 잡혔지 뭐. 멍청이들.]
[정확하게 말해, 들이 아니라 이지. 잔챙이.]
[어쩌겠어, 그 이상을 화력을 바라는건 무린데, 더 쩔게 가려면 점화도와 질량이 높아지는데 그럼 시가라도 가져다 바치지 않으면 몸통에 심어 놓기란 불가능해 져.] 잠깐의 침묵이 이어졌다.
[야, 그러면 여러개를 심어 놓으면 되잖아. 목걸이 처럼.]
[그거......, 괜찮은 생각인데?]
[원통형으로 만드는건 어때, 다이너마이트처럼.]
[손이 많이 가긴 할텐데.]
[할 수는 있지, 요번엔 얼굴에서 많이 멀어서 손가락 두어개만 날렸는데, 뒤로 길게 들어가면 얼굴과 가까워 진다는 소리니까.]
서랍이 열리고 종이가 꺼내진다. 그 위를 연필심이 뛰어 다니면서 그림과 숫자를 새긴다.
[해 봄직한데.] 혀 꼬부러진 소리가 웅얼웅얼 새어나오고 흑연이 끊임 없이 종이 위를 뛰어다닌다. 두 소녀는 귀를 벽에 바싹 붙인체 일거수 일투족을 들었다.
[나쁘지 않아, 나쁘지 않다고. 해 볼만해, 아니 할 수 있어.]
[실험은?]
[이미 한 번 성공했으니까 굳이 필요없어.]
[음......대상은?]
[분홍머리.]
[옳은 판단,] 중간에 말이 끊켰다. 괴한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스위치를 내렸다. 복도와 실험실의 불이 꺼졌다.
[이렇게 까지 할 필요가 있어?] 잔나의 목소리다.
[나중에 또 찾아와서 귀찮게 할 바에야, 한 번에 2차검진까지 마치는게 좋잖아.]
[안 찾아온다니까!] 바이가 언성을 높인다.
[제드 부탁만 아니였음, 벌써 의료사고를 냈을텐데, 너넬 위한줄 아니? 두번 꼴뵈기 싫어서 그런거니까 주둥이 닫고 내려와.]
[음흉해, 도대체 이사장실 벽장뒤에 왜 비밀의 계단같은게 있닌거야.]
목소리들은 점점 커지더니 바로 앞에서 들이는거 같은 착각이들 정도로 거리를 좁혔다.
나오는 문이 덜그럭거리지만, 오리아나가 밖에서 문을 밀고있어 열리지 않는다. 소리는 가까워 지더니 이내 조용해 진다.
[뭐야, 왜 불이 안켜지지?] 신드라가 의아한 목소리로 스위치를 딸칵딸칵 누른다.
[바이, 들려요?]
[왁! 누구야!]
[저에요, 옆에는 케이틀린도 있어요.]
[어디야 안보여.]
[거기 그대로 있어요, 안쪽에 누군가 있어요.]
[누구?]
[그걸내가 어떻게 알아요.] 오리아나가 거칠게 대답을하고서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서는 문을 열었다. 갇혀있던 실험실의 공기가 훅빠져나오고 바로 코를 따갑게 찌르는 화학물질의 잔향들이 뒤따른다. [뭐가 보여요?]
[전혀, 야 그지깽깽아, 지금 튀어나오면 목숨은 살려줄께.]
[어쩐지 내가 안 치우는 성격이여도 매번 올때마다 뭐가 조금씩 다르게 어질러진거 같더라. 내가 더러운게 아니였어.] 신드라는 심드렁한 감상을 내놓을 뿐이었다. 잔나는 그 감상에 질렸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뭘 그렇게 고민해, 불을켜. 빡대가리들아.]
[쫌 닥치고있지? 모두가 하지 않으면 다 이유가있는거야 땅꼬맹이.]
[고래?] 징크스는 바지주머니를 뒤적이더니 라이터를 꺼냈다. 지포라이터의 뚜껑이 퐁 소리를 내면서 열리자 잔나가 낚아쳈다.
[뭐가 둥둥 떠다니는 줄 알고 불을 붙여, 단체로 통구이 될 일이있냐.]
[쫄보.] 잔나는 말없이 라이터의 뚜껑을 닫았다.
[언제까지 그 무거운 궁둥이를 붙이고 있을껀데?] 바이가 어둠을 향해 한걸음 성큼 걸어나갔다.
[야!] 잔나가 다급하게 막아섰다.
[정신 나갔어, 뭘 가지고있을지도 모르는데! ]
[알게뭐야, 내가 다 털 수 있는데.] 어느새 바이의 손에는 무기고에서 훔쳐온 장갑이 끼워져있었다.책상을 짚고있던 손에 힘을 주니 책상의 귀퉁이가 바스려졌다.
[무식하긴.] 잔나가 혀를 내두르고서는 손가락을 한번 까딱하자 오른쪽에 놓여있던 책상이 들아올려져 일행의 뒤쪽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맞아 분홍머리, 넌 너무 무식해.] 모두의 시선이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향했다. 달팽이의 눈마냥 어둠속에서는 힌고무장갑을 낀 손 두개가 떠있었다
[오호, 드디어 모습을 드러내셨구만.]
[역시 멍청해, 손 두개를 보고 모습이래.]
[으흐흐흐,맘대로 지껄이라고 예쁜이, 곧 홍콩으로 보내줄테니까.] 바이는 손가락을 우득우득 꺾으면서 살인미소를 지어보였다.
[어후야, 가까이 오지마 꿈에 나올까봐 겁난다.]
[아무럼 겁내셔야지.]
[그것도 있고, 너 운동화 방수처리 되냐?]
[뭔?] 바이는 그제서야 운동화 밑바닥이 이상하게 끈적이는것을 알아차렸다.
[일단 급한대로 다때려 부었는데, 아마 불 붙이면 활활 잘타오를껄.]
[이런 싸이코세끼가!] 바이의 옆으로 구체가 날아갔다.
[엌!] 둔탁한 소리와 함께 오른쪽 장갑이 사라진다.
[쫑알쫑알 말이 많아.] 이사장이 던진 구체가 이번에 한바퀴돌아 어둠속에 숨은 범인의 등을 가격한다.
오리아나와 케이틀린은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쳐서 교실과 최대한 멀어졌고, 이즈리얼은 징크스와 바이의 옷깃을 꼭 붙잡았다.
[이런 미친!] 어둠속에서 메스가 신드라를 노리고 날아오지만 조준이 형편없어 그녀의 가슴을 맞추고 바닥으로 떨어진다.
[저번엔 잘도 도망갔지만, 이번은 아니지. 숲을 홀라당 태워먹을 값을 톡톡히 치르게 해주마. 내가 그 일 때문에 얼마나 많은 너구리들 앞에서 알랑방구를 뀌어야 했는지 알간?] 망치가 고깃덩어리를 다지는 둔탁한 소리가 울려퍼진다.
[잠깐, 잠깐, 잠깐! 컥, 콜록콜록, 잠깐만 내 말좀 들어.]
[싫은데?]
[야이! 확 그어 버린다.] 어둠속에서 성냥불이 타오른다.
