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입문 관련해서 긴 글을 쓰는 건 아마도 이게 마지막이 될 것 같습니다.
내년에도 페그오는 계속하겠지만 사정상 지금만큼 밀도있게 즐기기는 어려울 것 같네요. 세이버 워즈가 복각되면 또 모르겠지만.
마지막으로 제가 생각하는 나스 키노코의 작품, 페이트 시리즈란 어떤 것인지에 대해 정리해봤습니다.
나스 키노코의 작품에는 항상 모순을 품고 고뇌하는 존재와 모순 없이 일관된 목적을 위해서만 기능하는 존재가 대비되고 있습니다.
즉 나스가 다루어 왔던 테마는 근본적으로 인간과 괴물의 대결이었습니다.
인간이 괴물과 싸우기 위해서는 어디까지 괴물이 되어야 하는가.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인간성을 어디까지 남길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이죠.
인간은 어떻게 변하든 그 근본에 인간성이 남아있고, 오직 그 인간성을 통해서만 괴물을 이길 수 있다는 거죠.
공의 경계와 월희, 그리고 페스나의 fate 루트는 모두 이와 같은 테마 위에서 만들어진 작품들입니다.
그런데 UBW 루트와 헤븐즈 필 루트를 거치며 나스의 방향성은 바뀌게 됩니다.
질문 자체는 동일하지만 인간의 반대편에 '타고난 괴물'이 아니라 '한 때는 인간이었던 괴물'을 올려놓기 시작한 거죠.
짐작하건대 나스는 과연 인간과 괴물이 서로 이해할 수 있는지 자문했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만약 괴물이 애초부터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존재라면 대립한다고 한들 거기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남겠죠.
정말로 그래서였는지 뭔가 다른 이유에서였는지, 아무튼 UBW 이후 나스는 한 때는 인간이었던 괴물이 마지막에는 인간으로 돌아오는 이야기를 쓰기 시작합니다.
자연히 나스의 테마는 인간과 괴물의 대결에서 인간과 인간의 대결, 아직 인간에 가까운 쪽과 보다 괴물에 가까운 쪽의 대결로 옮겨갔습니다.
서로 대립할 수밖에 없는 입장과 사상을 짊어지고 있지만 어느 쪽도 근본은 인간이기 때문에, 결국에는 보다 인간성을 남긴 쪽이 승리한다는 이야기죠.
헤븐즈 필도 엑스트라도 CCC도 마법사의 밤도 페그오도 근본적으로는 전부 이 주제를 다른 소재로 변주한 것 뿐입니다.
이러한 나스의 테마를 가장 효과적으로 나타내는 소재가 바로 서번트라는 설정입니다.
초창기에는 딱히 그렇지만도 않았습니다만, 현재 페이트 시리즈의 서번트는 나스의 기준에서 모순 없는 존재, 즉 '괴물'에 가깝습니다.
이 괴물들에게 인간성을 부여해주는 것, 고민하고 갈등하게 만들어주는 것이 바로 마스터와의 관계성이죠.
본래대로라면 서번트들은 이미 자신의 인생을 끝냈기에 더 이상 모순도 고민도 갖고 있지 않은 존재지만,
마스터와 관계를 맺고 말았기 때문에 그들은 살아 있을 때처럼 불필요한 고민을 하고 갈등하게 됩니다.
진지한 이야기에서든 코믹한 꽁트 같은 이야기에서든 나스의 이런 결론은 변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뒤집어서 말하자면 서번트라는 설정이 남아있는 한 이 결론은 변할 수 없다는 말도 되겠죠.
이렇게 서번트라는 설정은 나스 키노코의 테마를 호소력 있게 전달하기 위해 더없이 적절한 소재였지만,
페이트 시리즈의 규모가 점점 커지고 페이트를 집필하는 다른 작가들이 늘어나면서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다른 작가들은 나스만큼 서번트라는 소재를 다룰 수 없기 때문이죠.
이건 그들이 이야기꾼으로서 나스보다 뒤떨어진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단지 그들이 추구하는 테마가 나스와는 다른 방향에 있기 때문이죠.
이를테면 우로부치는 페이트 제로에서 나스와 비슷하게 인간과 괴물의 대결을 그렸지만, 내놓은 결론은 나스와는 정반대입니다.
보다 인간성을 제거한 쪽, 즉 괴물의 승리로서 이야기를 끝내죠.
이건 우로부치 작품의 전반적인 테마가 인간성의 회복보다는 오히려 인간성을 잃어가는 과정을 중립적으로 바라보는 데 초점이 맞춰져있기 때문일 겁니다.
히가시데 역시 우로부치와 비슷하지만, 히가시데의 경우는 인간성을 잃어버린 결과 벌어지는 일들에 좀 더 주목하고 있죠. 말하자면 인간성이 아닌 괴물성이라고 할까요.
