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미스으으!”
태훈은 티유의 완드를 휘두르며 데미스를 불렀다. 슬라임들은 태훈의 공격따위 가소롭다는 듯이 높은 울음소리를 내며 계속 그들에게 몰려들 뿐이었다.
“힐! 힐 좀 해주라고!”
“힐 말인가요……. 아까운데.”
데미스는 실로 아쉽다는 듯이 중얼거리며 슬라임에게 반쯤 먹혀들어가는 호프를 바라봤다.
“아니, 그딴 소리 하지 말고! 저건 괴로워 하는 게 아니라 죽어가는 거라고?!”
태훈은 외치며 호프를 가리켰다.
[큐루루루루룽!]
태훈의 말을 긍정하듯이 거대 슬라임은 온 몸을 떨며 높은 울음소리를 냈다.
“죽으면 괴롭히고 뭐고 없다니까?”
“후후, 티케 여신의 신자를 뭘로 보시는 건가요? 저희는 죽은 사람도 10초 이내로는 살려낼 수 있답니다. 10초 이내면 살릴 수 있어요.”
“뭐야, 그 권능. 죽을 걱정 없잖아…… 가 아니라! 저 녀석 이미 죽었을 수도 있잖아! 우리 파티의 유일한 탱커라고!”
“하아, 알겠어요. 하면 되잖아요.”
태훈의 독촉에 데미스는 한숨을 내쉬며 들고 있던 완드를 들었다.
“힐을 넣어주면 되는 거죠?”
데미스는 실로 귀찮다는 듯이 그렇게 말했다.
“그런데요, 용사님.”
“뭐야?!”
태훈은 여전히 몰려드는 슬라임들을 티유의 완드로 때리며 대답했다.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라고 하죠?”
“그게 왜…….”
지친 숨을 몰아쉬며 돌아보자 데미스는 웃는 낯으로 태훈을 바라봤다.
“저희 교단에서는 이렇게 가르친답니다. 치유의 최종 비기는 상대를 먼저 공격해 치유를 할 필요가 없게 만드는 것이라고요.”
“……네?”
데미스의 발언에 태훈은 정신이 멍해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건지 슬라임들이 제자리에서 멈춰 몸을 떨었다.
“후훗.”
데미스가 그렇게 웃기 무섭게 완드의 끝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어, 야, 잠……?!”
그리고 태훈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데미스의 완드 끝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제 의지는 현실이 될 거예요!”
데미스의 기합과 동시에 빛이 사방으로 퍼져나갔고, 태훈은 자신의 눈이 머는 것은 아닐까 하고 순간 생각했지만, 이미 늦었다.
‘아, 젠…….’
“……훈 씨. 안태훈 씨!”
“허억?!”
태훈은 숨을 내뱉으며 일어났다.
“왜 여기 쓰러져 계신가요?”
눈을 뜨니 티유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스, 슬라임은?”
“다 격퇴했어요. 역시 제 마법의 위력은 엄청났다구요?”
“마, 법?”
티유의 말에 태훈은 잠시 전의 일을 회상하려 했다. 그리고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태초에 빛이 있…….
“윽.”
어째서인지 뇌가 과거를 떠올리는 것을 거부하고 있었다. 태훈은 지끈 거리는 머리를 누르며 세차게 흔들었다.
“용사님, 괜찮으십니까?”
그리고 그런 태훈을 호프가 걱정스러워 했다.
“데미스 님, 용사님께 치유 마법을 걸어주십시오.”
“치유인가요, 알겠어요.”
호프의 말에 근처 바위에 걸터앉아 있던 데미스가 일어나 태훈에게 다가왔다.
“그러면 용사님, 거기 누워계세…….”
“으어어억!”
데미스가 다가오자 태훈은 경기를 일으키며 뒤로 물러났다.
“아, 안태훈 씨?”
“아, 미, 미안.”
태훈은 순간 자신이 왜 그랬나 싶었지만 알 수가 없었다.
“기억이 덜 날아갔나.”
데미스는 그런 태훈을 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뭐?”
“후후, 아무것도 아니에요. 자, 그러면 용사님, 치유, 걸어드릴게요?”
“어, 어어.”
◇
“하아아.”
여관으로 돌아온 태훈은 돌아오기 무섭게 침대에 뻗었다. 설마 슬라임이 그렇게까지 애를 먹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기억도 안 나지만.”
사실 기억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긴 했지만. 태훈은 늘어지게 하품을 한 뒤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근데 얘들은 왜 이렇게 조용한 거지.”
태훈은 중얼거리며 뭔가 불안한 느낌에 방에서 나와 로비로 내려갔다.
“아, 용사님!”
식탁 앞에 앉아 있던 호프가 태훈을 보자마자 그를 불렀다. 그쪽을 바라보자 티유와 데미스가 주민으로 보이는 사람들과 대화하고 있었다.
“저 분이 용사님?”
