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 전이도 일주일차. 남해는 슬슬 이곳의 문화에는 적응해가고 있었다.
원래 세상과는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애초에 언어의 장벽은 전혀 없었고 그저 듀얼이 일상화되었다는 한가지 커다란 차이를 빼면 원래 세상과의 생활의 차이는 크지 않았다.
하지만 문화가 비슷하다고 해도 외로움은 어떻게 할 수 없었다.
‘엄마랑 아빠는 잘 계실까. 애들은 어떻게 됐을까. 여자애한테 처음으로 편지도 받았는데...’
여기에 오면서 같이 온 물건 중에는 가족사진 같은 건 단 한 장도 없었다.
그나마 지갑 안에 몇 달 전에 받았던 엄마의 편지가 꼭꼭 접혀서 같이 들어있긴 했지만, 그 편지 한 장이 가족의 마지막 흔적이었다. 가족뿐 아니라 친구들도 그리웠다.
남해에게 남은 원래 세상의 흔적이라곤 입고 온 옷과 이 가방, 지갑, 그리고 카드들뿐이었다.
“옛날이었으면 이런 거 버렸는데...”
덱에 넣어놓은 크리보르를 보며 남해는 외로움을 잊기 위해 괜히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냥 소장용으로 하나만 쟁여둔 카드였을 뿐이었다. 하지만 남해에게 이 카드들은 자신이 원래 있어야 할 자리를 다시 떠올리게 해주는 흔적이었다.
가이저도 마찬가지다. 듀얼을 하면서 내기만 해도 기분 나쁜 기운이 흘러들어오고 분명 몬스터일텐데도 말을 듣지 않고 제멋대로 다음 플레이로 이어가는 등 당장이라도 내치고 싶은 카드였다. 하지만 이렇게 버리기엔 가이저를 볼 때마다 현실에서 겪은 추억들이 머릿속에 아른거리는 것 같아 도저히 덱에서 뺄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니 자괴감도 들었다. 얘들이 뭐라고 지금 내가 이러는 걸까? 왜 나한테만 이런 일이 생기는 거야?
소설은 다 거짓말이야, 주인공들은 이런 일을 겪어도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지만 절대 아니었다.
눈 감을 때마다 집이 그립다. 즐거운 모험과 활극? 이세계에서의 인생역전? 그런 것 꿈꾸지 않는다.
자신이 여기 있어야 하는 이유는 그저 돌아갈 길을 못 찾아서 이러고 있다는 것밖에 없다.
“돌아가고 싶어...”
...
다 같이 모여서 하는 아침식사를 마치고 남해는 방으로 올라갔다. 목사님은 선약이 있었고 다른 인원들도 하나씩 할 일이 있어 바깥으로 나가버렸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혼자 남아 TV를 보는 일이 전부였다. 기억나는 프로그램이 하나도 없는 방송들을 보자 남해는 여기가 자기가 알던 그곳이 아니라는게 더 뼈저리게 느껴졌다.
‘듀얼 아카데미아라니. 아직도 실감이 안나.’
남해가 본 아카데미아의 교복은 어릴 적 만화에서 본 오시리스 레드니 라 옐로니 하는 그런 알록달록 오색 교복 대신 그냥 평범한 교복이었다.
다행이었다. 그 보기만 해도 불편해 보이는 파란색 롱코트 교복 같은 건 입기 싫었다.
이상한 가면을 쓰고 융합 플레이를 강요하는 일은 더더욱 없었다. 그런 일을 시킨다면 바로 그 가면을 벗어던지고 도망쳐야겠지.
듀얼디스크는 종류가 굉장히 다양했지만 남해가 받은건 학교의 범용 D-패드였다. 가장 기본적인 기능을 갖춘 공산품으로 모자랄 건 없지만 딱히 잘난 부분도 없었다.
이런 부분에서만 현실과 같다니.
듀얼리스트에 관한 감상은 그게 끝도 아니었다.
자신이 생각한 듀얼리스트는 ‘스포츠 선수’였다면 이곳의 듀얼리스트는 일종의 ‘엔터테이너’에 가깝다. 특히나 몬스터를 소환할 때 소환 대사를 말하는 것이 너무 당연하게 여겨진다는 것은 좀 충격적이었다.