[어쩌라고, 내가 눈썹하나 까딱하나 봐라.]
[아니 이 건물 말고, 당신이 원하는거.] 내려온 계단쪽에 숨어있던 이즈리얼은 순간 어둠속에서 하얀 치열이 떠오른것을 본 착각을 느꼈다. 신드라의 주위로 구체들이 모여 둥둥떠다닌다. 난타에서 벗어난 괴인은 잠시 숨을 골랐다.
[그날 아무것도 모른다고 대답하지 않았었나?]
[상황은 시시각각변하니까. 지금 다 불어버리지 않으면 여기에서 죽어버릴거 같아,]
[눈치는 있네.] 신드라는 콧웃음을 치고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내 놔.]
[하하하, 당연히 지금은 없지. 나중에 가져다 줄께. 어차피 내 얼굴을 알고 있잖아?]
[널 어떻게 믿고?]
[방금 느꼈어, 넌 구라치다 걸리면 손모가지가 아니라 모가지를 날릴 성격이야. 세상 어느 이사장이 이렇게 인정사정 없이 사람을 패겠어.]
[뭐야! 신드라, 저 미치광이를 알아?] 뒤쪽에 있던 바이가 소리를 지르며 이즈리얼의 손을 뿌리치고 신드라에게 성큼성큼 걸어갔다. 바이의 오른손이 공중에 떠있는 신드라의 어깨에 닿기 직전, 날아온 검은 구체를 막기위해 다섯 손가락을 짝 폈다. 그녀는 뒤로 열다섯 걸음정도 밀려났다.
[꼬맹이들은 뒤에서 손가락이나 빨고 있어.]
[이게!] 뛰처나가려는 바이를 잔나가 막아섰다.
[흐음, 그럼 언제 가져다 줄꺼지?]
[최대한 빠르게, 원한다면 여기에서 나가자 마자.]
[하하하하, 맘에 들어. 하지만 그렇게까지 급한건 아니야. 졸업하기 전까지, 아니지 아니야. 제드가 알기전까지 해결해야 하니까 음, 적당한때 내가 가지러 갈테니까 포장 이쁘게 해놔.]
[좋아, 단. 조건이 있어.]
[말 해.]
[날 여기에서 꺼내 줘.] 방안에 정적이 흐른다.
순식간에 많은 일이 벌어졌다. 잔나가 앞에 서있던 바이를 끌어당겨 이즈리얼에게 던지자 마자 그녀가 서있던자리에 구체들이 쇄도하였다. 징크스는 호주머니에서 급하게 무언가를 꺼내었고 서두르는 바람에 발꿈치로 이즈리얼의 복부를 강타했다.
학생들도 가만이 있지 않았다.
잔나가 던진 날카로운 바람이 이사장의 어깨를 찣는다. 주의가 산만해진 틈을 노려 복도에서 기다리던 오리아나가 실험실로 몸을 던진다. 손아귀에 잡히기만 하면, 설령 무사히 빠져나가더라도 다시 잡을 수 있다. 새까만 어둠속에서 의자가 빠르게 튀어나왔고 돌격하던 오리아나가 그만 걸려 앞으로 넘어져 버렸다. 불한당도 조력자에게 모든걸 맡기고 강건너 불구경 할 생각은 아닌가 보다.
엎어진 등 뒤로 구체들이 쏟아진다. 살을 내리치는 둔탁한 파열음 대신 망치가 쇳덩이를 내리치는 금속성 소리가 방을 가득 매운다.
[이거나 먹어라!] 징크스가 콩주머니를 이사장 머리를 향해 던졌다. 신드라는 날아오는 주머니를 구채로 막았고 주머니는 도탄되 왼쪽 대각으로 퉁겼다.
[야 저거 찟어!] 징크스가 날카롭게 외쳤다. 잔나는 고민하지도 않고 콩주머니를 바람으로 갈랐다. 곱게 간 후추, 고춧가루, 베이킹소다 등이 흩날린다.
신드라는 숨을 삼키고 눈을 가늘게 떳다. 시야가 좁아져 황소처럼 달려오는 바이를 놓쳤다. 그녀도 숨을 참고 눈을 감은체 달렸지만 지근거리에서 신드라를 덮치기엔 충분했다. 바이는 사람이 밑에 깔렸다는 확신이 들자 왼팔로 목을 짓누르고 오른손을 뒤로 최대한 당겨 갈비대를 난타했다. 구타도 잠깐이었다.
숨이 달렸는지 바이가 숨을 들이켰고 온갖 가루가 산소에 굶주린 폐로 흘러들어갔다. 기침을 쏟기위해 상체가 들린 순간 신드라의 구체가 날아와 바이를 옆으로 쳐냈다. 공중을 가로 지르는 바이를 안전하게 받아내기 위해서 이즈리얼이 몸을 던져 완충제 역활을 했다.
두 사람을 향해 쇄도하는 구체를 받아내기 위해 잔나는 진땀을 뺏다. 좁은 공간안에 후폭풍이 휘몰아치고 가루는 여기저기 날린다.
숨어있던 괴인도 사람이였는지 가루를 먹고 쿨럭인다. 모자를 푹 눌러쓰고 실험용 하얀 마스크를 낀 사람이 어둠속에서 튀어나와 빠르게 오리아나가 나온 문으로 달렸다.
[씨발, 젠장!] 징크스가 다급히 끝이 날카롭게 갈린 쇠젓가락을 던졌지만 빗맞아 벽에 박혔다.
[야,이즈, 튀어!] 잔나가 도망가는 범인을 쫓으려 했으나 신드라가 입구를 막아섰다. 옆구리를 깊게 맞았는지 한손으로 옆구리를 잡은체 떠 있다. 보호해야할 친구들이 있어 공격은 엄두도 내지 못한체 잔나는 날아오는 공을 막는데 급급했다.
범인은 복도를 가로 질러 계단을 타고 순식간에 지상으로 올라가려했다. 모퉁이에서 케이틀린과 부딭치지만 않았으면 말이다.
[우......, 움직이지 마!] 그녀의 손에는 머리가 빠진 밀대가 들려있다. 엉덩방아를 찧은 범인이 고개를 들어케이틀린을 바라 보았고, 그녀는 자리에서 얼어 붙었다.
그는 케이틀린을 응시하면서 자신을 겨눈 밀대를 살며시 밀었다. 약간의 저항이 있었지만, 물속의 수초처럼 부드럽게 밀린다. 케이틀린의 입술이 붙었다 떨어지기를 반목하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고 그 사이 남자는 한 걸음, 한 걸음 착실하게 멀어져갔다.
지하에서는 고함과 폭음이 계속해서 올라오고, 발 소리는 점점 멀어진다.
[어째서?] 케이틀린의 나약한 의문은 아래 위에서 발생한 소음 사이에 끼어서 묻혔다.
열어놓은 창문을 통해서 나방이 한 마리 날아든다. 전등에 몸을 비비더니 힘이 다 해 책상위로 떨어진다. 이즈리얼은 모랠로의 위로 떨어진 나방을 손등으로 쳐내자 동아리 방에 조그마한 마찰음이 퍼진다.
[모렐로, 진짜 가능한 일이지?]
