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래서 내가 언제까지 그런 곳에 썩어 있어야 되는 거지?”
여자는 짜증난 목소리를 숨기려고 하지 않은 채 그대로 얘기했다.
“목소리를 낮춰라.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남자도 계속 대기만 하고 있던 찰나에 여자의 짜증이 달갑지 않았다.
“그딴 거나 신경 써야 되냐고!”
쾅!
쓰레기통이 조금 찌그러지면서 넘어지자 풍겨오던 역한 냄새가 심해졌다.
“안 그래도 부를 참이었습니다.”
또각또각 하는 구두 소리가 들린다.
어둠 속에 나타난 여자는 다른 남자와 여자를 한 번씩 돌아보고 얘기를 계속 했다.
“당신이 있던 곳에서 그와 접촉했었지요?”
“뭐 그렇지. 바보 같은 시식 권유나 하면서 말이지. AIND 하나랑 장 보러 왔었어.”
“이제 그곳에선 일할 수 없겠군요.”
“뭐?”
의아해서 묻긴 했지만 이제 그곳에서 벗어날 수 있겠다고 생각하니 번지는 미소를 숨길 수 없었다.
“왜 그러지?”
“들켰을 겁니다. 당신이 단순 모습만 비슷한 안드로이드가 아닌 AIND 라는 걸요.”
“하지만. 그럴 리가.”
“너무 그분을 과소평가하지 마십시오. 자칫하면 그걸로 끝이니까요.”
“그렇게 대단한 거야? 그 녀석의 힘.”
“겪어보지 않았고 당시의 안드로이드를 찾을 수도 없어서 뭐라 단정 지을 수 는 없습니다. 그렇기에 대비하는 건 나쁘지 않 죠.”
“오오. 그럼 금방 실행하는 건가?”
“내일부터 시작하죠. 기다리기 지치셨잖아요? 연락드리겠습니다.”
평온하게, 무표정으로 말하는 그녀는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졌고 들려오던 구두 소리도 사라졌다.
“하! 이제 쓸데없는 소문을 낼 필요도 없다는 거겠지. 조작하고 명령하는 것도 꽤 복잡했다고.”
“그딴 인간 하나에 벌벌 떨다니. 다들 어딘가 고장 난 거라고 당당하게 말해주지.”
그들의 웃음소리가 골목에 부딪쳐 밤공기에 퍼졌고 이윽고 빛을 피해 모습을 감추었다.
*
보고 싶었던 영화가 드디어 TV에서 해주고 있어서 재미있게 보고 있었는데 애쉬는 전혀 집중하고 있지 않다.
“애쉬.”
“응. 왜?”
“늘 말하지만 그렇게 쳐다보지 마.”
“어머. 왜?”
“부담스럽다.”
“저녁 먹기 전에는 그렇게 적극적이더니 몇 시간 지나니 왜 또 소극적으로 돌아섰어?”
키득키득 거리는 그녀의 웃음은 짓궂다.
그냥 신경 쓰고 영화나 집중하자 하는데 등 뒤에서 갑자기 끌어안고는 턱으로 꾹꾹 눌러대기 시작한다.
“뭐하냐.”
“심심해서.”
“그럼 디어처럼 쉬어라.”
“졸린 게 아니라고.”
그도 알고 있지만 전문가들이 본다면 애쉬는 엄청난 AIND 다.
에너지 효율도 뛰어나다는 건 같이 있는 디어만 봐도 알 수 있다. 디어도 물론 최신 기기이긴 하지만 애쉬에는 못 미친다.
충전하는 건 정말 가끔이라고 생각한다.
기계에 대해 자세하게 알 수 있는 요상한 지금 상태라면 해제하지 않아도 구조를 알 수 있다.
그렇게 빤히 몸을 쳐다보면 애쉬는 음흉하게 실실 웃고 있고 디어는 왠지 몸을 가렸다.
변태.
아직도 왜 그런 말을 들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애쉬가 예시를 들어줘도 마찬가지.
“아퍼.”
안마를 해주듯 지긋이 눌러주던 턱의 강도가 조금 올라가자 그가 애쉬를 떨어뜨려 놓으려고 어깨를 잡은 손을 풀려고 하지만 기계의 손을 사람인 그가 어떻게 해 볼 방법은 없다.
“심심해~ 놀아줘~”
“자라.”
그가 하품을 하면서 말했다.