플레이도 그랬다. ‘하루 우라라’나 ‘유령토끼’와 같은 고성능 패트랩들은 사이드에서나 볼 뿐, 메인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너무 강하고 재미가 없다는 게 그 이유였다.
자신이 해온 듀얼이 ‘이기는 재미’의 게임이었다면 이곳의 듀얼은 ‘보는 재미’로써의 게임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책상 위에서 카드들이 오가는 현실의 듀얼과 다르게 이곳의 듀얼은 거대한 솔리드 비전이 화려한 연출과 함께 치열한 사투를 벌이는, 보는 재미로만 따지면 자신이 알던 어떤 매체와도 비교할 수 없는 게임이었다.
“그럼 왜 크리보 같은건 또 괜찮은 건데요?”
“극적이니까, 여기가 끝이라고 생각한 그때 나오는 구원타자 같은 이미진거지.”
“잘 모르겠네요...”
“나는 현역 때 약해도 효과가 강한 몬스터 위주로 썼어, 어떻게든 버티다가 마지막에 에이스를 뽑아서 일발역전하는 플레이로 유명했지. 돌풍의 나의주.”
남해는 그 이야기가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조금 이 세계에 대해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해황원턴이 성공한 그 듀얼에서 상대는 봉쇄호루스로 몇 번이나 연승을 이어갔던 플레이어였다.
시작하자마자 빌드가 다 세워진 상태에서 처음 보는 꼬마가 순식간에 필드를 엎고 역전했으니 관객들이 환호할 수밖에.
“프로마다 스타일이 다 달라. 파워로 상대를 찍어누르는 선수도 있고 덱을 여럿 들고 다니면서 그때그때 새로운 전략을 준비해오는 선수도 있지. 딱 하나만 들고 다니면서 그 덱을 계속 손보는 사람도 있고 말이다.”
“저번에 말한 그 대회란건 뭔가요?”
“아... 학교대항전, 매년 1학기 말에 도내 학교들이 전부 모여서 펼치는 대회야. 학교에서 대표를 뽑아서 보내는 건데, 모든 경기가 단판제라 한번이라도 미끄러지면 기회가 끝난다. 여기서 우승자를 배출하는 일이 아마 모든 아카데미아 교장들의 꿈일거다.”
“몇몇 카드는 없는 거 같던데...”
“그게 무슨 말이니?”
“넘버즈는 없나요?”
나의주 목사는 잠시 고민하더니 고갤 휘저었다. 남해는 역시 그런 것인가 싶어졌다.
“없어. 그런 카드 들고 다니는 녀석은 이 세상엔 없을게다.”
“그러면 스타더스트 드래곤이나, 오드아이즈 펜듈럼 드래곤 같은 건요?”
“엄청 귀하지. 섬광룡 스타더스트 같은 경우는 현역 때 쓰던 선수가 하나 있었는데 그놈 은퇴가 언젠지도 모르겠다. 지금 네 또래 손녀가 하나 있더라. 내 클리어윙도 미러매치는 거의 없었어.”
넘버즈는 없다. 자신이 알던 애니메이션 캐릭터들을 상징하는 카드들은 있긴 하나 매물이 극히 드물다. 어떻게 봐도 자기가 알던 어느 애니메이션 속 세상은 아니다.
아니... 언어도 문화도 듀얼이 이상하게 일상화 된 것을 빼면 이세계라기보다 어느날 누가 자길 납치해서 어디 먼 곳에 떨어트려놓은 느낌이었다.
‘소설 같은데선... 막 신이 이런저런 좋은 능력도 주고 그러던데...’
TV를 이리저리 돌려봐도 아는 프로그램은 보이지 않았다. 바깥을 나가봐도 자신이 아는 그런 거리가 아니었다.
“리모컨 줘. 나 어제 놓친 경기 재방 볼거야.”
“뭐 볼건데...?”
“윈터 포스트시즌.”
“...롤챔스?”
“뭔놈의 롤챔스야, 롤 자체가 여기 없는데.”