[속고만 살았나, 가능하다니까. 죽는게 아니야.]
[나중에라도 풀릴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야지. 그래도 개똥밭에서 굴러도 이승이 났다는 말이 있잖아. 바이나 이사장한테 걸린다고 생각해봐. 차라리 내가 났지.]
[그래도......,]
[간단한 일이야, 뭐가 그렇게 걱정이 되는지 공감이 가지 않는데. 내 몸의 한 장을 찢어서 그녀석 등에 붙여, 장난꾸러기 초등학생처럼 친구의 등에 포스트잇을 붙인다고 생각하면 편한데 말야.]
[하는 게 어려운 게 아니야, 다만, 이게 과연 최선인지 확신이 서지 않는 것뿐이야.]
[최선이야.] 낡은 고서위에 떠 있는 대답은 한동안 흩어지지 않았다.
[그날 신드라는 분명히 이야기했어, 성배만 받고나면 그런 짜증나는 애새끼 생사는 알게 뭐냐고.] 이즈리얼은 대답하지 않았다. 지하 과학실에서 엉망진창으로 깨진 신드라는 악에 받혀서 험악한 말을 많이 뱉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선명하게 기억나는 것이 방금 모렐로가 한 말이었다.
[확실히 이빨을 바닥에 뱉으면서 한 말이었지.] 이즈리얼이 중얼거린다.
[그렇다고 당장에 친구들이 도움이 될거 같지도 않고, 특히 잔나.]
[그렇게 화 낼줄은 몰랐어, 바이도 감동한거 같았는데.]
[친구들이 다쳐서 눈이 뒤집어 진거지. 바이나 징크스는 더 할 말도 없고. 유일하게 남은 건 오리아나인데, 알지? 성배에 집중 되서 소유자야 어떻게 되던 말든 신경 1도 쓰지 않을꺼야.]
[오직 너만이 그 불쌍한 친구를 그나마 사람답게 살 길을 열어 줄 수 있어.]
[어떻게 할꺼야?]
[일단, 한동안 숨어야겠지. 한 5년?]
[길어.]
[짧은거야, 진짜로. 그 녀석이, 비록 속아서 그랬다고 해도 저지를 패악질에 비하면 말이야.]
[언제까지 데리고 있을껀데?]
[일단 기본 20년, 술 마시고 했다면 한 5년만 데리고 있지, 살인의 형량은 대략 그 정도 이니까. 하하하, 안 웃긴가?] 이즈리얼은 굳은 얼굴로 모렐로의 맨 뒷장을 펼치고서는 이상한 글자들이 해엄치고있는 마지막장을 뜯어 갈무리해 주머니에 넣었다.
하굣길, 케이틀린과 이즈리얼이 무리에서 빠져나와 각자의 집으로 향하자 남은 네명의 아이들은 눈칫것 놀이터로 발걸음을 돌렸다.
[순둥이 생각보다 황소고집인데.] 바이가 그네에 걸터앉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자 오만상을 찌푸리고서는 배를 부여잡았다.
[이런 미친, 날숨 좀 뱉었다고 배가 아파, 내장 파열됬나?]
[그럼 진즉 피똥 쌌지, 멍든거 가지고 엄살은.] 잔나가 옆에서 등을 세차게 한 대 쳤다. 딴에, 기운을 북돋아 주려 한 행동이였지만, 바이는 눈물을 찔끔 흘리고서는 잔나를 야멸차게 노려보았다. 하지만 욕을 하진 않았다.
[일요일날 만난다고 했지요.]
[어.]
[쫒아가 볼까요.]
[뭣 하러, 순딩이가 병신이여도, 사기협잡꾼은 아냐. 실패하면 분명 우리한테 바로 알리러 올꺼야.]
[그래도, 불안하네요.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물어요.]
[궁지에 처 몰려도 빠져간 쉐리야. 순둥이가 오히려 농락당하고 눈물콧물 찔찔 짜면서 오겠지. 그때 우린 토닥이면서 몽둥이를 꺼내면 되.]
[낭만적인데?] 징크스가 키득인다.
[하, 젠장 불도 못 긋겠네.] 바이의 손에서 라이터가 떨어져 모래사장에 파묻혔다. 손가락 마디마디가 성하지 않아 붕대를 감지 않았을 뿐이지 정상인 곳이 없다. 잔나는 바이의 등 뒤에서 살짝 날아오른 다음 허리를 숙였다. 불붙은 담배가 불을 옮겨준다.
한동안 말이 오가지 않는다.
[물건을 확보하면 일단 너가 가지고 있어 오리아나.]
[당연하죠.]
[매입자가 나오기 전까지 말야.]
[조건을 인수한다는 가정하에 말이죠,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슴겨 놓을꺼에요.]
[핫! 어디? 장독대에 다가?] 징크스가 변죽을 올린다.
[물론 잊지 않았어, 소원을 3개만 빌고선 다시 우리에게 돌려 줘야 한다는 그 조건, 그리고 마지막은 너가 장식해.]
[물론이죠. 마지막 소원은 제가 빌겠어요. 두 번 다시 세상에 못나오게 할 자신이 있어요.]
[분명하게 말하는데, 어디 멀리 가서 해라, 괜히 우리 휘말리게 하지 말고.] 오리아나는 싱긋 웃을 뿐이였다.
7.
일요일이다. 그러나 아이들은 학교에 나온다. 중간이 끝난지 고작 1주일 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기말고사준비를 해야 한다고 아이들을 교실에 붙들어 매어다 놓고선 돌려보낼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이제는 익숙한 일상이라 그런지 학생들은 짜증을 내기 보다는 출석부에 출석만 하고 나간다던지, 침낭을 가져와서 낮잠을 자던지, 만화책을 가져와 읽거나 운동장에 가서 축구를 해서, 나름 알차게 시간을 때운다.
물개라는 별명을 가진 아이는 오늘도 빵셔틀 일을 하는지 학교 밖에 있는 슈퍼마켓에서 과자를 고르고 있다.
[그렇게 좋아?] 계산을 위해 꺼내진 지갑이 입을 열어 돈을 토해내며 물어본다.
[응? 아니 그렇게 좋은 일은 없는데.]
[표정에 쓰여저 있는데 시치미는. 싱글벙글 아주 좋아.] 지갑은 몇 마디 더 던지려고 했지만, 주머니 속으로 밀려나는 바람에 그러지 못했다. 물개는 계산을 끝내고 밖으로 나왔다.
[다 샀어?] 기다리고 있던 케이틀린이 고개를 앞으로 살짝 내밀며 물어본다. 두 사람이 종종 어울리기 시작한 것은 3주 전 부터였다. 도서관에서 인연이 시작되었다. 중간고사 준비를 위해 화학문제와 씨름을 하던 케이틀린이 근처에 있던 물개에게 도움을 구한 뒤부터 두 사람은 종종 만나기 시작했다. 왜냐면 한쪽은 문리에 강했지만, 수리에는 영 잼병이였고 반면에 다른 쪽은 꼭 반대였기에, 서로 서로 도우면서 중간 준비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반 띵 하자니까 왜 너가 다 사는데.]
