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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위로부터의 해방] '인간 이후의 인간' 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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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전화('인간 이후의 인간' 6화): http://bbs.ruliweb.com/family/212/board/300068/read/30559500?search_type=member_srl&search_key=4836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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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수들이 돌아다니는 낮 시간대는 피하고, 몰래 구한 검은 천을 자르고 붙여 만든 옷을 입고, 눈만 내놓은 뒤 코, 입, 귀까지 철저하게 가리고서 취침 시간대에 맞춰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꿈에서 알려준 열쇠의 위치가 딱 들어맞았기에 독방에서 빠져나오는 건 어렵지 않았다.

 

 

  탈옥수가 없나 땅바닥을 비춰보는 헤드라이트들의 시선을 피해 노역소 안의 구조물들에 몸을 숨기며 서서히 걸어간다. 총은 빼내지 못했으니, 이러다가 자칫 걸리기라도 하면 저항도 못 해보고 죽게 되니 조심할 수밖에 없다. 노역하며 단련된 몸이라고 해도 맨주먹으로 소총을 든 간수를 상대할 수는 없다.

 

 

  역시 취침 시간대에 맞춰 나오기를 잘했나 보다. 간수들도 대부분 자러간 시각, 돌아다니는 당직 간수들의 숫자는 낮에 모습을 드러내는 간수들의 수에 비하면 훨씬 적다. 그렇다고 우습게 볼 건 못되지만, 확실히 낮 시간대보다는 신경이 덜 쓰이는 것 같았다.

 

 

  간수들의 눈에 피해 취침 시간대에 조용히 움직일 때는 시각뿐만 아니라 청각과 후각, 촉각 등 모든 감각이 동원되었다. 귀를 기울이면 근처에서 걸어오는 간수들의 발걸음을 잡아낼 수 있었고, 운이 좋으면 코로 간수들 특유의 냄새- 소총에 발라진 윤활유라든지-를 맡을 수 있었고, 촉각으로는 함정의 여부를 판단할 수 있었다.

 

 

  매 순간 그 모든 감각을 동원해 내린 결론은 같았다. 아직 안전하다. 아직 들키지 않았다. 앞에서 다가오는 간수들의 숫자는 적고, 별다른 함정이나 감시 장비도 없다. 이 일은 성공적으로 끝날 것이다.

 

 

  어둠 속의 정보를 읽어내는 데 정신이 팔려 길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꿈에서 내려다본 노역소의 전경을 가끔 되짚어 보곤 했다. 이쪽 모퉁이를 돌아가면 골목이 나오고, 저쪽 골목으로 들어가면 새로운 길이 나온다는 것 같은 것들 말이다.

 

 

  이런 것들은 오로지 시각으로만 얻을 수 있는 정보인데, 마침 아무것도 볼 수 없지는 않은 밤이라, 예상이 맞는다면 그 아틀렌이라는 자가 들어있는 독방까지 가는 길을 잘 따라가는 중이다.

 

 

  목표지점까지 점점 가까워지면서 불현듯 이 상황 자체가 함정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들키지 않기 위해 몸을 제법 날리긴 했지만, 한밤중에 수상한 사람이 담을 넘고 길을 뛰어다니는 데도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고, 경보도 울리지 않고, 감시 장비도 보이지 않는다니.

 

 

  일이 너무 어려워도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게 마련인데, 반대로 지금처럼 일이 너무 쉬우니 오히려 걱정이 드는 역설적인 상황에 빠져들었다.

 

 

  꿈이 알려준 대로라면 지금 만나러 가는 아틀렌이라는 놈은 상당한 수준의 초능력자인데, 감시가 이렇게 허술해도 된단 말인가. 혹시 저 앞으로 계속 가다 보면 나를 잡기 위해 기다리던 이들이 달려들기라도 하는 것 아닐까. 마음속에서 의심의 크기가 점점 커졌다.

 

 

  1초가 급한 와중에 그 의심은 발걸음을 한 곳에 매어두어 다시 떼기 어렵게 했다. 설마 놈들은 내 마음을 꿰뚫어보고서 모범 노역자의 충성심을 시험해보기 위해 이번 일을 계획한 건 아닐까. 그 꿈은 어떤 장치로 조작한 꿈이고, 사실은 조금 조작된 정보를 꿈을 통해 흘려보낸 뒤 내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앞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틀렌이 기다리는 독방이 아니라, 죽음뿐이다. 돌이켜보면 열쇠를 빼돌려 독방에서 빠져나온 일부터가 수상한 냄새가 도사려 있었다.

