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그다지 높지 않지만 그렇다고 낮지도 않은 테르티아 인근의 고성(古城)은 그 몸이 일정한 크기의 회색빛 돌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드널은 평야의 언덕 부근에 위치한 이 성은 날짜를 기록하기 이전부터 존재했던 것으로 알려졌는데, 그래선지 무너져서 보수가
필요한 부분도 많았지만 여차저차 시대의 야망가들에 의해 주인을 바꿔가며 긴급할시마다 사용되곤 했다.
..그 옛날 거인족을 몰아내고 인류의 시대를 연 대영웅. 윌시언이 있었을때도 존재했다고 하니 모르긴 몰라도 최소 200년 이상의
것이리라. 아무도 이 바위성의 가치를 깊게 파고들지 않았지만 이곳은 주인만 잘 만난다면 작은 요새로 불리기에 충분했다. 수백
년을 견뎌온 성인데도 성벽 외에느 거의 멀쩡할정도로 돌의 간격과 질, 건축 기술들이 놀라울 정도로 정교했으니까 말이다. <옛
것이 항상 지금것보다 가치있다.>라고 말했다던 약 백년전의 미치광이 현자의 말도 비록 극단적이긴 했으나 어느정도는 일리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튼튼하게 지어진 성은 삭막한 인상은 있었으나 어찌되었든 기능적인 측면으로는 제기능을 충분히 발휘하고 있었다. 밖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안으로 절대로 들어오지 못 했다. 그만큼 틈이 없다는 것인데, 문제는 창가라고 불릴만한 공간이 비교적 적은
구조였기 때문에 햇빛도 같이 차단되는 단점이 있었다. 상황을 보려면 베르가와 제라스가 그랬었듯 몇개의 계단을 올라 성벽 위나
전망대 근처에 가야만 했다. 덕분에 안은 낮이든 밤이든 어둠으로 가득차있는 편이었다. 건축한 종족이 어떤 종족이었건 지혜로운
후대들에 의해 일정한 간격마다 휏불을 걸어놓았지만 대체적으론 그 분위기는 거의 그대로였다. 그런 차갑고 칙칙한 그늘 속에서,
일렁이는 몇번째의 불빛 앞에서 몇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는 그다지 큰 편은 아니었지만 건물 자체가 대체로 막혀있는 형
태였기 떄문에 작게 울려퍼지기도 했다.
"전황은?"
"아직은 팽팽해. 렝가르드군도 이번엔 꽤 선전하나봐."
제라스가 추위에 떨며 내려왔을 즈음엔 몇명의 용병단원들이 대륙의 지도를 펴놓고 현상황에 대해 논의하고 있었다. 베르가는 한쪽
모퉁이에 있는 의자에 앉아 늘 그랬듯 묵묵히 그들이 주고받는 말들을 듣고 있었고 제라스도 하얀 입김을 내뿜으며 아래로 내려와
조용히 베르가의 옆에 서 그의 행위를 따라했다. 팔짱을 끼고 같이 상황을 주시했는데, 그들의 앞에는 4명 정도의 각기 다른 단원들
이 그들을 신경쓰지 않고 말을 주고 받고 있었다.
"대장은 어디갔어? 우리 언제 시작하는거야?"
지도를 바라보다가 한 남자가 그렇게 말하며 짜증을 냈다. 베르가만큼 키가 크진 않지만 그 못지 않게 엄청난 근육질의 이 남자는 이
전부터 용병단에서 크게 활약해 유명세를 타고 있는 페레가니스라는 남자로, 그 유명한 북방의 칼테브리아 제국군과, 그것도 투신이
라고까지 불리우는 차르브 황제와도 격돌하고 살아남은 몇 안되는 사람이기도 했다. 모든 콘첼로스 일원들이 전투의 대가라고 불리지
만 그는 그 중에서도 유독 굉장한 실력을 가지고 있어, 소문으로는 인간의 범주를 이미 초월했다고 불리기까지 하고 있었다. 싸움을 좋
아해 강자들을 꺾는 보람으로 살았던 그가 용병단에 합류한 것은 그의 작은 변덕 중 하나였다는 듯 하다.
"일부러 조금 뜸을 들이나봐. 돈문제가 아직 협상이 안 됐다나."
