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흠."
천천히 걸어가는 갈색털 말 위에서 베르가는 그 큰 입으로 시원스럽게 사과를 배어먹었다. 큼지막한 손은 붉그스름한 사과를 한 손으로
쥐고도 남을 만큼 컸는데 그래선지 사과는 작아보였고, 실제로 작았던지 그는 단 몇번만에 사과를 맛있게 먹어치운 후 살을 전부 내주
고 홀쭉해진 찌그레기를 아무렇게나 휙 던져버렸다. 수초도 걸리지 않는 그 행위에 몸을 잃고 길바닥에 떨어진 사과의 모습은 실로 애처
롭기까지 했다.
"항상 생각했던건데... 베르가. 너 정말 과일 좋아하는구나."
그런 그의 옆에 제라스가 히죽거리며 그렇게 말했다. 담담한 표정의 베르가는 미간을 구기는 것으로 무슨 의미냐고 물어보았고 제라스는
익숙한듯 자연스럽게 입을 열었다.
"뭔가 야수같으니까 어울린다면 어울린다고도 할 수 있는데... 뭐랄까. 조금 아기자기한 느낌? 뭔가 통돼지같은걸 으적거리는게 잘 어울
리는데 너."
"나한테 대놓고 그런 소릴할 수 있다니. 기가 막히는구만."
"하지만 봐봐. 생긴건 무슨 전투에 특화된 맹수같은데 소식하고 과일 매니아에, 심지어 술도 마시지 못한다니. 이상하잖아? 엄청 이상해.
뭘 꾸미고 있는거야?"
".음모는 약해빠진 것들의 전유물이라 난 그딴거 안해. 그리고 이상한 건 네놈도 마찬가지라 되돌려 말할 수 있는 거다. 계집애같이 생긴
주제에 대식가, 고기 매니아에, 심지어 애주가라니. 이상하잖아 멍청아."
"아 진짜...! 계집애 계집애 하지말라고!"
"그럼 그 치렁치렁한 머리 좀 자르는게 어때?"
"아니 나 말고도 장발인 놈들이 지천에 깔렸는데 왜 항상 나만 계집애 소릴 들어야 하는거지? 완전 열받는다고!"
"..."
티격태격거리다가 제라스와 베르가는 어느 순간 서로 할말을 찾지 못하고 다시 입을 닫았다. 그들이 이렇게 천천히 말 위에서 잡담을 나눌
정도로 지루한 이유는, 그러니까 가롯테의 승전행렬에 합류했기 때문이다. 피해를 상당히 입었지만 워낙 대군인 탓에 이들의 움직임은 느
리기 짝이 없었다.
전쟁이 끝났는데 왜 제라스와 베르가가 이 행렬단에 있는가. 그것은 간단한 일이다. 가롯테는 수도까지 복귀하는 길에 호위병을 원했고, 그
다지 응할 생각이 없던 리처드는 그가 건네준 골드를 보고 변심의 미소를 지었다. 계약은 연장되었고, 그리하여 제라스와 베르가를 포함한
콘첼로스 용병단의 10명정도가 렝가르드의 수도까지 가야했다. 애시당초 호위라곤 해도, 아무리 가롯테의 지휘실력이 터무니없을 정도라
지만 이정도의 대군에게 고작 10명의 인원이 더 필요할리도 없고 보탬이 될리도 만무했다.
콘첼로스 용병단 한명이 수십명분의 싸움실력을 지녔다고 해도 그런 사실을 믿는 사람도 아니고, 그는 그냥 단순히 화려한 승전파티에 증
인을 한 사람이라도 더 참석하면서 마음껏 기분을 내보고 싶은 것뿐이었다. 가롯테 왕은 그런 사람이었다. 리처드가 일이 있어 참석하지 못
한다고 하자 얼마나 집요하게 그를 붙잡았는지, 지금 생각하면 그의 소인배스럽고 좁아터진 마음씀씀이가 따라온 10명에게 뭔가 보복을 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베르가처럼 예민한 단원들은 그래서 긴장을 늦추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출발한지 벌써 수시간. 터무니없을 정도로 단조롭고 느린 행렬은 그야말로 자기 하고싶은 것만 하고 살아온 그들에겐 눈물이 멈추지
않을 정도로 힘겨운 일이었다. 아무도 밖으로 나타내지 않고 있지만 속으론 모두 렝가르드군의 깃발을 보며 이를 갈고 있을 것이었다. 애시
당초 국기에 그려진 저 두개의 검 자루는 처음부터 형제국가였던 퀴네비아를 상징하는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퀴네비아라는 나라가 있
던가? 없다. 렝가르드의 발빠른 배신으로 허를 찔려 멸망해버렸다. 친족끼리의 추한 권력다툼이야 아무래도 좋다 치지만... 차라리 가롯테가
선대들의 10분의 1만 닮았다면 뒷통수에 칼을 겨누건 배신을 때리건 어찌되었든 민첩했을 것이다. 대체 뭔데? 렝가르드는 원래 기마병이
유명했다던데 고작 10년 사이에 그런건 온데간데 보이지도 않는다.