 

 

  그곳엔 정말 감시 장비가 없었을까? 당직 간수가 그 장면을 보지 못했을까? 지금쯤 내 부재를 깨닫고 수색대를 보내지는 않았을까? 왜 이제야 그걸 눈치 챘단 말인가.

 

 

  뒤를 돌아봐도 미행자가 황급히 어둠속으로 몸을 숨기는 것 같지도 않고, 위나 앞을 돌아봐도 기습하기 위해 기다리는 이가 내뿜는 살의도 느껴지지 않고, 옆의 벽이나 바닥을 만져 봐도 곧장 함정이 튀어나올 기세는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한 번 멈칫거린 발걸음은 다시 앞으로 달려 나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아무 소득 없이 되돌아갈 수도 없다. 이미 그곳에도 위험이 도사려있을 수도 있다.

 

 

  진퇴양난이다. 계속 달려가도 죽음뿐이고, 되돌아가도 죽음이요, 그렇다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고 가만히 있다 보면 아침이 밝아올 텐데, 그건 명백한 사형선고였다.

 

 

  결국, 아침 해가 밝아오기 전에 결정을 내려야만 한다. 그런데 마음속에서 크게 자라난 의심이 계속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애초에 아틀렌이라는 자가 실존 인물이었을까?

 

 

  네가 피한 당직 간수들이 정말 너의 움직임을 눈치 채지 못했을 것 같아? 아니야. 놈들은 네 움직임을 훤히 내다보고 있다. 네가 떠나온 독방에도 이미 함정을 설치해놨겠지.

 

 

  아니야. 여태까지 온 길은 꿈에 나온 그대로가 맞다. 그런데 아틀렌의 존재만 거짓일 리는 없고, 간수들이 정말 이쪽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있다면 굳이 아틀렌의 독방 앞까지 기다릴 필요 없이 바로 덮치면 되는 것 아니냐. 그 목소리와 계속해서 맞서 싸웠다.

 

 

  네가 원하는 것은 바로 앞에 있다. 바로 앞에 말이다. 일전에 토성까지 나오는 태양계 그림을 그리는 걸 본 일이 있다. 나는 네 야망을 잘 이해한다.

 

 

  부정하지 마라. 어차피 물러설 길은 없다. 네게 주어진 길은 앞으로 가는 것, 하나뿐이다. 이 세계는 네가 그린 것보다도 훨씬 크다. 세계는 토성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보다도 훨씬 넓다. 그런데 이런 좁은 노역소 안에서 네 삶을 끝낼 생각이더냐.

 

 

  순간, 구세주와도 같은 목소리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여자 목소리였는데, 정체는 불분명했다. 뭐지? 여자 목소리라니? 그게 내 목소리였을 리는 없고,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는 건가? 꿈을 통해 노역소의 전경을 보여주는 수고까지 했는데 가만히 지켜보고 있으려니, 고민하는 양이 하도 답답해서 재촉이라도 하는 걸까?

 

 

  어쨌든 그 정체불명의 여자 목소리 덕분에 갈 길은 정해졌다. 앞으로 가자. 앞으로 가서 아틀렌을 만다는 거다. 누군지는 몰라도 정말 고맙다. 오늘로써 저 멀리 펼쳐진 우주공간을 향하는 첫걸음을 떼놓는 것이다.

 

 

  다닥다닥 붙은 구조물들이 만들어내는 모퉁이 중 하나를 지나치고, 골목길을 빠져 나오니 갑자기 탁 트인 공간이 나왔다. 아직 어둠이 도사려 있었기에 전체적인 전경이 한눈에 다 들어오지는 않았지만, 좁은 골목만 계속 따라 걷다가 갑자기 길이 넓어진 것을 통해 직감할 수 있었다.

 

 

  저 앞에 아틀렌이 기다리고 있다. 아틀렌의 독방을 일부러 이런 깊숙한 곳에, 그것도 그 안에서는 잘 보이도록 해둔 건 감시를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이리라. 감시 장비로 추측되는 사각형과 원형의 물체가 여기저기에 붙어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어째 하나같이 불이 꺼져 있었다.

 

 

  감시 중이라는 사실마저 감추기 위해 불이 들어오지 않은 것처럼 위장한 것인지도 모르지만, 여기서 즉석 해서 판단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는 알 수 없었지만, 그가 이곳에 오기까지 길가에 있던 감시 장비들이 모두 조작되거나 전원이 꺼진 것은 사실이었다.)

