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아암.”
하품을 늘어지게 하며 태훈은 침대에서 일어났다. 어째서인지 오늘따라 개운한 기분이었다. 수능이 다 끝났다면 이런 기분이 아니었을까.
“젠장.”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태훈은 속으로 욕을 하며 옷을 챙겨 입었다. 처음에는 입기 껄끄러웠던 옷들이었지만 이제는 오래전부터 입고 있었던 것 마냥 편하기만 하다.
“이런 걸로 편해지고 싶지 않은데.”
수수한 무명옷을 바라보며 태훈은 인상을 찌푸렸다.
“젠장.”
다시 생각하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 순간적으로 욕이 육성으로 튀어나올 뻔했지만 태훈은 어떻게든 진정하며 심호흡을 했다.
“후우.”
그리고 침대 위를 바라봤다. 얼마 전 고블린을 사냥하다가 헤질대로 헤진 과거의 옷이 보였다. 이제 저 옷은 더 이상 못 입겠지. 태훈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옷을 만졌다. 겉옷의 주머니에는 수험표가 들어 있었다. 역시 상태는 좋지 않았지만 도저히 버릴 수 없었다. 태훈은 한숨을 쉰 뒤 수험표를 고이 접어 옷 안에 넣었다.
“안태훈 씨, 일어났나요?!”
그리고 티유가 특별한 기미도 없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노크 좀 해라, 이 멍청아!”
태훈은 소리치며 티유를 향해 베개를 집어던졌다. 베개는 아름다운 포물선을 그리며 티유의 면상을 맞췄다.
“컹!”
티유는 그런 소리를 내며 뒤로 넘어갔다.
“어차피 보여줄 것도 없으면서!”
“닥쳐!”
태훈은 티유에게 소리친 뒤 밖으로 나왔다.
“그래서, 뭔 일인데? 난 네가 날 찾을 때마다 불안해 죽겠다, 진짜.”
“에이, 제가 뭘 한다고 그렇게 불안해하세요. 전 안태훈 씨에게 잘못될 일은 하지 않는다고요?”
티유의 말에 태훈은 잠시 과거의 일을 떠올렸다.
“……너 지금 시비 거는 거지?”
“네? 어, 어째서 그렇게 되는 건데요?!”
티유는 당황하며 태훈에게 물었다.
“네가 지금까지 해왔던 짓거리 중에 나한테 득이 되었던 게 있었냐?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봐.”
“저, 적어도 하나 정도는 있겠죠!”
그렇게 말한 뒤 티유는 잠시 생각을 하기라도 하는지 입을 다물었다.
“그, 그래도 저 덕분에 동료는 모았잖아요!”
“그 모아온 동료란 게 저런 거냐고!”
태훈은 티유의 말에 화를 내며 주먹으로 그녀의 관자놀이를 눌렀다.
“으갸갹! 아, 아파요! 아파요오!”
티유는 괴로워하며 태훈의 팔을 몇 번이고 두드렸다. 태훈은 한숨을 쉰 뒤 그녀를 놓아주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뭔 일로 날 찾으십니까? 응?”
“아, 그게 같이 놀러가자고…….”
“마왕군 쓰러뜨려야 된다고 나 데려와 놓고 놀러가자고?!”
티유의 말에 태훈은 소리쳤다.
“으아앙, 화, 화내지 마세요! 지금까지 고생했으니까 좀 쉬자는 거잖아요!”
티유는 자신의 머리를 감싸며 태훈에게 다급히 말했다. 그 말에 태훈은 잠시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어, 어차피 안태훈 씨도 이곳에 와서 제대로 돌아본 적은 없잖아요? 그러니까 구경도 할 겸해서, 같이 나가시죠.”
티유의 말에 태훈은 잠시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티유의 말대로 이곳에 와서 제대로 구경도 못 했다.
“좋아.”
언제 돌아갈 수 있을지 알 수는 없으니 조금은 익숙해질 필요가 있을 것 같긴 했다. 어떻게 보면 청춘 이세계 생활이지 않은가. 소설 속에서나 일어날 법한 일이었다.
“야호! 그럼 준비해서 나올게요!”
티유는 만세를 부르며 방에서 나갔다. 태훈은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하아.”
