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이드발가의 아침이 밝았다!! 오늘 우리들. 키로넬의 자손들은 새로운 역사를 만들 것이다!"
차가운 세벽녘의 공기를 가로지르며 쩌렁쩌렁 남자의 목소리가 울렸다. 끝없이 펼쳐진 광활한 평야는
갓 뜨기 시작한 태양에 의해 자신들이 갖고 있는 본래의 색을 빠르게 되찾아가고 있었다. 남자의 말처
럼, 어제의 밤은 오늘 또 한번 죽고 늘 그랬듯 아침이 소생하려 하고 있었다.
"세상은 오늘의 일을 영원히 기억하며 칭송할 것이다!! 영광 속에 서겠는가!! 이드발가의 품에 안기고
싶은가!!!"
수백의 병사들 앞에서 지휘관처럼 보이는 남자는 다시 한번 그렇게 외치고 이번엔 칼을 뽑아 들었다.
맑고 청명한 울림이 쥐죽은듯 고요한 침묵 속에 울려퍼진다. 태양빛이 반사된 그의 검날과 전신을 두
른 황금빛 갑주가 눈부시게 빛나고 있다.
"명예와 영광을 위해서라면 죽음을! 영혼과 육신은 이드발가의 곁에!!"
지휘관과 대조적으로 은빛의 갑주를 두른 수백의 병사들이 너나 할 것 없이 함성과 함께 반복해서 그렇
게 외친다. 지휘관의 말에 화답하듯이, 번뇌를 잊기 위한 듯이, 생과 사의 앞에서 두려움과 흥분이 교차
하는 것을 어떻게 표현해야 될지 모른다는 듯이,
폭풍전야의 고요는 깨졌다. 그들의 사기는 하늘에 닿을듯 올라있었다.
지휘관은 그들의 외침보다 더 크게 소리치며 칼을 하늘 위로 올렸다.
"광휘를 거머쥐어라!! 삶도 죽음도 모두 영광으로 물들여라!! 우리들은 자랑스러운 키로넬의 자손들이
다!! 용맹을 보여라!! 승리를 쟁취하라!!!"
북소리가 울렸다. 지휘관으로 보이는 남자는 말에 올라타서, 놀랍게도 분위기에 고취될떄로 고취된 병사
들의 선봉에 서 내달렸다. 동시에 세상을 덮칠듯한 기세로 언어도 뭣도 아닌 커다란 함성과 함께 병사들도
달리기 시작했다. 그들의 질주는 이미 반쯤 이성을 잃은 짐승과도 같이 격렬했으나 그 움직임은 수백명이
하나인 것처럼 민첩하고 흔들림 없이 똑바로 나아가고 있었다.
기쁨도 슬픔도, 두려움도 망설임도, 최소한 지금 이 순간의 찰나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들은 그들이
쏟아내는 함성에 실려 토해내지고 있을 뿐이었다. 그들은 그들이 믿는 신. 이드발가에 대한 통솔자의 말 한
마디에 모든 것들을 잊었다. 물론 출전 전에 나누어주었던 술의 힘도 있었지만 선조,신,승리,죽음,명예,영광
같은 단어들은 마술같은 힘으로 그것들을 무마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들은 지금 그저 죽이고 죽는 것에만 생각하고 있었다. 어차피 죽어도 그들이 믿는 영광과 명예의 신. 이드
발가의 품에 안겨 용맹한 전사로써 영원히 기억될 것이었다. 그뿐인 것이다. 키로넬의 자손들은 늘 그랬듯
전사로써 전쟁터에 나가 승리하면 훌룡한 전사로, 죽는다면 그건 그거대로 행복한 최후가 기다리고 있었다.
