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현실은 레알 폭망겜이야.
“.......”
시원은 한손으로 벽을 짚으며 진저리를 쳤다.
하마터면 종업식날처럼 부웅- 날아서 쳐박힐뻔 했다.
길이 너무 미끄러웠다.
이게 만약 리얼타임 3D 미연시라면 남주, 아니 지나가던 친구 A 라 할지라도 여기서 휘청거리진 않을 거 아냐!
쪽팔려 죽겠네.
뭐냐고 이 상황.
“아니. 정말 괜찮아. 아까 했던 말 신경쓰지마. 농담이니까.”
이렇게 존시나게 잘난 척, 작별 대사를 쳤는데.
그래놓고 생각해보니 예원이라는 애도 따라 올 게 뻔했다.
사촌에게 맡겨놓은 폰 찾으러 전시장으로 갈테니까.
이사가는 친구랑 감동의 이별장면을 연출하고 집에 가는데 계속 이삿짐 센터 차가 따라와 보라고.
친구가 계속 차창 너머로 힐끔힐끔 쳐다보잖아?
뻘쭘하잖아?
좋아 거기까진 이해한다 쳐.
그 와중에 앞에서 자빠져봐.
미친.
으아아아아.
누구냐?
누가 여기 마찰 계수 이따구로 설정해놨어?
미끄럽잖아!
미연시라도 이런 건 제대로 해야할 거 아냐!
앞에 가던 NPC가 휙 자빠지더니 하늘로 날아가보라고.
백발백중 유튜브에 나온다.
스팀 폭망 인디 게임들 놀려대는 동영상들처럼 말야.
(스팀, Steam : 전세계적인 PC 패키지 게임 유통망. 최근엔 네트워크 게임들도 대부분 유통한다)
분명히 풉, 하고 입을 가리고 웃고 있겠지.
아니, 일부러 돌아보는 타이밍에는 싸늘한 눈빛으로 바꿀지도.
머리를 쥐어뜯던 시원은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시원이 예상했던 일은 없었다.
한예원은 비웃지도, 경멸의 눈빛을 보내지도 않았다.
지금 시원이 그러고 있는 것처럼 맨 손을 벽에 대고 발 밑을 살피며 한걸음씩 발을 옮기고 있었다.
“.......”
렌즈 잃어버렸다고 했었지.
이야기하던 내내 눈썹 사이에 주름이 졌었다.
가늘게 뜬 그 눈.
가뜩이나 화난 표정들만 연달아 지었던 여자애의 얼굴.
“.......”
그 눈 아래에 발갛게 달아올라 있던 뺨.
눈송이가 닿을 때 마다 움찔, 움찔 거렸었지.
부츠도 엄청 불편해 보였고.
“.......아 놔.”
시원은 젠장, 하며 돌아섰다.
이곳 게임쇼 회장에는 정말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의 스토리를 즐기고 있겠지.
누군가는 좋아하는 개발자의 강연을 들으며 개발자의 꿈을 부풀리고 있을테고, 누군가는 기대하던 신작 게임을 해보면서 눈을 빛내고 있을테고, 누군가는 직접 만든 코스츔을 걸치고 사람들 앞에서 자랑스레 포즈를 잡고 있겠지.
꿈과 희망이 넘치는 게임쇼.
그 곳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두 사람이 여기에 있다.
한 명은 오기 싫었지만 억지로 등 떠밀려 오게 된 어떤 반푼어치 프로그래머.
한 명은 행사 당일날 탈락 통보를 받고 아버지에게 얻어맞아 뺨이 부어오른 채 어렵게 어렵게 눈 길을 오르는 어떤 기획자.
만약 드라마에서 그런 둘을 내가 봤다면.
그 둘에게 조금이라도 기쁜 일이 생기면 좋겠다고 바랬을 거다.
두 번 다시 만나는 일 없을 그런 사이라 해도.
한 쪽은 드라마 주인공이고 한 쪽은 그냥 지나가던 행인 A 였다 해도.
둘 모두에게 기쁜 일이 생기면 좋겠다.
거창하지 않아도 좋다.
보잘 것 없어도 좋다.
별 것 아닌, 아주 사소한.
그런 기쁜 일.
“괜찮아?”
한예원 앞까지 다시 돌아온 시원이 말했다.
한예원은 눈살을 찌푸리면서 앞을 쳐다본 다음 깜짝 놀란 듯이 목을 움츠렸다.
“넘어졌을 때 어디 다쳤어?”
시원은 금새라도 미끌어질 것처럼 비틀거리는 한예원을 살폈다.
이 쪽은 무릎을 다쳤다.
이 쪽은 무릎을 다쳤다.
상대방도 그렇지 않을 거란 보장은 없다.
“아니. 그냥....... 렌즈 잃어버려서 그래. 아픈 데는 없으니까, 신경 쓰지마.”
시원은 깜짝 놀랐다.
한예원은 웃고 있었다.
상상력만 굉장한 게 아니라 멘탈도 굉장하잖아!?