좋아하는 모습에 뭐라 말하고 싶었지만 차마 뭐라고 말하기가 힘든 태훈이었다.
“그래서, 뭘 안내해 줄 건데?”
“흐흥, 기대하시라고요!”
어째 자신만만한 티유를 보자 태훈은 왠지 모르게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이 녀석, 전에도 자신만만해하다가 고생하지 않았었나.’
슬라임 사건과 고블린 사건을 통해서도 발전이 없는 티유의 모습에 태훈은 할 말을 잃었다. 믿어도 될까, 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괜히 또 말을 함부로 했다가 시끄러워지면 자신만 귀찮으니 가만히 입 다물기로 했다.
“점심도 안 먹었고 하니까 밥부터 먹죠!”
“그 점심 메뉴는 뭘 생각했는데?”
“그야 당연히 전투조……!”
티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태훈은 그녀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왜, 왜요?!”
“장난하냐아! 어제도, 그제도, 엊그제도! 저녁은 계속 전투조류였다고! 이제 지겨워 죽겠네! 얼마나 많은 양의 전투조류를 먹어야 정신을 차리는 건데?! 엉?! 뭐 궁극생물이라도 되고 싶은 거냐, 너!”
태훈은 소리치며 티유의 머리를 한 대 더 쥐어박았다.
“하다못해 근처 노점상 같은 데에서 먹을 수도 있는 거잖아!”
“그건 그렇지만.”
티유는 태훈의 말에 시선을 피하며 중얼거렸다.
“전 전투조류가 없으면 살 수 없는 몸이 되어 버렸다고요. 솔직히 안태훈 씨가 입으로는 싫다고 하시면서 몸은 솔직…….”
“닥쳐!”
뭔가 위험한 발언을 하는 것 같은 티유를 말리며 태훈은 숨을 몰아쉬었다.
“우으으, 안태훈 씨는 절 너무 막 다루시는 것 같아요.”
티유는 불만을 표하며 볼을 부풀렸다.
“네가 다 자초한 일이라는 생각은 안 하냐.”
태훈은 어이가 없다는 눈으로 티유를 바라봤다.
“알겠어요. 그러면 저희 큐에르의 대표적인 길거리 음식들을 먹여드리죠!”
“네네. 좀 제대로 된 것 좀 먹여주라.”
태훈은 티유의 호언장담에 더 이상의 기대를 담지 않은 채 대답했다. 그리고 둘은 인파 속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태훈과 티유는 각자 양 손에 꼬치와 먹을 걸 들고 광장의 분수에 앉아 있었다.
“닭은 피하고 싶었는데.”
태훈은 손에 들린 꼬치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왜요? 닭은 언제나 옳은 음식이라고요.”
“지겹다고.”
태훈은 대답하며 손에 들고 있던 마지막 꼬치를 먹어치웠다.
“그나저나, 나 이제 와서 생각난 건데, 이 세계에 있는 사람들이랑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게 대화할 수 있는 거야?”
“……정말 이제 와서네요.”
티유는 할 말이 없다는 표정으로 태훈을 바라봤다.
“지금까지는 정신없었으니까 별 신경을 안 썼거든. 근데 오늘 와서 새삼 깨닫네.”
“그야 당연히 마법을 써서 그런 거죠.”
“마법이냐.”
티유의 말에 태훈은 그녀를 바라봤다.
“너, 공격 전문이라며?”
“에이, 그야 그런 건 다른 마법사들이랑 같이 했죠. 바보세요? 소환했을 때 기억 안 나세요?”
“아니, 너무 잘 기억나서 아직도 짜증나는데.”
태훈은 눈살을 찌푸리며 티유를 노려봤다.
“아니, 그런 의미가 아닌데. 죄송합니다. 안 까불게요.”
그의 시선에 티유는 식은땀을 흘리며 사죄했다. 태훈은 말 없이 그녀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무튼 마법이란 말이지. 마법이란 거 참 편하네. 이거 나중에 돌아가도 지속되는 거냐?”
“그럴 리가 없잖아요.”
“젠장! 외국어 영역 날라갔네!”
태훈은 성질을 내며 꼬치를 집어던졌다.
“……아, 됐어. 다 포기했어. 어차피 마왕 쓰러뜨리고 날 때쯤이면 수능은 물 건너간 상황이겠지. 망할. 빌어먹을. 빌어먹을 신발 끈.”
