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까만 괴물의 발이 허공을 가로지른다. 그럴 때마다 뒤늦게 바람 소리가 터져나오며 고음의 파열음이 뒤따른다. 이 괴물의 생김새는 무척이나 특징적이다. 꼬리는 아홉 갈래로 나뉘어진 여우의 꼬리가, 몸통은 다리가 여섯이나 달린데다 두터운 비늘 갑옷을 입은 몸, 여섯 개나 되는 새빨간 눈동자 위로 왕관처럼 생긴 것이 부유한다. 더욱이나 괴물은 산처럼 거대했기 때문에, 느릿느릿 움직이며 발을 뻗고 꼬리를 휘둘러도 그걸 보고서 피한다는 것이 무척이나 어려웠다.
"안 돼."
이 커다란 괴물을 앞에 두고 가온은 듀얼 웨펀에 다시금 카드를 강타했다. 그가 코트를 비롯한 숱한 적들과 싸웠을 때처럼, 그 감각을 되새겨보며 온몸의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렇지만 너무나도 희박하다. 몬스터의 형상이며, 그 기운이란 것이.
"소환되질 않아."
그의 손을 빌려 나타난 몬스터들은 불투명한 유리 조각이 부유하는 것 같다. 희미하고 희박한 존재. 당장이라도 사라져버릴 것처럼 불안정한 존재만이 그의 손끝에서 탄생한다.
"왜!"
가온이 입을 굳게 닫아 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감정이 격렬하게 호소함에도 카드가 답해주지 않는다.
그러더니 정신이 흐릿해지는 것 처럼, 가온은 했던 행동을 반복하며 악을 지르기만 했다. 보다 못 한 소피아가 가온의 손목을 잡아 그를 멈추게 했다.
"진정해."
"윽."
그녀의 작은 주먹이 손목을 압박하자 그제서야 가온의 정신이 돌아왔다.
"반복해도 안 되면 이유가 있는 거겠지. 침착해라."
여태까지 숨을 쉬는 것조차 잊고 폭시를 노려보았다. 가온은 가쁘게 숨을 몰아 쉬기 시작했다.
"이유를 찾는거다. 어째서 실체화되지 않는지. 어째서 링커가 나타나지 않는지를."
"링커……."
가온이 한 마디 말을 중얼거렸다. 그러자 그 짧은 단어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몬스터가 실체화되지 않는 이유……. 모르포……."
폭시는 가온에게 말했다. 코트와 듀얼을 하며 링커를 두 번이나 파괴당했으니, 자신이 힘을 낼 필요도 없이 가온을 이길 수 있노라고.
'그래. 그녀석이 말한대로야. 오늘만 벌써 몇 번이나 모르포를 파괴당했어.'
링커를 파괴당하고 패배에 이르지 않았을 뿐, 모르포는 빈사상태였다. 그녀가 폭시의 공격에 제대로 힘을 내지 못 하고 패배한 이유도 분명 그것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코트와 싸우면서 모든 힘을 다 써버렸어.'
코트에게 이기고나면 모든 것이 끝날 거다. 그 단순한 생각으로 그는 여력을 남겨놓지 않고 모든 힘을 탕진했다.
가온의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의 온몸이 불쾌할 정도로 땀에 흥건하다. 그리고 숨결마저 가빠르다. 스스로의 몸상태를 가온은 뒤늦게서야 자각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폭시 저녀석한테 왕관의 힘을 빼앗긴거야."
결론을 내린 가온을 보며 소피아가 입을 열었다.
"그렇다는 소리는 실체화를 쓰기 위해 저녀석한테서 힘을 다시 되찾아야 한다. 그런건가."
"그래. 하지만 어떻게 해야 그럴 수 있지?"
원인을 파악하는 것에는 성공했지만 해결책이 보이질 않았다. 애시당초 폭시가 어떤 방법을 사용해서 가온에게서 왕관의 힘을 일정 부분 빼앗았는지 그 원리조차 알 수 없었다.
"흠. 어쩌면."
소피아는 무엇인가 떠올린 듯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
새까만 머리의 소녀가 뛰어올랐다. 그녀의 온몸에서 주황빛으로 빛나는 불씨가 타올랐다. 불꽃은 이내 크기를 부풀려 그녀의 전신을 감쌀 정도가 되었다. 짐승처럼 잽싸고 거칠게 돌진한다.