 

 

  조금 더 앞으로 가니 문 앞에서 대기 중이어야 할 간수 몇 명이 잠이 들어 코를 골고 있었고, 열쇠를 따로 찾을 필요도 없이 문이 열려 있었다. 덕분에 열쇠를 찾는 수고는 덜었다.

 

 

  발을 들여놔도 경보 하나 울리지 않는 걸 보니 이 문틈을 넘어서부터는 마음 편히 걸어가도 되겠다. (역시 이곳의 바닥에 깔린 감지 센서도 고장 난 상태였다.)

 

 

  복도와 계단을 지나쳐 꽤 깊숙이 들어가니, 안에 과연 사람 한 명이 들어가 있을 법한 방이 보였다. 보나 마나 아틀렌이겠지. 특별 관리 대상을 한 곳에 두 명 이상 몰아놨을 일은 없으니까.

 

 

  “아틀렌...?”

 

 

  마음이 놓여 낮은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부르며 독방의 창살 문을 열었다. 그건 독방에서 빠져나온 뒤로 처음 내뱉은 말이었는데, 조금 뒤 그것이 초보적인 실수였음을 깨달았다.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가 강하게 밀치더니, 바닥에 쓰러지고 만 것이다.

 

 

  뒤에 누군가가 있다! 저항할 수는 없었다. 눈 깜짝할 새에 팔과 다리를 움직일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대기 중이던 간수인가? 놈의 얼굴이라도 보려고 고개를 돌리려니까 놈이 큰 손으로 얼굴을 부여잡고 바닥으로 돌리는 바람에 볼 수 없었다.

 

 

  놈은 이쪽을 저항할 수 없는 상태로 만들어 놓고는 창살 문 안에 패대기치듯 던져 놓았다. 조금 뒤 창살 문이 잠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 여기서 죽게 되는 걸까. 독방에서 빠져나왔는데 다시 다른 독방에 갇히게 되다니.

 

 

  “죄수 번호 13,942번... 네놈은 도대체 뭐냐? 죄수가 이런 시간에 다른 죄수를 만나러 오다니.”

 

 

  죽음만을 조용히 기다리고 있는데, 놈이 내뱉는 말이 이상하다. 그럼 간수가 아니었던 건가? 그렇다면 혹시 이 방의 원래 주인인 아틀렌...? 창살 문을 빠져나와 조용히 기다리고 있는데 이쪽이 그의 이름을 부르며 창살 문을 여니 수상해 보여서 일단 제압했다고 하면 이 상황을 설명할 수 있다.

 

 

  “아틀렌...? 아틀렌인가!”

 

 

  “남의 이름을 그렇게 함부로 부르지는 마. 이름도 없고, 죄수 번호만 달랑 붙어있는 주제에. 그래도 난 이름이라도 가지고 있다고.”

 

 

  아틀렌이 맞았다. 아틀렌은 구속복을 입은 채 여느 때처럼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구속복이 풀리고 창살 문이 스르르 열리자 바깥의 동태를 조금 살펴보고서 안전을 담보하기 위해 다시 이곳에 돌아와 누가 오나 안 오나 지켜보던 것이었다.

 

 

  이제 자유의 몸이 되었는데, 이 사실을 눈치 챈 간수가 달려온 줄 알았더니 죄수복을 입은 죄수가 자신을 찾아온 상황이 지금 상황이다. 아틀렌으로서도 조금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간수는 아니니까 마음은 놓았는데, 이 죄수의 정체를 알고 싶었다.

 

 

  “네놈, 정말 죄수냐? 변장한 간수는 아니고? 이렇게 돌아다니는 걸 보면 빠져나오는 데는 성공한 모양인데 곧장 탈옥할 생각은 하지 않고 같은 죄수를 만나러 온 꼴이라니...”

 

 

  “그야, 아틀렌 자네를 꿈속에서 봤는데 상당한 초능력자인 것 같아서 빠져나가기 전에 얼굴이라도 한 번 보려고 온 거지.”

창살 문 속에 갇힌 13,942번은 상황에 걸맞지 않게 능청을 떨었다. 저쪽도 이쪽을 죽이지는 않으리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징그럽게 시리 같은 남자끼리 꿈에서 봤다는 말은 하지 마.”

