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소녀의 일기 'give me choco'
까득.
항상 먹을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상쾌한 소리란 말이야.. 달콤한 향을 풍기며 입안에서 초콜릿이 부서졌다.
초콜릿의 마력이 온 신경에 퍼지며 전신의 피가 에너지 드링크가 된 것 같은 상쾌함이 느껴졌다.
언제나 처럼 내 앞에는 괴상한생물체가 동네를 때려 부수고 있었고 나는 이제 저 녀석을 파괴시키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래야만 했다.
'초콜릿을 언제까지 먹고 있을 거야? 빨리 변신 안 해?'
나의 관리를 맡은 검은 고양이가 나를 보챘다. 이름은 레반이라고 하지만 나는 그냥 까망이라고 부르고 있는 녀석이다.
그래 알았다 알았어. 하면 될 것 아냐. 나는 초콜릿이 묻은 손가락을 핥은 뒤 외쳤다.
'Give Me Choco.'
형식적일뿐인 주문을 외운 뒤 전투복장으로 변신한 나는 건물 지붕을 뛰어다니며 파괴되고 있는 공원으로 향했다.
그래, 내가 마법소녀가 된 경위는 이렇다.
어릴때 가끔 생각하지 않던가? tv에서 나오는 애니메이션에서 엄청나게 예쁜 애들이 반짝반짝 빛나면서 변신하고 나쁜악당들이랑 싸우는 그런 게 실제로 있는 게 아닐까 하고 말이지. 나는 그런 생각을 하는 애들 중에 한 명이었고 실제로 그렇게 싸워보고 싶다는 생각도 했어. 멋있잖아? 정의를 위해 싸우는 그런 거. 그래서 유치원 생일잔치 때 당당하게 말했지. 내 꿈은 마법소녀가 되는 겁니다! 라고.
울아빠는 그런 내 모습이 귀여웠는지 관련 장난감들을 무지무지 많이 사줬었지 온몸에 그런 것들로 마구 치장하고 온 마을을 뛰어다니기도 하고. 이것저것 마구섞여 대체 뭘로 변신했는지도 모를 정도였지만 여자애들 치마를 들치던 남자애들을 마술봉으로 신나게 때려주면 마치 내가 정의의 사자가 된 것 같았어. 덕분에 아빠고 엄마고 꽤나 골치를 썩었던 모양이지만 그래도 나를 혼내지는 않았어. 단지 정의에도 정도가 있다고 말해주긴 했지만.
어쨌든 나름 절제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나는 마법깡패라고 불리고 있었고 유치원에서는 나에게 거역하는 애가 아무도 없게 되었지 여자애들은 완전히 나를 졸졸 따라다니며 함께 정의를 지키려고 했었어. 남자애들은 우리한테 그냥 밥이었다니까? 별로 의도하던 바는 아니었지만 더 이상 여자애를 괴롭히는 남자애들이 없어지자 정의의 사도가 된 것 같아 너무 기분이 좋았어. 아, 누가 보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근데 난 울 엄마를 닮아서 그런지 힘이 무지 셌으니까.. 뭐 어쨌거나 이제는 그런 짓은 안 하게 됐으니 다행이야. 고등학교까지 올라와서 마술봉을 휘두르고 다닐 수는 없으니까. 그런 건 잘해줘 봐야 초등학교 때 까지라고. 하지만 정의를 지킨다는 의식이 각인되어버렸는지 아직도 맘에 안 드는 행동을 하는 놈은 확 그냥 때려주지 않으면 성미가 안 풀린단 말이야. 고등학교 쯤 되니 애들이 나름 커서 그런지 예전만큼 편하게 제압이 잘 안 되는 것 같아. 옛날에는 그냥 확 노려보거나 뭣하면 손정도만 꺽으면 되었었는데 이젠 뻑하면 자꾸 폭력을 쓰게 된다니까..그렇잖아 담배를 물고서 껄렁껄렁한 행동에 말은 안 하고 욕만 해대면서 애들을 괴롭히면 누구나 그렇게 때려주고 싶어지지 않겠어? 여자애들이야 몇 번 다그치면 괜찮아지던데 남자애들은 어지간하면 맞아야 정신을 차린다니까. 이렇다 보니 고등학교에 와서도 나는 갱생폭력을 휘두른다고 해서'폭력천사'라는 별명으로 불리고 있었고 의도치 않게 유명인이 돼서 자꾸 귀찮은 일이 생긴단 말이지..사실 이게 정의랑은 별로 관계가 없다는 건 나도 잘 알고 있지만 나는 이미 그런 건 못 참는 성격이 되어버렸고 남을 괴롭히는 건 역시 안 좋다고 생각해. 그러니까 그냥 다들 사이좋게 지냈으면 좋겠어. 평화 좋잖아 평화.
요즘 1학년 사이에선 남자애들끼리 팔씨름이 유행하는 것 같다. 반끼리 태그매치라도 하는 모양인데 힘자랑이 저렇게 좋은 걸까? 아직까지 남자애들의 허세는 알다가도 모르겠다니까. 지금 우리 반에서 팔씨름을 하는 건 우리 반 반장 김형선과 1반 몬스터 박태형이다. 쓸데없이 몸만 커서 또래에 비해 힘이 센 건 확실해. 전에 나한테 얻어터지고선 이제 친구들은 안 때리고 다니는 모양이야. 결과는 뻔히 보이지만 우리 반 반장이니까 마음속으로 응원은 해줘야지. 박태형은 아무래도 온 반을 돌아다니며 남자들을 하나씩 꺾고 있는 것 같다. 우리 반이 마지막이라고 하는 걸 보니 다른 반은 다 쓰러진 듯하군. 결과적으로 우리반 애들이 다 졌으니 반장이 마지막 주자인 셈이지.
우지끈 하고 책상이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반장은 한 5초쯤 버티나 싶더니 몸째로 넘어가 버렸다. 아프겠다..지현이가 반장에게 가서 팔을 살폈다. 반 공인 커플다운 모습이야.
'하핫! 이 반에도 적수가 없구만! 이제 1학년은 제패다!'
몸집에 걸맞은 천박한 목소리다. 저렇게 쓸데없이 소리 지를 필요는 없잖아. 맞을 때도 저러더니..