“하긴, 그건 그렇겠네.”
너무 자연스럽게 대화가 오가고 잠시동안 둘 사이에 이상한 공기가 돌았다.
남해는 대체 금선이가 어떻게 그걸 아는 건지 혼란스러웠다. 롤챔스? 여기 롤 자체가 없지 않아? 피시방도 거의 없는 곳인데? 게임 전문 채널이라는 곳에서도 듀얼만 주구장창 틀어주는 곳에서 롤챔스라고?
그건 금선이도 마찬가지였다. 왠 롤챔스? 얘 그냥 천애고아 하나 주워온 거 아니야? 왜 롤챔스를 알지?
“어... 페이커는 요즘 어때?”
금선이 남해를 쳐다보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때 보인 분위기에서 남해는 머릿속에 희망회로가 마구 돌아가기 시작했다. 혹시? 설마? 어쩌면...?
그건 금선도 마찬가지였다. 만약... 지금 내 생각이 맞다면...
...
“나도 그날이 마지막이었어, 내가 너보다 1년 일찍 왔으니까 동갑이지.”
“출생년도가 다른데 동갑은 무슨.”
“야 1년 늦게 태어났어도 1년 더 살았으면 동갑 맞지.”
어느새 남해와 금선은 둘도 없는 친구처럼 과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비록 공통분모가 많지는 않았지만 지금 이 교회, 아니... 어쩌면 이 세상에서 둘밖에 없을지 모를 ‘원래 세상’의 기억을 공유할 수 있는 상대를 만난게 너무 기뻤다.
비단 남해뿐 아니라 금선도 마찬가지였다. 그간 억누르고 숨겨온 누구에게도 풀어놓을 수 없던 외로움을 터놓고 대화할 상대를 일년만에 만났다.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굳이 깊이가 있는 이야기일 필요 없었다. 정말 너무 당연하고 일상적이었던 이야기부터 왔던 곳, 생일과 주로 사용해온 덱, 쓰던 학용품까지...
“네 덱은 뭔데?”
“잔디노이드, 필요하면 섀도르나 퍼니멀, 클리포트도 써.”
“그...”
남해는 금선이 보여준 덱들을 보자마자 흠칫했다. 전부 다 찝찝하게 생긴 애들이었다.
악마족이거나 속성이 어둠이거나 뭔가 악당 포지션이거나 하여튼 전부 그런 애들 뿐이었다. 금선도 그런 낌새를 눈치 챘는지 슬쩍 남해의 눈치를 봤다.
“전부 악당 같지? 혹시 힐이라고 알아?”
“힐?”
“간단히 말해 악역 연기자야, 그게 내 컨셉이고.”
금선이는 그렇게 말하며 패드를 몇 번 조작해 동영상 하나를 띄웠다. 관객석에서 찍힌 금선이의 듀얼로그였다.
“목사님이 찍어주셨어.”
금선이의 로그는 실전 그 자체였다. 잔디깎이로 덱 20장을 뭉텅이로 집어넣고 계속 충원되는 노이드의 물량과 고성능 마법, 함정으로 상대를 고개도 들기 힘들게 짓누른다.
기기괴괴하게 생기고 섬뜩한 기계음과 울음소리를 내는 인페르노이드들의 모습도 모습이었지만 이런 시각적 요소나 플레이뿐만 아니라 플레이하는 내내 금선이는 상대의 신경을 긁어대는 말을 했다.
-“뭐야~? 그게 네 에이스였어? 너무 쉽게 터지는 거 아냐?”
-“아하하하하하하하!! 네, 비장의 수였지만 간단하게 막혔네! 아직 하나 더 있어? 솔직히 없겠지, 그럼 비장의 수가 아니잖아?”
막상 영상을 튼 금선 본인도 민망한지 화면에서 자꾸 시선을 피했다. 남해 역시 그 영상을 보면서 머릿속이 점점 더 복잡해져갔다. 소환 대사나 발동 대사만으로도 오그라지는데 저런 것까지 해야하나?
단순하게 딱지만 잘 치는 게 끝이 아니고, 관객들을 휘어잡는 연출력에 저 상황에서도 뭐라고 말을 이어나갈 멘탈까지. 생각 이상으로 만만한 직종이 아니었다.