 

 

  사실 아틀렌 또한 그와 비슷한 꿈을 꾸었었다. 13,942번이라는 좌수 번호를 부착한 죄수가 자신을 만나러 오는 꿈 말이다. 그런데 조금 전에 그의 명찰을 보고서 꿈에서 본 13,942번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보니 경악을 금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 13,942번도 자신을 꿈에서 만나봤다니, 구속복이 풀린 것도 그렇고, 달려드는 간수가 없는 것도 그렇고 오늘 밤은 도대체 왜 이러지?

 

 

  “그나저나 계속 그렇게 생각에 잠긴 채로 나를 내버려 둘 생각인가?”

 

 

  “적의가 없다는 건 알았으니 풀어주도록 하지.”

 

 

  틀렌은 그를 구속하는 데 쓴 초능력을 풀고 창살 문을 열어주었다. 얼떨결에 탈옥하는 김에 동료를 하나 구한 셈인데, 이 13,942번이라는 자에게세는 초능력자 냄새가 나지는 않지만, 동료가 있다면 탈옥할 때나, 탈옥한 뒤에나 도움은 될 터였다.

 

 

  “우리 둘 다 서로를 꿈속에서 봤다니 정말 놀라워. 그렇지 않아? 13,942번... 그런데 번호가 너무 긴데. 한 번 부를 때마다 한참 발음해야 하는데, 뭐 다른 방법 없나?”

 

 

  “여기에 있는 죄수만 얼만데, 다섯 자리 죄수 번호가 나올 수밖에 없지. 그건 그렇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자고.”

 

 

  “글쎄, 오늘 처음 본 사이인데 급작스럽게 탈옥 같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나...”

 

 

  아틀렌은 머뭇거렸다. 믿을 수 있는 자인가? 함께 탈옥할 수 있을 만큼. 꼼짝없이 독방에 갇혀있느라 이 자에 대해 전해 들은 소문 같은 것도 없으니, 이 자의 얼굴과 행동만 보고서 판단해야 한다.

 

 

  “무슨 소리. 자네나 나나 같은 꿈을 꿨고, 독방에서 무사히 빠져나오기까지 했어. 이건 운명이야.”

 

 

  야 이놈아, 나도 네놈을 오늘 처음 만나보는 건 마찬가지야. 그렇게 치면 나는 네놈이 정말 초능력자인지를 의심해봐야 해.

 

 

  “그러니까, 같은 남자들끼리 운명으로 엮지는 말란 말이야.”

 

 

  지랄한다, 나도 남자는 싫다. 여자가 좋지. 이곳에서 빠져나간 뒤에 권력을 잡게 된다면 네놈이 그런 말을 꺼낼 수 없도록 미녀들을 내 곁에 놔둬 주마.

 

 

  “알았으니까 지금부터 어떻게 탈옥할지나 생각해.”

 

 

  아틀렌으로서도 이왕 이렇게 만난 김에 함께 행동할 수밖에 없다는 쪽으로 생각이 흘러갔다. 남들에게는 없지만, 자신에게는 초능력이 있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의 위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는 모르고 있던 터에 그를 만나게 된 셈이다.

 

 

  게다가 이 13,942번이라는 남자, 말하는 걸 보니 함께하지 않으면 나중에 후회할 일이라도 생길 것 같았다. 농담을 던지다가도 바로 날 선 투로 밀어붙이니 도무지 종잡을 수 없었다. (아틀렌은 자신에게 남의 생각을 읽는 능력이 있는지 몰랐다.)

 

 

  그 둘의 만남을 성사한 아리아는 그들이 볼 수 없는 곳에서 그들이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그들이 곧장 탈옥을 시도한다면 그것을 도와줄 것이고, 여기에 남아 상황을 좀 더 살펴보겠다면 결정을 내리기 전까지 지켜줄 것이었다.

 

 

====

 

 

  병부 대신 쿼크가 고서의 일을 들어 황제께 칭제건원을 주장한 일이 있은 뒤, 고서를 읽는 데 분발하겠노라는 빌뇌브의 결심은 보현원에서의 유흥으로 이어졌다.

 

 

  쿼크가 고서에서 황제에 관한 기록을 보고서 제정을 건의해 황제의 환심을 샀다면, 빌뇌브는 시문을 익혀 잃어버릴 뻔했던 황제의 총애를 다시 자신에게 돌리는 데 성공한 것이었다.

 

 

  쿼크는 수염이 불타버린 뒤로 통 출두를 하지 않고, 이일이 두 뺨을 맞고 군바리 소리를 들은 뒤로 대장군들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니, 빌뇌브 입장에서는 드디어 꼴 보기 싫은 것들이 모두 사라진 뒤 황제의 곁에 남아 그의 환심을 사는 데 집중할 수 있게 된 셈이다.