괴물과의 거리는 불과 팔 하나 정도. 스트로리는 양쪽 주먹을 번갈아가며 괴물에게 수 차례 난타했다. 그럴수록 그녀의 팔에 붙은 불길은 더욱 환하고 찬란하게 타올랐으며, 마침내 괴물의 껍질을 벗겨내고 더러운 피가 분수치게 만들었다.
"날파리 같은 녀석."
괴물은 눈살을 찌푸리더니, 상체를 앞으로 뻗어 스트로리를 집어삼키려 했다. 스트로리는 그것보다 한 박자 빠르게 뒤로 내뺌으로서 괴물의 콧잔등에 다다랐다.
- 넙죽 낚여주셨어."
자신을 삼키려고 꽉 다문 입 아래로 뛰어내려, 괴물의 턱 아래에 강렬한 어퍼컷을 꽂아넣었다. 커다란 충격에 괴물의 턱이 찌그러지며 전신이 휘청거렸다. 상반신이 위로 일어서서 뒤집어지려는 것을, 다시 정신을 차려 몸을 땅바닥 가까이 대어 모면한다.
- 후~. 어지간히 단단한가 봐. 턱 아래를 맞았는데도 저렇게 정신을 차리다니."
스트로리는 괴물의 피가 묻은 주먹을 털어내며 말했다.
- 그래도 이렇게 계속 이어지면 곤란한데.
겉보기에는 유효타가 들어간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도 않다. 폭시가 들어있는 괴물의 몸뚱아리는 즉시 상처를 수복하고 반격을 준비한다. 피를 아무리 흩뿌려도 그만큼 새로 생겨나고, 비늘을 찌부려트려도 더욱 단단하게 매여진다.
- 커다란 거 한 방을 먹여야 해.
괴물이 상처를 회복할 수록 비늘을 뚫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늘어나고 있다. 장기전이 된다면 스트로리 그녀조차도 비늘을 뚫을 수 없을 지경이 될 것이다.
스트로리가 다시 폭시에게 맹공을 퍼붓기 위해 숨을 고르고 있자, 괴물이 빠르게 움직였다. 그녀를 향해 쏜살같이 달려와 발을 구르며 스트로리가 있던 자리를 짓밟았다. 숱한 먼지들이 뒤섞인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올라 제대로 앞도 보이지 않았다.
- 콜록! 더럽게시리.
소녀는 먼지를 그대로 들이쉬어 거센 기침을 몇 번인가 했다. 괴물의 움직임이 사그라들고, 스트로리는 괴물의 발치에서 벗어나 사각지대에 몸을 숨겼다. 괴물이 완전히 등을 돌리는 그 순간, 뒤에서 한 방 먹여주겠다고 다짐하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괴물이 발 아래를 살피며 고개를 돌렸다. 스트로리는 이때다 하며 땅을 박차고, 괴물의 몸에서 떨어져나온 부유물을 밟고 섰다. 있는 힘껏 주먹을 재리르려고 폼을 재자 그녀의 곁에 퍼득거리는 날개 소리가 났다.
- 뭐야?
폭시의 몸에서 나는 소리는 아니다. 그녀가 휙 고개를 돌려보자, 스트로리와 비슷한 체격의 소녀가 등뒤에 돋아난 날개를 파닥거리며 무엇인가를 매달고 왔다. 양의 링커인 루어시가 양의 팔을 잡은 채로 날개짓하는 것이었다.
- 오. 말 잘 통하는 언니!
- 쉿.
스트로리는 휘파람을 불며 루어시를 불렀다. 루어시는 검지 손가락을 올려 그녀에게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 저녀석한테 커다란 거 한 방 먹여주려고 하는데. 저녀석이 완전히 등을 돌린 지금이 기회야.
- 그런가요. 하지만 잠깐 기다려주실 수 있나요?
- 음?
스트로리가 고개를 갸우뚱하자, 루어시의 팔을 잡고 어색하게 날개짓하는 양이 보였다.
"너와 같이 다니는 녀석은 어디로 갔지?"
- 세라라면 밑에서 싸우는 중이지. 뛰는 걸 잘 못 하거든.
괴물의 꼬리 하나가 지면을 박찬다. 눈과 모래가, 건물의 잔해가 뒤섞인 대지가 성난 파도처럼 출렁거렸다. 괴물의 꼬리 여럿이 지면을 내리치며 두드리는 소리가 나더니, 그 중 하나가 누군가에 의해 붙잡혔다.
