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마차에 몸을 맡긴 후 잠깐 잠들었던 나는 돌이라도 밟았는지 거친 흔들림 때문에 침을 질질
흘리다가 정신을 차렸다. 아끼고 아끼던 하배니아산 시가 한박스로 얻어타다시피 루테르나까지
경로를 정할 수 있었다. 이런 고통쯤 웃으며 감수해야지.
야들렌은 큰 도시지만 외지 중에 외지라 주변에 소도시들이 없어서 변방 외지인들이 몰리고 몰려
서 커져버린 곳이다. 따라서 안에 있을땐 모르지만 다른곳으로의 이동이 상대적으로 매우 불편하
다. 아무것도 없이 계속 내달려야 하는 것도 있고 뭣보다 주변 지형도 일반적이지 않다.
동쪽으로 빠지면 그나마 깨끗한 길에 제법 도시들이 있지만 그 주변은 여러모로 흉흉한 곳들이
많다. 대륙 중서부 중심에는 커다란 사막지대도 있고 소위 사막민족이라고 불리우는 가논 인들의
카슈 왕국과 가깝기 떄문에 여러모로 골치아파진다. 그들은 금전에 있어 상대적으로 더 깐깐한
경향이 있다.. 앞으로 갈길이 먼데 가진 돈이 적은 내가 문명의 해택을 원활하게 받기는 힘들다.
뭣보다 사막쪽은 기후도 그렇고 아무리 요즘 시대라도 국경 근처라 불안하다.
사막을 돌아서 갈수도 잇지만 그건 그거대로 거쳐야될 길과 도시가 너무 많고 멀다. 아무리 발
품 팔면서 여행기분을 만끽하고 싶다곤 해도 지금의 내처지로썬 불가능한 이야기. 따라서 도중에
거치는 곳 하나 없이 길도 험하고 당연히 위험할수도 있지만 일직선으로 경로를 잡은 것이다.
뭐하나 하려면 이렇게나 시간과 돈이 든다. 이렇게 좋은 평화시대에도 빈자는 결국 어쩔 수 없는
것인가. 루테르나 이후로는 농담이 아니고 걸어서 다음 마을까지 가야할 판이다.
야들렌 안에서 꽤 빠르다고 정평이 나있는 마차. 마부는 브렌든씨로 정직하고 말수가 적은 사람이
다. 그가 아니었으면 루테르나까지 시가 한박스로 가줄 생각같은건 안했을 것이다. 거의 대륙 서쪽
해안선을 따라가는 루트인데다 주변에 작은 마을들도 없고 길은 험하고 거리도 거의 뭐. 3~4일은
걸릴 것이다. 나도 나지만 그도 그다. 대단해.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싸구려 궐련 담배를 하나 꺼내물고 불을 붙였다. 흩날리는 연기 속에 정신을
좀 안정시키고, 주섬주섬 가방을 만지작거리며 창박을 본다. 빠르게 스쳐지나가는 자연풍경은 빠
른 마차의 속도로 인해 형태를 시시각각 일그러뜨리고 다만 녹색으로, 그리고 잠시 텅 빈 너머의 산
들만을 비추다가 다시 녹색으로 변해가길 반복하고 있었다.
야들렌의 마차들은 사방으로 넓은 창이 나 있는 것이 특징이다. 나쁜점도 있겠지만 이런식으로 넓고
쾌적한 시야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장점도 명확하다. 조그맣고 조잡한 맛을 내며 자기 몸을 다 태워버
린 담배를 재떨이에 꽂아넣고선 이번엔 가방을 열어본다.
혹시나 필요할지 몰라 가져온 몇가지 작은 상비약, 지갑에서 뺀 내 전재산의 절반,
혹시나 필요할지 몰라 가져온 필기구, 작은 노트, 모노클, 담배...
혹시나 필요할지 몰라 가져온 몇가지 내 수집품들...