녀석은 반장에게 손을 내밀었다. 꼴에 매너가 좋은 줄 알았더니 반장이 주머니에서 세종대왕님이 그려진 종이를 꺼내 넘겼다. 왜 내가 배알이 꼴리는 거지? 천 원도 아니고 만 원이라니 애들 장난치곤 판 돈이 너무 세다. 지현이도 나와 같은 기분을 느꼈는지 주무르던 반장의 손을 내팽개치고 나가버렸다. 저 녀석 이따 고생 좀 하겠군..박태형이 반을 나가려고 하자 반장이 놈을 불러세웠다.
'야 아직 한명 남았다.'
'엉? 누가.'
박태형은 반 주위를 돌아보며 자기가 쓰러뜨린 남자의 수를 세는 듯했다.
'누가 남았다는 거냐?'
'저기.'
반장이 손가락이 내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나를 가리키고 있는 게 확실했다. 혹시 잘못 본게 아닐까 뒤를 둘러보았지만 내 뒤는 칠판이랑 초록색게시판밖에 없더라.
'나 말이야?'
반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비장한 표정으로 복수를 해달라는 그런 얼굴을 하는데 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박태형은 나를 보더니 입이 귀까지 걸리는게 뭔가 이때다 싶은 그런 느낌이 들었다. 복수의 기회. 쪼잔한 녀석...
해봤자 아무 이득도 없었지만 지명까지 당한 이상 빼는 것도 그렇고.. 반장놈..이따 지현이한테 더 삐친척하라고 말해야겠다.
'올만이다? 홍세라.'
'어. 그래그래..'
'힘으로는 안 진다!!'
'아 예...여자랑 싸우면서 참 대단하시네요..'
녀석은 책상 위에 팔을 올렸다. 이런 녀석이랑 손은 맞잡는다는 것까지 생각을 못한 터라 갑자기 하기가 싫어졌지만 이제 와서 뺄 수는 없고..그냥 재미있게 조건을 걸어보는 건 어떨까 싶었다.
'야 잠만 조건이있다.'
'뭐냐.'
'너 아까 반장한테 돈 뺐었지?'
'뭐!? 아냐! 뺏은 게 아니라 원래 돈 걸고 하는 거였어!'
'..안때려 걱정하지 마.'
박태형의 안심한 표정이 뭔가 측은해진다..
'나도 뭐 좀 걸자. 내가 이기면 한 달 동안 내 매점비내기~!'
'뭐 뭐라고!?'
'뭐야, 그 정도도 못해? 쫄리면 뒈지시던지!'
내가 내건 조건이 이상했는지 반 아이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야 박태형 그만둬. 쟤 엄청 처먹는다고.'
'괜찮아, 지금 뺀다고 해서 우리는 아무도 널 비웃지 않아.'
이 자식들이..
박태형은 되게 고민하는 것 같았다. 아까의 기세는 어디로 간 걸까? 하지만 복수심이 먼저였는지 자존심 때문인지 그 조건을 받아들였고 덕분에 우리반은 엄청 시끌시끌해졌다.
오오오오!!!! 박태형 멋있다! 다시 봤어! 남자다 남자!!! 지더라도 응원하마!!!
'시끄러! 이 자식들아! 대신! 내가 이기면 10만원이다! 홍세라!'
'ok, 콜.'
어느새 울 반엔 다른반 애들도 무지 모여있었고 책상 주위로 왠지 모르게 불이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뜨거워진 불판 위에 올려진 기분이었거든. 책상주위로 둥글게 아이들이 모였고 반장이 비장한 표정으로 맞잡은 손위로 자기 손을 올렸다. 니네 아까는 이렇게 안 했잖아..
'자 내가 카운트를 세고 손을 떼면 그때부터 시작이다. 먼저 시작하면 반칙이야, 특히 홍세라. 알았지? 그러면 안됀다.'
'야! 반장! 너 누구편이야!!'
1,2,3, 시작!!!
'쿠오오오오오!!!'
오늘은 고등학교에 올라와 2학기 중간고사가 다가오기 일주일 전이다. 나야 뭐 시험 같은 건 안중에도 없었으니까 조용조용한 시험기간이 썩 나쁘진 않았지만 내 친구들은 아니겠지. 시험이 다가온다고 생각하니 다들 힘들어하는 것 같은데 기분이나 풀어줄까 해서 2교시가 끝나고 친구 윤아를 데리고 매점으로 갔다. 그 고릴라한테는 네 이름으로 외상을 달아 논다고 말해뒀으니까 알아서 계산하겠지. 이래 봬도 매점 아저씨와는 연이 깊어 신용은 확실하다. 울 학교는 학교치곤 상당히 큰 부지를 가지고 있었고 꽤 오래된 학교라 본관 쪽은 건물이 낡은 대신 뒤뜰이 매우 예뻤다. 조금 떨어져서 지어진 신관은 건물이 새 건물이라 매우 깨끗하고 난방이나 에어컨도 무지 빵빵하게 잘 나온다니 부럽긴 하군.. 난 아직 1학년이라 들어가 본 적이 별로 없어서 잘 모르지만, 소문으로는 화장실에 비데도 있다고 하던데..한번 몰래 가서 써볼까? 거긴 운 좋은 2학년들이나 3학년들이 사용하기 때문에 시험기간엔 교실의 창문도 닫아두고 블라인드로 막아놓고 있었다. 저게 뭔가 도움이 되는 건가?? 쨌든 나는 본관 뒤뜰에 있는 나무벤치를 무지 좋아했고 거긴 나와 친구들의 지정석처럼 되어버렸다. 딱히 그러고 싶지도 않았는데 다들 알아서 비켜주는 걸 보면 이걸 미안 해 해야 할지 고마워 해야 할지..이 벤치 뒤쪽에 자연정원에는 대충 500년쯤 된 나무가 있는데 별로 오래 살지도 않았지만 이렇게 큰 나무는 살면서 처음이다.