병이나 노쇠하여 죽는 것보다 전장에서 장렬하게 죽기를 원한다고 누군가가 노래했었다. 그 노래의 작사가
가 누구이든간에, 어찌되었든 노래의 선율은 아름다웠고 비장했고, 그 노랫말들은 그들을 매료시켜 정말로
그런 것처럼 느껴졌다. 전장이야말로 그들이 살다 죽어갈 성스러운 곳. 그들은 그렇게 교육받았고, 이제는
스스로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여유 속에서 뿜어져나오는 온갖 사념들이 곧 두려움과 공포가 되어 곧 그들을 덮칠테지만 그건 그때의 이야
기였다. 지금은 그저 사념들을 토해내듯 기세 그 자체로 내달릴뿐, 마침 같은 생각을 하는 무리도 똑같이 다
가오고 있었다. 거대한 두개의 무리들이 서로를 향해 내달려 이윽고 격렬히 부딪힌다.
정의,신념,명예,복수...
갖가지 비장한 사념들이 뒤엉켜 화려하게 피어오른다.
그러나 그 광란의 질주를 멀리서 보면, 그들이 내뿜는 자잘한 소음과 지리멸렬한 광기 와 신념의 소리는 희미
해져버리고 만다. 그저 두개의 검은 무리들이 연기를 내뿜으며 서로를 향해 부딪히고 있다. 그저 그렇게만 보
인다.
먼 곳에서 바라봐도 여전한 것은 어찌되었든 대지가 울리고 있다는 것일까.
멀리서 보면 볼수록, 그 진지함이나 격렬함은 온데간데 없어진다.
어떤 자연현상같이, 혹은 두개의 파도가 맞부딪히는 꼴정도밖에 안 보인다.
뭐랄까. 확실한 것은,
거기엔 이드발가라는 신도, 자랑스러운 선조도 없었다는 것이다.
거기엔 그저, 야욕에 불타는 인간들만 있었을 뿐이다.
1.
"드디어 시작됐구만."
거친 체구와 투박하고 조금은 지저분한 옷을 입은 남자는 어울리지도 않게 화려하고 고급스러워보이는 파이프 담뱃대를
입에 물고 중얼거리듯 말했다. 파이프는 세밀한 세공이 들어가 물결치듯 무늬가 그려져 있었는데 그 모양새는 남자의 체
격이 너무 큰 탓에 퍽 부자연스러워 보였다. 뭣보다, 파이프 하나만 너무 깨끗했다.
그는 구릿빛보다도 조금 더 진한 피부색에 온 몸이 근육으로 뒤덮혀 있었는데 험상궂은 얼굴부터 팔뚝까지 여기저기 상
처자국으로 가득했다. 거친 삶을 말해주는 그의 그런 모습은 멀리서 봐도 위압감을 느끼기에 충분할 정도였지만 적어도
이 근방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그를 두려워하기보다 믿음직스러운, 때론 단순히 껄끄러운 인물로 여겼다.
광활한 대륙. 에스테리아에서 최소한 200년 전에도 존재했었다고 전해지는 전설적인 용병단. <콘첼로스>에선 그도 그저
용병단의 평범한 구성원일뿐이었다. 산전수전 다 겪고, 그 누구도 당해낼 수 없다고 자부했던 그같은 남자도 이곳엔 얼마
든지 있는 것이다.
"왼쪽이 그레핀, 오른쪽이 랭가르드지?"
파이프를 문 남자의 곁에 키가 작고 호리호리한 남자가 다가와 물었다. 미소가 배여있는 장난끼어린 얼굴은 콘첼로스 내의
대부분이 <계집애같다.>라고 말한 것처럼 중성적인, 좋게 말하면 미형이고, 나쁘게 말하면 거세당한 간신같은 모습의 남자가
있었다. 짧게 자른 회색빛 머리카락과 피부가 검은 울퉁불퉁한 남자와는 다르게 이쪽은 피부도 희고 머리도 길게 길러 묶고
있으며 색깔 역시 생기 있는 금발이었다. 전체적으로, 둘은 완전히 대조적이어서 흡사 난쟁이와 거인같은 인상을 주었다. 물
론 양쪽 모두에 속할 정도로 그들이 작거나 크진 않지만.
"반대다. 멍청아. 왼쪽이 그 패배하는데 도가 텄다는 실지왕(失地王). 가롯테의 렝가르드 군이야. 반대로 그레핀은 왕은 어떨지
몰라도 저 군대의 지휘관은 꽤 실력이 있다고 하는 아드가의 정예부대지."