"저기 있는건가.
- 세라일거야. 초월체가 되고나서는 팔힘이 엄청 세졌으니까 꼬리를 붙잡고 있어줄 걸?
그러나 그 말을 한 직후 묵직한 충돌음이 울려퍼졌다. 괴물의 꼬리를 묶어놓는가 싶던 세라가 그 사이에 놓쳐버린 것이다.
"별로 버티지 못 하는 것 같다."
- 에고고. 그렇게까지 팔힘이 좋지는 않았나 보네.
그 모습에 양이 한숨을 내쉬자, 스트로리는 멋쩍게 뒷머리를 긁었다.
- 저한테 작전이 있어요.
- 음?
스트로리가 세라 이야기를 하느라, 한동안 말을 하지 않던 루어시가 입을 열었다.
- 저 괴물의 힘을 흡수할 수 있는 시점까지 흡수해서, 한 번에 퍼붓는 거에요.
- 저녀석한테서 힘을 흡수한다고?
"그래."
스트로리가 고개를 갸우뚱거리자 양이 대신 대답했다.
"루어시가 성체가 되게 하면, 검으로 녀석의 힘을 어느정도 빼앗을 수 있다. 저녀석과 듀얼할 때 한 번 해봤으니, 두 번이라고 못 할 것도 없지."
- 오호! 그럼 빨리 하면 되겠네!
- 그런데 문제가 있어요…….
- 문제? 어떤 문제?
"루어시에게 마시게 할 내 영혼이 얼마 남지 않았다."
- 뭐어?
루어시 대신 양이 대답한다.
- 지금 사방에 널린 게 영혼인데? 대체 얼마나 필요하길래 부족하단 거야?
"루어시를 내 링커로 할 때 조건 삼았던 게 있다."
- 조건?
"오직 내 영혼만을 취할 것을 말이야."
- 허…….
"그리고 여기에 떠다니는 영혼의 잔유물은 모두 저녀석과 코트에게서 나온 것. 루어시에게 그걸 먹일 수는 없다."
- 까다롭게 굴거야?
스트로리가 뭐라고 해도 양은 자기 생각을 바꾸지 않았다.
"단순히 혐오감 때문에 그러는 것도 아니다."
- 그럼 또 뭐 때문에 그러는 건데?
"너는 지금 여기에 떠다니는 영혼들을 마시고 있나?"
- 나는 아직 세라에게 받은 게 있으니까 그럴 필요 없지. 부족해진다면야 그거라도 끌어다 써야겠지만.
"그러지 않는 게 좋을거다."
- 음?
"이 자리에 모여있는 건, 전쟁을 일으킨 전범의 우두머리들 그리고 이름 모를 원령들이다."
- 흠. 그건 불쾌하긴 하지.
"그것보다 처음 이야기로, 작전에 대한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겠다."
양은 엉뚱한 구석으로 튀던 이야기를 정상궤도로 돌려놓았다.
"루어시에게 내 힘을 줘서 성체로 성장시킨다. 그 다음, 저 괴물의 힘을 루어시의 검에 봉인하고 그걸 다시 저녀석에게 퍼붓는다. 주요 골자는 그런 거다."
- 그래. 거기까지는 이해했어. 그런데 문제는 시간이 적다는 거지?
"그래. 내 영혼이 버틸 수 있는 시점까지가 한계다."
- 어느정도 버틸 것 같아?
"정확히는 알 수 없다. 루어시가 성체가 되는 데 필요한 것만이 아니라, 저녀석의 힘을 봉인시킬 때에도 어느정도 내 생명을 깎아내야 하니까."
양의 대답에 불만스럽긴 하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알았다는 스트로리. 그녀가 다시 양에게 질문을 던졌다.
- 그래서. 내 역할은 뭔데?
"미끼 역할이다."
- 뭐어?
"재주껏 저녀석의 공격을 버티고, 루어시가 일격을 날릴 때까지 시간을 버는 거다."
- 말 뜻은 이미 이해했거든.
"그러면 바로 시작한다."
- 내가 미끼 역할을 맡으라고? 나도 팔힘은 자신있거든!
"더이상 지체할 시간 없다. 어차피 너나 나나, 아무리 용을 써봤자 저녀석한테 치명상은 못 입힌다. 아닌가?"
- 욱.
양의 말이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스트로리는 입을 꾹 다물었다.
