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원은 일단 문 밖에서 몰래 엿듣고 있던 동생 상큼이를 헤드락으로 응징했다.
상큼이가 지병으로 약한 심장을 빌미삼아 행한 탈출 시도에도 넘어가지 않았다.
“놔, 놔! 아파!”
“예의바른 아이는 얌전히 게임이나 할 것이지. 감히 하늘같은 오라버니 방을 엿들어?”
“하늘 같은 오라버니 좋아하네. 쫄보도 이런 쫄보가 없으면서. 안시원. 멍석 깔아줘도 못 먹냐!?”
“......너 어디서 그런 말 배웠어?”
꾸우우욱 머리를 감싼 팔에 힘을 주자 상큼이가 버둥대더니 추우욱 늘어졌다.
일부러 그러는 게 너무 티가 나 어이가 없었다.
어렸을 때부터 심장이 좋지 않아 쭈욱 고생한 상큼이었지만 이제는 거진 완치 단계다.
내년에 마지막 수술만 남겨두고 있는 상황.
애당초 정말로 아프면 이런 식으로 수작을 부리지도 않을뿐더러 바로 정신을 잃으니까.
“오, 오빠. 나 가슴이... 가슴이...”
“가슴이 부푸냐?”
“지랄 옘병! 놓으라고! 키만 멀대 같이 커갖고선.”
다시 버둥버둥.
“한 번만 더 내 방 밖에서 엿듣기만 해봐.”
“어쩔건데!?”
“......애플 소다 사와서 나 혼자 마셔버릴테다.”
헤드락을 풀면서 의기양양하게 선언하는 시원.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할 생각도 못하고 털썩 주저앉아 절망에 빠진 표정으로 시원을 바라보는 상큼.
“그, 그러지마......”
“못 할 거 같아? 쫄보인지 아닌지 확인해볼까?”
애플 소다.
상큼이가 사족을 못 쓰는 음료.
심장 때문에 섭취 금지 목록에 버젓이 탄산 음료가 들어있긴 하지만 – 의사는 인산이나 칼슘에 대해 언급하며 탄산은 가급적 먹지 않아야한다고 주의를 주었었다 – 아주 가끔, 상큼이가 먹고 싶다고 그럴 때가 있다.
한 달에 한 번이 채 될까 말까한 빈도.
그것도 몇 모금 마시지도 못한다.
웬만하면 떼를 쓰는 일이 없는 상큼이가 드물게 부탁하는 일이기도 하다.
사정을 들은 의사도 그 정도는 크게 위험하지는 않다고 했었다.
중2를 상대로 중2병스러운 포즈로 중2병보다 못한 협박을 하고 있는 중3의 모습이 거기에 있었다.
“안 가?”
그리고 어느 틈엔가 문지방을 넘어와 시원을 싸늘하게 바라보고 있는 세연.
“어, 갈려고.”
시원은 여느 때의 구부정한 등으로 돌아와 뻘쭘하게 대답했다.
“언니! 시원이가 나 괴롭혀.”
저게 진짜. 하다못해 오빠라고 해라. 오빠!
“안시원.”
“넵!”
매달리는 상큼이를 토닥토닥 두드려 달랜 세연이가 [번쩍] 하는 의성어를 등 뒤에 띄우면서 노려보았다.
상큼이가 얼굴을 부벼대는 세연의 가슴을 멀뚱히 쳐다보던 시원은 반사적으로 차렷자세를 취했다.
“너 가기 싫지?”
“아니...... 그런 건 아니고.”
“그럼 뭐해?”
움찔.
오후에나 어물쩡 나가서 후다닥 열쇠고리만 사서 돌아올 생각이었는데.
시원은 눈을 피했다.
지금 나간다고 하진 않았다고!
게다가 말야.
난생 처음 여자 가슴 만져봤다고.
그것도 세연이 가슴!
아이덴티티 크라이시스라고!
게슈탈트 붕괴라고!
슈뢰딩거의 고양이라고?
일단 손을 언제까지 씻지 않을지 정하고 싶다.
아니면 적어도 손바닥을 핥아볼 시간 정도는 필요해.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단 말이지.
왜 그걸 모르실까.
똑똑하신 분이.
“그, 뭐냐. 좀 있다 나갈.......”
“지금 당장 가.”
“그래. 빨리 가버려. 세연 언니는 나랑 놀 거니까.”
옆에서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고 했다.
저걸 그냥.
저런 꼴을 보니 더 오기가 뻗친다.
가지 않기로 했던 곳인데.
나 황소고집이라고?
부탁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가는 거잖아.
언제 가든 내 맘이지.
힐끔, 세연의 가슴을 쳐다보다 눈이 마주쳐 시원은 다시 시선을 돌렸다.
“하아아아아아아.........”
길게 한 숨을 내쉰 세연은
“다른 한 쪽도 만지게 해줄테니까.”
그렇게 말했다.
헐?
“에에에에엑?”
시원이 반응하기 전에 상큼이가 먼저 반응했다.
“무무무무무무무무무무무슨 소리야! 너 언니 가슴 만졌어!?”
으아.
그렇게 스트레이트로 말 하지마.
부끄럽잖아.
“이럴수가. 언니 가슴은 내 껀데. 내 허락도 없이.”
......너한텐 그게 중요한가 보구나.
상큼아.
넌 좀 닥치고 있어봐라.
시원의 눈에 핏발이 섰다.
“어, 세연아?”
“왜?”
“그, 그러니까....... 지금 당장 CGS 갔다오면 그......”
