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라는 것이 그렇다. 끝이 없는 존재가 아니다. 모든 것에 한계가 존재한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과연 나는 앞으로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눈앞의 A를 보았다. 무어가 또 마음에 들지 않는지 목에 핏대까지 세웠다.
“아니 그래서 말이야. 그 부장 놈이.”
오늘도 같은 하루의 연속이다. 어김없이 만나봐야 불평이나 듣는 처지였다. 혹시나 하는 기대는 역시나 하는 실망으로 바뀌었다. 턱을 괴고 A를 보았다.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한 시간? 두 시간? 얼마나 또 들어야 하는 걸까? 아니 그전에 내가 이런 얘기를 왜 들어야 하는 걸까?
“내 말 듣고 있어?”
A가 나를 째려보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있다. 물론 듣고 있다. 하지만 좀처럼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저 멍하니 A를 바라보았다. 언제나 그렇듯 일방통행인 대화는 나를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대화라는 것은 본래 서로에게 말을 건네는 행위이지 않나? 아니 적어도 서로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있어야 한다. 그러면 이건 대화라고 볼 수 없다. 그저 지껄이는 말에 불과하다. A가 내뱉는 말들이 내게 달려들었다. 가시가 박히듯이 내 몸을 파고들었다. 그럴수록 점점 몸의 힘이 빠져나갔다. A가 말하면 고개만 겨우 끄덕였다. 이건 대화가 아니었다. 대화라기보다 파블로프의 개 같은 거다. 그래. 개 같은 경우다.
“정말 회사 다니는 것도 그렇고 힘들어 죽겠다니까. 매일 부장 놈은 이거 해라 저거 해라 난리지. 선배 놈은 뭐든 안하고 넘기려고만 하지.”
A는 팔짱을 끼고 입술을 삐죽 내밀고 있었다. 그 이후에 나올 얘기는 안 봐도 뻔했다. 동기 놈들은 아부나 하고 힘든 일은 자기한테 온다는 얘기일 것이다. 내기를 해도 좋다. 아니면 내가 손에 장을 지질 것이다.
“그리고 동기 놈들은 맨날 아부만 한다니까? 짜증나 죽겠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나. 다를 바 없었다. 언제나 같은 불평이었다.
“그러면 다른 일을 해보는 건 어때? 그렇게까지 힘들면?”
조심스레 말을 꺼내자 A의 미간이 좁아졌다. 목에 핏줄을 내세우며 이를 갈았다. 잡아먹을 듯이 내게 다가왔다.
“장난해? 요즘 세상에 취직하기 얼마나 힘든데. 알잖아? 지금 이 회사 들어오려고 하는데도 얼마나 힘들었는데.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어?”
“미안.”
고개를 숙였다. 뭐가 미안한지 왜 고개를 숙이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숙였다. 이제는 습관처럼 고개가 내려갔다. 내가 무어를 잘 못했고 무어가 문제인지는 상관없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그런 인과관계와는 상관없이 나의 고개를 저절로 내려가야 했다. A의 기분을 맞춰주기 위해 오늘도 자동으로 내려갔다.
힘든 것은 이해한다. 누구나 그렇듯이 사회생활이라는 게 쉬운 것은 아니니까. 게다가 그 속에 있는 사람 관계란 늘 힘든 법이다. 때로는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과 일을 할 수도 있고 더 나아가 개자식들과 함께 살아가야하는 법이다. 이해되었다. 충분히 힘들겠구나 싶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것이 이해가 되는 건 아니다.
“아아. 짜증나 죽겠네.”
A가 또 다시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또 불만 사항들을 얘기하려는 걸까?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어째서 그걸 나에게 푸는 건가? 그 점에 관한 것이다.
논리적으로 생각해보면 나에게 말한다고 해결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내가 아무리 이 자리에서 들어준다 한들 해결되는 것은 단 하나도 없을 것이다. 오히려 더 악화만 될 것이다. 원래 모든 문제가 그렇듯이 시간이 지날수록 썩어가는 법이니까. 그렇다면 가장 좋은 해결법은 문제가 되는 사람과 얘기를 해보던가 아니면 스스로 나서서 행동하는 것이다.