울학교 자랑이 두 개 있는데 이 500살 먹은 나무랑 학교 앞뜰에 있는 동상이다. 그 동상은 대충 3미터쯤 되고 얼굴은 없지만, 매우 잘 조각된 근육질 몸매를 가지고 있는데 이름은 앙도일도(卬衜一途) 애칭은 앙일이. 꽤 유명한 조각가가 만들었다고 한다. 물론 이 학교 졸업생이고.
아 하나 더 있다. 새로 부임 온 음악쌤. 무지 상냥하고 키크고 잘생겨서 여자애들한테 인기가 무지 많다. 아 덤으로 젊기도 하군.
어쨌든 난 지금 나무를 올려다보며 청솔모 같은게 뛰어다니지 않나 보고 한번 놀아줬으면 하는데 사람이 무서운지 근처로는 안 온다.
'요번 주 놀토에 옷 사러 가지 않을래?'
옆에서 멜론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던 윤아가 갑자기 내 귀에 속삭였다. 몸이 베베 꼬일 만큼 간지러웠다.
으악..!아이스크림 떨어뜨릴 뻔했잖아.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해?'
'아무것도 아냐. 그냥 쓰잘데기 없는 생각이었어. 옷 사러 가자고??'
'응, 어제 굉장히 마음에 드는 옷을 발견했거든.'
'시험기간인데 너도 참 여유다 여유..'
'네가 할 소리는 아니지 않니?'
살면서 내 돈을 주고 사본 옷이라고는 고양이 캐릭터 잠옷이랑 막 입고 다닐 토끼 귀 달린 후드티 정도다. 애초에 고등학생 주제에 교복 말고는 다른 옷을 입을 여유 따윈 거의 없기도 하고 주말에는 웬만한 약속이 아니면 게임을 하거나 뒹굴뒹굴이 일상이었기 때문에 그다지 나한텐 옷이 필요하진 않았다. 밖에 나가는데 내 딸이 후줄근하게 입고 다니는 꼴은 못 본다며 엄마가 어딘가에서 옷을 사다 입히기는 하지만 그냥 마냥 주는 대로 입을 뿐 직접 옷을 사거나 하는 일은 별로 없었다. 윤아가 나를 데리고 옷을 사러 가자고 할 때는 거진 짐꾼으로 활용될 때가 많았고 특히 방학 때 쇼핑을 하고 있는 우리를 앞에서 본다면 각자 양손에 커다란 부채를 들고 있는 것 같은 기묘한 모양새일 것이다. 다행인 건 그 와중 윤아가 멋대로 어울릴 것 같다며 사준 내 옷이 한 두 벌 정도는 있다는 것이고 그날 밥은 메뉴 관계없이 무조건 윤아가 사는 걸로 되어있었다. 때문에 4~5시간이 걸리는 지루한 쇼핑이 그다지 지루하게만 느껴지지 않는 건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보통은 이런 일은 남자친구가 해야 하는 게 보기 좋다고 생각하지만 윤아 왈 나는 인기가 없어라고 말하고 있는데다 나의 눈으로 본 윤아의 남자기준은 파라 미터가 하늘까지 뚫을 정도로 까다로운 편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그런 꽁냥꽁냥한 모습은 한동안은 보기 힘들 것 같다.
'너무 아깝지 않니?'
'뭐가말야?'
'니 그렇게 태어난 거.'
갑자기 뜬금없이 무슨 이야길 하나 했더니 갑자기 손가락으로 내 입술 만지지 마라. 왠지 아이스크림 먹다가 짠맛 날 것 같으니까.
'세상에, 애들을 그렇게 패고 다녔는데 너 은근히 인기 많은 거 아니? 내가 너한테 전해주라며 받는 러브레터가 일주일에 한두 통 쯤은 된다? 진짜 남자들은 예쁘면 다인가 봐. 이런 왈가닥 선머슴 같은애가 어디가 좋다는 건지.'
교내 남자 울리기 기록을 가지고 있는 여자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알아서 거절해주는 건 고맙긴 하지만.
윤아는 특유의 양 갈래 머리를 들어 올려 머리끝으로 내 볼을 문지르기 시작했다.
'화장도 안 해, 립밤도 안 발라, 내가 제일 어이없었던 게 뭔 줄 아니? 어떤 애는 너한테 얻어맞고 있는데도 눈에 하트가 그려져 있었다는 거야. 그 애가 나중에 나한테니 번호 물어본 건 알고 계신 지요?'
울 학교 안에 엄청난 세디스트가 있는 것 같구만..다음에 그런 일이 생기면 조심해야겠다. 암튼 나는 뭔가 꾸미는 게 매우 귀찮게만 느껴질 뿐이고 만약 내가 분칠하고 있는 나를 보게 된다면 손발이 오그라들기 전에 그대로 거울에 얼굴을 문대 버리고 말 거다.
'요거트 껍데기만 핥아 먹고 버리는 소리 하긴.. 너처럼 무시무시한 왕언니한테 '걸어 다니는 폭탄'이나 '괴력 여편네'나 '참교육형냐' 같은 웃긴 별명이 아니라 '폭력천사'라니 그런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니? 진짜 바보 같지 않아? 더군다나..더군다나.. 그 커다라안...! 우웁..!'
나는 내가 먹던 아이스크림을 윤 아 입에 물렸다. 여자애가 쓸데없는 이야기를 할 때는 단걸 물리는 게 최고다.
아! 자꾸 여기 쳐다보지 마, 진짜로 부끄러우니까..!
'세라야 저기 봐봐.'
'응, 뭔데?'
윤아가 가리킨 곳에는 까만 고양이가 있었다. 뭔가 킁킁거리며 돌아다니는 게 마치 강아지처럼 보였다. 목에 반짝거리는 주머니를 걸고 다니는게 야생고양이 같지는 않았다. 나는 동물을 무척 좋아하고 고양이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이상한 매력이 있어서 왠지 만져보지 못하면 아쉬운 기분이 든단 말야. 알잖아 그런 거.