담담하게 대꾸하는 차가운 인상의 저 여성은, 자세히 보면 귀와 피부색이 일반인과는 판이하게 다른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렇다. 그녀는
무려 다크엘프다. 보랏빛에 가까운 피부에 길죽하게 뻗은 귀, 긴 백색의 머리카락과 호박색 눈동자는 분명히 인간처럼 두 다리와 두 팔을
가지고 있지만 인류와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그녀의 이름은 케실로, 대장과 인연이 닿아 콘첼로스에 합류한 모양이었다.
가녀린 여성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그것은 엘프종 특유의 선천적인 눈속임으로, 그녀의 민첩하고 예리한 검술은 단연 콘첼로스 내에서도
다섯손가락 안에 손꼽힌다고 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도 돈 문제로 콘첼로스를 불러세워놓고 갈팡질팡이라니. 가롯테가 괜히 패전을 일삼는 군주가 아니었나보군."
지도를 노려보며 입을 연 남자. 검은 로브를 뒤집어 써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 그는 데이리크라는 이름의 암살자로, 사실 전쟁과 전사라는
개념보다는 청부살인계쪽이라고 보는 것이 맞다. 다만 그의 기량은 자신의 전문 분야를 뛰어넘어 전쟁터에서도 빛을 발휘하고, 또 자기
자신도 살인에 대해 조금 광적인 면이 있어 콘첼로스에 합류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콘첼로스의 일원들을 철저히 규율로써 대하지만 일
반적인 타인. 즉 콘첼로스 외의 모든 인간들에게 어떤짓을 저지를지 알 수 없는 살인광이다. 으레 이런 풍의 사람들이 지나치게 유쾌하거나
악담을 일삼는 것에 반해 그는 조용하고 침착하며, 콘첼로스 내의 모든 사람보다 책을 많이 읽는다.
"현명하지 못한 것보다 우유부단한 것이 군주에겐 더 큰 죄악이지."
마지막으로 베르가처럼 조금 떨어져서 조용히 침묵을 지키던 에드발드가 그렇게 툭 내뱉었다. 전장터에서 한쪽 눈을 잃은 그는 안대를 하고
있었고 항상 바드(Bard)처럼 깃털달린 날렵한 디자인의 사냥꾼 모자를 쓰고 있었다. 그는 전장터에서도 철갑옷보다 가볍고 편한 가죽옷이나,
심지어는 천옷을 걸친 체 과감히 뛰어들기도 하는 괴짜였다. 그는 눈을 잃기전에는 창술의 달인으로 이름이 드높았지만 한쪽 눈을 잃은 후에
는 백발백중의 궁수로써 더 유명해졌다고 한다. 그가 말하길 한쪽 눈을 잃음으로써 거리감각이 더 좋아졌다고 말하기도 했다.
...6명의 대표적인 단원들이 한 자리에 모여 자질구레한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주로 제라스와 베르가, 에드발드는 묵묵히 듣고 있다가 끼어드는
편이고 나머지 셋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자기 주장을 늘어놓고 때론 언성도 높여가는 식이었다. 그들은 한명한명 최고의 전사이고 노
련한 살인병기였지만 지금 이 자리에 없는 약 50명의 단원 모두가 각각 특유의 사연과 이해관계 속에서 결집된 정예병 중에 최정예병이었다. 콘
첼로스라는 용병단은 인류가 대륙을 정복한 200년 전부터 지금까지 그들의 역사와 함께 존재했고, 앞으로도 존재할 전설적인 용병단이었으며
그 구성원은 모두 최고가 아니면 안 되었다.
변하지 않는 것은 적지만 반드시 있어야 하는 철의 규율과 오로지 돈에 의해 움직인다는 합리적인 목적의식과 그에 걸맞는 최강의 용병단이라는
명성. 스스로 자부심이 생길만큼 자유분방하면서도 그들은 언제나 모든 용병단 중 단연 최강이었다. 오죽하면 일국의 왕들도 함부로 건드리길
꺼려한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 그들이 출전한 전쟁터는 그들이 지지하는 이가 누구냐에 따라 전장의 판도가 바뀐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악명
이 높았다.
내부의 규율을 철저히 지키고 실력만 있다면 어느 민족, 어느 출신, 어느 과거라도 상관없다. 누구라도 지원받지만 그들의 거친 삶의 방식에 버
텨내는 이들은 극소수. 결과적으로 소수의 배태랑만이 콘첼로스 용병단의 맴버가 될 수 있다는 것이고 그것이 지금 세대에는 50명정도라는 듯 했
다. 전대가 80명, 그 전의 전대가 110명이었다는 것을 보면, 세상에는 굉장한 실력자가 점점 줄어들었거나, 혹은 콘첼로스에 오지 못하는 환경으
로 변해가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같았다.