 

 

  진수성찬이 벌어진 수라상을 앞에 두고 황제가 중앙에 앉은 가운데, 빌뇌브가 황제의 술잔에 술을 따르고 그가 시문을 읊으면 황제가 칭찬하고 답가를 불러주는 광경이 계속되었다. 곁의 미녀들의 얼굴과 수라상에 놓인 음식들은 가끔 바뀌긴 했지만, 눈여겨보지 않으면 이 사실을 알 길이 없었다.

 

 

  처음에는 술을 최대한 자제하며 고서에서 베낀 시문을 잘 읊던 빌뇌브도 술이 좀 들어가니 그만 취해서 점점 시도 뭣도 아닌 무엇인가를 지껄이게 되었다. 원래는 태양에 관한 시문을 읊으려다가 내용을 잊어먹어서 말을 더듬은 결과는 이랬다.

 

 

  “...저 바다를 넘어, 저 산맥을 넘어, 저 하늘을 넘어 거대한 태양이 힘차게 욱일승천하리니...”

 

 

  그때쯤엔 황제도 거나하게 취하여 알아듣지 못할 정도가 되었기에 그의 실수를 눈치 채지 못했다. 혀가 꼬이는 엉터리 시문에도 칭찬을 아끼지 않으며- 취한 정신에는 그것마저 명문으로 들렸다- 답가를 불러주는 것이었다.

 

 

  그 꼴이 아주 못 볼 꼴이었다. 술을 좀 적당히 마셔야 하는데 하며 머리로는 생각하는데, 몽롱한 정신은 갈수록 술에 무뎌져 술과 음식을 계속 목구멍으로 밀어 넣고 있었다. 한 나라의 대신과 황제가 하는 일이라서 그런지 뜯어말리는 사람도 없었다.

 

 

  쿼크의 수염을 불태우고, 이일의 두 뺨을 때려 모욕을 준 장본인인, 빌뇌브의 손자는 완전히 취한 상태로 두 사람의 앞에서 막춤을 추었다. 문벌귀족으로서의 체면이고 나발이고 없었다. 두 사람은 막춤에도 좋다고 껄껄 웃어댔다.

 

 

  꺼억... 그, 뭐였나. 귀족 놈들 모이는 회의에 나가봐야 하는데... 귀족... 뭐? 귀족이 뭐하는 거였더라? 술잔에 새 술을 부어 마신 빌뇌브는 순간 이성의 끈이 끊겼음을 감지했으나, 그 뒤로는 제대로 생각할 수 없게 됐다.

 

 

  분명 저 멀리 원정 나간 이연이 거두는 성과에 관한 회의가 진행 중이었던 것 같긴 한데... 알게 뭔가. 누가 감히 대신의 뜻을 거역한단 말이더냐?

 

 

  귀족 좋다! 병부 대신의 수염을 불태우고, 총사령관의 두 뺨을 때리고 면전에서 군바리라고 불러도 아무 탈이 없다! 귀족... 뭐? 그런 회의가 열렸었던가?

 

 

  그때쯤 무신들 몰래 회의를 연 문신들은 의장인 빌뇌브의 부재를 알면서도 밉보일까 두려워 감히 그를 부르러 오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의 예감은 정확히 적중해서, 빌뇌브는 이제는 본인이 누군지 조차 긴가민가하고 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면서도 그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분간하지 못했다.

 

 

  “이런 요망한 것! 내가 누구인줄 알고 여기서 꼬리를 치느냐!”

 

 

  원래 이런 연회의 자리에서 빠질 수 없는 여인은 연회에 참석한 주역들의 손에 자신의 몸이 샅샅이 만져지는 것을 참고 있어야 하기 마련이었다. 빌뇌브 역시 곁의 여인의 얼굴이 지겨워지면 내치고 새로운 여인을 불러오길 반복하다, 마침내 이성을 잃고서 곁의 여인에게 삿대질하며 역정을 내기에 이르렀다.

 

 

  “속살이 다 드러나는 살을 입고서 내 곁에 붙어있다니... 이런 음탕한 년! 내 너에게 벌을 내리겠다!”

 

 

  황제가 지켜보는 와중에 빌뇌브는 본인의 취향에 맞춰 입혀놓은 여인의 옷을 거칠게 벗겨버리기 시작했다. 사실 황제도 궁녀들에 정신이 다 팔려 그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던 참이었다. 여인들은 거절할 힘이 없으니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는 것뿐이다.