"흐~음...영웅님의 정예병인가..."
담담히 파이프를 피우는 검은 남자와는 다르게 표정이 풍부한 금발의 남자는 한쪽 손으로 태양을 가리고 한참동안 너머의 전쟁
을 신기한듯 바라보았다. 파이프를 문 검은 남자는 지금까지 보아온 전쟁터보단 그런 그를 관찰하는 것이 더 흥미로웠다.
"오? 오오?"하면서 연신 신기하게 전장을 구경하는 그의 마른 뒷모습은 터무니없을 정도로 무방비. 무릇 전사라면, 그것도 위대
한 용병단. 콘첼로스의 맴버라면 한 순간도 빈틈이 있어선 안 된다고 생각하는 그였기 때문에 그는 종종 속으로 혀를 차곤 했다.
어떻게 이런 녀석이 나와 대등한 위치에 있는가 의심스러울때가 한두번이 아니었던 것이다.
애시당초 옷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전사이기 이전에 사내대장부라면 갑옷 외에 걸칠 것들에 대해 신경쓸 이유가 없는 것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실제로 그가 입고 있는 옷은 이미 색이 바래지고 찢어지고 난리도 아니었지만 어차피 전장에 사는 몸, 갑옷
을 걸치기 전에 잠시 입고 있을 정도면 충분했다. 어차피 전쟁이 끝나면 술과 여자가 기다리고 있고, 기회가 되면 아무거나 집어
들면 그만인 것이다.
하지만 저 남자는 어떤가. 그는 언제나 옷이 새 것처럼 깨끗했다. 남자라면 자기 몸을 단련해 탄탄한 근육과 북방의 전사들처럼
한 눈에 봐도 상대를 짓누르는 어마어마한 넙고 큰 어깨와 자신처럼 신체 곳곳에 영광의 흔적들이 새겨져 있어야 하거늘 그는 마
치 계집애처럼 머리를 기르고 실제로 여자로 혼동될만큼 부실한 몸을 가지고 있는 것도 모자라 지금 입고 있는 옷도 무려 색깔이
붉은색과 검은색이 뒤섞여 있는 화려한 모양새에 한 술 더 떠 몸에 착 붙는, 아마도 최근 맞춘듯한 것을 걸치고 있지 않은가.
...여러가지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사람은 모두가 제각각이고 약 30년 가량 그런 것들을 보아왔지만, 솔직하게 말해서 마음에 들
지 않는 것들은 대부분 베어넘겨왔던 그로써 콘첼로스라는 집단의 사람들은 어떻게 대해야 할지 기묘한 감이 있었다. 긴 세월동안
언제나 돈만을 쫒아 움직이는, 어떻게 보면 가벼워보이는 목적의식으로 뭉쳤지만 항상 최고의 구성원으로 존속한 이 자유용병단
의 식구들은 모두가 자신의 이해수준을 뛰어넘을 정도로 다 제각각이었다.
그 어느 사회에도 속하지 못했던 맹수같은 그가 최초로 마음을 연 쉼터이자 또다른 전장.
이곳에는 그동안 베어넘겨왔던 류의, 자신과 다른 이들이 많았고 동시에 같은 기질을 지닌 기묘한 이들이 많았다. 남자는 늘 그런
그들과 어울려야 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저기. 빅 에르골."
"그따위로 한번만 더 부르면 네 머리가 어떻게 몸둥아리와 분리되어 하늘을 나뒹구는지 알게 될꺼야."
"하하하. 너무 민감하게 반응하지 말라고."
"닥쳐."
"정말이지 진지하다니까."
"...넌 너무 애새끼같이 굴지."
빅 에르골. 파이프 담배를 뻑뻑 피워대던 남자. 베르가에겐 그런 별명이 항상 따라다녔다. 차라리 <검은 악마>쪽이 마음에 들었다.
유치하지만 최소 강한 이들에게 붙을 법한 초월적인 생명체가 끼어있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빅 에르골은 그저 사람의 이름에
자신이 거구라는 이유로 빅을 붙였을 뿐이었다.