“뭔가 비리비리해 보이는데?”
“믿을 만 한 건가?”
사람들은 태훈을 보자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뭔가 무시하는 느낌이 들었지만 태훈은 그냥 넘어갔다.
“뭔 일이야.”
태훈은 일단 호프에게 물어봤다.
“아, 그게, 이곳에 온 상인분들입니다만.”
“상인?”
상인치고는 뭔가 행색이 초라해보였다.
“네, 이곳 왕도에 적을 둔 상단의 대표님들과 그곳에 소속된 행상인분들입니다.”
“그렇구나. 그런데 무슨 일로?”
“근처에 다다랐을 때 고블린 도적단의 공격에 운송중이던 상품을 빼앗겼다고 합니다.”
“흐음. 그런 거라면 그 뭐냐, 네 상관한테 가는 게 더 빠르지 않냐?”
태훈은 호프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한스 경께서 이곳에 용사님이 있다고 하셔서 이곳에 왔다고 합니다.”
“그 아저씨…….”
태훈은 한스가 귀찮아서 떠넘긴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었지만 일단 한 번 밖에 안 만나본 사람에 대해서 함부로 생각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하며 애써 무시했다.
“한스 경께 있어서는 귀찮은 일일 테니까요.”
“뭔……?!”
호프의 말에 태훈은 당황하며 호프를 바라봤다.
“원래 그런 분이에요, 한스 경은. 어쨌든 안태훈 씨. 이건 좋은 기회에요!”
“뭐가 또 좋은 기회인데?”
“저희는 슬라임도 잡았잖아요? 그러면 이제 제대로 된 전투를 경험해봐야죠!”
티유의 말에 태훈은 슬라임을 잡았던 낮의 일을 떠올렸지만, 어째서인지 아무것도 떠오르질 않았다.
“저기, 우리가 슬라임 잡은 거 맞긴 한 거야?”
일단 태훈은 아까 전부터 신경 쓰이던 부분을 언급했다.
“네? 그야 당연하죠. 제 최강의 마법으로 날려버렸잖아요.”
“그랬, 냐?”
뭔가 이상한 것 같지만 태훈은 도저히 기억이 나질 않았다. 낮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할 수가 없었다. 마치 뇌가 기억하기 싫어하는 것 같았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태훈은 고개를 세차게 저은 뒤 한숨을 쉬었다.
“아무튼, 저희 정도의 실력이면 고블린 정도야 쉽게 잡겠죠!?”
티유는 그렇게 말하며 호프를 바라봤다.
“네. 고블린은 슬라임과는 달리 인간형이고, 저희 기사단에서도 몇 번 소탕한 적이 있었습니다. 저희 정도면 한 두 마리 정도는 쉽게 잡을 수 있을 겁니다.”
호프는 그렇게 말했다.
“다만 방패가 새로 필요해서.”
“방패?”
“네. 아까 낮에 슬라임의 부식액에 녹지 않았습니까.”
“부식, 액? 윽, 머리가…….”
호프의 말을 듣던 태훈은 머리가 지끈거리는 느낌이었다.
“어머, 용사님. 괜찮으세요? 잠시 쉬실래요?”
그러자 호프의 옆에 앉아 있던 데미스가 태훈을 부축해주었다.
“아, 아니. 괜찮아.”
태훈은 어째서인지 즉시 데미스의 부축을 거절하며 근처에 있던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그래도 몸이 안 좋아지시면 언제든 말씀해주세요. 저희 신전에 내려오는 치유법의 비기로 치료해드릴게요.”
“아, 응.”
비기란 말에 왠지 모르게 몸이 움찔거렸지만 태훈은 일단 넘어가기로 했다.
“그럼 고블린 도적단은 저희가 소탕해드릴게요! 걱정하지 마세요!”
“아, 감사합니다, 아크메이지님! 덕분에 살았습니다! 이 은혜는 반드시 갚겠습니다!”
상단 대표는 고개를 숙이며 티유에게 감사를 표한 뒤 물러났다.
“역시 용사가 있다는 게 알려지면 이렇게 귀찮네요~.”
그들이 물러나자 티유는 어깨를 으쓱이며 동료들을 바라봤다.
“뭐, 상인 대표니까 보수는 넉넉하겠죠?”
“야, 너 솔직히 말해서 보수 때문에 하는 거지?”
“저, 절 뭘로 보시는 건가요, 안태훈 씨는? 전 그런 속물 아니라고요!”
그 말에 태훈은 눈을 가늘게 뜨며 티유를 바라봤다.
“어, 어차피 한스 경도 저희한테 보낸 거잖아요! 이건 한스 경도 저희에게 금전 걱정을 하지 않게 하려는 깊은 뜻이 있으셔서 그런 거라고요!”
“그런 건 아닌 것 같습니다만.”
티유의 말에 호프는 눈살을 찌푸리며 부정했다.