"앗."
전황에 대한 논의가 잡담으로 변질되어갈때 즈음 낮고 넓게 퍼지는 뿔나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소집을 위한 소리였다. 모두는 너나 할 것 없이 계단을 밟아 내려갔다. 여섯명의 단원들이 부랴부랴 달려갔을 즈음엔 나머지 단원들이 이미
한 자리에 줄을 맞춰 서있었다.
그들은 뒤늦게 대열의 뒤에 꼈다. 이드발가에 대한 찬양과 전쟁신호를 알리던 그레핀의 명장. 아드가가 그랬듯, 규모는 작지만 그들의 앞엔 한 사람
이 당당하게 서있었다. 젊고 분위기를 스스로 일으키고 스스로 도취되었던 금색 갑주의 아드가와는 다르게 그의 눈은 한껏 힘이 빠져있었다. 게다가
젊지도 않았다. 그는 긴 수염을 기른 백발의 노장이었다.
키도 아드가에 비해선 작지만 그렇다고 외소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에겐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무언가가 있었다. 수많은 전장터를 누빈 배태
랑들의 위에 군림하는 것은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는 노련한 전사였고 이번의 싸움도 그에겐 별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담담했
고, 소집된 단원들의 표정에도 아드가의 병사들같은 복잡한 표정은 없었다. 그들은 두 나라간의 전쟁이 마치 동네 싸움인냥 긴장은 커녕 여유가 배
여있었다. 몇몇은 건들건들 거리며 소근소근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웃기도 하고 장난도 칠 정도였다. 도저히 지금 당장 목숨을 걸고 뛰
어들 것 같이 보이지 않는다.
"...뭐. 알다시피 우린 가롯테 왕의 편에 서기로 했다. 우리의 이번 아군은 렝가르드군이지."
턱수염을 어루만지며 무구를 걸친 노병이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조금 쉬고 갈라져 있었지만 그건 그가 나이를 먹고 서쪽 사막 민족들에게서
얻은 엘퀸 잎을 자주 말아 피웠기 때문이었다. 그는 심신을 단련하는데 하루도 게을리 하지 않았지만 술과 담배는 언제나 그의 트레이드 마크처럼
함께 했다. 콘첼로스의 마스터. 리처드는 세상 제일 가는 신체단련 중독자에 건강식을 찾는데 거의 강박증세를 보이면서도 동시에 애주가이자
애언가인 기묘한, 혹은 썩 합리적으로 보이지는 않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럼에도 여전히 정정했고, 실제로 그의 노련함과 자존심은 녹슬지
않은 그의 실력으로 늘 증명되곤 했다.
"솔직히 말해서 하도 질질 끌어대는 통에 반대쪽에 서고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말야. 알다시피 그레핀 왕국은 몰락해가는 추세라 이쪽에 투자
를 못 한단 말이지. 게다가 콘첼로스를 흔하디 흔한 저질 용병단으로 생각하는 통에 신뢰도 하지 않는 것 같고 말야. 뭐. 나라도 여기에 몸 담지 않
았다면 그렇게 생각했겠다만..."
그는 항상 단원들을 <애송이>라고 불렀지만 전쟁을 앞두곤 항상 단원들의 실력을 인정하는 말투를 쓰곤 했다. 베르가는 그 점을 놓치지 않고 그에
대해 또 한번 새롭게 평가를 내리려 했다. 물론 그의 고민 아닌 고민은 밖으로 나오지 않았고 리처드의 말도 멈출 일 없이 계속 이어졌다.
"어찌되었든, 그런 의미에서 지금 전장터에 나온 그레핀의 영웅에겐 정말 유감스러운 일이야. 그는 괜찮은 사람이거든."
현재 몰락해가는 그레핀이 유일하게 의지하고 있는 영웅. 아드가는 그의 말처럼 실제로 인품도 첨렴결백하고 지휘관으로써도 상당히 능력 있는 남
자였다. 그는 뇌물을 받아본 적이 없는 몇 안되는 귀족 출신이며 민심도 현재의 그레핀 왕보다 더 높아 인기가 높을 뿐만 아니라 부하들에게도 관대
하고, 그러면서도 특유의 카리스마로 병사들을 휘어잡아 신병조차 그의 밑에 있으면 용맹한 맹장이 된다고 할 정도였다.
