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선 사랑
밤 열한시. 오늘도 컴퓨터 앞에 앉았다. 한 손으로 마우스를 잡는다. 인터넷 창을 열고 나서 주소에 익숙한 문자들을 입력한다. 평소에 영어 단어 하나 외우기 힘든 나였지만 이럴 때면 누구보다도 빠르게 타자를 입력한다. 엔터키를 누르자 우리들의 방으로 이동한다. 그리고는 마우스로 채팅인원을 눌러본다. 나를 빼고 아무도 없었다. 기지개를 펴면서 몸을 비틀었다. 띠링 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가 들어왔다. 사실 누군인지 이미 알고 있었다. 오늘도 그녀에게 인사를 올렸다.
-안녕.
그리고 오늘도 우리의 대화가 시작되었다.
처음으로 그녀를 만난 것은 일 년 전의 일이다. 당시에 펜팔이 하고 싶었던 나는 이리저리 펜팔 친구를 구하고 있었다. 그때는 로망인가 낭만인가 아무튼 그런 걸 쫓고 있었다. 바보 같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때는 그게 멋져 보였다. 그렇게 사람을 찾아봤지만 현대 사회는 인터넷 사회였다. 메일 한방에 해외로 소식이 가는 시대에 누가 편지를 쓰려고 할까? 그렇게 포기하려는 때 그녀를 알 게 되었다.
그녀는 늘 이 채팅방을 이용하였다. 사진으로 얼굴도 보고 간간히 목소리도 들었지만 사실 한 번도 그녀를 만난 적이 없었다. 하지만 나는 누구보다도 그녀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만나지 않아도 우리는 충분히 서로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녀에 대해 퀴즈를 낸다면 그 누구보다도 높은 점수를 받을 자신이 있었다. 그만큼 우리는 서로에 대해 많이 알고 있었다.
-그래서 오늘은 애들이랑 햄버거 가게에 갔는데 글쎄 사람이 많아서 곤란했다니까.
-하긴 점심 시간대 사람이 많지.
우리의 이야기에 어떤 목적도 없었다. 그저 대화를 위한 대화였다. 어떤 의미로 정말 대화다운 대화였다. 대화 그 자체가 목적이었고 서로를 향해 말을 건넸다. 수다스러운 우리는 늘 이렇게 밤을 지새곤 했다.
-그리고 보니 이제 일 년이네.
-뭐가?
-우리가 알게 된 게 벌써 일 년이야!
-그렇네. 벌서 일년이라니 시간 참 빠르네.
웃으면서 타자를 쳤다. 생각해보면 일년동안 참 많은 일이 있었다. 남에게 말 못할 고민부터 어린시절 흑역사까지 무어 하나 빼놓지 않고 그녀에게 털어놓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딱 하나를 제외하고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있잖아. 너는 좋아하는 사람 있어?
문득 물어보는 그녀의 질문에 잠시 주저했다. 딱 하나를 빼고 모든 것을 얘기했다. 그것은 바로 내가 그녀를 좋아한다는 것이다. 어찌 보면 미친 얘기일수도 있다. 얼굴 한번 마주하지 않은 사람을 어찌 사랑할 수 있겠냐고 물어볼 수 있다.
하지만 사랑이라는 감정은 대체 무엇일까? 사랑은 물건과 다르다. 눈에 보이는 것도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내 생각이지만 사랑은 내 마음 속에 있는 것이다. 이렇게 내가 그녀에 대해 느끼는 감정은 감히 다른 누군가가 모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내가 사랑이라 느낀다면 이 감정은 사랑인 것이다. 비록 그것이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사람이라도 말이다.
-있기는 한데. 왜?
-그 내 친구가 좀 특이한 사람을 좋아해서 그게 고민이래.
-특이한 사람? 왜 사차원 같은 거야?
-아니. 그게 아니라 그 인터넷 채팅으로 알게 된 사람을 좋아하게 된 것 같아서 고민이래.
고개를 갸웃거렸다. 과연 그렇군. 세상에 별난 사람이 나 말고도 또 있나 보다. 게다가 우연하게도 그녀의 친구라니. 참으로 아이러니했다. 후후. 살짝 웃고는 타자를 마저 두드렸다.