[다음에 사줘, 하루 이틀 보는 것도 아니잖아,] 그가 말끝을 흐리면서 대답했다. 그러자 케이틀린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물개가 건네는 과자를 받았다.
[하긴, 근데 너무하다. 중간 끝난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뭔 기말 대비야.]
[내 말이, 그런데 너 이번에 친 모의평가는 어떻게 봤어?]
[나? 그럭저럭, 근데 수학은 진짜 안될것 같아. 내가 살아생전에 기하와 백터를 언제 써먹을지 모르겠는걸, 동기가 생기지 않아. 왜 배워야 하는지도 모르겠는 걸.]
[그래? 난 재밌는걸, 뭔가 깔끔하게 맞아 떨어지게 말이야.]
[변태야? 그게 왜 재미있어.]
[치파일반이야, 내 눈에는 같은 언어인지도 미심쩍은 고전운문을 외우는 녀석들이 변태 같아 보인다고.]
[에이, 그래도 고전 운문이 더 쉽지, 글자는 비슷하잖아. 수학은 애초에 글자부터 다르고.]
[수학은 전 세계 어딜가던 과거나 지금이나 똑같은 숫자를 쓰는걸, 비슷한 게 아니라 똑같아. 더 쉬워보이지 않아?] 문과가 쉬운지 이과가 쉬운지 두 아이는 조잘 거리고 때로는 우스겟 소리도 섞어가면서 도심지를 가로 지른다. 휴일이라 번화가는 사람으로 북적거린다.
[와, 인산인해가 과장된 말이 아니었구나, 사람 좀 봐봐.]
[이게? 아참, 너 시골에서 전학 왔다고 했지.]
[맞아, 사람 머릿수가 세자리가 넘어가지 않는 동네였어, 그나저나 날씨가 이렇게 좋은데 바로 학교로 돌아가긴 좀 아쉽지 않아?] 신호등을 건너면서 케이틀린이 던진 말에 그는 잠깐 차도 위에서 주저했다.
돌아가 봤자 할 일이라고는, 언제나 늘 그랬듯이 도서관에 앉아서 퀴퀴한 책 먼지나 먹어가면서 책장을 넘기며 시간을 죽이는 일 밖에 없다. 아마 돌아가면 다시 진회색이 되어서 창살이 열려도 장기 복역한 죄수가 탈옥하지 않는 것처럼 무감각해 질 것이다.
[어차피 왔다 갔다 할 시간이나 여기서 계속 있는 시간이나 똑같아.] 그는 녹색불이 깜빡일 때 인도로 올라왔다. 아이들은 도심지를 구경하기로 결탁했다.
지갑이 얇다하더라도, 눈으로 보는 것은 돈을 받지 않는다. 두 아이는 거리를 쏘아 다니면서 대화를 하고 구경을 했다. 자동차들이 내 뿜는 매연으로 공기는 탁할 법도 하지만, 웬걸 옅은 복숭아 향기가 공기 중에 떠다니고 있다. 짝을 이룬 연인들이 거리에 가득하다. 아름드리나무가 자랄 장소가 없지만, 구석구석에 민들레가 핀다. 항아리 같은 곡선을 그리진 못해도 정비된 개울로는 물이 흐르고 겨울 철새들이 하나 둘 떠나며, 아지랑이는 흙밭 대신에 아스팔트위에서 꼬물꼬물 피어오른다. 봄은 도시에도 찾아왔고 사람들에게 울렁임을 심어주었다.
그 축복에 충실한 사람들은 여자건 남자건 저마다 짝을 지어 풍족하게 산다. 중요한 것은 혼자 있지 않는 것이다. 길거리 음식으로 대충 끼니를 때워도 짝이 있다면 배가 부르다는 것은 약간의 과장이고, 두 아이들은 길거리를 돌아다니면서 토스트, 달고나, 닭꼬치, 핫도그 같은 음식으로 배를 채웠다.
다리도 아프고 돌아다니느라 지친 아이들은 잠시 쉬었다 가기 위해서 패스트푸드점에 들렸다. 하지만 휴일이라 그런지 사람이 너무 많고 시끄러웠기에 케이틀린은 자신이 아는 카페로 가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바로 아이들의 아지트인 카페 ‘개천’이었다.
다행히도 가계에는 자리가 있었다. 공간에 비해서 좌석들이 적어 넓게넓게 앉을 수 있는 곳이지만, 간혹 손님이 많이 오면 단골들이 테라스나 계단에 퍼질러 앉아 쉬었다 가는 것을 볼 수도 있다.
[으, 다리야. 넌 다리 안 아파?] 사내아이가 자리에 앉아 종아리를 주무르며 말했다.
[이것도 걸은 거라고, 여기 와서 느낀 건데 다들 운동 좀 해야겠어. 체력이 별로야.]
[도시니까, 그렇게 많이 걸을 일이 없어. 아, 오해하지 마, 내 말은 그렇게 먼 거리를 걸을 시간도 없을뿐더러 장소도 마땅하지 않다는 거였어. 오늘도 봐, 원래대로였다면 우리는 지금 학교에 짱 박혀서 발효되고 있을 껄.]
[하기는, 학교 근처에 산이 있어서 심심하면 등산도 할 수 있고 좋아, 너도 가끔 한는거 같은데. 안 그래?] 다리를 주무르던 남자아이가 멈칫하고 케이틀린을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카운터로 가서 주문한 음료가 올려진 쟁반을 가지러 가서 그의 의뭉스런 시선을 마주 하지 못했다. 자리에 돌아온 케이틀린은 주스가 담긴 컵을 내려놓고선 아까 받은 과자를 꺼내 식탁위에 올려놓았다.
[아까 뭐라고 말 한거야?]
[너가 등산을 자주 간다고.]
[하하하 그럴 리가, 다른 사람이랑 헷갈린 거 아니야.] 그가 멋쩍게 웃었다. 하지만, 케이틀린은 같이 웃어주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말하기 전에 이거 하난 분명하게 말 해두고 싶어, 난, 사실은 말이야, 너가 그런 일들을 벌렸다고 믿고 싶지 않아. 하지만 그건 내 바램일 뿐이야. 너구리들을 죽인건 너지?] 케이틀린은 말을 마치고선 눈을 감았다.
[아니, 절대로 아니야. 내가 왜 그런 일을 해.]
[바이 알지?]
[알고 자시고, 일단 확실히 난 그런 일을 한 적 없어.]
[내가 산체로 목을 자른걸 보니까 마취를 시킨 것 같다 했어, 그러자 열 받아서는 골목이란 골목은 전부 쑤시며 마취제를 구입한 녀석을 찾으려 했지. 근데 워낙 바이가 점잖고 품행이 올곧아서 말이야, 뒷골목 양아치들이 협조를 안 해주더라.]
[하하, 그 바이가?] 남자아이는 농담이라 생각했는지 웃었다. 맞은편에 앉은 케이틀린도 자기가 말해 놓고도 웃긴지 실소를 머금었다.
[그래서 내가 농담 삼아 한마디 던졌어, 과학실에 가면 마취제가 많이 있다고. 너도 알지, 표본을 만들기위해 쓰는 것들 말야.]