“딱지만 잘하면 되는거 아냐?”
“그럼 얼마나 좋겠어, 실력이 제일이지만 그것만 갖고 될 일 아냐.”
“그럼 너처럼 계속 떠들어야 되는거야?”
“하... 저거 내 컨셉이야... 쟨 조용하잖아.”
남해는 지금이라도 그만둔다고 말해야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그런 생각은 다시 접었다.
고등학교 재학사실도 증명할 수 없는 이곳에서 자기가 가진 재능이라곤 딱지뿐이다. 이젠 뒤도 없고 샛길도 없다.
“자신있어?”
“솔직히 걱정돼.”
“진짜 미친 짓 같아. 애들도 아니고 카드 하나 낼 때마다 으와앗 몬스터를 소환한다~ 익숙해질 때까진 고생 좀 할걸.”
걱정된다는 듯 한껏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던 남해가 갑자기 풋, 하고 실소를 터트렸다.
그래, 어차피 이것밖에 남지 않았는데 고민할 이유가 어딨는가? 까짓거 하자. 이렇게 무게잡고 고민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랴.
“너 미쳤냐?”
“듀얼 아카데미 수업은 어때? 여기도 수학 어려워?”
“원래보단 훨씬 쉬워. 룰 외우고 그러는게 빡센거지 수업은 따라갈만 해.”
이젠 되돌릴 수 없다. 돌이키고 싶어도 돌이킬 수 없다. 도망치고 싶어도... 자신이 갈 곳은 여기뿐이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라면 해야겠지.
“난 뭐부터 시작될까?”
“소환영창이랑 공격명.”
“끔찍하다.”
...
“아, 그래... 나야 잘 지내지. 응? 참나, 코치시절 버릇 아직도 못 버렸네. 일반인 되고서도 그러냐? 반평생 듀얼만 했으면 이젠 쉴 때도 됐지.”
“할아버지, 저녁 드시래요.”
전화로 누군가와 통화를 하던 한 노인은 손녀가 방문을 열고 들어오자 그쪽을 돌아봤다. 몇마디 짧게 대화를 더 주고받은 노인은 전화기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구랑 통화하셨어요?”
“나영감. 실기로 한명 입학시켰다고 어찌나 자랑인지.”
“실기... 그럼 걔도 우리 학교에요?”
“그래. 근데 왜 그러니 지민아?”
여자애는 잠시 뭔가를 생각하더니 살짝 삐진 듯 눈썹을 씰룩였다. 불만의 표시인 것 같았다.
노인은 승부욕에 불이 붙은 손녀를 보며 누굴 닮아 저럴까 생각하다가 자기 현역이랑 똑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승부에 할아버지의 명예 같은 거 걸지 말고 걸거면 네 명예나 걸어라.”
“에이, 할아버지도 참. 요즘 누가 그래요.”
말은 그렇게 하고 있었지만, 식탁에 앉은 소녀의 눈은 이미 승부욕에 활활 타오르는 눈빛이었다.
‘얼마나 강한지는 모르지만 한번 붙어보고 싶어지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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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어서 죄송합니다. 딱지를 치지 않는 파트라 도저히 내용이 안 이어져서 고민했던 3화입니다.
언급만 되던 금선이가 드디어 제대로 등장했는데요. 잔디노이드에 초융합 든 섀도르, 이전 마룰 당시의 마함 7칸 클리포트를 쓰는 악녀입니다.
히로인이냐구요? 아뇨, 그런 거 하는 거 아니에요 지지
어째 디자인을 찾아보니 근래에 그린 그림중에 적당한 디자인이 없어서 작년 4월 말에 그렸던 그림으로 대체합니다. 교복 디자인은 본안과 다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저번에 올린 그 캐릭터인데...
4화에 등장할, 이번에 짧게 스쳐지나간 그 캐릭터가 이 캐릭터입니다.
포지션이요? 히로인인가 라이벌인가 그것도 아니면 스쳐지나가는 단역인가!
그 모든건 4화에 계속됩니다! 다음화를 기대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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