그렇게 중얼거리며 그는 자신의 신발을 바라봤다. 이 모든 게 신발 끈 때문이라는 사실이 너무나 짜증이 났다.
“그나저나, 데미스는 어디 갔냐?”
“데미스 언니요? 신전에 볼일이 있다고 갔어요. 뭐, 저희 능력치를 알아보고 오신다던데요?”
“응? 그거면 우리가 같이 가야 되는 거 아니야?”
“네? 저희 머리카락같은 것만 있어도 충분해요.”
“머리카락? 나 데미스한테 그런 거 준 적도 없는데?”
티유의 말에 태훈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은 데미스에게 머리카락을 넘긴 적이 없었다. 그런데 머리카락이라니, 금시초문이었다.
“아, 안태훈 씨 머리카락은 언니가 밤에 방에 들어가서 뽑았댔어요.”
그 말에 태훈의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혹시 그거, 내가 자고 있을 때였냐?”
“네.”
“나 간밤에 뭔 짓을 당한 거야?!”
태훈은 두려움에 떨었다. 앞으로는 방 문을 꼭 잠그고 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어제 분명 잠그고 잤을 텐데?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다시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걱정 마세요. 언니 말로는 그냥 장난만 조금 쳤다고 했으니까요.”
“무, 무슨 장난?”
“그건 안 가르쳐주던데요?”
“무서워!”
티유의 말에 태훈은 다시 한 번 두려움에 떨었다.
◇
“어머, 태훈 님, 벌써 돌아오셨나요?”
여관에 도착하자 로비에서 데미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 얼굴을 보자 태훈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렸다.
“너, 너 간밤에 나한테 뭔 짓 한 거야?”
“네? 간밤에? ……아.”
태훈의 말에 데미스는 잠시 생각하는 것 같다가 떠올랐는지 손뼉을 쳤다.
“후후후, 그건 비밀입니다?”
데미스는 눈을 가늘게 뜨고 요염한 미소를 지으며 검지손가락을 자신의 입술에 가져다댔다.
“으아아아, 미친년아아아!”
그런 그녀의 행동에 태훈은 얼굴을 붉히며 소리쳤지만 데미스는 그저 웃으며 넘길 뿐이었다. 그리고 호프와 티유는 순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건 제쳐두고요.”
“아니, 제쳐두지 마! 나 엄청 신경 쓰이니까 제쳐두지 말라고!”
“여기 저희의 능력치를 작성해왔답니다.”
“제쳐두지 말라고!”
태훈의 절규를 무시하며 데미스는 작은 카드 같은 것을 넘겨주었다.
“이걸로 저희의 능력치를 쉽게 알아보실 수 있을 거예요. 그나저나 태훈 님의 능력치 중에서 행운은, 대체 뭐죠?”
데미스의 의미심장한 말에 태훈은 카드를 바라봤다. 그곳에는 자신의 능력치가 적혀 있었다.
[안태훈. 용사. 체력, C+. 지능, B-. 근력, D. 공격력, C. 방어력, 측정불가. 행운, 측정불가]
“저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능력치를 작성해봤었지만, 이런 능력치는 처음 봤어요.”
“행운이, 측정불가라고?”
“네. 운이 엄청 좋으시거나 운이 엄청 안 좋으시거나 둘 중 하나예요.”
그 말에 태훈은 표정을 찌푸렸다. 확실히 신경 쓰이는 능력치였다.
“……그것보다 나한테 무슨 짓 한 거냐.”
하지만 그것보다 신경 쓰이는 건 간밤에 무슨 일을 당했나였다. 그걸 알기 전까지는 다른 건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후후후, 사실 별 거 안 했어요.”
“별 거 안 했다고?”
그 말을 도저히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후후, 전 신관이랍니다? 거짓말을 할 수는 없어요.”
“너 신관이었냐.”
지금까지 잊고 있었던 사실에 태훈은 경악을 금치 못 했다.
“후후후.”
태훈의 반응에 데미스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전 직업상 거짓말은 못 하니까요. 믿어주세요. 별 거 안 했어요. 그냥 머리카락을 뽑았을 뿐이에요.”
“진짜지?”
“믿으세요. 믿는 자에게 복이 있다고 하잖아요?”