상큼이 얼굴 옆에 살짝 부풀어 오른 지방덩어리가 너무너무너무 신경쓰인다.
“만지게 해준다는 거지?”
“파지티브.”
“그... 직접?”
시원은 뭐라고 표현해야할지 몰라 그렇게 물었다.
좀 전엔 옷 위에서 만졌었다.
부족해.
피가 부족해.
크크크크큭.
“미쳤어. 변태. 죽어.”
상큼이가 냉장고 냉장실에서 반년은 묵은, 썩어문드러진 무언가를 보는 듯한 눈길을 보내며 작게 중얼거렸다.
“너 아깐 파이팅이라며?”
“키스까진 괜찮아.”
그건 무슨 기준이냐.
“가슴은 내거라고!”
“아, 네.”
그럼 입술은 내가 가져도 된다는 이야긴가.
잠깐만.
입술로 선회해도 상관없지 않나?
하고 시원이 머리를 굴리는데 세연이가 선언했다.
“그래. 대신 애플 소다도 사와.”
“어?”x2
남매가 동시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상큼이는 명백하게 고민하는 눈치였다.
어이. 세연이 가슴이 애플 소다랑 저울질할 그런 거였어?
야야야야.
안시원.
그딴 거나 생각하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
“그러니까 당장 꺼져.”
“넵.”
시원은 대충 걸쳐 입고 부리나케 밖으로 튀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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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더 빨리 갈 수 없어요?”
“응. 나도 내비보고 가는 거라서....... 미안해.”
비서관 언니를 탓할 수는 없었다. 아빠의 정책-수석 비서관인 진수 아저씨의 딸로 몇 달 전에 인턴으로 들어온 언니는 그 전에는 서울에 있었다.
아직 청산시 지리에는 밝지 못하다.
예원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초조함이 목구멍을 넘어 튀어나올 것만 같아 결국 참지 못하고 물어보았다.
일반 공개에 쓰일 최종 버전 앱은 일주일 전에 넘겼다.
문제가 있었다면 이미 연락이 왔을 것이다.
공개 당일날 이런 식으로, 그것도 아빠에게서 탈락 소식을 전해들을 일이 아니다.
스마트폰을 확인한다.
팀원들끼리 사용하는 협업 앱, 네이-밴드에는 아무런 소식도 없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팀원들도 모른다?
오후부터 있을 시연 공개 준비 때문에 일찍 나간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도 아무런 소식이 없다.
설마.
아빠가?
그 외에 누가 이 짧은 기간 동안 이런 일을 해낼 수 있지?
떨어질 거라 생각했던 딸의 게임이 결국엔 본선에 올라왔다.
무슨 트집을 잡던 떨구고 싶다.
딸이 얌전히 공부만 하기를 바랬다면?
아침에 집에서 나갈 때 봤던 아빠는 어땠지?
한 번 의심을 하기 시작하니 모든 일이 다 믿을 수 없게 되어버린다.
결국 그런 거였어.
아빤 내가 엄마처럼 되길 바라는 거야.
난 엄마 대신이 아니라고.
스마트폰을 들고 있는 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예원은 한 손으로 손목을 감싸 쥐고 입을 열었다.
“언니.”
“왜?”
“언니는 왜 비서관이 되려는 거죠?”
“음......”
“진수 아저씨가 시켜서 그러는 거에요?”
“아빠 탓이 없다고는 못 해도... 나도 하고 싶었는 걸.”
비서관은 예원의 심상치않은 분위기를 감지하고선 조심스레 대답했다.
“만약에요. 언니가 비서관 말고 다른 걸 하고 싶어서 하던 공부, 진수 아저씨가 비서관 하게 하려고 방해했다면 어쩌실 거에요?”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세련된 수사를 쓰기도 힘들었다.
나 지금 뭐라는 거야? 라면서도 멈출 수 없었다.
“글세...... 일단은 화가 날 거 같아.”
“그리구요?”
“아버지랑 이야기를 해보겠지.”
“.......”
고개를 돌려 차창 밖을 바라보고 있자니 친구와의 약속이 떠올랐다.
탈락된 이상 돌이킬 수 없다.
아빠 짓이라면 더더욱 그렇겠지.
“예원아. 무슨 생각을 하는진 모르겠는데. 일단 진정하는 게 어떠니? 너 설마 탈락한 게 의원님이 시킨 일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예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럴 리가 없어. 의원님이 얼마나 좋아하셨는데.”
“그건 모르죠. 그게 아니라면, 그럼 왜 오늘 갑자기 탈락했을까요?”
“그러니까 진정하고 의원님이랑 차근차근 이야기를 해보란 거야.”
“.......”
예원은 다시 밴드를 확인했다.
마찬가지였다.
CGS(청산게임쇼) 개최장에 도착하기까지 걸린 20분이 영겁처럼 느껴졌다.
“주차하고 올테니까. 안에 들어가서 기다려줄래?”
“네.”
차에서 내려 문을 닫은 후 CGS 건물을 바라보고 있자니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일반 입장객들이 행사를 기다리며 늘어선 줄도, 대형 모니터도 원래라면 가슴 벅찬 맘으로 바라보고 있었겠지.
예원은 눈을 몇 번 깜빡이고 나서 사방을 살폈다.
기다리라던 언니의 말은 어느새 머릿속에서 사라져버렸다.
아빠. 아빠는 어디에 있지?
그래. 강연장.
사람들이 나오는 곳이 보였다.
예원은 정신없이 달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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