-그래? 그게 왜 고민이야? 좋아하면 좋아하는 거지. 그게 아니라면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거야?
-그게 상대방이 자기를 이상하게 생각할까봐 걱정이래.
-상대방이?
-응. 그렇잖아.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사람을 좋아하게 되다니. 그게 일반적인 경우는 아니잖아.
일반적이라. 물론 일반적이지 않다. 보통 사람은 만나서 호감을 느끼고 그런 지속된 만남으로 사랑을 하게 되겠지. 하지만 일반적이라는 건 무엇일까? 언제부터 그런 것이 사람들의 일상을 지배하기 시작했던 걸까?
-그게 중요한가? 일반적이든지 아니든지 중요한건 그 친구의 마음이지. 중요한건 좋아하면 좋아하는 거고 아니면 아닌 거잖아. 좋아하는 거면 좋아하는 거지. 복잡할 것도 없어. 그냥 좋아하는 거니까.
-그래도 그 상대방이 이상하게 생각하면 어떡해?
-사랑에 있어서 최선이 뭐라고 생각해?
갑작스러운 질문에 그녀가 대답을 머뭇거렸다. 깜빡이는 말풍선을 보며 조용히 기다렸다.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글쎄...... 잘 모르겠어.
-내 생각에는 자신의 마음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야. 상대방이 싫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내 마음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데 상대방의 마음을 어찌할 수는 없잖아. 그러니 그때는 포기해야겠지. 하지만 그걸 겁내서 아무것도 안하면 이루어지는 것이 있을까? 난 그렇게 생각해. 포기하더라도 최선을 다해야하지 않을까 싶어. 자신의 마음에 솔직하고 그런 마음과 상대방에게 최선을 다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해.
적어도 내가 생각하는 사랑이라는 것은 그런 것이었다. 사실 내가 무슨 대단한 철학자나 생각이 깊은 사람도 아니었다. 그저 길을 지나가다 흔히 볼 수 있는 범인에 불과했고 나 또한 사랑 앞에서 고민도 하고 상처도 받는 청춘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난 내 마음에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남들이 보기에 이상해도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본인의 마음이다. 내가 그녀를 좋아하듯이 세상에 이런 사랑도 존재한다. 누군가가 다른 사람의 사랑을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의 마음이다.
-하지만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사람인데? 그걸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러면 사랑이 무엇이라 생각해?
-뭐랄까 다른 사람을 좋아하는 마음?
_그러면 그 친구가 가지고 있는 마음은 사랑이 아닐까? 사랑에 있어서 만남은 조건 중 하나일 수도 있지만 필수 조건은 아니야.
-그러면 어떤 게 사랑인데?
-사실 나도 잘 모르겠어. 하지만 적어도 내 생각에 사랑은 조건이나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닌 것 같아. 사실 그렇지 않아? 어느새 보면 좋아하게 된 거지. 이유가 어디에 있겠어. 만일 이유가 있다면 그 이유가 사라지면 그 사람을 더 이상 좋아하지 않는 거야? 그건 아니잖아. 좋아하니까 이유가 생기는 거지. 이유가 있어서 사랑을 하는 것은 아닌 것 같아.
-그래. 그렇구나. 듣고 보니 그러네.
-그치? 그런 거야. 세상에 그런 사랑도 있고 저런 사랑도 있는 법이니까.
-그러면 만일 말이야. 이건 정말 만일인데 내가 널 좋아한다면 어떨 것 같아?
순간 타자를 치던 손가락이 굳었다. 무슨 말이지? 머리가 새하얗게 변해갔다. 방금 전까지 잘난 듯이 떠들던 놈이 사라지고 소심한 겁쟁이가 튀어나왔다. 뭐지? 무슨 의미로 얘기하는 걸가?
-저기 혹시 기분 나빴어?
그녀가 조심스레 메시지를 보냈다. 그 순간 얼른 타자를 쳤다. 잠시 생각한다는 것이 어느새 시간이 이렇게 흘러버렸다. 조심스레 타자 위 버튼을 하나하나씩 눌러나갔다.