에르골이 어떤 사람이었냐고? 그는 지금은 죽어버렸지만 그레핀 왕국의 전왕이었다. 나름 영웅적인 인물이었지만 그녀의 딸이
앓고 있던 전염병에 의해 허무하게 세상을 뜬 남자로, 그 얼굴의 이목구비와 여기저기에 난 상처가 너무나도 닮아 베르가 본인의
별명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실제로 너무나 닮아 누명을 쓴적도 있고, 옛날부터 따라붙은 두번쨰 이름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 전까
지는 항상 그렇게 말하는 녀석의 입을 다시는 나불거릴 수 없게 만들어주었지만 최근에는 그것이 힘들어졌다. 아까도 고백했듯,
그는 이제 콘첼로스라는 용병단의 일원이었고 이 단체의 가장 첫번째 규율은 <동료를 배신하거나 살생하지 마라> 였기 때문이다.
"어쨌든 말야."
나름 위협을 줬음에도 여전히 장난스러운 얼굴로 침묵을 꺠는 금발의 남자. 제라스.
베르가는 이럴때면 이 남자가 정말로 거물인지 아니면 그냥 바보인지 햇갈리곤 했다. 자신이 매서운 눈으로 위협을 주면 조무레기
들은 조무레기들대로, 숙련자들은 숙련자대로 자기들의 역량을 깨닫고 몸을 사리곤 했는데 이 남자는 언제나 이런식으로 자기 페
이스를 이어갔기 때문이다.이런 행동은 언제나 목을 부러뜨리는 것으로 응징했던 베르가에게 항상 복잡미묘한 표정을 짓게 만든다.
그리고 콘첼로스의 대부분에게 그는 이런 기괴한 표정을 짓곤 했다.
"어쨌든 말야?"
"말해. 듣고 있어."
한숨을 내쉬면서 대답하는 베르가. 제라스는 갑자기 조금 머쓱거리면서 입을 열었다.
"그래서 우리는 어느편이야?"
무뚝뚝한 표정으로 일관하는 베르가였지만 이번엔 자신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멍하니 그를 쳐다볼수밖에 없었다. 어처구니가 없어도
정도가 있는 법이다. 그는 지금 전쟁터에 나와서 자기가 누구의 검이 되는지조차 모르고 있단 말인가.
"...아니 그게. 실은 지금까지 잤거든."
"...뭐?"
"아니 그러니까 저번에 르노와에 갔을때 이틀동안 잠을 못 자가지고... 다 끝내고 와선 완전 뻗어 있었거든. 그래서..."
베르가의 표정을 보고 먼저 변명하는 제라스. 그는 어떨게든 자신이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고 설명하고 있었지만 베르가는 잠시동안
난생 처음 머리가 아파오는 것을 느끼고 잠시 이마를 쓰다듬었다. 처단할 수 없는 작은 불쾌함은 지속되면 간지러운 것같게도 느껴지
는듯 하다.
"진짜야. 믿어줘. 아니 믿어주세요."
"..."
베르가는 미간을 찌푸리며 일어섰다. 벽에 기대어 놓은 자신의 커다란 도끼를 쥐고 그는 그대로 갑옷을 걸치기 위해 내려가려다가 제라
스의 시선을 느끼고 살짝 고개만 돌려 입을 열었다.
"가롯테의 편이다. 저 기세 좋은 아드가도 이제 운이 다했다는거지."
그는 그렇게 말하곤 그대로 내려갔다. 격렬한 전장이 코앞인데도 고요한 용병단의 임시 요새에서 제라스는 그런 그의 뒷모습이 사라지는
것을 한참동안 멍하니 바라보았다.
"..."
홀로 남은 제라스는 다시 손으로 태양을 가린체 전장을 쳐다보았다.
깨알처럼 작은 것들로 가득찬 무리들은 여전히 옥신각신하고 있다.
"기왕이면 멍청한 왕보단 영웅쪽이 좋았는데..."
그는 진심으로 실망했는지 한숨을 늘어지게 푹 내쉬곤 그렇게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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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전에 써놨던 글인 모양. 백업 겸 여기다 묵혀둬야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