나는 먹던 초코빵을 윤아에게 넘기고 그 까망이한테 다가갔다. 고양이들은 예민해서 가까이 다가가면 쏜살같이 도망치기 때문에 살금살금 다가갔는데 가까이 가서 보니 그 녀석도 뭔가에 다가가는 것 같았다. 얼마나 집중하고 있는지 내가 뒤에 있는 건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것 같았다. 실례인 줄은 알지만, 저 복슬복슬한 털이 얼마나 만지고 싶던지..나는 확 다가가 녀석의 몸통을 붙잡았다. 깜짝 놀라 바둥대는게 너무도 귀여웠다. 꼬리털이 바짝 곤두선 게 엄청 놀란 것 같았지만.. 미안, 이따 영양사 누나한테 멸치라도 받아줄게.
'놔! 이 멍청한 계집애야!!!'
'?'
윤아야 혹시 나 불렀니? 라고 물어봤지만, 그저 세상 모르게 멜론 맛 아이스크림을 핥아 먹으면서 특유의 양갈래 머리를 가지고 노는 게 귀여웠다. 방해하지 말아야지.
'빨리 놔! 놓쳐버린단 말이야!'
주변을 둘러보며 묘하게 어린애 같은 목소리의 주인을 찾고 있으려니 방심을 틈타 고양이는 내 손가락을 깨물고는 후다닥 달아나버렸다. 같이 놀고 싶었는데 미안한 짓만 해버렸다. 멸치는 대충 이 부근에 놓아둘게.
어디에 놓으면 좋을지 둘러보고 있으려니 바닥에 뭔가 네모난 물건이 떨어져 있었다.
고양이가 흘리고 간 것일까? 예쁜 색의 종이로 싸여있던 그것에서는 달콤한 냄새가 났다.
'초콜릿?'
네모난 모양의 작은 초콜릿은 묘한 빛이 나는 포장지에 가지런히 싸여있었고 지금까지 살면서 먹어봤던 초콜릿과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달콤한 향이 나고 있었다. 마치 먹어보지 않고는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행복할 것 같은 맛이 상상되었고 전교생에게 떨어진걸 주워 먹었다는 놀림을 받는다 해도 상관이 없을 정도의 마력을 내뿜고 있었다. 평소 당분을 에너지로 삼아 살아가던 나는 마치 무언가에 이끌리듯 포장지를 벗겨 입안에 초콜릿을 넣었다.
까득.
시원한 소리가 나며 초콜릿이 부서졌다. 얼린 듯이 단단한 식감이었지만 순식간에 녹아들며 지금까지 살면서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달콤한 맛이 부드럽게 혀를 감싸들고선 서서히 녹아내려 갔다. 그 달콤함은 마치 온 신경을 돌아다니면서 전신으로 퍼지는 것 같은 묘한 감각을 느끼게 했다.
'세라야! 종 쳤어!'
언제부터였는지 윤아가 내 등을 마구 두드리고 있었고 종소리의 멜로디가 거의 종장을 향해 가고 있었다.정신을 차린 나는 조금이나마 다음 교시 선생님이 늦장을 부리길 바라면서 교실을 향해 전속력으로 뛰어 올라갔다. 그러고 보니 다음 교시가 뭐였더라..교과서 가져왔던가?
아! 자꾸 거길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지 마, 진짜로 부끄러우니까..!
우리 교실은 2층에 있고 자랑인 동상이 창가 아래로 보이는 위치에 있다. 오늘도 늠름하게 손끝을 어딘가로 향하고 있는 걸 보면 그곳으로 확 날아갈 것 같단 말이지. 나는 교실 끝 뒷자리는 아니지만 창가 쪽에 앉아있기 때문에 수업시간에 멍때리기 아주 좋다. 가끔 선생님이 나를 지명하곤 현재 문단을 읽어보라고 할 때는 매우 난감하긴 하지만 옆에 문진이가 잘 집어주기 때문에 어찌어찌 넘어가긴 하니까 크게 문제 될 건 없다. 이 녀석은 유치원 때부터 악연이 깊은 친군데 나한테 제일 먼저 마술봉으로 맞았던 아이다. 옆집 살아서 자주 놀기도 했고 착하고 공부도 잘하지. 약해 빠졌지만, 용기있는 친구라는 건 인정해야 한다. 어릴 때의 기억이지만 내 치마를 들쳤다가 안에 속바지를 입고 있어서 실망한 표정이 아직도 기억나네. 그 뒤로 친해져서 자주 놀러 가 아줌마한테 이상한 독수리가 그려져 있는 코코아를 많이 얻어먹었다. 참고로 지금도 울 집에 아무도 없을 땐 가서 저녁을 얻어먹곤 한다. 울 엄마랑은 다르게 요리를 참 잘하시기 때문에 어쩔 수 없거든. 차라리 없길 바랄 때도 있을 정도니까. 아들만 셋이라 나를 딸처럼 생각하신다는데 어버이날 때 카네이션을 달아 드리면 울 엄빠가 서운해 하시려나? 시험기간이 다가와서 그런가 교실의 분위기는 무거웠다. 문진이도 등수를 유지하고 싶은지 장난도 잘 받아주지 않고.. 쉬는 시간에도 공부를 하고 있길래 윤아에게 가봤지만 곧 차이게 될 불쌍한 2학년 선배를 거절하느라 바빠보였다. 지현이는 반장을 여전히 갈구고 있는 게 보기 좋군. 연애는 중요하지 암암. 어쩔 수 없이 나는 또 매점을 가기로 했다. 아까 남겨둔 멸치도 궁금하고. 보통 3교시 쉬는 시간은 점심시간 전이라 그런지 다른 시간보단 매점이 한가하다. 매점 아저씨는 인상이 좋아서 항상 웃고 있지만 내가 너무 오니까 살찌지 않나 가끔 걱정을 하기도 한다. 쓸데없는 걱정이지만.. 오늘 같은 경우는 그 고릴라의 지갑 사정을 더 걱정하는 것 같다. 걱정 말라구요. 그렇게 경우 없는 여자는 아니니까. 나는 옆에 있는 허X콘 아이스크림과 프링X스를 집어들고 아저씨한테 이따 또 오겠다는 인사를 했다. 바삭한 감자 칩의 식감은 늘 기분을 좋게 만든단 말야. 이렇게 5개쯤 들고 한 번에 씹으면 마치 부르주아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며 사치를 부리고 있다는 심리적 상태가 조미료가 되서 평소 보다 훨씬 맛으로 느껴지게 된다. 이 맛은 엄마가 어렸을 때 가르쳐줬는데 엄마가 그랬다. 나중에 졸업하면 맥주랑 같이 먹어보라고. 자길 닮았으면 무척 좋아하게 될 거라나 뭐라나.