결국 영화는 끝이 나고 조금 아쉬움을 느끼며 그가 잘 준비를 하려 일어나려는데
애쉬가 아직까지 거머리마냥 들러붙어 있어서 불편했다.
“잔다.”
“같이 잘래?”
“굳이 그래야 되냐.”
“어머. 아침에는 ‘괜찮아. 충분해. 너희들만 있으면 돼’ 라면서 그렇게 애정 표현을 하더니. 너무 서운하다~”
뒷말은 하지도 않았고 애정 표현도 한 적이 없는데, 장난이다.
“뭐 어때~ 사람끼리 사고치는 것도 아닌데 응~?”
얼굴을 가까이 하지만 그는 당연히 장난이라고 생각하고 눈을 가늘게 뜨고 있는데
휴대폰 벨소리가 울린다.
시선이 자연스레 그쪽을 향하는데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쯧.”
혀를 차는 소리가 들리고 애쉬의 부드러웠던 눈이 바뀌어 있다.
“야…!”
손은 이미 검으로 바뀌었고 그녀의 눈이 향하는 곳은 그의 휴대폰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조금만 손을 뻗는 게 늦었으면 휴대폰이 박살날 뻔 했다.
“이런 새벽에 전화질이라니 예의가 없는 사람이네~”
“그렇다고 내 전화기를 부술 필요는 없지 않냐.”
“잘못했으면 네 손까지 잘라버릴 뻔 했으니까 다음부터는 그냥 보고만 있어.”
“하지 말라고 하는 거다.”
발신인을 확인하는데
“응?”
“누군데?”
“모르는 번호.”
“끊어 그럼.”
“새벽에 모르는 번호라.”
애초에 휴대폰으로 전화 받는 일이 드물었기에 일단 받아본다.
“누구시죠?”
“…으헤~ 끅!”
뚝.
“뭔데?”
“주정뱅이 같아서 바로 끊었다. 잘 준비나-”
또 다시 울리는 휴대폰.
“……”
조용히 다시 손을 들어올려서 휴대폰을 박살내려고 하는 애쉬를 말리고 그녀와 조금 떨어져서 다시 전화를 받는다.
“너 임마… 번호는 어떻게 알고 나한테 전화질이냐.”
“네에~? 왜요~ 그러면 안 되나요~?”
이 새벽에 이런 이상한 늘어지는 말.
“취했냐.”
“안 취했어! 요오~”
그리고는 곧바로 직원인 다른 여자가 설명을 듣고서 전화를 끊었다.
한 숨이 절로 나온다.
요약.
주점에서 술 취해서 뻗고서 마무리 후 문 닫으려는데 주정 부림, 총 가지고 있어서 곤란. 누구 데려올 사람 없냐는 말에 틸리드가 뻔뻔하게 그에게 전
화했다는 거다.
무슨 감시 대상에게 이런 식으로 친근하게 구는 거냐.
“민폐덩어리 같은 녀석.”
“그냥 내가 죽여도 될 거 같은데 괜찮지 응?”
웃고는 있는데 계속 휴대폰을 노려보고 있는 그녀의 표정은 귀신이 따로 없었다.
“잠깐 갔다 올게.”
“뭐?”
일어나서 옷을 주섬주섬 대충 입으려는 그를 막아선다.
“왜 그래야 하는데?”
“그 녀석한테 빚을 지는 것도 나쁘진 않지.”
“굳이? 다른 마음이 있는 건 아니고?”
애쉬는 지그 말을 못 믿겠다면서 붙잡은 손에 조금 더 힘이 들어갔다.
“왜 그렇게까지 해주는데?”
애쉬는 검을 손으로 돌려놓고 묻는다.
혹시나 설마- 하는 마음에 물어보지만 그는 잠시 생각하듯이 위를 쳐다봤다가 질색하는 표정을 짓는 걸 보고서 피식 웃어버렸다.
“아하하하! 뭐야 그 표정!”
“네가 끔찍하고도 만약에? 라는 이상한 상상을 하게 하잖아.”
그 녀석이랑 나랑? 더 심하게 표정을 구기면서 그가 고개를 저었다.
“감시하는 녀석이 너무 우리랑 친하게 대해서 그건 또 그것대로 문제인 거 같긴 한데, 이 녀석이 적이라고 보긴 어려워.”
옷 입는 걸 도와주고는 애쉬는 그와 똑같이 한 숨을 쉬었다.
“그 여자 집도 모르잖아.”
“어쩔 수 없지. 여기서 재우는 수밖에.”