[알아, 학교가 지은지 워낙 오래되어서 과학실엔 별의 별게 다 있어. 소문엔 예전에 금지된 마도구들을 비롯해 고대인들이 제조한 비약들도 많다고 하더라.]
[그렇지, 그런데 그때 오리아나, 너도 알지?]
[학교에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알지 당연히.]
[그래, 게 보기만큼 박식해서 내가 던진 농담에 뭐라고 대답한줄 알아? 순도가 낮아서 강력한 마취 효과를 얻으려면 정제과정을 거처야 된다고 하지 뭐야.]
[그게 생각만큼 쉽지 않지.] 그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공감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맞은편에 앉은 아이가 자신을 끔찍한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몰아붙인 것을 잊은 것 같다.
[너 한번이라도 학교 지하실에 대한 괴담을 들어본적 있어? 학교 지하실에는 여러 가지 괴수들이 우글거려서 항상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철책으로 봉인 되있는 거라고.]
[처음 듣는걸, 지하실엔 그냥 빗자루 같은 비품들만 놓여 있어. 내가 종종 가봐서 알아.]
[그래? 그럼 내가 본건 뭘까.] 케이틀린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눈앞에 있는 사내아이를 째려보았다.
[번쩍이는 기계장치들, 습지가 부패하는 듯이 기분 나쁘게 끓는 액체, 뱀같이 꼬불거리면서 유령같이 소름끼치는 유리관들. 그리고 공중을 떠다니던 손. 꿈인가?]
[백일몽 아냐?] 남자는 일부로 대화에 뛰어들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럴지도, 왜냐면 그때 난 너의 뒷모습을 보았어.] 케이틀린은 주스를 한 모금 마셨다.
[그런데 그 친구 상태는 어때?]
[누구?]
[땅콩알러지가 있는 친구 말이야.]
[아, 나도 잘 모르겠는 걸.]
[그런가? 난 평소에 둘이서 잘 어울려 다니기에 소식을 좀 들었을 줄 알았지.]
[불쌍한 친구야, 종종 도와주기는 했어도, 친하게 지내긴 힘들어. 말이 통해야지.]
[그렇지, 알기 힘든 친구야. 어곳은 땅콩알레르기가 있는 줄도 몰랐다고 하더라.]
[나쁜 놈들.]
[맞아, 나쁜 놈들이야. 주변 사람들에게 관심이 없고, 자기들이 재밌는 것만 하려고 들어. 그게 남들을 얼마나 괴롭게 하는지도 모르고 말이야. 그래서 징크스가 미심쩍어 하더라고. 자기 말고는 관심도 없는 놈들이 어떻게 그 친구가 땅콩알러지가 있는지 알았을까 하고 말이야.]
[모르고 그랬데.]
[그걸 믿니?] 케이틀린이 콧방귀를 뀌고 대꾸했다.
[암튼 그래서 징크스가 나름 끄나풀을 동원해서 어곳과 어울려 다니는 녀석들에게 물어봤나봐. 녀석들 중 몇몇은 말이야, 어곳을 싫어해. 하지만 그 녀석 눈 밖에 나는 건 더 싫어해 어울릴 뿐이라고 하더라. 암튼 계들이 말하길, 자기들은 어느정도 눈치를 채고 있었데. 그 친구가 땅콩을 먹어서는 안되는 정도로 말이야, 죽을 정도인 줄 몰랐다고 하더라. 억울해 하면서.]
[변명이지.] 칼로 자르듯이 말을 끊고는 그는 자기 앞에 놓인 음료의 빨대를 빙빙 돌렸다.
[맞아 지독해, 그리고 이어서 하필이면 너가 그 장애인 친구를 잘 챙겨주는 모습을 보고 어찌어찌 하다 보니 그가 땅콩을 못 먹는다는 걸 어렴풋이 알게 된 게 문제였다고 말하더라. 웃기고 자빠졌어.]
[내 탓인거야?]
[전혀.] 케이틀린은 맞은편에 앉은 친구를 보았다. 그는 분명히 듣고 있었다. 하지만, 외딴섬에 불시착한 이방인의 말을 듣어 주는 원주민처럼, 집중해서 듣되 아무것도 알아먹지 못하는 눈치였다.
[하, 됐어. 이딴 건 집어 치우자. 조금만 생각해 보면 다 심증만 있지 물증은 하나도 없어. 시치미 뚝 떼면, 그만이지.]
[음, 잘 이해가 가지는 않지만, 이제 오해가 풀린거지?]
[오해라, 그렇게 볼 수도 있구나. 그래, 풀릴꺼야. 다만,] 그녀는 말허리를 스스로 잘랐다. 그리고 결정적인 질문을 명중시키기 위해 입안에서 혀를 풀었다. 입 밖으로 말이 나온 순간, 그리고 허공에서 흩어져 흔적도 찾지 못하게 되면, 이제는 두 사람의 관계는 이전과 같아 질 수 없는 것이다.
[너가 토끼를 죽인거지?] 그녀는 할 말을 다했기에 답을 기다렸다. 청자라고 다를 건 없었다. 얼빠진 표정으로 거짓말을 지어내는지, 문맥을 파악하는 건지, 논리적으로 자신을 변호할 준비를 하는 건지 몰랐지만, 아무튼 입을 꾹 다물고 있다.
[또 그 소리, 나 화낸다.]
[화내, 너가 죽인거 맞으니까.] 그녀는 확신했다.
[내가, 그러니까 우리 반에서 기르는 토끼들을 죽였다고? 그렇게 끔찍하게? 그럴 리가 없잖아.]
[토끼 뿐만이 아니야, 쥐, 고양이, 너구리, 그리고 어쩌면 사람까지도 너가 한 일이야.]
[헛소리야. 날 보라고. 매일 빵셔틀이나 하는 한심한 놈인데 어떻게 그런 일을 벌이겠어.]
[기억해내.]
[아니 그렇게 말해도, 그런 끔찍한 일을 했던 기억은 없어.]
[그럼 수학여행 가기 전날 뭐했는데, 나랑 마트에서 만난 건 기억나니?]
[잘 모르겠어.]
[잘 모르겠다니, 그게 무슨 뜻이야.] 케이틀린이 몸을 점점 앞으로 수그리면서 다그치자 마침내 남자는 허리를 곧게 세우고 항변에 나섰다.
[내가 왜.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말 했잖아. 더 기억을 더듬는다고 뭐가 나올 거 같지도 않고, 무엇보다 왜 케이틀린은 그렇고 그런 이야기를 억지로 내 입에다가 쑤셔넣을려 해? 전부 심증이라고, 결정적인 증거는 없다면서. 도대체 너까지 나한테 왜 그러는데.]
[있지, 너도 알잖아. 반에서 너를 좋게 보는 애들은 없어. 물론 난 게네들이 잘못 생각하고 있다고 봐. 넌 정말 괜찮은 친구야. 그 동안 같이 지내봐서 알아. 좀 더 가까이 지내고 싶어. 하지만, 친구들이 그렇더라고. 어쩌면, 아니 거의 확실하게 그 끔찍했던 사건들의 범인이래. 그래서......,]
[그래서?]