아까 받아둔 멸치는 다행스럽게도 없었다. 그 까망이가 먹은 건 지까진 모르겠지만 비어있는 그릇을 보니 기분이 좋았다. 조금은 용서해 주려나? 4교시는 수학 시간인데 내가 가장 싫어하는 시간이었다. 이것만큼은 문진이도 답이없는지 나한테 가르쳐주려고 하지 않았다. 예전에 엄마의 명령으로 몇 번인가 놀러갔을 때 가르쳐 주었는데 기본적인 방정식인지부터 공부해야 한다고 했다. 방정식이 뭐지? 누구 이름인가? 라고 할 정도로 바보는 아니니까 좀 가르쳐줘도 좋을 텐데.. 그렇게 화를 내는 문진이는 처음 봤다. 옆에있던 자기 침대를 막 두들기는 모습이 안타까울 정도였다. 그나마 다행인 건 수학쌤도 내가 답이 없다는 걸 알게된 뒤론 공식을 풀어보게 시키지는 않는다는 거지. 그냥 하염없이 창가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뭔가 이상한 위화감이 들었다. 단지 기분 탓인가? 뭔가 허전한 기분.. 혹시 프링X스를 다 먹지 않고 약간 남겨둔 게 원인이려나? 이따 점심 먹고 다 먹어버려야겠다.
시작은 미미하였으나 끝은 창대하리라? 아니지 오랜 기다림 끝에 낙이 온다든가? 하여튼 길고 긴 4교시가 끝나니 다음에 남은 건 점심시간밖에 없잖아. 언제나 그렇지만 이 시간은 학교생활 중에 가장 즐거운 시간이다. 울학교 급식은 매우 맛있어서 항상 기다리게 된다고. 가끔 된장국이나 콩나물무침 같은 반찬이 나와도 내가 만족스러워하는 걸 보면 새롭게 온 영양사 누나가 열일 하는 게 분명하다. 두 번 정도 식판에 밥을 덜어넣고 있었는데 남자애들이 축구를 하자고 불렀다. 평소 같으면 거절할 이유가 없었지만, 오늘은 패스. 아까 만났던 까망이를 찾아보고 싶었거든.
나는 남겨두었던 프링X스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어쩌면 이미 학교 밖으로 나갔을지도 모르지만.
봉투에 멸치 몇 마리를 들고 나가니까 혹시 냄새를 맡고 찾아올지도 모르지. 어쨌든 사람이 없는 쪽을 먼저 둘러보는 게 어떨까 싶어서 풀이 무성한 외곽 쪽을 돌아보기로 했다. 점심시간이었기 때문에 학교 주변에 사람이 없는 곳은 거의 없었다. 혹시 다른 애들한테 귀여움을 받는 게 아닐까 싶어서 웅성거리는 곳이 없나도 확인해 보았지만 그런 기색도 없었고.. 남은 곳은 사람이 잘 안오는 곳인 신관 건물 뒤쪽이었는데 거긴 좁기도 하고 햇볕이 잘 들지 않는 것도 있는데다 여긴 바깥에선 전혀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다. 장소의 특성 때문에 예전에는 여기서 아이들이 담배를 피거나 하고 그랬었는데 이제는 못 그러지. 멸치 봉투를 흔들어 대면서 주변을 다 뒤져봤지만 까망이는 나오지 않았다. 뭔가 아쉬운 기분을 느끼면서 프링X스를 입에 넣고 있는데
쿠와아아앙!!!!!
하고 엄청난 폭발음이 들려왔다. 폭발음이 들린 쪽은 학교 본관 쪽이었다. 이쪽까지 진동이 느껴질 정도면 엄청난 폭발이었을 것이다. 본능적으로 심상치 않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한 궁금증 때문도 있었지만 친구들이 걱정되어 손에 든 걸 던져버리고 소리의 방향으로 뛰었다.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왼편이 완전히 날아가 버린 본관이었고 거기선 회색의 연기가 나고 있었다. 가스가 터져 불이 난 걸지도! 순식간에 학교는 아수라장이 되었고 학교 전체에서 비명소리가 들렸다. 생각해보니 잠깐.. 저기 우리 반이잖아..!! 당황해서 우왕좌왕할 수도 있었는데 용케도 난 핸드폰을 꺼내 119에 전화하려 잠금패턴을 입력했다. 장하다 홍세라. 막 통화 앱의 아이콘을 누르려는데 갑자기 연기 속에서 뭔가가 팍하고 튀어나왔다.
그것은 이상할 정도로 거대한 사람이었다.
얼굴없는 3미터의 괴물은 학교를 부수며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내 친구들이 걷어차이며 날아가는 모습은..
지금 혹시 내가 밥을 왕창 먹고 식곤증으로 곯아떨어져 있는 건가? 의문은 사람들의 비명소리로 저 멀리 날아가 버렸다. 녀석은 오래된 본관 건물을 케이크 부수듯 파괴해나갔다. 학교 안의 친구들은 너무도 끔찍하게 죽어갔다. 건물 더미에 깔리거나 괴물에게 밟히기도 했고 폭발에 밀려 공중으로 날아가는 등 눈앞에 참혹한 광경이 펼쳐졌다. 학교건물 바깥에 있는 아이들은 교문 밖으로 미친 듯이 도망쳤고 본관 오른편에 있던 아이들은 학교 밖으로 빠져나오려 마구 뛰쳐나오고 있었다. 판단력을 잃었는지 4층 창에서 뛰어내리는 사람도 있었다. 서로 먼저 도망치려 하다 보니 애들끼리 부딪히고 넘어지며 서로 밟고 다니고 있었다. 계단에서 여럿이 굴러떨어지며 몇몇 사람이 깔려 죽는 등 끔찍한 모습이 멈추지 않았다. 통제 불가능한 패닉상태다. 지현이 윤아아 문진이의 얼굴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 녀석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도망쳤을까? 아니면... 현 상황이 내 망상 속의 꿈이길 바란다. 하지만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내 희망을 유리처럼 깨뜨렸다. 머리 한구석에서 도망치라고 다리에 전기신호를 보내고 있었지만 척추신경이 고장난 것 처럼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신호장애에 망가진 다리를 움직이게 만든 건 저 멀리 쓰러져 있는 익숙한 양갈래 머리였다.