때문에 우로부치가 괴물과 인간의 경계선에 놓인 갈등을 그리고 있는 데 비해 히가시데는 더욱 철저하게 괴물 쪽으로 밀어붙이는 편입니다.
아포크리파의 마지막 결말이 페스나의 라스트 에피소드와 동일한 구도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다르게 느껴지는 위화감은 그 때문이죠.
한편 사쿠라이의 경우에는 인간도 괴물도 등장하지만, 서로 대결하지는 않습니다. 애초에 대결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 거죠.
설령 양쪽이 서로 대립하더라도 그 내막을 보면 한 쪽의 내적 갈등, 혹은 서로 맞물리지 않는 두 쌍의 내적 갈등이 있을 뿐입니다.
사쿠라이의 대결이란 어디까지나 내면의 갈등의 연장선으로서 극복해내는지 혹은 좌절하는지의 결과를 보여주는 장치죠.
메테오는 거기서 한술 더 떠서 대결은커녕 대립조차 희박합니다.
특별한 이유 없이 운명에 휘둘리고 저항하는 인간들의 세계, 고대 신화에 가까운 세계가 메테오의 작품이니까요.
산다와 나리타 역시 나스의 테마와는 상당히 거리가 있습니다.
산다에게는 인간성 자체가 딱히 크게 중요한 주제가 아니고, 나리타의 경우 인간은 전혀 없고 오로지 괴물들밖에 등장하지 않으니까요.
이들 작가들에게 있어서 서번트라는 설정은 사실상 불필요합니다. 오히려 자신이 원하는 테마를 그리는데 방해가 될 여지조차 있죠.
과연 페이트 시리즈는 앞으로 얼마나 계속될까요.
만일 현재의 작가진이 그대로 유지된다면, 제 생각에 페그오가 끝난 이후까지 계속될 것 같지는 않습니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서번트라는 근간 설정에서 뭔가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해내지 못하는 이상은 계속되기 어렵다고 봅니다.
나스를 제외한 각 작가들이 과거에 표현해왔던 것, 그리고 앞으로 표현하고 싶은 것들은 아마 페이트 세계관과 서번트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테니까요.
게다가 나스 역시 15년 가까이 반복해온 테마를 언제까지고 계속하지는 않을 것 같고요.
앞으로의 페이트 시리즈가 어떻게 될지,
지금의 작가진들이 해산하고 끝나게 될지 혹은 새로운 작가들에 의해 다른 모습으로 계속될지.
현재로서는 알 수 없지만, 하나 분명한 건 어느 쪽이든 오타쿠 문화에 큰 흔적을 새긴 작품으로 남을 거라는 겁니다.
(IP보기클릭)218.237.***.***
여기에 각 작가가 어떤 작품을 썻는지, 각주가 달리거나 스샷이 있으면. 이것 만으로도 훌륭한 리뷰글이 될듯.
(IP보기클릭)59.25.***.***
타케우치만큼은 10년 20년 후에도 계속 세이버를 그릴 것 같지만. ....왜 부정할 수 없을까....장문의 분석 잘 읽었습니다. 인간성과 비인간성이 맞물리는걸 나스만큼 잘 써내려가는 작가는 드물죠
(IP보기클릭)14.36.***.***
글 잘 읽었습니다! 제가 페이트 시리즈는 페스나랑 페제로를 만화책으로만 봤고 이번에 페그오를 시작하면서 시리즈별로 제대로 감상해볼까 생각중이었는데 큰 틀을 이렇게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주시니 더 몰입해서 감상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IP보기클릭)59.11.***.***
이건 [잡담]..탭을 쓰기엔 꽤나 심오한 분석이네요. 흥미깊게 읽었습니다.
(IP보기클릭)134.34.***.***
원래 이미 인간의 범주가 아닌 서번트가 마스터와 관계를 맺어서 괴물에 대항한다...많이 공감이 가네요. 멋진 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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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잘 읽었습니다! 제가 페이트 시리즈는 페스나랑 페제로를 만화책으로만 봤고 이번에 페그오를 시작하면서 시리즈별로 제대로 감상해볼까 생각중이었는데 큰 틀을 이렇게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주시니 더 몰입해서 감상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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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잡담]..탭을 쓰기엔 꽤나 심오한 분석이네요. 흥미깊게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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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케우치만큼은 10년 20년 후에도 계속 세이버를 그릴 것 같지만. ....왜 부정할 수 없을까....장문의 분석 잘 읽었습니다. 인간성과 비인간성이 맞물리는걸 나스만큼 잘 써내려가는 작가는 드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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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각 작가가 어떤 작품을 썻는지, 각주가 달리거나 스샷이 있으면. 이것 만으로도 훌륭한 리뷰글이 될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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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이미 인간의 범주가 아닌 서번트가 마스터와 관계를 맺어서 괴물에 대항한다...많이 공감이 가네요. 멋진 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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