- 좋아. 까짓거 해주지.
스트로리는 주먹을 꽉 쥐고 괴물을 향해 뛰어들었다. 그녀의 강력한 맹공이 이어지자, 폭시의 시선은 오로지 그녀에게로 쏠렸다.
"시작한다."
- 네.
스트로리가 폭시의 이목을 끄는 사이에 루어시가 날개를 부풀렸다. 양에게 남은 힘을 거의 다 받다시피 하며, 그녀의 몸은 성인의 신체가 되었다. 그녀의 왼손에는 백옥처럼 하얀 검 한 자루가 쥐어졌다.
양은 그것을 확인하고는 여러 마리의 용을 실체화 시키더니, 루어시의 팔을 놓고 실체화한 몬스터의 위에 올라탔다.
"죽어라. 괴물."
양의 용들이 눈을 붉게 번뜩이며 으르렁거렸다. 폭시는 그것에 대한 대답 대신 꼬리를 휘둘러 공격했다.
- 그르르!
양이 불러낸 용 중에서도 가장 커다란 용 한 마리가 괴물의 꼬리를 양손으로 받아냈다. 어두운 자줏빛이 흐르는 비늘, 무성하게 자라난 새까만 터럭. 박쥐같은 날개를 커다랗게 단 괴팍한 용 가이저였다.
가이저가 꼬리를 뒤집어 튕겨보냈다. 폭시는 예상외로 드세게 힘을 내뿜는 룡성을 흘끗 보더니, 뒷발로 걷어차버렸다.
"링커도 아닌 것으로 나에게 상처를 낼 수 있을 것 같더냐."
폭시는 가소롭다는 듯이 양의 용들을 짓밟고, 스트로리를 잡으려 허공에 팔을 내저었다. 하늘에 떨어지는 부유물들을 박차고 날아다니듯 뛰어다니는 소녀를 향해 팔을 내지르는 폭시에게로, 가슴 아래에서 주황빛 불길이 솟구쳤다.
"음?"
뜨거운 불길이 점점 거세지며, 그녀의 턱까지 치솟아 온몸에 불을 붙이려는 듯 했다. 양이 불러낸 커다란 용 한 마리가 그녀의 뒷다리를 붙잡더니 들어올리기 까지 했다. 괴물은 다리를 결사적으로 휘저으며 용을 짓밟으려고 하였으나, 용의 주변에서 피어나는 장렬한 불꽃들이 괴물의 살점을 태우려고 소리질렀다.
"아아. 그게 남아있었구나. 혜르의 끄나풀."
악마를 닮은 듯한 검붉은 용 한 마리가 괴성을 내지르며 어깨에 힘을 준다. 다리를 붙잡은 양 손이 괴물의 무릎 아래를 뜯어버려 멀리 내던졌다. 커다란 뒷다리의 반절이 지상에 떨어지자, 많은 양의 폭약이 일제히 터진 것처럼 커다란 소리를 내며 대지가 출렁거렸다.
"미련하다."
괴물은 새롭게 뒷다리를 만들어내 레드 데몬즈의 안면을 강타했다. 그녀의 날카로운 발톱이 용의 목을 찢어버리고 대가리를 뽑아버렸다.
중심을 잃고 휘청거리던 몸을 앞으로 확 꺾어버렸다. 그녀의 압도적인 중량이 용의 목 아래 신체를 짓누르고, 다시금 지면에 뱃가죽을 눕혔다.
"날파리처럼 날아다니니, 너희들에게 아무리 발을 휘둘러봤자 소용이 없겠구나."
폭시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확실하게 끝낼 방법을 써야겠어."
괴물의 등허리 아래로 아홉 개의 꼬리가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며 쓰러진 건물 잔해들을 긁고 지나간다. 먼지 구름이 피어오르며, 사방에서 유리조각과 콘크리트가 휘날렸다. 온갖 커다란 파편들이 날아다니는 사이에 괴물이 지면을 강타했다. 괴물의 주먹은 땅 깊숙히 파고 들어갔다. 딱딱한 지각으로 이루어진 지구의 피부를 뚫고, 그 아래에 감춰진 힘줄과 핏줄을 당긴다. 검고 새빨갛게 이글거리는 핏물이 솟구쳐 올랐다.