사람들사이에 낑겨있다 튕겨 나간 것인지 윤아는 현관 쪽 벽에 쓰러져있었고 나는 튀어나오는 사람들의 안을 헤엄치며 윤아에게 다가갔다. 생존본능에 눈이 뒤집힌 사람들을 헤집고 나가는 건 매우 힘든 일이었다. 망할! 상황이 이렇긴하지만 지금은 눈 앞의 사람을 때려주고 싶다는 기분이 샘솟는다. 맛이 간 물소떼를 뚫고 겨우 윤아에게 다가가 들쳐 엎으려고 하는데 동시에 '쾅!' 소리가 나며 앙일이가 현관 벽을 부수며 튀어나왔다. 그 파괴력에 튕겨나온 벽면파편이 사람들을 깔아뭉갰고 그대로 현관을 완전히 막아버렸다. 갈 길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우왕좌왕하는 걸 앙일이는 재밌다는 듯 돌주먹으로 날려버리기 시작했다.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나는 그 모습을 뒤로한 채 윤아를 들쳐업고 신관으로 향하는 2층의 구름다리로 뛰었다.
원체 가벼운 녀석이라 들고 뛰는 것 정도로는 힘들지 않았지만, 곧 힘든 상황에 봉착하고 말았다. 신관도 본관과 상황이 별반 다른 게 아닌지라 패닉상태의 사람들이 제 살기 바쁜 상태였다. 저 파괴적인 행렬을 뚫고 출구로 나가기는 무척 어려워 보였다. 몇몇 선생님들이 학생들을 통제하려 했지만 그런 건 그들에게 엄마의 공부 좀 해라 수준의 효용 없는 외침 정도일거다. 등 뒤에서 건물이 부서지는 소리와 지진이 난 듯한 엄청난 진동이 울려왔다. 내 발밑이 부서지는게 몇 초 남지 않았다는 것은 굳이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어쩔 수 없이 행렬 사이로 비집고 들어가 뚫어보려 했지만 내 발재간보다는 놈의 돌주먹 쪽이 속도가 빨랐던 것 같다. 발바닥의 감각이 사라지며 몸이 중력에 끌려내려갔다.
깜깜했던 시야가 조금씩 밝아지기 시작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어떻게 눈을 떠서 일어나보니 나처럼 떨어진 사람들이 싸늘하게 누워있었다. 고마워요 엄빠 튼튼하게 낳아줘서. 어디 잘못된 곳이 없나 살펴봤지만 크게 다친 곳은 없는 것 같다. 몸이 잘 안 움직여지는 것 같은 느낌이긴 한데.. 입안에서 약간 씁쓸한 맛이 났는데 이 정도야 뭐. 내가 안고 떨어진 덕분인지 다행히도 윤아는 타박상 정도로 그친 것 같다. 그 녀석이 어떤 변덕을 부렸는진 몰라도 내가 떨어진 1층은 생각보다 크게 부서지지 않았고 저 멀리서 신관 어딘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오는 게 왠지 3~4층쯤을 부수고 있는 것 같았다. 아직 시간은 있는 것 같다. 쓰러진 사람들을 확인해 보았다. 파편에 깔린 사람까지는 어쩔 수 없지만 혹시 살아있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예전 영화에서 보았던 것처럼 목 근처에 손가락을 대봤는데 느낌이 잘 안 느껴졌다. 요령이 없어서 그럴지도 모른다. 허리가 아파 오긴 하는데 그냥 심장 소리를 들어보는 게 빠르겠다 싶어서 한 사람 한 사람의 가슴에 귀를 가져다 댔다. 에구구 소리가 절로 나오네.. 우리 할머니가 왜 그러셨었는지 좀 알 것 같다. 주변의 사람은 거의 다 확인해본 것 같았는데 아무래도 살아있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운 좋게 마지막 사람에게서 가까스로 심장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아, 다행이야 누군가 살아있다니..
곧 구해 드릴겠습니다. 음악쌤. 울학교 3대 자랑이라고 불릴 만큼 멋진 얼굴이다. 기절했는데도 멋있네 거참..여자애들이 왜 이리 열광하는지 알 것 같다. 선생님을 들쳐 엎고 싶었지만 그 자린 이미 윤아가 전세 낸 자리라서 내줄 수는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질질 끌어서 옮기려고 하는데 쾅!! 하는 익숙한 소리와 함께 뭔가가 날 날려버렸다. 우리들은 그 충격파로 건물 파편들과 함께 데굴데굴 굴러 바깥으로 날아갔다. 콘크리트 더미들과 철근들이 머리를 때리고 갔는지 머리에서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먼지들이 사라지자 눈앞에 앙일이가 보였다. 부수던 건물이나 부술 것이지. 3미터 키가 저렇게 큰 줄은 몰랐다. 꼿꼿이 서 있는 그 녀석 몸이 태양 빛을 가리는데 내 주위가 전부 그림자로 덮여서 밤이 된 것 같다. 얼굴이 없어서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굉장히 즐거워 보이는구나 너..
바깥으로 날려졌더니 완전히 파괴되어버린 학교가 눈에 보였다. 구관이고 신관이고 다 부서져서 저기 멀리 500년 된 나무가 서 있는 게 보인다. 매점 아저씨는 괜찮을까? 더 이상 부술 게 없어진 건지 녀석의 타깃은 이제 나로 정해진 것 같다. 아까부터 계속 이쪽만 쳐다보는 게 부끄럽잖아 임마. 3M짜리의 돌주먹이 이제 나를 향한다. 한 번도 남의 주먹이 위험하다고 느껴본 적이 없는데 이번만큼은 나도 무섭다고 느끼고 있나보다. 다리가 후들거려 움직여지지 않는데.. 이 자식..우리가 청소시간마다 매일같이 빤딱빤닥 닦아줬는데 이런 식으로 나와? 열받으니까 죽더라도 한 대는 꼭 때려줘야겠다.