하지만 논리적으로 생각하는 것도 웃긴 일이었다. 애초에 A는 내게 자문을 구하는 것이 아니다. 고민을 털어놓는 것도 충고를 바라는 것도 아니다. 그저 화풀이 대상이 필요할 뿐이다. 자신의 감정을 뱉을 대상이 필요한 것이다.
“아니. 그리고 오늘 또 무슨 일이 있었냐면.”
A에게는 문제 해결의 의지가 보이지 않는다. 그저 불만만 가득할 뿐이다. 이렇게 얘기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비록 오늘 기분이 좋아진다 고해도 내일 또 다시 기분이 나빠질 것이다. 그리고 난 또 그 이야기를 듣고 있겠지.
A가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래봐야 무슨 얘기를 하는 지 뻔했다. 의자에 기대어 A를 보았다. 무어를 저리 열심히 얘기하는지 관심이 생기지 않았다.
“그랬더니 그 선배가 나한테 뭐라고 하는 줄 알아?”
“뭐라고 했는데?”
“그게 다 내 잘못이라는 거 있지? 참 어이가 없어서. 일은 지가 벌려놓고 책임은 나보고 지라는 거야 뭐야?”
“응.”
어렸을 때 우리 집에 고장 난 라디오가 있었다. 테이프를 넣으면 맨날 같은 구간만 반복되는 바보 같은 라디오였다. 그 라디오 이런 기분이었을까? 바보 같다.
“너무하네.”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하네. 어쩌면 지금 내가 A에게 하고 싶은 말일지도 모른다. A는 그런 내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목청을 키웠다.
“그치? 네가 생각해도 그렇지? 그 사람은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그렇게 오늘도 A의 투덜거림은 계속 이어졌다.
집으로 가는 길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얼마 만나지도 않았는데 기운이 쏙 빠졌다. 어찌된 게 만나기 전보다 더 피곤했다. 그런 나와 달리 A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폴짝폴짝 뛰어다니는 모습이 신경에 거슬렸다.
“아~ 그래도 말하고 나니까 속 시원하네.”
해맑게 웃으며 나를 보았다. 순간 눈을 가늘게 뜨고 A를 쳐다보았다. 그렇구나. 너는 상쾌하구나. 나는 최악인데.
이상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어째서? 어째서 나는 이런 생활을 반복하는 걸까? 처음에는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연인의 힘든 점을 들어주는 것도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모르겠다.
“있잖아. 넌 내 생활은 궁금하지 않아?”
“응? 그게 무슨 소리야?”
무슨 소리라? 순간 등골이 오싹했다. 온 몸에 소름이 끼쳤고 소리를 지를 뻔했다. 세 시간이었다. 무려 세 시간을 얘기하고 나왔다. 그 시간 동안 질리도록 떠들면서 나에 과내서는 단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나의 하루가 어땠는지, 힘든 것은 어땠는지 단 한마디도! 오직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했다.
A가 멍하니 나를 바라보았다. 영문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째서 모르는 걸까? 하긴 알고 있을 리가 없다. 하도 힘드신 양반이니 그럴 만도 하다. 왜 내가 이런 말을 하는지 감도 잡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힘들고 인생 사는 게 힘들어서 나 따윈 신경 쓰지 못하니까.
“내가 직장에서 어땠는지? 밥은 먹고 다니는지? 그런 거 궁금하지 않아?”
“뭐야? 갑자기 왜 그래?”
A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순간 띵하고 머리가 울렸다. 뒷골이 당겨오면서 온 몸의 피가 머리로 몰려오는 것 같았다.
“넌 말이야. 항상 너 힘든 것만 말하잖아. 그걸 듣는 내가 어떨 거라고 생각해본 적은 있어?”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어쩌면 한계가 온 모양이다. 당연한 일이다. 언제까지 이런 것이 지속되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언젠가는 터질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오늘일 줄은 나도 몰랐다.
“오늘따라 왜 그래?”
A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그렇게 나에게 온갖 불평불만을 하면서도 내 얘기는 듣고 싶지 않구나. 정작 나에 대해서는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구나. 웃음이 흘러나왔다. 갑자기 입에서 후후하고 웃음소리가 계속 새어나왔다. 바보 같다. 이런 사람을 연인이라고 사귀고 있었다니…….