“싫은데~”
“적보다는 아군이 낫지. 일어나면 한 소리 해야겠지만.”
“너무 우리가 휘둘러지는 느낌이야.”
“… 듣고 보니 열 받는데.”
가자마자 꿀밤 한 대 먹여주마. 그렇게 결정하고 애쉬의 배웅을 받으며 집 밖을 나왔다.
어둡고 가로등만이 켜져 있는 거리는 그가 좋아하는 풍경 중 하나다.
귀찮긴 해도 나오기만 하면 이렇게 기분 좋게 산책을 할 수 있다.
선선한 바람까지 불어오고 조용한 곳에서 행여 자기가 이 정적을 망칠까 발소리까지 안 내며 걷고 있는데
“뜻밖이군요.”
또각또각 구두 소리와 함께 누군가 정적을 깨며 말했다.
아무런 감정 없는 아나운서 말투라고 생각했지만 어쩐지 더 차가움이 묻어나오는 목소리에 그는 습관적으로 자기가 뭘 들고 왔나 살폈지만 무기가 될 수 있는 건 그가 주머니에 넣은 휴대폰뿐이라는 사실에 조금 긴장한다.
“이 새벽에 거니는 건 좋아하지만 제가 더 좋아하는 상황이 벌어져서 정말. 오늘 저는 운이 좋은 거 같습니다.”
혹시나 자기가 괜한 걱정을 하는 거고 상대가 그저 통화를 하는 거라면 그저 어깨를 으쓱하고서 갈길 가면 그만이었지만
상대는 가로등 안으로 모습을 드러내 무표정으로 똑바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한쪽 팔을 가슴 쪽으로 굽히며 허리를 조금 숙여 인사하는 정중한 모습에 그는 머릿속이 조금 혼란스러웠다.
“타샤라고 합니다.”
“뭐죠? 무슨 용건이죠?”
“아아. 안타깝게도 저는 열심히 일하는 영업사원이 아닙니다.”
차라리 그랬으면 하는 예상을 꿰뚫어보듯이 부정하는 여자는 사람이 아니다.
“이미 제가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겠지요. 네 저도 AIND입니다. 역시 대단하군요. 기계왕.”
꿈틀. 그의 얼굴이 점점 굳어져 갔다.
지그가 불리는 다른 이름을 알고 있다.
“저희는 당신을 위해서 전쟁을 그만두고 당신의 강림을 기다리고 있는데. 어째서 가만히 계시는 겁니까?”
“누가 너희들의 왕이야. 멋대로 즉위시키지 마. 그딴 명칭, 왕좌, 다 관심 없으니까.”
“하긴 그건 그렇죠.”
그녀가 턱을 만지면서 얘기를 계속한다.
“그러니 그런 헛소문에도 반응이 없으셨겠죠.”
“헛소문이라면-”
“왕이 돌아왔다.”
점점 더 복잡해진다.
눈앞의 여자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나타난 건지.
모든 걸 그에게 말하는 이유가 뭔지 알 수 없다. 어렵다.
“저와 동료들이 한 거죠. 혹시나 진짜 왕인 당신이 화가 나서 등장할까 싶어서 말이죠.”
“애초에 멋대로 왕이라고 말하고 있는 건 너희뿐이라고. 그쪽 입장에서 난 왕이 아니라 괴물일텐데?”
“지배죠. 불쾌하시다면 저를 조종하면 되지 않습니까? 저리 가버려 라면서요.”
“… 어디까지 알고 있지?”
“물론.”
비밀이라는 듯이 검지를 입술에 대고서 윙크해주었지만 그로서는 황당할 뿐이었다.
“AIND 에게는 지배가 약하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아 하지만 느끼고는 싶습니다. 그래서 말한 거 였는데 역시나 해주시지 않는 군요. 엄청난 영광인
데 말이죠. 그러면 같이 지내는 그녀들에게도 안 하셨는지요?”
“바쁘니까 용건만 말해. 부숴버리기 전에.”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면 죄송합니다. 그저 기뻤을 뿐입니다.”
“기뻤다고?”
“예. 이건 정말 예정에도 없었던 상황이라. 아무래도 저와 당신은 잘 맞을 거 같아요. 저도 이런 조용한 거리를 산책하는 걸 좋아한답니다. 생각도 정리되고 다른 무언가를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도 있고요.”
단순 우연이라는 걸까. 믿지 못하고 적은 맞는 거 같은데도 이 애매한 태도는 뭘까.