놈의 주먹이 날라왔다. 묵직한 게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여고생력를 발휘해 그곳에 주먹을 뻗었고 그러자 빠직! 하는 소리와 함께 뭔가 처음 듣는 이질적인 소리가 귀에 들려왔다.
시야에 들어온 건 어쩐지 내 주먹 앞에 이상한 노란 빛 덩어리가 있는 것이었다. 동그란 그것은 놈의 주먹을 마치 튕기듯 밀어냈고 순간 중심을 읽은 거구가 밀리며 우직!하는 소리와 함께 넘어졌다. 뭐..뭐지? 머리 위로 물음표가 세 개쯤 떠올랐는데
'참나... 아까 방해만 안 했어도 이런 일은 안 생기잖아.'
빛덩어리에서 어떤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까 들은 묘하게 어린애 같던 목소리. 그 구체는 땅바닥에 사뿐히 내려앉곤 점차 빛이 녹듯이 사라지더니 그 안에 까만 고양이가..있었다.
'까망이?'
'누가 까망이야!'
새침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고양이는 어딘지 이상하다고 해야 할까.. 아니 신비롭다고 해야 할까..
'..고양이가 말을..?'
'고양이가 말 좀 하면 어때. 동상이 움직이는 건 괜찮냐?'
'아니.. 그건 아니지만..'
이상한 일의 연속이었다. 사실 고양이가 말하는 건 지금 눈앞에 벌어지는 일에 비하면 별로 대단한 것도 아니었다. 차라리 고양이든 강아지든 참새든 햄스터든 다 나와서 말 좀 해주라 그냥 꿈이라고 말이야.
'꿈 같은 소리 하네, 어쨌든, 이렇게 된 건 네 책임도 있어. 코어가 되는 마충(魔蟲)을 잡고 있었는데 너 때문에 놓쳐버렸단 말야.'
'마충? 그게 뭔데..? 저거랑 관계가 있는 거니?'
'어, 엄청. 그러니까 쫌!! 지나가는 고양이를 괴롭히지 말란 말이야! 이러니까 인간 놈들은 꼭!!'
콰직. 콰직.
넘어진 거구가 슬금슬금 일어나고 있었다. 그 무게 때문에 아래 깔려있는 콘크리트 더미가 가루처럼 부서지는 게 보였다. 까망이는 다시 꼬리를 세우고 공격태세를 취했다. 아무래도 계속 싸우려는 것 같았다.
'도망칠 수 있겠어?'
'모르겠어..하지만 선생님을 두고 갈 순 없어.'
'쳇..어떻게든 해봐, 나도 저 녀석을 막지는 못한다고..'
콰앙!!
바닥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그 거대한 거구가 바닥을 박차고 뛰어오르며 까망이를 향해 공격했다. 아까와 같은 빛덩어리로 변한 까망이는 놈의 공격에 계속해서 부딪히며 맞받아쳤지만, 타격을 주진 못하는 것 같았다. 주먹과 부딪힐 때마다 그 충격으로 공기층이 생기며 주변에 콘크리트 파편과 먼지가 튕겼다. 혹시 내가 할 수 있는 게 있을까? 까망이 말대로라면 나 때문에 사람이 엄청나게 죽은 게 되는 거잖아..
갑자기 내 발목에 뭔가 따뜻한 감촉이 느껴졌다.
'세라야..'
'음악쌤!?'
선생님이 정신을 차린 것 같다. 하지만 선생님은 자력으로 움직일 수 있는 상태처럼 보이지 않았다. 나는 선생님을 일으키기 위해 부둥켜 안고 일어서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윤아도 데려가야 하는데 큰일이네..
'도망가렴. 선생님은 괜찮아..'
'안돼요 쌤.'
나는 어떻게든 선생님을 옮겨보려 시도했지만, 지금의 내 몸으로는 두 사람 옮기는 정도의 일조차 많이 버거웠던 것 같았다.
빛덩어리가 나에게로 돌아오더니 빛이 깨지듯이 사라졌다. 그리고 안에는 금방이라도 쓰러져버릴 것 같은 까망이가 있었다. 너 괜찮니?? 완전히 지친 것 같다. 윤기나고 복슬복슬했던 털은 축 쳐져 버렸고 다리도 후들거리는데다 입가엔 피와 침이 흐르고 있었다. 난 한 라운드를 처참하게 얻어맞고 돌아온 복서를 맞이하는 세컨드의 기분을 느끼면서 셔츠의 소매로 입가를 닦아주었다.
'어이, 꼬맹이. 더 이상 내가 지켜 줄 수가 없을 것 같다..'
'야, 안돼. 방법이 없는 거야!?'
매너없는 동상은 우리의 대화를 끊으려 달려들었고 까망이는 다시 빛으로 변하며 놈을 저지하려 했다. 하지만 까망이는 거의 서 있기도 힘들 정도로 엉망진창인 모습이었다. 다시 빛덩어리를 내려고 하는 것 같았지만 주면에 스파크가 일어날 뿐 구체가 형성되지 않았다. 거대 민머리의 커다란 주먹이 이쪽을 향해 날아왔다.
본능적으로 느낌이 왔다. 이제는 끝이구나라고. 눈앞에 주마등이 스치는가 싶더니 머릿속이 새하얗게 되었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갑자기 거대한 주먹이 느릿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놈이 내지르는 주먹이 일으키는 먼지의 숫자마저 셀 수 있을 것 같은 이질적인 감각. 지쳐 늘어져 버린 몸일 터인데 피가 청량음료가 된것 같은 상쾌한 에너지가 흘러넘치며 마치 뭐든지 날려버릴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겁도 없이 놈의 날라오는 주먹에 아무런 의심 없이 맞주먹을 날렸다. 어쩐지 당연히 막을 수 있을 것 같았고 넘어서 부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엄청난 파열음과 함께 잠시 주먹 사이로 일정공간이 진공상태가 되며 공기가 퍼져 나가는 게 보이고 있었다. 그 충격파 때문에 내 등 뒤를 중심으로 부채꼴 모양으로 땅이 파도가 치듯 파였다. 세탁소에 맡겨도 지워지지 않을 것 같은 더러워진 교복이 새하얗게 변하기 시작했고 입고 있는 교복이 빛가루가 되어 마치 바람에 날리는 민들레 씨앗처럼 날아갔다. 그리곤 그 아래 마치 입지 않은 것처럼 새털처럼 가벼운 의상이 나를 보호하듯이 감싸들었다. 마치 내가 어릴 적 마술봉을 들고 뛰어다닐 시절에 입었던 그런 반짝이고 하늘하늘한 옷. 순간 주먹을 맞대고 있는 부분부터 쩌저적 소리를 내며 그놈이 팔에 금이 가기 시작했고 곧 어깨까지 터지듯 부서졌다. 왠지 얼굴이 없는 녀석의 표정을 읽을 수 있는 것 같았다. 아까까지의 즐거워 보이던 모습은 사라졌고 의문과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아 보였다.