“솔직히 말해봐. 너 저 사람들한테 보수 얼마나 불렀냐?”
“어, 어어, 얼마 안 불렀어요!? 고작 해봐야 500만 틸 정도 밖에…….”
“티유 님!”
티유의 말에 호프가 식탁을 강하게 내리쳤다. 그러자 식탁이 쪼개지며 그대로 무너졌다.
“히이익?!”
티유는 놀라며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데미스의 뒤로 숨었다.
“보수는 받지 않습니다! 용사님도 그렇게 생각하시지 않으십니까?”
“어? 아, 아니. 그 뭐냐. 돈이 없는 것 보다야 있는 게…….”
“용사님!”
호프는 태훈을 노려봤다.
“낫긴 한데, 이번 일은 무보수로 하자.”
호프의 시선이 무서워 태훈은 하려던 말을 즉시 바꿨다.
“그러면 저희는 보수 따위 받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아시겠습니까?!”
“네, 녜!”
호프의 박력에 눌렸는지 티유는 칼 같이 대답했다. 태훈은 한숨을 쉬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완전히 기댔다.
“근데 호프.”
“네?”
“저 식탁은 어떻게 할 건데?”
태훈의 말에 호프는 자신이 박살낸 식탁을 바라봤다. 그녀의 뒤에는 근육질의 여관 관리인이 팔짱을 낀 채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
호프는 그제서야 자신이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깨달은 것 같았다.
“죄, 죄송합니다!”
호프의 사과하는 소리가 여관의 로비를 울렸다.
◇
다음 날, 그들은 깊은 숲속으로 들어와 있었다.
“그러면 몇 가지 주의사항을 말씀드리겠습니다.”
호프는 그렇게 말하며 쪼그려 앉은 일행들을 둘러보았다.
“고블린 도적단은 그렇게 수가 많지 않습니다. 우두머리만 처리하면 얼마든 쓰러뜨릴 수도 있고요.”
“우두머리인가.”
호프의 말에 태훈은 수풀 너머에 있는 녹색의 땅딸막한 생명체들을 바라보았다.
“우선 저기에서 우두머리가 어떤 녀석인데?”
“우두머리는 장식이 가장 화려한 녀석일 확률이 높습니다.”
호프 또한 수풀을 넘겨다보며 그렇게 말했다.
“화려한 녀석 말이지.”
태훈은 중얼거리며 그런 존재를 찾아봤지만 눈에 보이지는 않았다.
“없는데?”
“으음.”
호프는 낮은 신음 소리를 내며 다시 생각에 빠졌다.
“그렇다면 제 마법으로 싹 다 날려버리면 될 일이겠군요!”
티유는 낮게 외치며 완드를 강하게 쥐었다.
“그거 괜찮은 거야?”
어째서인지 안 좋은 느낌에 태훈은 작게 중얼거렸다.
“저번에 슬라임들도 제 마법으로 날려버렸었잖아요! 그러니까 고블린 정도야 쉽게 날리겠죠!”
“야, 호프. 나 진짜 기억이 안 나서 그러는데, 어제 슬라임들 진짜 이 녀석의 마법으로 쓰러뜨린 거 맞냐?”
태훈은 뭔가 의심쩍은지 호프에게 물었다.
“그게 저도 거대 슬라임에게 깔렸던 것까지만 기억이 나서 잘 모르겠습니다만.”
호프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뒤통수를 긁었다.
“이 녀석 믿어도 되는 걸까아.”
“후후후.”
태훈이 영 불안하다는 듯이 중얼거리자 옆에 있던 데미스가 작게 웃었다.
“맡겨만 달라고요, 안태훈 씨! 전 언제든 제 최강의 마법을 쓸 수 있으니까요!”
“아니, 네가 쓸 수 있는 건 좋은데 난 싸울 줄 모르잖아. 만에 하나라도 잘못되면 어쩌자고?”
“그건…… 호프 씨가 막아줄 거예요!”
그렇게 말하며 티유는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어쩐지 짜증이 날 것 같았다.
“그럼 바로 가죠, 호프!”
“네! 방패가 되어드리겠습니다!”
말리기도 전에 티유와 호프는 일어나 수풀 너머로 달려나갔다.
“아니, 야!”
태훈은 그런 그들을 보며 소리쳤지만 이미 늦었다. 수풀 너머에서는 고블린의 것으로 추정되는 찢어지는 듯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후후, 그러면 저도 가볼까요?”
데미스는 그렇게 말하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수풀 너머로 넘어갔다.
“아니, 힐러면 그냥 여기서 지원……. 아, 젠장! 나도 모르겠다!”
혼자 남은 태훈은 화를 내며 그 뒤를 따라 갔다. 어차피 여기 혼자 있으나 저 너머에 있으나 위험한 건 매한가지지만, 그래도 저들과 함께 있는 것이 좀 더 안전할 거라고 생각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