아. 이 수집품들은 그다지 귀한것은 아니지만 안 귀한것도 아닌 적당한 것들로 예를 들면 회중시계,
성언이 새겨진 기념주화, 마법재료로 활용할 수 있는 약초 파우더, 에테미아 출판협회가 출판한 동화
책. <바보왕>의 초판본, 어쨌든 예술적이게 보이는 손바닥만한 에스터 교단의 십자가, 카슈 왕국에서
만 구할 수 있는 모래를 유리병에 쌓아서 그림을 만든 작가미상의 예술품, 마지막으로...
현재 내가 거지꼴이 된 원인 중 하나인 모조검이다.
분명히 옛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이 화려한 모조검은 검 자체의 실용성과는 별개로 예술적인 외양을 하
고 있으며 최소 고대력 후반에서 신력 초반으로 연대가 추정되는 매우 희귀한 물건이다. 나를 가장 놀
라게 한 것은 단검 수준의 짧고 고풍스러운 장식을 한 검집과 검집만큼 멋지지만 크기도 비슷한 손잡이
였는데 이게 검집을 빼면 물리법칙을 벗어나서 장검이 나오는 것이었다.
처음에 봣을땐 입을 다물지 못했고 두번째 봣을땐 뭔가 사기가 아닌가 싶었을 정도로 난생 처음보는 광
경이었다. 검집을 넣으면 장검은 마치 스프링처럼 그대로 축소되어 단검처럼 되었고 빼면 장검이 되는
것이 아닌가. 예술품으로써의 가치, 유물로써의 가치, 소장으로의 가치뿐만 아니라 내 취향에도 딱이었
던 것이다. 틀림없는 마법무구였다. 이런 마법이 깃든 유물이란건 이 세계에 신들의 시대, 공백의 역사,
고대력 초반 정도에서밖에 기원을 거슬러 올라갈 수 없다. 즉 셋 중 하나. 뭐라도 잭팟인 것.
가치를 알아보지 못했던 늙은 떠돌이 상인은 이것을 터무니없는 가격에 내놓았고 터무니없는 가격인데도
돈이 없는 나는 피눈물을 흘리며 전재산을 이것을 사는데 투자했다. 일생일대의 승부였다. 그것으로 내
하루하루는 빈곤과 결핍의 나날이었다. 잘 생각해보면 파는 그도 나도 알콜을 과량섭취했던 것 같다.
...어찌되었든 이것은 내 최후보험이다.
여차하면 돌아갈 돈도 없을 수 있기 때문에 이거저거 다 안되면 이걸 어떻게든 제값을 주고 팔아야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 이것을 포함해 내가 집에서 몇개 가져온 수집품들은 모두 부족한 내 돈을 여차할때 대신할
있는 거래품들이다. 어쨌든 부호들은 야들렌보다 큰 도시에 사니 값이야 못받아도 내 고향에서보다야 더
잘 추겠지. 모조검의 건도 마찬가지다. 식견이 있건 없건 판매루트 자체는 대도시가 더 수월할 것이다. 요리
책건이 망하면 나는 이것들로 씁쓸하지만 쏠솔하게라도 귀환할 수 있는 것이다.
...스쳐지나가는 풍경을 비추는 사각형의 작은 공간.
나는 가방을 닫고 넓은 경치를 관람하며 다시 눈을 감았다.
말이 없을뿐 자기몫은 철저하게 하는 브랜든씨라면 예상시간에서 그렇게 많이 차이나지는 않을 것이다.
어차피 긴 여정이다. 나는 한숨 더 자기로 했다.
눈을 뜬 것은 아미 주변이 까맣게 어두워진 뒤였다.
도시 안에 있을떄는 볼 수 없었던 밤하늘. 말은 쉬고 브랜든씨는 이미 야영준비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시간은 정직하게 흘러간다. 내가 원한다고 빨라지지도 느려지지도 않는다.
달이 아름다운 밤이었다.
나는 신선한 공기를 있는 힘껏 크게 내쉬고,그리고 브랜든씨에게 다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