하지만, 어찌되었든 돈으로 움직이는 콘첼로스는 이번에 렝가르드의 편을 들어주고 말았다. 렝가르드 자국 내의 사정은 정확히 모르지만 그들도 똑
같이 자금난에 시달리고 있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현재의 렝가르드 국왕. 가롯테는 의욕은 넘치지만 항상 패배하는 기량미달의 군주로, 전
쟁은 끊이지 않는데 승리도 없고, 따라서 수입이 항상 마이너스일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금을 강제징수한건지 국고의 가보를 팔아넘긴
건지 알 수 없으나 그들은 어찌되었든 어마어마한 엑수의 돈으로 콘첼로스의 충성심을 사는데 성공했다. 이번 전쟁에 이겨도 어차피 뺏고 뱻기는
일이 반복될테니 결과적으로 본전도 못 뽑을테지만, 그건 뭐. 콘첼로스의 사정은 아니었다.
시대는 40개의 소국들이 난전을 벌이는 난세.
이런 시대에 콘첼로스같은 용병단은 이런식으로 사상 유래가 없을만큼 돈을 벌어대고 있다.
"...우리는 이대로 아드가가 매복해둔 견제군을 섬멸하고 단숨에 돌진해서 측면을 파고든다. 렝가르드의 부실한 기마병들이 나름 휘저어주긴 할꺼
니까 너희들은 마음껏 날뛰어주기만 하면 돼. 한 사람당 12~13명정도만 죽여도 뭐. 아무리 바보같은 렝가르드군이라도 뭔가 하겠지?"
비아냥거리는 노인의 말에 모두가 와하하 웃었다.
"그럼 제군들. 알아서 살아남길 바라네. 죽으면 영광이고 명예고 다 살아남은 사람 차지가 될꺼니까."
"허? 그레핀 녀석들은 죽으면 명예로운 이드발가의 품에 안겨 영원한 영광을 얻는다던데?"
까불거리기를 좋아하는 대머리의 단원 하나가 그렇게 툭 내뱉었다. 리처드는 핫하하 호탕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그럼 우리들이 최대한 많이, 그리고 빠르게 그들을 그들이 우러러 마지 않는 신의 품으로 보내주자고. 성불시키는 신성한 성전이니까 이드발가
신도 우릴 위해 축복 비슷한건 해주겠지?"
"우리가 죽어도 이드발가가 안아줄까요?"
왁자지껄한 분위기 속에서 누가 또 물었다. 리처드는 이번에도 웃으며 입을 열었다.
"만약에 우리가 그렇게 물으면 그가 말하겠지. 너희들 자리는 없어. 엿이나 먹고 꺼져."
뒤늦게 내려온 여섯명을 제외하고 모두가 시끄럽게 웃어댔다. 그러는 와중에 멀리서 연기가 피어올랐고, 그것을 본 리처드가 목을 까딱거리고는
칼을 뽑아들었다. 순간 왁자지껄하게 웃던 소리가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데이리크도 그가 승배하는 피와 살육의 여신에 대한 기도를 끝마쳤다.
"봤지? 출발 신호다. 모두 근처에서 눈치만 보는 놈들을 최대한 빨리 죽이고, 그 다음에도 최대한 빠르게 죽이도록 하자고. 그럼..."
출발이라고 말할 새도 없이, 와아아아 하는 함성과 함께 콘첼로스 용병단이 뛰기 시작했다.
칼을 하늘로 치켜든 리처드는 그들이 신나게 지나가는 통에 잠시 넋을 잃고 있다가, 뒤늦게 "이,이봐!! 내가 선봉장인데!!"하고 부랴부랴 뒤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3.
세상일이라는 것은 무릇 개인의 의지만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지는 않는다. 위대한 영웅도 사람이고, 사람인 탓에 배신당하고, 병들고, 노쇠하며, 때론
전장 속에 이름도 없고 실력도 없는 무명의 병사에게 죽음을 당하기도 한다. 세상에 제일 가는 야망과 지혜, 그리고 힘을 지닌 자도 어차피 개인. 아무리
뛰어난 영웅이라도 한명으론 세상을 바꿀 수 없다. 실력과 실력이 극에 달하고, 기적과 기적이 연이은 행운아라 할지라도, 한명이 바꿀 수 있는 것은 한계
가 있다. 한 사람으로 좌지우지되기엔 세상은 너무 넓고, 세상을 구성하는 복잡미묘한 자연법칙들 또한 너무 복잡하고 정교하며 늘 그렇듯 변덕스럽다.