-아니, 아니. 갑자기 그런 얘기해서 놀랐어.
-왜? 내가 이런 얘기하니까 이상해?
-아니. 그냥 갑작스러워서.
-그래서 넌 어떨 거 같아?
-글쎄다. 솔직하게 말하면 좋겠지. 사실 내가 널 본 적이 있는 건 아니지만 그만큼 좋은 사람이니까.
-좋은 사람이라고?
-응. 이런 말하면 이상하겠지만 넌 충분히 매력적인 여자야. 내가 널 만난 적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적어도 내가 아는 바로는 사고방식도 그렇고 꽤나 멋진 사람이라고 생각해.
-그렇구나. 그렇게 생각하는지 몰랐네.
하긴 생각해보면 이렇게 말한 적은 처음이었다. 잘난 듯이 지껄였지만 나도 누군가에게 조언을 할 처지는 아니었다. 나 또한 그저 바라볼 뿐 만이다. 사람이 늘 그렇듯이 타인의 일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나서지만 막상 자신의 일에는 소극적으로 변해버린다. 그나마 이번에는 선방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얘기했을 것이다. 평소에는 이런 얘기를 죽어도 하지 않았으니까.
깜빡이는 말풍선을 그저 바라보았다.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어쩌면 너무 오버해서 얘기 했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오버라는 표현은 이상하지 않을까? 적어도 난 내 진심을 얘기했을 뿐이다. 하지만 또 생각해보면 부담스러울지도 모른다. 그저 장난스럽게 얘기한 것에 너무 진지하게 대답한 것은 아닐까?
한참동안 말풍선은 그저 깜빡이기만 했다. 이런 적은 또 처음이네. 오늘은 뭔가 처음인 일이 가득했다. 사랑에 관해 얘기한 것도 처음이었고 이런 질문을 받은 것도 처음이었다. 그리고 오늘 또 처음으로 우리 사이에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물론 나만 그렇게 느낄 수도 있다. 어쩌면 화장실을 간 것일 수도 있고 그것도 아니라면 잠깐 자리를 비운 것 일수도 있다. 하지만 왜 일까? 괜시리 가슴 언저리가 간지러워졌다.
하지만 결코 나서지 않았다. 누군가가 내게 바보 같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게 내 사랑이었다. 사랑은 강요하는 순간부터 사랑이 아니었다. 그건 집착이었다. 우리의 관계도 그랬다. 우리가 서로에 대해 친밀감을 느끼고 있다 한들 그것은 유리와 같은 것이다. 얼굴을 맞대고 목소리를 나누는 사이가 아니니 언제든지 단절될 수 있는 사이였다. 그녀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 전에 내게 소중한 사람이었고 놓치고 싶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내가 선택한 방법은 그저 지켜보는 것이다.
오랜 침묵이 끝나자 그녀가 한마디씩 메시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턱을 괴고 그 문장들을 천천히 읽어나갔다. 문장 하나, 단어 하나 놓치지 않고 머릿속으로 들어왔다.
-나는 아직 잘 모르겠어. 너는 괜찮다고 말하지만 아직 이런 내가 이상하게 느껴지거든. 솔직하게 말하면 내가 널 좋아하는 것 같아. 아니 확실하게 좋아해. 하지만 과연 이게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난 모르겠어. 이런 경우는 처음이거든.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사람을 좋아하게 되다니 상상도 못한 일이야. 인터넷에서 흔한 썰로만 생각했는데 내가 그 당사자가 될 줄이야. 그래서 많이 고민했어. 너에게 솔직하게 말을 할까 말까. 며칠을 고민했는지 몰라. 그런데 오늘 너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생각이 바뀌었어. 그래서 물어보고 싶어. 혹시 괜찮다면, 너도 날 좋아한다면 우리 언제 만나보지 않을래?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를 했다. 조심스러우면서 부드럽게 따뜻하면서도 확실하게 자신의 말을 이어나갔다. 그녀의 글을 읽으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그랬구나.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빠르게 타자를 쳤다
-나야 좋지. 이번 주 주말에 만나지 않을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