한 쪽 입가가 부어오른 쪽에 비해 조금 더 올라가서 이상했지만 웃기지는 않았다.
이 미소는 좋은 미소다.
모택동이라도 그렇게 말했을게 분명하다.
시원의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역시 여자는 웃는 편이 예뻐.
씰룩, 하고 긴장이 풀릴 뻔한 얼굴 근육을 진정시키면서 시원은 손을 내밀었다.
“자.”
뭐라고 말해야할지 몰라 그저 그렇게 말했다.
이렇게 하자고 결심했던 일이고 그래서 그대로 했다.
그런데 막상 하고 나니 미친 듯이 부끄러웠다.
손발이 오그라든다.
아니 내민 손은 오그라들면 안 되는데.
으아아아아아.
삐빅- 이불킥 확정.
그 순간 시원의 머릿 속에 논리 회로가 생성되었다.
트레이스 온!
크큭.
시냅스를 따라 타오르는 광섬이 일순간에 시상하부에 도달한다.
그 속도는 빛의 속도를 아득히 뛰어넘어 타키온조차 따라잡을 수 없다.
논리 회로의 가장 상위에 조건문이 입력된다.
[한예원이 손을 잡는다] yes? or no?
그 절대적인 명제, 그리고 아래로 뻗친 두 갈래 선택지는 천상의 삼각형.
생명의 나무 가장 위에 그려진 세피라!
물리법칙을 초월한 논리 회로가 아래를 향해 무한 증식한다.
손을 잡으면 이렇게 말하자.
손을 잡지 않으면 이렇게 수습하자.
뇌가 타오른다.
저 멀리 시공관리국의 관리 영역을 벗어난 아득한 곳에서 백색왜성처럼 수축하는 나의 쫀심이 사상의 지평선을 만들어낸다.
씨어리 오브 렐러티버티(Theory of relativity).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
이 얼마나 로맨틱한 울림인가.
상대성 이론은 옳다.
지금 이 시각, 이 장소에 흐르고 있는 시간은 관측자인 내게 있어 너무나도 느리다.
너와 키스할 때도 이렇게 시간은 느리게 가겠지.
는 개뿔.
그냥 죽고 싶었다.
쪽팔려서 뒤지겠다고.
한예원이 자신의 손을 힐끗 쳐다본 다음, 물끄러미 얼굴을 바라보고 있다는 걸 시원은 느꼈다.
대체 언제 끝날지 모를 고통의 순간이었다.
가라! 사나이라면 가즈아아아아!!!
“손 잡아줘. 폰 주워준 사례로.”
시원은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가다듬었다.
“뭐?”
아차. 내가 생각해도 너무 병신력이 강한 대사잖아!
시원은 이성을 포기해버렸다.
생글생글 웃고 있는 예원의 표정이 오히려 절망적이었다.
“여친이라곤 사귀어 본 적도 없는 동정이라 밥 보단 그게 훨씬 좋을 거 같으니까. 뭣 하면 벽 대신이라고 생각하든지.”
내민 손이 부끄러움에 불타올랐다.
팔 깊숙한 곳에 잠들어있던 흑염룡이 아우성을 친다.
“지금 나 꼬시는 거야?”
아뇨. 그건 아닙니다만.
너 너무 자의식 과잉이잖아!
너 지금 얼굴 이상하다고!
다리는 예뻤지만.
“아빠한테 맞고 얼굴 퉁퉁부은 사람 꼬시는 놈이 어딨어.”
그냥 선의에서 우러나온 행위입니다만.
하여간, 이렇게 받아들일까봐 하기 싫었는데.
이젠 거진 포기상태이긴 해도 나,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고!?
얕보지마라!
한예원은 풋, 하고 소리내 웃었다.
그 덕에 사상의 지평선을 만들어내던 시원의 쫀심이 완전히 소멸해버렸다. 다른 차원으로 날아갔다.
그냥 죽자.
내밀었던 손을 거두려는데 작은 손이 손바닥에 겹쳐졌다.
예원의 손이었다.
차가웠다.
어라?
어라라?
어라라라?
요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
시원은 그 손을 마주 잡은 다음 무심코 코트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동생에게 자주 그러던 버릇이었다.
예원은 살짝 놀라는 기색이었지만 별달리 반응하지 않았다.
“동정은 동정이네. 손 잡아주는 게 사례라니.”
“시끄러.”
“밥도 같이 먹자.”
“싫거든? 전시동까지만 같이 가줄 테니까.”
잡고 있던 손을 꼼지락거려 주머니 속에서 빼낸 예원은 시원의 팔에 매달렸다.
“너무하네~.” 하며 깔깔대는 예원의 웃음소리와 팔에 느껴지는 무게.
드라마의 두 사람은 조금은 마음의 짐을 덜었을까?
자그마한, 아주 자그마한 기쁨이 둘에게 깃들길 바라며 시원은 미소지었다.
- 예원은 스승이라고 할 수 있는 같은 팀 기획자 이진과 만나게 되고, 시원은 행동에 나선다.
다음화도 서비스 서비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