[‘그래서’ 라니! 이건 정말 중요한 문제라고.]
[지금 우리의 관계에 대해서 물어보는 중 아니였어?]
[맞아.]
[그런데 그게 그렇게나 중요한 문제야? 고작 동물 몇 마리 죽은 일의 용의자로 내가 지목된 일이? 이해 할 수 없어, 고작 고양이, 너구리, 토끼, 비싸지도 않아.]
[이게 설명이 필요한 일이야?] 그녀의 이마에 생각의 주름이 잡혔다. 복잡한 심정을 나타내는 듯 군데군데 끊긴 이마의 주름을 보고 남자아이는 자신의 생각이 적절하게 전달되지 않았음을 느끼고서 부연설명을 했다. 손들이 공중에서 허우적거린다.
[그저 가까워지고 싶으면 가까워지는 거지, 그런게 뭐가 그렇게 중요한데. 너 되게 옛날 사람 같아, 마치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에 길 가던 나그네들이 서로 말이 통한 다음 상대가 백정인지, 사당패인지, 떠돌이 무당인지 떠보는 거 같아. 만약 내가 질문에 ‘응’이라고 대답하면 어떻게 되는거야.]
[난 널 싫어할꺼야.]
[어쨰서?] 순간 그의 면도칼 몸통같이 회색눈동자에서 순간 서슬빛이 문득 드러났다.
[자랑은 아니지만, 너도 내 생활을 봤다면 알겠지, 난 매일 당하고 살아. 아침부터 신발장에서 죽은 쥐의 시체를 발견하는건 썩 유쾌한 일은 아니야. 책상 밑에 커터칼 조각이 붙어있어서 책을 꺼내려다가 손등위에 붉은 길이 하나 뚫리는 것도 매한가지고. 그에 비하면 자고 있는데 뒤통수를 후려갈기거나 의자를 빼고, 수업시간에 책을 빼앗겨 선생님한테 혼나는건 차라리 감사할 일이야. 시간이 제발 빨리 가라고 기도하면서 난 버티지.]
[화내고 싸워, 하다 못에 욕이라도 한 사바리 퍼붓던가.] 그의 답답한 평소 모습에 쌓인게 많았던지 케이틀린은 되려 성을 내었다. 하지만 남자아이는 자조한다.
[넌 한 번도 이지메를 당한적이 없지?]
[있어.]
[어? 몇 명에게서?]
[셋, 작은 마을이였거든.] 그녀의 대답이 귀여웠는지, 남자아이는 석고상처럼 웃었다. 생기라고는 눈꼽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굳은 미소다.
[난 이곳에서 오래 살았어, 그리고 이 괴롭힘의 역사는 유구해. 초등학교 때부터 왕따와 괴롭힘을 받았어. 그때야, 소리도 질러보고 주위 어른들에게도 상담이니 도움도 요청하고 그랬지만, 그때만 반짝이고 말아. 나중에는 더 집요해지고 교활해져서 날 괴롭혔지. 아, 한번은 내 가방에서 선생님의 지갑이 나왔어. 당근빠따로 내가 훔친 게 아니야. 하지만 그 뒤로 선생은 내가 무슨 말을 하던 믿지를 않았어.]
[그리고 허울 좋은 급우들, 내가 말도 않되는 억울한 일을 당하고 있는 걸 모를 것 같아? 설마, 다만 눈을 감는거 뿐이야. 나 하나가 짓밟히면 짓밟힐 수 록 자신들이 희생양이, 일진들의 심심풀이 땅콩이 될 일이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더 잘 알아. 난 애들이 왜 날 무시하나, 같이 도덕을 배우는데 누구 한명 정도는 날 도울줄 알았어. 어느날 책이 이 의문을 풀어 주더라고, 집단의 결속을 굳게 하기 위해서는 적이 필요하데. 외부의 적이 예컨대 야만인, 이웃나라, 산적, 같은게 최고지만 없다면 내부에서 만들어야만 한데. 불가축 천민, 창녀, 이교도, 피부색, 어떤 구실을 삼아서든 말이야. 교실을 봐, 외부의 적? 선생? 교장? 어른? 경찰? 누구 하나 만만하지 않아. 그렇다면 말야 선택지는 하나지.] 그는 검지손가락으로 자신의 심장을 찌르듯 가르켰다. 바닥에서 절망을 태우며 올라온 목소리에 케이틀린은 감히 끼어들어 반박을 할 수가 없었다.
[이제는 내가 물어 볼게. 왜 나에게 이런 일들이 일어났지? 그리고 이런 일들이 중요한 일이야? 누구도 신경쓰지, 심지어 나 조차도, 않는 이런 일들이?]
[아니야.]
[그래 맞아, 일 그램도 중요하지 않아, 교과서는 늘 옳지. 생명은 귀중하고 도덕은 인류의 긍지, 그래서 법을 준수하고 올곧게 자라야 한다고. 허나 현실은? 내가 무슨 죄를 지었어? 아 일진들의 말마따나, 숨쉬는거 자체가 지구에게 민폐라고 하긴 하더라.]
[아니라고]
[너가 처음은 아니야. 나를 동정해서 그룹에 끼워주려고 했던 맘씨 고운 애들이 왕왕 있었지만, 누군가는 땅위에 설 수 없어서 항상 발밑에 찍어 누를 벌래가 필요했나봐. 그런 친구들까지 싸잡혀서 나랑 같이 괴롭힘을 받았어. 결국 그 친구들도 등을 돌려 버리고 날 원망해. 억울하니까. 결국 세상은 이렇게 생겨먹었구나 하면서 받아들였어, 양육강식. 남을 잡아먹는 사람은 점점 더 덩치가 커지고 강해지는데, 남을 먹지 못하는 자는 약해지고 비참해 지는 거야. 어찌 보면 짐승들이 사는 곳보다 더 못한 곳이야. 적어도 자연은 사슴보고 고기를 먹으라고 하지는 않으니까.]
[좀 이상한 결론인거 나도 알아. 하지만 이 생각이 아니면 도저히 내 삶이 이해되지 않아. 어때 아직도 토끼니 고양이니 너구리니 그런 약한 생명들이 죽은 게 그렇게 중요해 보여?] 그는 의자에 몸을 파묻었다. 열기가 올라와서 얼굴이 붉다. 누구에게도 털어놓은 적이 없는 신세한탄과 스스로 납득할 만한 설명을 일기가 아닌 입 밖으로 토해낸 기쁨에 취하기도 했다.
[너 되게 이상하다. 왜 애들이 널 계속 괴롭히게 내버려 둬? 변태야?]
[그야......., 아무도 도와주지 않고, 괜히 반항했다간 더 큰 보복이.]
[보복이라고? 그걸 너가 어떻게 아는데? 그리고 그게 무슨 반항이야, 보호지.]
[격어봤다니까.] 그의 목소리가 격앙된다. 자신의 목소리에 놀라선 순간 몸을 멈칫한다.
[한 번? 괴롭히면 싸워, 힘이 모자라면 도움을 요청해, 누구도 잡아 주지 않을 리가 없어.]
[해봤다니까.]