신의 의지도 그러한 것인가.
위대한 선조들의 축복도 부족했던 것일까? 아니면 나 자신이?
"..."
아드가 디 그레노수스는 그런 생각을 하며 허망한 얼굴로 무릎을 꿇은 체 땅바닥을 바라보고 있었다.
몇명인가 피투성이의 병사들이 칼을 여기저기서 겨누고 있었다. 그들의 거친 호흡과 흥분을 가라앉지 못한 눈, 금방 쏟아져나온 듯 선명한 선홍색의 피와
벌어진 상처.
아드가의 얼굴은 모든 것을 채념한듯 가라앉아 있었으나 그의 뺨에서 흐르는 땀은 마지막까지 그들이 방금전까지 얼마나 치열한 싸움을 벌였는지 짐작케
해주었다.
"핫하하하. 꼴 좋군. 아드가."
불헌듯 너머에서 그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중저음이지만 깨끗한 울림은 결코 아닌 소리의 주인공은 다름아닌 렝가르드의 현국왕. 가롯테 디오나르 렝가르드
였다. 그는 튼튼한 갑옷과 어깨와 목 뒤를 감싸는 흰색 털이 달린 망토를 걸치고 있었는데 그 화려하고 질좋은 옷과 검은 먼지와 피투성이가 된 그들과는 전혀
다르게 깨끗하기 그지 없었다. 머리와 수염은 풍성한 곱슬로 희끗희끗해져가고 있으나 살이 쪄 풍체가 좋았다. 피범벅이 되고 지친 주위의 모든 이들과는 다
르게 혈색이 좋다못해 기름으로 번들거리고 있다.
"응? 안색이 안 좋은걸? 어디 편찮으신 데라도 있으신가? 엉? 와핫하하하!"
승리에 도취된 왕은 뒤따라오는 병사들을 이끌고 여유만만한 걸음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왕의 곁에 가장 가까히 붙어있는 이들은 모두 렝가르드 최고의 군사 간
부들로, 거기엔 콘첼로스 용병단의 단장. 리처드도 포함되어 있었다. 기분좋게 웃는 왕처럼 함박 웃는 자도 있는가 하면 무둑뚝한 이도, 리처드처럼 따분하다는
표정을 짓는 이도 있다. 인간은 하나가 아니기에, 그들은 같은 상황에서도 서로 미묘하게 다른 표정들을 짓고 있다.
"과묵하구만. 불편하신가? 아무렴 그렇고 말고. 불편하시겠지 또 불편해야 되는게 맞고."
가롯테는 위풍당당 그의 코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패배한 적장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고개를 숙인체 땅바닥만을 쳐다보고 있다. 더이상 할말도 잃은 모양이었다.
왕과 주위의 친위병들은 제각기 눈동자를 굴려 이리저리 주변을 훑어보았다. 모두들 군인 특유의 빈틈없는 자세로 빠르게 현상황을 읽고 있다. 느릿느릿 거만한
표정의 가롯테만이 뒤늦게 천천히 주위를 쳐다볼 뿐이다.
여기저기 나뒹굴고 있는 적과 아군의 무기들, 각종 형태로 나자빠진체 죽어가거나 이미 죽은 병사들, 그들이 흘린 피들이 벽과 땅바닥 여기저기 흩뿌려진 체로
말라가고 있다. 아드가의 측근도 대단한 용사가 있었는지 아니면 아드가 본인이 대단한 무용을 자랑한건지 알 수 없으나 어찌되었든 렝가르드 병사들의 시체 몇
몇은 갑옷째로 몸이 반쯤 잘려나가거나 투구체로 머리와 몸이 따로 차가운 땅바닥에 누워져 있기도 했다.
"...당신의 승리요. 죽이시오."
아드가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쉰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그의 눈엔 두려움의 기색은 없었다. 영웅이란 자들이 대게 그러하듯 그는 죽음의 앞에서도 당당했다.