유독 가스가 물씬 풍겨나오며, 지면을 따라 흘렀다. 땅바닥은 넘실대며 파도쳤고, 부서진 건물 잔해들이 그 위로 비내리듯 쏫아져 내린다. 괴물이 그르렁 거리는 숨소리를 내자, 땅 아래에서 곯은 핏덩이가 터져나와 유성처럼 떨어졌다.
"자. 이래도 버틸 수 있는지 보자꾸나."
지구가 토해내는 강렬한 불길 속에서 괴물의 용머리가 입을 벌렸다. 그의 이마에 응어리진 보랏빛 보석이 찬란하게 빛났고, 왕관이 서슬퍼렇게 번뜩였다. 그리고 마침내 용이 새까만 불꽃을 쏘아보냈다.
총알처럼 빠르게 발사된 화염이 뒤엉킨 잔해들을 관통했다. 불빛과 금속들이 무작위로 엉겨있는 곳에 타닥거리는 작은 불씨만을 남았다. 괴물은 조금씩 고개를 돌려가며, 불꽃을 뱉어냈다. 화염과 화염이 부딪히며 터져나오는 굉음이 그치질 않았다.
그 행동을 몇 번인가 반복하자, 크기가 커다란 건물들은 모두 사라지고, 시야에 스트로리가 들어왔다. 왼팔이 새까맣게 그을린 것을 제외하면 커다란 상처는 없어보였다.
"용케 살아남았구나."
- 그야 당연하지. 나는 클리파 링커의 왕이라고.
"트리가 빚어낸 링커말이구나. 하지만 네 주인은 왕관이 없지 않느냐."
- 그렇게 따지면 트리도 왕관 없었거든.
스트로리가 지면을 박차고 폭시를 향해 뛰어들었다. 처음 자신에게 달려들 때만큼 속도가 빠르지는 않았다. 폭시는 씨익 웃으며, 괴물의 입을 열어 불꽃을 쏘아보냈다. 스트로리가 오는 방향 그대로, 그녀의 코앞으로 화염이 날아갔다.
- 멍청이~!
스트로리는 갑작스럽게 방향을 틀었다. 그러자, 그녀의 등뒤에 있던 누군가가 화염을 향해 검을 내밀었다. 새까만 화염이 검끝을 기준으로 빠르게 빨려들어갔다. 화염이 점점 작아지고, 마침내는 사라지자 폭시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네이년."
스트로리의 뒤에서 나타난 것은 루어시. 그것도 자신과 싸우면서 마지막으로 보였던 그 모습이었다.
새하얀 검을 따라 괴물이 쏘아보낸 검은 불꽃이 타닥거렸고, 그녀의 오른손에 쥔 검이 검게 물들었다. 괴물의 입가에서 타올랐던 것처럼, 오른쪽에 든 검이 검게 타오르자 루어시는 그것을 크게 휘둘렀다.
새까만 화염이 용머리를 향해 날아들었다. 팍 터지는 소리와 함께 섬광이 번쩍였다. 용의 비늘이 찌부러지고, 턱이 뜯어졌다. 괴물은 비명을 내질렀고 6개나 달린 붉은 눈동자가 화염에 타들어가며 핏물을 흘렸다. 절반 가량이 파괴된 머리를 붙들고 몸부림을 치자, 스트로리와 루어시는 승리를 확신했다.
- 좋아! 이거면 되겠는데!
-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루어시가 검을 크게 휘두르려고 하자, 그 순간 그녀의 몸집이 줄어들었다.
- 어?
신체가 갑작스럽게 변화하자 루어시는 균형을 잃고 휘청거렸다.
- 설마 양의 힘이…….
빈틈이 생겼다. 아주 잠깐사이에 괴물의 발톱이 그녀의 머리맡을 찌르려 들었다.
계란이 바닥에 떨어지는 것처럼 짧게 퍽 소리가 퍼졌다.
괴물이 괴성을 내지르며 주변 일대를 휩쓸었다. 무척이나 처참한 몰골이었다. 6개나 달린 눈은 모두 찢어져서 피를 흘렸으며, 턱은 부숴져서 없다. 피를 침흘리듯 흘려대며 괴물은 목청껏 울부짖었다.
새까만 불꽃이 괴물을 보호하듯이, 찌그러지고 피를 흘리는 신체를 감싸안았다. 괴물은 화염을 두른 채로 발에 걸리는 것을 닥치는대로 짓밟으며 파괴했다.
- 으윽.