[아니 넌 하지 않았어, 넌 그냥 비열한 녀석이야.] 케이틀린이 눈에 쌍심지를 켜고 그를 쏘아본다.
[사냥꾼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게 뭔 줄 알아? 호랑이? 늑대무리? 독거미? 곰? 아니, 상상력이야. 특히 밤, 그때는 자신이 만들어낸 공포의 탈을 쓴 상상력과 싸워야만해. 바람에 스치는 낙엽 소리가 호랑이 발소리 같고, 밤비 사이로 늑대들이 이쪽으로 접근하는 것만 같지, 새소리나 벌레소리가 멈춘다? 미치고 팔짝 뛰지도 못할 만큼 숨막혀. 하지만 다음날 아침에 보면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아무일도 아니야. 혼자서 북치고 장구치고 하다 힘만 뺀거지. 지금 너가 딱 그 모양이야. 아무것도 아닌 일에, 상상력을 있는 대로 다 동원해서 꾸며놓고서 그 핑계로 아무것도 하려 들지 않지. 아니지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모함하고 있다고.]
[무슨 터무니 없는 소리. 너가 격어 봤어, 격어 봤냐고. 상상의 공포, 웃기는 개소리야. 그건 허상이 아니라고, 진짜야. 주먹이 날아오고 피가 나고, 뿌러지고 멍드는 현실이라고.]
[그래서 매일 맞냐?]
[젠장, 내가 철인이야? 애들이 지랄할 때마다 맞서서 더 맞으라고, 난 지쳤어, 날 내버려 둬.]
[입 닥처!] 대화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이리 뛰고 저리 뛰던 와중에 케이틀린이 냅다 소리를 질렀다. 카페에 얼마없는 손님들의 시선이 쏟아지지만, 지레 사랑싸움이겠거니 하면서 신경을 끈다.
[케이틀린, 목소리, 목소리좀 낮춰.]
[이것도 않 된다, 저것도 않 된다. 도대체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알겠어 알겠어, 그러니까 목소리좀 낮춰.]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있는 그녀를 자리에 도로 앉히기 위해서 어깨에 양 손을 올리려 했지만 케이틀리는 다가오는 손을 뿌리쳤다.
[그럼 넌 계속 그렇게 당하고만 살꺼야? 스스로가 불쌍하지도 않냐!]
[너가 뭘 안다고!] 다툼을 피하는 성격, 주위에서 집중되는 이목이 뒤섞여서 그 역시 이성을 내려놓고 벌컥 성을 내었다.
[난 더 이상 배신당하고 싶지 않아. 믿었던 치구가 일진에게 붙어먹어서 날 못살게 굴고 둘만이 나눴던 진솔한 대화를 다 까발리는 기분을 넌 알아? 선생님한테 용기를 내어서 힘든 사정을 울면서 털어 놓았는데, 너도 잘못한 게 있으니 참는 게 어떻겠냐는 무관심한 대답만 돌아오는 느낌은? 아니지, 웃으며 학생과 짝짝꿍 어울려 날 놀려대서 어거지로 맞춰서 웃어야만 했던 비참함은? 경찰서 앞을 서성이면서 반나절은 고민해 봤어? 부모라는 건 내가 맏았다는 사실을 알고 학교를 뒤집어 놔서 다음날부터 전교생이 따가운 눈초리로 날 쳐다보는 일은 격어봤냐? 비슷한 처지의 왕따친구가 다른 그룹에 들어가서 그녀석 몫의 괴롭힘까지 내가 받을때 느끼는 증오심과 자괴감은?]
[몰라, 그렇다고 계속 그렇게 살꺼냐?]
[상관 마, 내 인생이야.] 그는 말을 뱉고서 아차 싶어서 숨을 멈췄지만, 이미 시위를 떠난 화살이었다. 케이틀린은 숨을 거칠게 몰아쉬면서 그를 노려본다.
[좋아, 알겠어. 하지만 이 말은 해야겠어. 넌 도대체 뭔데 손을 내밀면 반듯이 누군가 잡아줘야 하지? 한 번에 도움을 받겠다고? 웃기는 짬뽕이네. 한 번이 안되면 두 번, 두 번이 안되면 열 번, 도움 받을때 까지 하라고. 한 번에 깔끔하게 포기 할 만큼 상황이 안 심각해? 안 힘들어?]
[그럼 그 동안 내가 받는 상처는.]
[누군 상처 하나 없이 하하호호 사는 줄 알아? 왜 주변 사람들이 너의 손을 안 잡아 주는 줄 알거 같다. 그들이 지옥에서 올라온 악마가 아니라, 그냥 너가 눈에 안 보일 때 잠시 손을 찔끔 뻗고 나서 고개를 돌리니 꿀 먹은 벙어리처럼 가만히 있으니까 그렇지.]
[난 계속해서......,]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 주려고 했어, 하지만 곰곰이 듣고 보니까, 굴레를 벗어 던질 생각이 없어. 싫은 거야, 예측에서 벗어나지 않는 세상이니까, 그리고 그곳에서 넌 언제나 나약하지만 심성은 고운 비극의 주인공이거든, 오만하다. 도대체 뭐가 그렇게 두려워서 벗어나지 못하니.]
[억울해 난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어, 거짓말이야.]
[그런놈이 그런식으로 말하니, 눈치를 체고 손을 잡아 주려는 사람한테? 됐어, 어차피 니 인생이지 내 인생이냐, 정떨어진다. 잘있어.] 케이틀린은 자리에서 일어나 뒤도 돌아보지 않고서 카페를 나갔다.
그는 뒤쫒아 나가려했다. 하지만 왜인지 그는 문을 열어젖히지 못했다. 과거와 현제를 가르는 경계처럼 문만 박차고 넘어가면 과거의 바보 같은 인내심과 끔찍했던 기억 모두를 털어 낼 수 있었겠지만, 어째서인지 그는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이었다.
친근하게 생긴 카페주인이 와서 어깨를 다독여 주고 음료 값은 받지 않을 테니 집에 가서 쉬라고 등을 떠밀자 그제서야 문을 열었다. 그는 영혼이 빠진 사람처럼 집으로 갔다.
그는 곧장 집으로 와서 방에 틀어 박혔다.
[내가 잘못한 건가?] 한밤중이 돼서 그가 중얼거렸다.
그는 방 안에 앉아있다. 세간들은 전부 고급품이다. 면적으로 말하자면 성인 20명은 능이 들어 가 놀 수 있는 크기인데, 침대는 우아한 곡선으로 깍인 틀에 끼워져 있으며 시트와 이불은 풀을 먹여서 빳빳하다. 책장에는 책들이 졸부들의 집이 그러듯이 양장된 두꺼운 책들이 가지런히 정렬되어 전질 구매이후 한 번도 읽지 않았음을 간증하고 있다.
책상과 의자는 반면 아무런 장식이 되어 있지 않아 소박한데다 아무것도 올려져있지 않아 도저히 사람이 사용한다고 생각되지 않는 냉기를 품고 있다.
책상위에는 사냥용 칼, 네일 건, 가죽장갑, 지갑이 앉아서 그를 마주보고 있다. 그러나 사물들은 그제서야 입으로 침묵하는 방법을 배웠는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는 쓸쓸하게 웃고선 욕실로 가 거울을 보았다.