 

 

  “대감께서는... 좀 어떻습니까?”

 

 

  “어떤 소식을 들고 왔는지는 몰라도 그만 포기하고 돌아가 보는 게 좋을 거요. 조금 전까지는 정신을 유지하고 계신 것 같았는데, 이제는 완전히 취하셨어.”

 

 

  어떤 소식을 들고서 빌뇌브가 보현원에서 나오기를 기다리던 남자는 몇 시간째 서서 기다리다가 그냥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빌뇌브가 술에 취하기 한참 전에, 원정군으로 나아간 이연이 성과를 거두기 시작했다는 보고가 올라온 일이 있었다.

 

 

  그 보고는 빌뇌브도 들었었고, 그 뒤에 바로 열린 대책 회의에는 빌뇌브도 참석했었다.

 

 

  이제는 한 번 연회장에 들어갔으니 한나절을 기다려도 안 나올 줄 알면서도 기다려봤는데, 결국 허사로 돌아가고 말았다. 또 술 마시고 시조 읊고... 틀어박혀 있겠군.

 

 

  그가 들고 온 소식의 주인공, 이연은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수 만 광년 떨어진 곳까지 끌려갔다가 정신을 차리고 깨어난 뒤에 자신의 아버지가 빌뇌브의 손자에게 두 뺨을 맞았다는 소식을 듣고서 느낀 분노를 잊어버리고 깨어나 원정군 사령관으로서의 역할 수행에 나선 바 있었다. 그의 분노를 없앤 것은 대전쟁을 바라는 ‘아리아’의 음모였다.

 

 

  이연과는 다르게 아직 분노를 삭이지 못한 이일은 쿠데타를 일으킬 계략을 꾸미고 있었고, 황태자와 함께하는 애덤스 쿼크는 자신의 아버지이자, 병부 대신인 아틀라스 쿼크의 신병을 구속하고 거사를 일으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병부 대신이라는 중책에도 불구하고 황제가 워낙 신경 쓰지 않아서 인지 병부 대신을 따로 찾지도 않고, 그의 공석을 문제 삼는 이도 없어서 아버지를 설득하는 일을 실패하여 신병을 구속해야만 했던 것만 빼면, 모든 일이 순조롭게 돌아가고 있었다.

 

 

  이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보고를 올리러 여기까지 왔는데, 이런 중요한 보고를 제 발로 차버리다니, 재무대신 자리는 어떻게 올라갔는지 모를 일이다. 어쨌거나 나는 분명 보고하러 왔었으니 책임 없다.

 

 

  그는 보고를 올리러 보현원 안으로 뛰어들어도 빌뇌브가 자신에게 벌을 줄 것 같고, 이 소식을 못 전해줬다가 나중에 일이 터져도 책임을 물을 것 같아서 그 길로 도망에 나섰다. 지금이라면 술에 취해있으니 도망쳐도 모르겠지.

 

 

  술에 취해있으나 중요한 보고를 놓쳐버린 빌뇌브는 자신이 과일 껍질 벗기듯 벗겨버린 여인의 가슴을 움켜쥐고 있었다. 그 촉감이 아주 부드러웠다.

 

 

  다른 대감들은 큰 가슴을 지닌 미인이 둔해 보인다고 배척하고, 속살이 다 드러나는 옷은 전통 윤리에 어긋난다 하여 더럽다고 하던데, 그들의 식견 좁음에 한숨이 다 쉬어졌다. 저택의 크기나 여인의 가슴이나 모두 크면 클수록 좋은 법이고, 옷은 보기에 좋으면 되는 법이거늘...

 

 

  빌뇌브는 원래도 낮에는 귀족의 체면 운운하다가도 밤이나 술에 취했을 때는 이렇게 돌변하는 사람이었다. 빌뇌브가 그러는 동안 막춤을 추던 그의 손자는 지쳤는지, 술기운이 머리끝까지 올라갔는지, 그만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놈이 술에 취해 있다니! 이건 놓칠 수 없는 기회입니다!”

 

 

  “음... 기회만 보고 있던 참인데, 이번에는 평소보다도 더 오랫동안 나오지 않고 있다고 하니... 정말로 이번 기회가 큰 기회일지도 모르겠군요.”

 

 

  황태자는 거사를 일으키기 위해 은밀히 불러 모은 사람 중 몇몇을 골라 빌뇌브를 죽일 목적으로 보냈다. 황제는 생채기 하나 내지 말고 생포해야 한다는 단서를 붙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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