"렝가르드 수도까지 호위하다니. 아까운 하루하루가 죽어가는 느낌인데..."
베르가와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제라스가 대뜸 말에 착 달라붙어 긴 한숨을 내쉬며 그렇게 말했다. 베르가는 아무런 표정의 변화 없이 앞으로
시선을 고정한 체로 대꾸할 뿐이다.
"추가보상이 있잖아. 아무것도 안하고 수도까지 가서 왕성의 파티에서 비싼 음식과 술을 축낼 수 있다니 너한텐 좋은거 아니냐."
술처럼 정신을 흐리게 하는 것이 대체 뭐가 좋은지 알 수가 없는 베르가는 비꼬듯 그렇게 말했다. 그에게 있어 술이란 용맹한 전사들에게 필수
라는 느낌은 있었지만 동시에 그저 허세와 과장, 이해할 수 없는 악마의 음료와도 같았다. 알고 있던 사람들이 술에 취해 바보가 되는 꼴을 그는
굉장히 싫어했고 그렇기 떄문에 자신도 그런 모습이 되고 싶지 않았다. 뭣보다 술이 약하기도 했지만, 그런걸 떠나서 애시당초 맛도 없이 독하
고 쓴 것을 뭐가 좋다고 그렇게 마셔대는지도 의문이었다.
언제나 날카롭고 온전한 정신을 유지해도 부족한 인생이거늘 그들은 술에 의지해 자신의 나약함을 드러내는 것 같았다. 강자라도 마찬가지. 그
것은 방심과 태만의 상징이었다. 빈틈 투성이가 되는걸 뭐가 좋다고 그러는지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다. 동화나 시인의 노래에서 흘러나오는
영웅들이야 만취해도 수백을 배어넘기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세상은 자기 몸둥이 하나만을 늘 믿고 살아가는 것이고, 특히나 자기같은 직
종은 순간의 판단미스가 생과 사를 결정짓는다. 당사자가 그런 위태로운 외줄타기를 하는데 한 치의 흐트러짐이 있어서야 될까? 아닐 것이다. 그
것은 객기고 오만이며 나태고 태만이다. 활시위를 팽팽하게 당겨야 멀리 날아가듯, 사람은, 혹은 전사는 언제나 팽팽한 긴장상태를 유지해야 어
떤 상황에도 대처할 수 있다. 한치 앞도 볼 수 없는 전란의 시대니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헤헤헤...술이 있었지 에헤헤헤..."
...이런 베르가의 철학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술생각이 나 헤죽헤죽 행복하게 웃는 제라스. 이렇게 이해가 안되는 인물과 가장 친하다는 사실
이 가끔씩 베르가를 놀라게 하곤 했다. 뭐든지 둘 중 하나로 구분해 선택하고 지르는 자신과 다르게 항상 신중하고, 계집애처럼 구는 주제에 정신
차려보면 항상 싸움터건 술자리건 파티건 어디서든 평소의 모습 그대로 살아남은 남자. 그와 붙어본적은 한번도 없고 붙으면 당연히 자신이 이긴다
고 생각하고 있지만 가끔씩, 뭔가 그에겐 자신에게 없는 뭔가가 있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최근에 문득문득 들곤 한다. 생각해보면 자신과 같은
인물에게 이렇게 거리낌없이 대하는 인간은 드물고, 그런 자신을 이해해주는 주제에 자신과는 또다른 반대의 타입에게도 상냥하게 대해 좋은 관계
를 유지하고 있다. 그것은 분명히 그의 장점이기도 했지만, 솔직히 말해 이해가 되지는 않았다.
"그나저나 나머지 놈들은 안 온건가?"
"녀석들은 리처드와 함께 돌아가버렸다."