다만 그와 함께 인생을 보내온 친구,가족,동료등등이 아직 그의 눈동자에 비춰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이미 죽은 눈으로 그의 영광스러웠던 지난날과 찬란했
을지도 모르는 가승성의 미래가 종이가 타듯 재가 되어가는 것들을 동시에 바라보고 있었다.
"흥. 당연히 죽일꺼야. 하지만 지금 당장 죽이기는 너무 아깝지."
암 그렇고 말고. 하고, 가롯테는 스스로의 말에 대답하듯 말을 잇고는 씨익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는 전쟁을 원했고 실제로 왕에 오른 이후 기나긴 전쟁을 경험했지만 사실상 이렇게 큰 대전에서의 승리는 처음이나 마찬가지였기 떄문에 기분이 아주 좋았다.
그는 아드가의 입장을 알고 있었고 그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아주 잘 알고있었다. 그레핀은 왕족이 거의 다 전염병으로 죽어 망국의 길을 걷고 있었고 그것을 미
련스럽게 놓아주지 않았던 인물인 아드가는 그레핀 왕국에서 현재의 무능한 왕보다도 인기가 있었다. 하지만 그 날고 긴다는 영웅의 말로가 어떤가. 지금 이렇게
목을 뺴놓고 죽을 날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가 죽으면 그레핀은 금방이라도 멸망할 것이었다. 보람이 있었다. 이제서야 자신을 반대하는 사람들도 자
기를 인정하고, 상황이 좋다면 우러러보기 시작할 것이었다. 수십차레 대패하긴 했어도 그거야 지난 날인 것이었다. 어찌되었든 그레핀 왕국을 멸망시킨 것이다.
그것도 자신이 직접 출전한 전쟁에서.
"네가 그 대단한 올페도스 신성제국의 라셈 일가조차 인정하는 명장이라지? 전장에서 죽는 것은 네놈이 사랑하는 이드발간지 나발인지 하는 야만인의 신을 기
쁘게 해주는 거라고 하던데. 영광스러운 죽음이라고 했던가? 그런건 곤란해. 너는 본국으로 끌려가서 많은 국민들 앞에서 공개처형이 될꺼야. 그 편이 더 내 성에
차지."
최대한 승리를 과시한다. 영웅을 죽였다는 것을 알면 지금 갈갈히 찢겨진체 나뉘어 있는 수많은 나라들에게 충격을 줄 것이다.
그리고 꺠달을 것이다. 렝가르드는 자신이 통치하는 한 강력하며 소문처럼 겁쟁이에 무능한 왕이 다스리는 곳이 아니라는 것을. 한다면 한다는 것을.
"목이 잘려나간 후에는 글쌔... 성문에다 걸어놓을까? 축 늘어진 몸둥아리는 다음 출정때 내 마차로 끌고 가게 할 수도 있겠지. 질질 끌려가다보면 아주 우스울꺼야.
성문이든 광장이든 근엄했던 네놈의 얼굴은 그거대로 추레하게 말라비틀어져 갈테고. 그동안의 업적과 위상이란 위상은 한순간에 사라지는거지."
가롯테는 신이 나서 그에게 얼굴을 가까히 대고 속삭이듯 말했다. 어떻게 처벌할지에 대해서는 순수하게 지금 그 자리에서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는 지금까지 세상에 알려진 위대한 인물을 쓰러뜨린 일도, 전쟁에 승리한 일도 없어서 굉장히 고조되어 있었다.
"..."
사실상 이번 전쟁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50명남짓한 용병단의 리더인 리처드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수백 수천명이 만드는 전장이거늘, 잘 훈련되고 단합이
잘되었다곤 해도 고작 50명에 의해 바뀐 전쟁이었다. 자신이라면 수배의 군도 훨씬 더 잘 통솔할 수 있을 것이었다. 가롯테는 소문대로 무능의 극치를 달리고 있었
다.
"..."
침묵이 찾아왔다. 가롯테와 아드가, 그를 따르는 수하들과 리처드, 죽어가고 있는 병사들.
그들이 저마다 내쉬는 숨소리만이 피비린내나는 실내에 나지막하게 울려퍼지고 있다. 서로 각기 다른 생각을 품은 체 시간만이 흐른다.
왕은 미소를 띄운체로 최고의 전리품인 아드가를 바라보았지만 그는 대꾸가 없었다.
고요 속에서, 수명의 칼끝이 겨누어진체 적군의 영웅. 아드가는 그저 고개를 떨굴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