데미스의 말에 태훈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그 말에 일단 납득하기로 했다.
“후후후, 전 거짓말은 하지 않았답니다?”
“으아아아, 진짜 신경 쓰이게 하네!”
이어진 데미스의 말에 태훈은 납득이고 뭐고 때려 치웠다.
“진짜 뭔 짓 했냐고!”
“후후후후, 알면 다쳐요, 용사님.”
데미스는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으아아아아악!”
그리고 태훈은 공포에 질려 소리쳤다.
“안태훈 씨, 진정, 진정하세요!”
공포에 질린 태훈을 티유가 필사적으로 말렸다.
티유에 의해 진정한 태훈은 숨을 몰아쉬며 의자에 앉았다. 어느새 호프도 와서 태훈을 걱정하고 있었다.
“으으.”
더 이상 공포에 질릴 힘조차 나지 않았다.
“여기 마실 것 좀 갖다 주십시오.”
호프는 그런 태훈을 걱정하며 종업원에게 부탁했다. 티유는 한심하다는 시선으로 태훈을 바라봤다.
“그게 그렇게 무서우세요?”
“너 같으면 안 무섭겠냐.”
“에이, 그 정도로. 전 그 정도는 별로 안 무서운데요? 아, 참고로 전 무서워 하는 게 없답니다.”
그 말에 태훈은 뚫어져라 티유를 바라봤다. 얼마 전만 해도 고블린한테 쫓겨서 도망쳤던 주제에, 저런 말을 하다니 할 말이 없었다.
“흐흥, 저처럼 담력을 키우실 필요가 있겠네요, 안태훈 씨는.”
“와, 우쭐대는 거 진짜 기분 나쁘네.”
태훈은 그렇게 말하며 경멸하는 시선으로 티유를 바라봤다.
“그렇게 기분 나쁘셔도 상관없답니다. 무엇보다 전, 왕국 최강의 아크메이지니까요!”
티유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카드를 태훈의 눈앞에 들이댔다. 그곳에는 티유의 능력치와 직업이 적혀 있었다. 공격력 측정불가.
“안태훈 씨보다 강하다고요?”
티유의 자랑에 태훈은 아니꼬운 시선으로 그 카드를 바라봤다. 그러다가 뭔가 이상한 문구를 발견했다.
‘뭐야, 저건?’
자세히 보자 그곳에는 작은 글씨로 ‘주의문’이란 게 적혀 있었다.
‘보통 저런 게, 적혀 있나?’
그런 생각을 하며 좀 더 자세히 읽으려던 찰나, 티유의 모자를 쓰지 않은 머리 위로 무언가가 떨어졌다.
“응?”
“뭐죠?”
티유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녀의 머릿결을 따라 그것이 식탁 위에 떨어졌다. 회색의 몸통에 긴 꼬리를 가진, 태훈이 살던 세계에서는 세계적인 캐릭터로도 그려졌던 그 생명체, 쥐가 식탁 위에서 티유를 바라보고 있었다.
“히.”
그리고 티유는 이상한 반응을 보였다.
“히이이익!?”
“어, 야, 너 뭐하는…….”
그리고 태훈이 말리기도 전에 티유는 완드를 집어 들어 휘둘렀다.
“파, 파파, 파이어 보오오올!”
“아이씨, 잠……!”
그와 동시에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폭발로 인해 로비는 아수라장이 되었고, 쓰러진 태훈의 머리 위로 카드 한 장이 팔랑거리며 떨어졌다.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들어서 내용을 읽어보았다.
[10000분의 1의 확률로 1분간 마법 위력 증가 및 최고위 마법 사용 가능.]
‘아무리 그래도, 이 타이밍에, 이건 아니지.’
청춘 이세계 생활?
‘그거, 한참 잘못됐잖아.’
그 생각을 끝으로 태훈의 의식은 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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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탄신일입니다. 샌드위치 연휴 덕분에 4일 동안 교생실습에 치였던 멘탈을 추스를 수 있었던 것 같네요.
읽어주시는 분들에게 언제나 감사드리면서 오늘 하루도 고생 많으셨다는 말을 남깁니다.
내일부터는 또 다시 교생실습으로 치이겠지만 멘탈을 부여잡도록 노력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