"술 안 먹는 무뚝뚝한 야수. 빅...아니. 베르가와 함꼐라니.. 뭔가 슬퍼지는데..."
"슬픈건 니새끼랑 있어야 하는 내쪽이지."
제라스와 베르가 외에 같이 용병단 내에서도 몰려다니는 일행들은 있었다. 그들은 전쟁 전에 지각한 나머지 네명으로, 싸움광 페레가니스와
신궁 에드발드, 냉정한 다크엘프 검사인 케실과 이해는 안 가지만 어쨌든 친해졌다...고 생각하는 암살자. 데이리크가 그들이었다. 50명 남짓
한 작은 용병단이지만 유독 이 여섯명은 나머지 단원들과 가깝게 지내는 편이 못 되었다. 그래서 제라스와 베르가가 따로 떨어져 이렇게 담소를
나누고 있는 것이다. 이유? 이유는 간단하다.
애시당초 베르가는 말 한마디에 상대의 머리통을 박살내버리려는 다혈질에 농담을 잘 알아듣지 못하는 트러블 메이커였고, 제라스는 모두와 잘
지내는 편이었지만 베르가의 편을 들어주다가 그만 평판이 낮아지고 말았다. 오래전부터 용병단원이었던 다크엘프 케실은 원래부터 아무나 다가
갈 수 없는 오오라를 풍기는 차가운 얼음공주같은 느낌이었고, 페레가니스는 성격은 정말 유쾌한데... 정말이지 유쾌한데...문제는 만나는 사람마
다 싸움을 걸어서 쓰러뜨려야 적성이 풀리고, 그런 주제에 정말로 다 이겨버리는 통에 적으로 가득차버렸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이단교 승배자이
자 청부살인마인 데이리크는 그 악명과 불길한 웃음소리와 말투, 성격등이 문제가 되어 아무도 가까히 하지 않았고 그 관계는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결과적으로, 워낙 소수이고 모두가 싸우는데 능한 이들로 구성된 엘리트 집단답게 일이 벌어지면 협동하는건 순식간이지만 암묵적으로 약간의
거리가 있다는 것이다. 대체적으로 베르가나 데이리크를 제외하면 보통은 다 사이가 좋은 것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그 조그만한 거리는 줄어들지
않고 있다. 바꿔 생각해보면 이런 독불장군들이 서로 만나게 된 것도 퍽 정상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
베르가는 문득 그런 생각을 했고, 그래서 자연스레 헤죽거리는데 여념이 없는 제라스를 쳐다보았다.
각자 개성이 너무나 뚜렷한 그들을 그나마 결집시킨 것도 사실은 그로부터 시작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왕의 행렬은 느릿느릿하고 침묵으로 가득했으며, 산적들이 감히 습격해올 수 있는 규모도 아니었기에 안전했다. 베르가는 지루했고, 지루
했기 때문에 그때의 추억을 떠올려보기로 했다. 지나간 것들은 되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사람은 황혼에 가까울수록 과거를 회상한다. 사람의
인생이란 결국 추억이 얼마나 쌓여 있는가에 따라 노년의 유복함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던가. 비록 노쇠하고 병에 들고 가난하더라도, 추억
이 가득한 노인은 그것을 양분으로 고독을 견뎌낸다. 비록 한창의 나이지만, 베르가는 이따금씩 그런 생각을 하곤 했다. 그는 다혈질에 충동
적인 기질이 다분한 전사 그 자체였지만 의외로 섬세하고 진중한 면이 있었다. 그에게 있어 모든 추억은 아름다웠다. 후회도 없었다. 다만 반
성할 부분이 있을 뿐.
...너머로부터 고개를 숙인체 침묵하고 있는 아드가를 가둔 압송용 쇠창살이 보였지만 베르가가 내뿜는 파이프 연기에 의해 곧 그 색이 바랜
황금빛 갑주와 패잔병의 씁쓸한 뒷모습은 일순간 보이지 않게 되었다. 뿌옇게 퍼진 연기 속에서, 베르가는 추억를 회상했다.
그윽하게, 그는 허공을 주시했다. 순식간에 형태를 잃고 사라져가는 담배 연기 너머엔 지루한 행렬단 대신 낮익은 풍경이 펼쳐지고 있다.
희미하고 애매모호하게, 연기는 과거로 그를 인도해주었다. 그의 눈은 이제 허공을 지나 지난날을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