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색-
스산한 가을의 바람은 저녁이 되면 쌀쌀하기 그지없다. 바람에 우는 나무들의 소리가 노비그라드로 향하는 게롤트의 마음을 더욱 우울하게 만들었다. 벨렌에서 시리의 흔적을 거의 따라잡았다고 생각했으나 또 어느새 시리의 흔적은 썰물처럼 저 멀리 사라졌다. 그렇게 감상에 젖어있을때 익숙하지만 께름칙한, 피냄새가 게롤트의 코를 자극했다.
게롤트는 냄새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며 애마 로취에서 내렸다. 짙고 끈적한 사람의 피냄새. 멀리 보이는 작은 마을을 향해 게롤트는 조심스러운 걸음을 옮겼다. 거리가 가까워질 수록 피 냄새는 짙어졌고 이 정도의 피냄새라면 분명 한둘이 죽은게 아닐 것임을 게롤트는 짐작했다. 어쩌면 마을의 모든 사람이 학살당했거나 시체를 수습할 겨를도 없이 달아난 유령마을일 것이다.
집 네체와 마굿간밖에 없는 작은 마을의 입구에서 게롤트는 차가운 얼굴로 은검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왼손으로 쿠엔표식을 새겼다. 작은 이명과 함께 게롤트의 몸은 쿠엔 방어벽에 보호를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구울이 시체를 뜯어먹고 있었다. 게롤트는 그 역겨운 형상에 잠깐 인상을 쓰고는 신속하게 구울 두마리를 한번에 베어버렸다. 그리곤 몸을 왼쪽으로 돌리며 남은 한마리의 목에 칼을 찔러넣었다.
그러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사방에서 구울들이 게롤트를 경계하며 기어나왔다. 다섯 마리. 너무도 가벼운 상대에 게롤트는 검을 한번 멋드러지게 휘두르며 구울들이 덤벼오기를 기다렸다. 가장 오른쪽 놈이 달려들어서는 손톱을 들이밀었다. 상당히 빠른 공격이었으나 이곳에 당도하기전 늑대교단의 중갑옷을 벗고 살쾡이 교단의 경갑옷으로 장비를 교체했던 게롤트에게는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다. 가벼운 몸놀림으로 그 공격을 피한 게롤트는 그대로 그쳐지나가는 구울의 목을 베었다. 흉측한 단말마와 함께 구울은 머리와 몸이 분리되어 땅바닥에 뒹굴었으며 그것을 신호로 남은 네마리도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1격에 1마리씩 빠르게 정리한 게롤트는 검을 한번 휘둘러 남은 피들을 털어낸 후 마을의 전경을 둘러보았다. 건물 밖에 있는 시신은 세구. 남자 둘 여자 하나. 모두 성인이었으며 언뜻 보이는 상처로는 예리한 무기에 잘린것으로 보인다.
게롤트는 먼저 가장 가까운 마굿간으로 들어갔다. 마굿간 안에는 두구의 성인 남성의 시체가 더 있었다. 첫번째 시신은 오른팔이 잘려 있었다. 한번에 팔꿈치 위를 자른 전문가의 솜씨다. 얕은 자상이 있으나 대동맥을 자른 상처가 있는것으로 보아 과다출혈로 죽은것으로 보인다. 시신의 오른편엔 쇠스랑이 있었다. 아주 위협적인 무기. 게롤트는 잠깐 리비아에서의 일이 떠올라 자신도 모르게 복부를 쓰다듬었다.
"쇠스랑이라. 근접에서 아주 위험한 무기지."
자조적인 혼잣말을 내뱉은 게롤트는 이윽고 오른쪽 벽에 쓰러져있는 또 다른 중년 남성의 시체를 바라보았다. 살찐 몸과 콧수염. 어쩌면 귀족이었거나 요직을 맡은 인물이 아닐까 생각된다. 단 한번의 칼질로 갈비뼈를 지나 심장을 관통 당했다. 이 또한 전문가의 솜씨다. 이 학살을 벌인 인물이나 단체는 필시 전문가일 것이다.
게롤트가 시체의 손에 남은 의문의 사슬을 확인할 때 마굿간 밖에서 황급히 달음질 치는 발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린 게롤트는 작은 소녀의 뒷모습을 발겼했다. 황급히 뒤를 쫒으려 했으나 이미 소녀의 모습은 마을 어디에도 없었다. 다만 마굿간 입구에 소녀의 것으로 보이는 작은 봉제인형이 있을 뿐이었다. 게롤트는 그 봉제인형을 들고서 감각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곧, 게롤트의 시야에 소녀의 것으로 보이는 발자국이 포착됐다. 그 발자국은 마을 중앙에 가장 큰 집으로 이어져있었다. 문을 열자 곧바로 중년 여성의 시체가 보였다. 상처를 보아하니 저항도 하지 못하고 죽은것으로 보였다. 그리고 이 장소와는 어울리지 않는 레션의 전리품이 보였다. 왜 저게 이곳에 있는지 의아했지만 소녀를 쫓는게 우선이라 생각한 개롤트는 소녀의 발자국을 찾아보았다. 곡 집 뒤편으로난 창문으로 이어져 있는 소녀의 발자국을 찾을 수 있었다.
"다른 창문을 통해 집을 관통해서 도망가다니. 영리한 소녀군."
짧은 감상을 내뱉은 게롤트는 곧 집을 돌아 소녀가 향한 곳으로 향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숲의 한 나무 뒤쪽에서 소녀를 찾을 수 있었다. 소녀는 밤 바람의 싸늘함 때문인지 마을에서 있었던 공포 때문인지 혹은 둘 다 인지 몸을 움치리고 심하게 떨고있었다.