“오늘따라? 그렇구나. 너에게는 오늘따라 그렇겠지. 그런데 생각해봐. 언제 한번이라도 나한테 힘든 일 있냐고 물어본 적 있어? 늘 그랬어. 넌 항상 너 힘든 것만 말해왔지 내게 관심 따윈 없었어.”
한번 터진 말들은 더 이상 막을 수 없었다. 점점 목청이 올라갔다. 이를 악물고 A를 쳐다보았다.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었다. 아니 참지 않을 것이다.
내 말을 듣고 A가 발끈했다.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내게 다가왔다. 얼굴을 들이밀고 다시 목에 핏대를 세웠다.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이며 소리쳤다.
“연인사이면 그 정도 말할 수 있는 거 아니야? 아니면 뭐 그런 거 얘기했다고 기분 나쁘다는 거야?”
고개를 저었다. 정말 모르고 있구나. 아니 알려고 하지 않구나. 사실 마음 한구석으로 알아차려 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 끝이다. A에게 나는 당연한 것이었다. 이렇게 A의 투정을 듣는 나날이 그저 당연한 것이었다.
“아니. 힘든 일이 있으면 애기할 수도 있는 거지. 그런 걸로 화를 내고 그래? 오히려 연인이면 들어주고 위로도 해주고 그래야 하는 거 아니야? 그게 당연한 거 아니냐고?”
발악을 하는 A를 보자 정이 뚝 떨어져 나갔다. A에게 나는 무엇인걸까? 사랑하는 연인? 감정을 버리는 쓰레기통? 답은 이미 알고 있다.
“그래. 그렇구나. 당연한 거구나.”
눈을 감고 상상해보았다. 앞으로의 미래. 지금보다도 힘든 일이 더 많을 것이다. 회사에 입사하고 난 뒤 고통 따윈 앞으로의 일에 비하면 작은 티끌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내 모습이 보였다. 한숨을 내쉬며 A의 이야기를 듣는 내 모습. 어쩔 수 없이 맞장구나 치는 내 모습. 정작 나 힘든 건 하나도 말 못하는 내 모습. 그런 바보 같은 모습만 눈앞에 그려졌다.
“우리 헤어지자. 더 이상 못 들어주겠다.”
눈을 뜨고 A를 밀어냈다. 가로등 아래로 보이는 얼굴이 지겨웠다. 씨익거리는 숨소리도 모든 것이 지겹다.
발걸음을 옮겼다. A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애초에 궁금하지도 않았다. 더 이상 A와 엮이고 싶지 않았다.
“자, 잠깐. 헤어지자니? 너무한 거 아니야? 겨우 불평 좀 했다고 이러는 거야? 나 사랑하는 거 아니었어?”
A가 내 앞으로 달려왔다. 양 손을 크게 펼치고는 내 앞길을 막았다. 그런 A를 지나가려 몸을 비틀었다. 하지만 A가 나를 놔주지 않았다. 한숨을 내쉬고 A의 어깨를 붙잡았다.
“겨우 불평? 넌 정말 너 밖에 모르는구나.”
A를 밀어냈다. 아까와는 다르게 세게 밀었다. 덕분에 A는 그대로 뒤로 넘어졌다. 엉덩방아를 찧고는 나를 올려다보았다.
“사랑? 넌 이런 걸 사랑이라고 부르니? 지난 몇 개월 동안 단 한번이라도 달랐던 적이 있니? 전화를 해도, 만나서 얘기를 해도 힘들다는 말만 하고 어떤 얘기도 하지 않았잖아. 매일 사람 기운이나 빼놓고. 게다가 무슨 얘기만 하면 뭘 아냐고 소리치고. 너는 양심도 없니?”
A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난 네 감정을 담는 쓰레기통이 아니야. 그럴 거면 집에 가서 인형이랑 얘기해.”
발걸음을 옮기자 훌쩍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순간 너무했나한 거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그래도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먼 미래, 한숨을 내쉬는 내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렇게 A의 곁을 지나갔다. 길을 걸어갈수록 A의 울음소리가 작게 들렸다. 그리고 어느 샌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