나를 무서워하는 건가? 눈치가 좋구만. 실제로 지금 나는 저 민두 녀석을 용서할 생각도 없고 더 이상 멋대로 움직이게 놔두고 싶지도 않다.
'너 설마!?'
까만 고양이는 갑자기 메고 있던 주머니를 확인하더니 경악스런 표정을 지었다.
언젠가 배운 적도 없고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누군가 내 뇌에 써두기라도 한 것처럼 어떤 마법이 뇌리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아니 마법이라기보단 기술에 가까운... 뒷걸음을 치는 녀석의 배를 향해 한 방. 거의 반사적으로 놈을 향해 뛰어들며 나는 당연하다는 듯이 주먹을 꽉 쥐었다. 어느새 내 주먹에는 손가락 앞에 커다란 하트모양의 너클이 생성되어 있었고 배워본 적도 없는 방법으로 주먹을 내질렀다. '하트스크류블로우!!!' 나도 모르게 기술명을 외치며 주먹을 내지르는 게 정말 신기한 기분이었달까. 주먹에 체중을 실어 몸 뒤쪽부터 당겨 앞으로 돌리면서 내질렀다. 그놈의 배에 부딪히는 순간 딱딱한 감촉이 느껴졌고 곧 하트모양 구멍이 뻥! 하고 뚫리면서 빨간빛이 감도는 주황색의 하트가 하늘까지 솟았다. 뚫린 구멍으로 석상 파편이 가루가 될 정도로 분쇄된 건 덤이고.
어쨌든 그렇게 그 거대 민머리는 움직임을 멈췄다. 갑자기 석상의 구멍 뚫린 부분에서 칠흑같이 어두운 까만색의 벌레 한 마리가 징그럽게 기어나왔다. 까망이는 기다렸다는 듯이 갑자기 튀어나와 그 녀석을 앞발로 눌러죽었다. 아무래도 이 벌레가 석상에 들어가 조종하는 메커니즘 이었던 것 같다.
'어..얼레??'
뭔가 무의식을 자각했다는 느낌이 들자 마치 일순간 꿈을 꾸고 있었던 것 같은 감각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내가 왜 이러고 있는 거지?? 라는 의문이 머릿속을 헤집었다. 하늘하늘한옷이 번쩍이더니 지저분한 교복으로 돌아왔고 순식간에 힘이 빠지며 내 몸은 연극인형의 줄이 끊어지듯 바닥에 널브러졌다.
'하아..하아..뭐가 어떻게 된 거야?'
검은 고양이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다 끝났어라고 날 안심시키긴 했지만 뭔가 굉장히 동정 어린 눈빛으로 할 말이 많아 보이는 얼굴을 했다. 뭐가 어떻게 되는 거지? 억지로 몸을 일으켜 주변을 둘러보았다. 일단 윤아나 음악쌤은 정신을 잃었지만 무사해 보였다. 학교의 사람들은 대부분 죽은 것 같았는데 더군다나 학교는 형체도 없이 부서져 버렸다. 지금이라도 119를 불러야 하나..?
나는 적어도 반 친구들의 생사 정도는 확인해 보고 싶어 몸을 일으켜 교실 방향으로 향했다.
'잠깐 기다려.'
까망이는 매고 있던 주머니에서 뭔가를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지금 말할 분위기는 아니라 말은 안 했지만 앞발로 주머니를 뒤적거리는 게 왜 이리 귀여워 보이냐. 앞발 위에 올려져 있던 건 아까 본 빛깔의 네모난 물체였다. 공중으로 떠오른 물체는 예쁜 빛을 내는 포장지가 벗겨지면서 초콜릿이 한 번 점멸하곤 하늘로 솟았다. 노란 빛을 띠며 솟구친 초콜릿은 구형으로 우리 학교 부지를 감싸 안았고 마치 시간이 회귀하듯 원상태로 복원되기 시작했다.
'초콜릿 하나의 마력은 어마어마해. 어지간한 일은 이 마력으로 해결할 수 있을 정도니까.'
까망이는 초콜릿을 하나 더 꺼냈다. 다시 하늘로 올라간 초콜릿은 다시 빛으로 변해 비싼 불꽃놀이처럼 터지더니 각각의 빛이 어디론가 향하기 시작했다. 초콜릿을 5개쯤 쓰면 어디 1년 마다 열리는 불꽃놀이 축제 안 부러울 것 같다.
'이걸로 이 주위에 인간들의 기억은 지워질 거야.'
주머니의 손잡이 부분으로 목을 넣어 건 까망이는 주머니 속을 확인하더니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고양이도 한숨을 쉴 수 있구나. 까망이의 말대로라면 죽은 친구들의 목숨도 전부 돌아온다고 한다.
어찌되었건 일이 잘 해결 된 건가? 상황이 하나도 이해가 안가고 있는데 내 머릿속에 몇 가지 의문점이 좀 더 밝은 빛으로 반짝였다. 첫째,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며. 둘째, 사람들의 기억은 지웠다고 했는데 그럼 내 기억은??
내 질문에는 까망이는 설명하기 귀찮다는 듯 무시해 버리더니 너희 집은 어디냐? 라는 말만 하곤 앞발로 얼굴을 비비고선 꼬리를 몸 주위로 감고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