긴장으로 푹 젖어버린 이마에서 땀 한 줄기가 흘러내렸다. 입가에서 자연스럽게 신음이 새어나온다. 그러나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자그마한 소녀가 눈을 찔끔 감았다 떳다.
- 어라?
루어시의 눈 앞에는 폭시가 없었다. 그 대신, 스트로리와 또다른 누군가가 서있었다.
"진짜로 발 빠르네."
"코스믹 코퍼레이션의 기술력이 이 다리에 응집되있거든."
소피아가 가볍게 발을 구르며 말했다. 루어시는 눈 앞에서 벌어진 상황을 이해하지 못 하고 가만히 있었다.
- 순식간에 나타나서 우릴 구해줬어.
스트로리가 턱짓으로 소피아를 가리키고서야 그 상황을 조금이나마 이해했다.
"방금 전에 네가 날린 그 일격. 잘 봤다."
- 하지만 완전히 없애버리지 못 했어요. 더군다나 성체로 돌아갈 힘도 안 남았으니까…… 방금 그 공격이 사실상 마지막이에요.
"그런가. 하지만 녀석의 회복이 더뎌졌다. 겉으로 보이는 부상도 지금까지 중에 제일 크다. 무슨 수를 쓴거지?"
- 저 괴물의 힘을 빼앗아서 다시 받아쳤거든요.
루어시가 새하얀 검을 꺼냈다. 검 끝에는 괴물이 뿜었던 것과 같은 새까만 불꽃의 불씨가 남아있었다.
그 말을 듣더니 가온이 놀라며 루어시에게 다가갔다.
"방금 뭐라고 했어?"
- 네? 어. 힘을 빼앗아서…….
"힘을 빼았았다는 건 그건가? 녀석이 가지고 있는 영혼을 네가 빼앗았다고."
- 정확히는 공격하려고 방출해낸 걸 빼앗은 거지만요.
"어쨋든간에 폭시 저녀석한테서 영혼을 어느정도 빼앗았다는 거지?"
루어시가 고개를 끄덕이자 가온은 흥분을 주체하지 못 했다.
"그렇담 방법이 있을지도 몰라."
- 어떤 방법이요?
가온이 주먹을 꽉 쥐었다.
"네가 방금 폭시한테서 빼앗은 영혼을 나에게 넘겨줘. 그걸로 모르포를 불러내겠다."
가온은 방금 전에 있었던 일을 모두 설명했다. 폭시와 싸우며 맥없이 힘을 빼앗긴 것부터 몬스터를 실체화할 수 없다는 것까지. 그리고 그 이유를 루어시와 스트로리에게 전했다.
폭시가 가온의 영혼을 빼앗아 왕관의 힘을 약화시켰다. 그렇다면 반대로 폭시에게서 빼앗은 영혼을 가온에게 넘겨주면 된다.
- 그렇지만……. 정말 그럴 수 있을까요?
루어시가 불안을 표했다.
- 지금 당신에겐 링커를 불러낼 힘이 없는데, 괴물에게서 빼앗은 힘을 당신히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나요?
"해봐야 알겠지. 지금 가장 확실한 방법은 그것뿐이야."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스트로리가 무엇인가를 떠올린듯 손가락을 튕겼다.
- 그렇다면 내가 도움을 줄 수 있겠는데.
스트로리가 가온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툭툭 두드렸다.
- 나는 원래 트리가 만들어낸 링커. 태어난 건 걔랑 똑같은 방식으로 태어났어.
소녀가 씨익 웃었다.
- 잊어버린 건 아니겠지? 애시당초 링커가 영혼을 모아서 주인한테 넘겨주려고 태어났다고.
스트로리와 소울 이터를 만들어낸 것은 트리. 가온은 트리와 같은 영혼을 갖고 있다. 그렇다면 원래 역할대로 가온에게 힘을 주면 되는 거라고 스트로리가 말했다.
- 어때. 이거라면 괜찮겠지?
- 그게 가능하다면…….
- 좋았어. 그럼 그렇게 하자고.
두 소녀의 대화가 끝나자, 소피아가 괴물의 상태를 지켜봤다. 아직 괴물은 이들을 찾지 못 했다.
"끝을 내자고."