[이봐 친구 내가 잘못한 건가?] 간혹 거울을 볼 때마다, 특히나 힘든 일을 격고 나선 언제나 위로 혹은 화를 대신 내주던 그 친구는 그날따라 아무런 말없이 물끄러미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왜 오늘따라 말이 없니? 난 오늘 정말 힘들고 넌 언제나 내가 힘들 때 말을 걸어 주었잖아. 정말 힘든 날이야. 혹시나 하는 희망을 가졌는데 바로 차였어, 아니 내가 찬 건가?] 그는 피식피식 웃으며 거울에 바싹 다가갔다.
[가까이서 보니까, 너 어깨 좀 피고 당당하게 걸어 다니면 잘 생겼을 것 같은데, 하하하. 아 그나저나 넌 이름이 뭐냐? 우리가 초등학교 마지막 학년쯤에 만난 것 같은데 아직 이름을 모르네.] 거울 속 미소는 점점 우그러지더니 혼란으로 인한 공포로 점철된 이상한 얼굴이 되었다.
별안간 남자는 주먹으로 거울을 깨트린 다음 집밖으로 뛰쳐나갔다. 늦은 밤인데 그 누구도 붙잡거나 바닥에 떨어진 피를 보고 놀라 쫒아오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 두 가지 사건이 일어났다. 하나는 교정에서 새벽에 청소부가 허리가 거꾸로 꺾인 체 게거품을 물고 신음을 하던 학생을 발견해 병원으로 옮기는 사건이 생겼고 다른 하나는 케이틀린이 자신의 사물함을 열었을 때 과자가 담긴 장바구니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모든 수업을 짼 것이었다.
사건이 워낙 절묘하게 겹치는 바람에 온갖 소문이 일어났지만, 대놓고 케이틀린에게 물어 보거나 혹은 그의 친우들에게 물어볼 수 가 없어 결국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오리아나와 바이가 저녁급식을 먹고 나서 교정으로 나왔다. 두 사람은 말없이 두 번이나 구 넓은 품으로 아이를 받아준 돌바닥을 내려보았다.
경찰이 몇 번 왔다갔다하고 자살 특별 강좌를 몇 번 들으면서 시간이 지나갔다. 오리아나와 바이는 교정을 지나가다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 세낀 전생에 나라를 팔아먹은 게 분명해. 최소 반신불수라네, 쳇, 한 놈을 골로 보낸 것 치고는 싼거지.]
[케이틀린이 문제지요.]
[똑같아, 난 신경 끄기로 했어, 한동안 이즈리얼에게 맡겨 놓을려고. 얼탱이가 없어, 하필이면 순둥이가 그 지랄한 다음에 일이 터질게 뭐람.] 그들은 한동안 두 번이나 사람을 끌어안은 돌바닥을 물끄러미 처다보았다. 바닥에 붙어있던 포스트잇이나 부식거리는 이미 누군가 다 뜯고 치웠다. 잔나와 징크스가 뒤쫒아나오자 아이들은 어슬렁거리며 사육장으로 올라갔다.
[결국 뭐였을까? 싸이코 녀석이 미쳐 날뀐건지, 아니면 정말 성배라는 것에 홀린 불쌍한 놈이 생긴걸까?] 바이가 중얼거린다.
[난 싸이코에 한 표, 그 세끼 사고칠거 같았어] 징크스가 담담히 받아친다.
[나도, 불쌍하긴 해도.] 잔나가 말했다.
[그런가? 그래도 같은 장소에서 두 번이라니 찜찜해.]
[그래도 놓고 보면 말야, 죽진 않았지.]
[난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 평생 식물인간이라니. 끔찍하다.]
[병문안 다녀온 애들이 그러드라, 땅콩알러지 있었던거 맞냐고, 병원을 잘 돌아다녀서 간호사들이 붙잡는데 애먹는데.]
[선배는?]
[회복중이래.]
[얄굳어, 같은 높이에서 떨어져도 누군 깨어나고 누군 아니고.]
[혹시몰라 시간이 해결해 줄지.]
사육장은 새로 지어졌다. 이전과 똑같은 구조지만 다른 점이 있다면 어딘가에 감시카메라가 숨겨져 있고 주변에 cctv촬영중이라는 푯말이 서있다. 우리 안에서 뛰노는 토끼를 교장인 제드가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아이들의 인사를 고개를 살짝 끄덕여 받고는 계속해 우리 안을 살펴보았다.
[학교가 벌집 쑤신 듯 소란스러운데 교장이 이런 곳에 있으셔도 되는감?] 바이가 깐족거리자 교장은 어깨를 으쓱인다.
[가끔은 신드라도 일을 해야지, 토끼들이 다들 건강해 졌구나.]
[누가 지극 정성으로 돌봐서 그런가봐요.] 오리아나가 자물쇠를 열고 들어가 물통의 물을 버리고 갈아주었다.
[고양이는 잘 지내니? 왜 수학여행에서.]
[아, 젖 때자마자 집나갔어요. 가끔씩 집에 와서 밥 달라고 야옹거리는데 요즘은 통 안보이네요. 할머니가 섭섭해 하시더라고요.]
[킼킼 어쩐지 요즘 집 밖에서 애 우는 소리가 그렇게 들리더만.] 오리아나를 뺀 나머지 아이들이 키득이면서 사육장을 정비했다. 교장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머리를 긁었다. 다만 저속한 농담을 들어서가 아닌 자신의 예측이 전부 빗나간 당혹스러움에서 빛어진 행동이었다.
우리의 문을 잠그자 토끼들이 굴에서 기어 나와서 건초와 물을 마시기 시작했다. 어떤 녀석은 귀가 없어서 오른쪽으로 돌지 못했지만 가운데에 있는 먹이 통까지 가는데 문제는 없었다. 쩔뚝이거나 눈이 없어도 다른 다리가 있고, 후각이 있었고 다른 토끼들이 기척을 내주어 마찬가지로 잘먹고 잘 마실수 있었다.
아이들과 교장은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고선 학교로 내려왔다.
[내가 틀렸구나.] 산길 끄트머리에서 제드가 아이들에게 말했다.
[일단 살려놓으면 어떻게든 살긴 하는구나.]
[일단 살린게 기적이지, 궁예, 소세, 몽땅이, 누가 살아 날 줄 알았어, 고양이도.] 제드는 발걸음을 멈추고 아이들의 뒤통수를 살폈다.
[이번 일도 그냥 너희들에게 맡겼으면, 이렇게 최악의 결과가 나오진 않았을지도 모르지. 최소한 아무도 죽지 않았을지도.] 그는 혼잣말을 하고선 교무실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러다 문득 생각이 났는지 고개를 돌렸다.
[야자하고 가라.]
[네, 그냥 갈께요.] 아이들은 약속이나 한 듯 밝게 대답하고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웃으며 교실로 튀어갔다. 교장은 3초정도 생각을 하다 헛웃음을 지었다.
교장과 헤어진 아이들은 잽싸게 가방을 챙겨서 동아리방으로 날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