"얘야, 나는 너를 헤치지 않는단다."
어울리지 않은 나긋한 목소리를 내어본 게롤트였지만 게롤트의 눈을 본 소녀는 꽥 소리를 질렀다.
"그눈! 똑같은 눈! 저리가요!"
게롤트는 잠깐 당황하다가 아까 주웠던 인형을 꺼내어 소녀를 달래기로 했다.
"이 인형, 네것이지?"
소녀가 여전히 공포심이 담긴 눈으로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인형의 이름이 뭐니?"
머뭇거리는 소녀를 위해 게롤트는 끈기있게 기다려주었다. 그러자 소녀는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주근께대장이요."
감정을 절제하는 위쳐가 아니라 일반인이 들었다면 이 상황과 너무도 대조적인 인형의 이름에 난색을 표했을것이다.
"귀여운 이름이구나. 이 인형을 돌려주도록하지."
인형을 받아든 소녀는 조금은 경계심을 푼모양이다.
"이제 무슨일이 있었는지 이야기 해줄 수 있니?"
"마을과 가까운 곳에 괴물이 나타나서 사람들이 위쳐를 불렀어요. 위쳐는 괴물을 잡았고 이장님과 대화를 하더니.....갑자기 서로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함께 마굿간에 가더니...."
오들오들 떨며 말하던 소녀는 결국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그 사람이 나와 같은 눈을 하고 있었니?"
소녀는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등에 칼 두자루를 차고 있었니?"
소녀는 대답하지 못하고 흐느꼈다.
"괴롭겠지만 나에게 그 이야기를 해주어야 한단다. 내가 널 구할 수 있도록."
차분한 게롤트의 말에 소녀는 울음을 억지로 참으며 대답했다.
"사람들을 모두.....죽이고......저는 살려줬어요.........그리고 저기 돌무덤으로....갔어요...."
더 이상 질문을 하기에 무리라고 판단한 게롤트는 이곳에서 자신을 기다리라고 말한 후 돌무덤으로 향했다.
고양이 눈과 두 자루의 검이라면 분명히 위쳐일 것이다. 그런데 위쳐가 학살을 하다니. 이건 아주 좋지못한 소식이다. 어서 빨리 이 사단을 낸 위쳐를 찾아 자초지종에 대해 알아봐야한다. 하지만 이 조급한 마음은 이내 진정이 되었다. 돌무덤에는 고양이 교단의 옷을 입은 위쳐가 피범벅이 되어 앉아있었기 때문이다.
"늑대 매달에 고양이 옷이라. 혼종인가?"
냉소적인 빈정거림에 게롤트는 직설적으로 물었다.
"왜 마을 사람들을 학살한거지?"
게롤트의 물음에 고양이 교단의 옷을 입은 위쳐가 자신의 복부를 부여잡고 일어섰다. 출혈이 있는것 같았다.
"늘 있는 이야기지. 정직하지 못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
게롤트가 팔짱을 끼고 그의 말을 기다리자 고양이 교단의 옷을 입은 위쳐가 이야기를 계속했다.
"난 그들에게 고용되었지. 아주 강한 레셴이었어. 그런데 그들은 보수로 얼마를 지불하기로 한것 같나?"
격분한 그의 외침에 게롤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난 지금 수수께끼를 할 기분이 아니야."
"십이골드야! 그정도 푼돈으로도 나는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의뢰를 수락했지. 그런데 의뢰를 완수한 후에는? 전쟁중이라 먹을게 없고 아이가 있고 제발 자비를 배풀어주십시오.......아주 지긋지긋한 이야기지. 난 자비는 없다고 했지. 십이골드면 내가 이일을 하기위해 사용한 포션값도 안된단 말이야! 그랬더니 그들은 마굿간에 숨겨둔 돈이 있으니 그곳으로 가자고 하더군."
한번 숨을 고른 그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참 어리석게도 그런 함정에 걸려들었지. 마굿간에서 내 뒤에선 사내가 쇠스랑으로 나를 찔렀지."
"흠, 상당히 고통스러웠겠군. 어떻게 살아남았지?"
남성의 복부에 시선을 고정한 게롤트의 질문에 남성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저 운이 좋았지. 각도가 좋지 않아서 치명상을 면했고 나는 이성을 잃었지. 고작 십이골드 때문에 자신들의 의뢰를 완수해준 나를 죽이려 했으니까! 그 뒤는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
"소녀는 왜 살려준거지?"
"그건........내 누나가 떠올랐어. 물론 내가 고양이 교단으로 들어가기 전의 모습이지만 말이야."
"그 누나는 지금 건강하신가?"
"10년전에 죽었지. 나이가 들어 죽은거야."
고양이 교단의 옷을 입은 두 사내는 한동안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게 끝인가?"
사내가 게롤트를 향해 묻자 게롤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난 네 행동을 심판하는 사람이 아니야. 나도 때로는 학살자로 불렸었지. 위쳐들의 삶은 그런식이지."
게롤트가 사내를 등 뒤에 두고 돌아서자 사내가 급히 게롤트를 불러세웠다.
"내 이름은 가예탕이야. 난 저들처럼 은혜를 받고 져버리진 않아."
가예탕이라 자신을 밝힌 남성은 게롤트의 손에 지도를 쥐어주었다.
"위쳐끼리의 대화가....정말 오랜만이었어. 위쳐간의 공감도. 이곳에서 원하는 만큼 가져가."
"고맙군."
가예탕은 상처가 있는 복부를 부여잡고 그 곳에서 벗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