“바쁘시다고 하셨으니 저는 이만 물러나죠.”
“어이-”
“조만간 다시 뵙겠습니다.”
“거기 서!”
오랜 만에 써본다.
그는 편하게 기계지배라고 부르고 있지만 기계는 완벽하게 제어할 수 있다.
“아.”
하지만 한계가 있다.
“아아- 이게…”
AIND에게는 거의 통하지 않는다. 최대한 집중하면 움직임을 제한 할 수 있는 정도.
역시나 제한이 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이걸로 궁금증은 풀렸습니다. 물론 아무에게도 공유하지 않을 겁니다. 왕께서 직접 저에게 수하로 넣어주겠다고 쓰신 힘이니까요.”
“쳇. 기분 나쁜 녀석.”
“농담도 잘 하시는 군요. 아아 –점점 더 매력적이십니다 당신은.”
농담이 아닌데. 중얼거린 그의 말을 듣지 못한 채로 구두 소리가 점점 멀어져 갔다.
“사람이나 AIND 나 정신 나간 것들은 많단 말이지.”
심란한 이 기분을 어떻게 해야 할까 했지만 걸어가면서 생각이 조금 비워졌다.
대체 아까 그녀와 그 동료들이란 녀석들은 원하는 게 뭘까.
전쟁 때처럼 사람에게서의 자유, 권리를 위해 투쟁하는 걸까.
마음에 걸린다.
그가 이 힘을 가지고 나서 AIND의 일방적인 항복으로 종전
그녀가 말한 ‘기다리고 있었다’ 라는 말.
왕.
달갑지 않은 단어다.
“우예이~ 지그 씨이~ 끗!”
“……”
지금까지의 고민이 앞에서 엎어져서 잠꼬대 마냥 말하며 딸꾹질을 하는 틸리드를 보니
“아야야야야~”
화가 난다.
“너는. 왜. 나한테. 전화질. 한 거냐? 응?”
“헤에~? 그래도오~ 바~텐~더~ 씨가 이제 가게 접어야 된다고오~ 일어나시라고오~ 했는데~ 끌어내지는 않더라고요~ 이러니까아~”
그녀는 외투를 반쯤 벗어놓았는데 그쪽 허리춤에 권총이 보였다.
“히이~”
화가 난다.
“아아아아야~”
아까는 한쪽만 꼬집었던 볼을 이번에는 두 쪽 다 꼬집으면서 화를 낸다.
“아, 애인분 맞으시죠.”
“아뇨.”
즉답부정에 직원이 당황하지만 그는 정말 아니라면서 고개를 젓는다.
“그냥 아는 지인이죠. 그래서 더 열 받는 거고.”
“이히이~”
“실례했습니다.”
취해서 이상한 말이나 해대는 틸리드를 등에 업고서는 사과의 말과 함께 가게를 나왔다.
“내가 왜 사과를 해야 하는 거냐 도대체.”
“사과는 맛있어~”
“그 사과 말고.”
“맛있으면 바나나~”
확 그냥 버리고 갈까 하는 고민을 수 십 번 반복한다.
아까 AIND가 했던 말과 틸리드로 인해서 머릿속은 그야말로 혼돈의 도가니.
업힌 상태의 주정뱅이를 상대로 계속 대화를 하는 지그는 그만 좀 말하고 잠이나 자라고 몇 번을 얘기하지만
했던 얘기 또 하고 딸꾹질, 또 하고 딸국질, 장난치며 딸꾹질.
목청을 뽑아버리고 싶다고 생각한 순간이 계속되는 와중에 겨우 집에 도착해서 한 숨을 쉬었다.
가볍게 씻고 잘 생각에 조금 피곤이 몰려왔는데 그가 손대기도 전에 문이 열렸다.
안에서 애쉬가 열어줬겠구나 싶어 신발장에 들어서는 순가.
“아.”
“아~ 어서와~ 데이트는 즐거웠어?”
앞에 무릎 꿇고 있는 애쉬와 문을 열어준 디어 라고 하는 귀신이 팔짱을 끼고서 서 있었다.
“디어. 일단 설명을-”
“저기 무릎 꿇어!”
“넵…”
“히에~ 무릎~ 발, 무릎~ 발~ 머~리~ 어깨, 무르?”
헛소리나 하는 틸리드의 입을 막아두지 않으면 디어가 더 화 낼 것이 틀림없었기에 그는 조용히 무릎 꿇고 틸리드의 입을 손으로 막고서 디어의 꾸을 들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