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보맨이 진짜 유사쿠인가에 대한 문제는 제처두고,
[백업 시스템에 오류가 일어나서 '백업된 너'와 '진짜 나'가 바뀌었다.]에 대해서 생각해봤습니다.
보맨이 내가 진짜 나라고 주장하는 근거는 정신을 차려보니 바깥의 '너'는 의아한 듯이?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고, 그걸 지켜보는 '나'는 전뇌 세계에 갇혀있었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진짜라고 말하기엔 부족한 것이,
"그리고 동시에 그때 네 데이터, 감정, 사고, 경험치 ..." -57화 중에서
데이터가 감정, 사고, 경험치뿐만 아니라 백업 시점의 기억까지 포함이라면? 백업 데이터가 자신을 진짜라고 착각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백업 데이터 입장에선 방금 전까지는 현실의 몸에 있던 감각이 생생한데 갑자기 지금의 나는 네트워크 세계에서 내 몸이었던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고 생각할 것이고, 자연스레 가짜와 내가 뒤바뀌었다고 여기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닐테니까요. 저 바뀌었다고 말하는 타이밍에 맞춰서 바깥의 유사쿠가 취한 미심쩍은 행동은 오랜 시간 동안 계속된 학대로 기억을 잃었던 것으로도 설명이 됩니다.
최소 89번의 백업이 되는 동안 유사쿠는 적지 않은 횟수의 전기충격을 받았을테니까요.
2.
또한, 유사쿠가 로스트 사건 이전의 기억이 없다는 점은
1. 그 이전에도 지속적으로 작품 내에서 표현해왔던 PTSD의 증상일 수 있다.
2. 유사쿠의 로스트 사건 이전의 인연이 아직 나오지 않았다.
이 두 가지 이유로 본인이 진짜라도 겪을 수 있는 일입니다.
1번은 간단히 넘기고 2번 이유에 대해서만 풀어써보자면
흔히 기억상실을 겪은 사람이 기억을 찾기 위해서 어떤 행동을 하느냐 입니다.
잃어버린 기억과 관련된 장소를 찾아가거나, 관련된 행동을 하는 것.
하지만 유사쿠의 주변 인물 중에 로스트 사건 이전의 인연에 해당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과거 일을 기록해놓은 일기장 같은 것도 없습니다.
유사쿠가 고아원에 있었던 묘사만 하더라도 과거의 자신을 알려줄 부모나 친인척이 로스트 사건 이후에 없었다는 얘기일 수도 있고요.
즉, 유사쿠는 과거를 되짚어줄 존재가 현실에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계기가 없으니 후에도 쭉 못 찾고 끝낼지도 모르죠.
3.
백업 데이터에 대해서도 좀 의문이 들었는데, 슬쩍 지나가면서 보이는 88, 89라는 숫자. 이게 정말 백업된 개수라면 그렇게까지 백업본을 많이 만들 필요가 있나 싶었습니다.
쯔꾸르 게임 세이브로 따지면 이런 거잖아요?
1. 후지키 유사쿠 00:01:13
2. 후지키 유사쿠 00:15:50
3. 후지키 유사쿠 00:40:26
...
85. 후지키 유사쿠 40:23:25
...
플레이를 41:00:00까지 하다가 실수해서 배드 엔딩을 내버렸다면 85번째를 고르죠. 보통 1~3번을 누를 일은 없습니다.
세이브 데이터도 85개까지 만들 것도 없이 1~3개 칸만 쓰면 충분하고요.
또, 컴퓨터 백업도 가장 멀쩡한 최근 껄로 남겨놓지 50개 넘게 백업본을 만들어놓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저 장면이 서술트릭으로 사람 헷갈리게 '진짜 유사쿠'와 '백업 유사쿠'가 바뀌는 장면으로 보이게끔 하고, 사실은 새로운 백업 데이터로 덮어쓰는 장면이 아니었을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4.
이그니스는 모르는 백업본. 실험 진행 중에는 AI가 로스트 사건 피해자의 듀얼로 간접경험하면서 학습을 해야하는 상황이었는데, 그런 이그니스에게 감춰진 실험과정이라면 이그니스 외에 별개의 목적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코우가미 박사는 의지를 가진 AI를 만듬으로써 인류의 후계자를 만들었는데, 만들 것도 없이 의지를 가진 인간의 정신을 전뇌세계에 업로드한다는 발상을 안해봤을까 하고요. 백업본은 그 발상의 일환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당사자의 동의 없이 멋대로 올려놨기 때문에 업로드된 본인의 정신은 혼란스럽겠지만요.
이것도 어찌보면 육체를 가진 인간 한계를 벗어던지고자 한 박사의 노력 중 하나였을지 모릅니다만 옹호해주고 싶진 않군요.
+
여러 추측을 써봤습니다만 글쓴이 본인도 지금의 후지키 유사쿠가 진짜라기보다는 가짜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곱씹어 볼수록 철학적인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고 있어서 머리가 아프네요. 룬의 아이들 2부의 두 인물 관계가 연상되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우선 VR에 있을 거 같은 '진짜 유사쿠'는 유사쿠 몸을 빼앗아서 나오더라도 로스트 사건 이전 인연이 없는 거 같은지라 외롭게 고통받는 거 확정일 거 같네요. 전뇌 세계에서 10년을 지냈더라도 그 정신은 10년 전 성숙하지 않은 어린 유사쿠가 베이스니까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이불킥하러 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