가온이 자기 주먹을 탁 잡으며 말했다. 스트로리와 루어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
괴물의 상처가 아물어간다. 잃어버린 장기와 신체가 뒤늦게나마 다시 재생되기 시작했다. 턱은 이미 반정도 재생되었고 시력도 되돌아 왔다. 마구잡이로 주변을 파괴하는 것을 멈추고, 회복되는 시력으로 주변을 살폈다. 생명이 있는 곳을 향해 새까만 화염을 쏘아보냈다. 괴물에게 있어서, 폭시에게 있어서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인물들은 모두 적수가 되지 못 한다.
루어시는 그녀에게 치명상을 입혔지만, 방금 그것으로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다. 루어시가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신체가 작아졌다. 그건 분명히 그녀의 주인인 양이 힘을 잃었기 때문이다.
"그 아이는 나와의 싸움에서 이미 힘을 많이 소모했지. 링커 또한 마찬가지."
실질적인 전력은 스트로리와 모르포 뿐. 그러나 스트로리는 폭시에게 커다란 상처를 입히지 못 했다. 루어시만큼 강한 폭발력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렇다면 마지막 남는 것은 모르포.
가온은 몬스터를 실체화하지 못 하고 있다. 그녀가 그에게 진실을 말하며 포박했을 때, 코트의 왕관을 강탈하듯 가온에게서도 그의 힘을 빼앗았다.
"천천히 확실하게."
숨소리가 들려온다. 폭시는 그 방향으로 돌아보았다. 용은 입을 벌리고 여태까지 중에서 가장 커다랗게 화염을 일궈냈다. 그것을 쏘아보내자, 번개가 내리치듯 대기가 갈라졌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그 틈새로 새까만 어둠이 나아간다. 화염의 창이 정면에 있는 모든 것을 불태우고, 그 너머까지 꼬리를 흔들며 날아갔다.
퀴퀴한 악취가 코를 찔렀다. 요란하게 불이 붙고 터지는 소리에 다른 모든 소리가 묻혔다. 요란스러운 정적. 화염의 궤적을 불빛의 꼬리가 더듬으며, 땅바닥에 머리를 박고 씰룩거렸다.
그 거대한 불꽃의 꼬리에 새파란 빛이 올랐다. 전혀 새까맣지 않은, 지금껏 타오르던 화염과는 전혀 다른 찬란한 불빛이었다. 이 빛의 정체는 투명하고 이질적인 생김새의 고치 하나. 무수히 많은 실이 엮여, 보석처럼 영롱한 빛을 낸다.
"저건……."
보석의 등이 뜯어진다. 대기중에 모인 습기가 그녀의 날개에 엉겨붙어, 축축하게 적셨다. 날개는 물기를 털어냈고, 흐릿한 무지개가 몇 개나 그녀의 곁에 생겨났다.
그녀가 날개짓 하자 무지개마저 사라지고, 검정과 파랑 모든 불빛이 사그라들었다.
"그럴리가."
폭시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검은 화염을 물리고 자신의 빛을 뿜어내는 것은 파란 날개가 달린 나비 한 마리였다. 정말로 나비처럼 자그마한 것이 푸르게 빛나는 날개를 펄럭이며 폭시를 정면으로 노려보았다.
폭시가 눈알을 굴려 아래를 쳐다보았다. 거기에는 몇 명인가가 버티고 서있었다. 스트로리와 루어시를 비롯해 가온까지, 그녀가 상처를 회복하는 동안 작당질을 한 모양이다.
"루어시. 저년을 가장 먼저 죽였어야 했는데."
루어시는 폭시의 힘을 빼앗아 반격했다. 마지막 일격을 날리려다 실패했으니, 남은 힘은 온전히 그녀가 갖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을 가온에게 돌려주고, 링커를 소환할 힘을 얻은 것이 분명하다.
- 후.
소녀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그녀의 허파 가득히 탄내가 도는 공기가 들어왔다. 비릿한 냄새와 불쾌한 악취. 그것들이 모두 섞여있는 숨을 내뱉었다.
- 2라운드 시작이다.
가슴을 활짝 펼치고 양손을 꽈악 쥐었다. 그녀 자신이 촛불이 된 것처럼 화려하고 창백한 불길이 그녀의 전신을 감쌌다. 아득하게 새파란 날개를 펼친 소녀가 폭시를 향해 정면으로 뛰어들었다.
"가소롭기는."
둘 사이에는 어떠한 방해물도 없다. 서로를 향해 훤히 뚫려있는 길. 피할 것도 없다. 서로는 서로를 맞추는 것만을 생각하고 주먹을 내질렀다.
그 순간, 땅바닥에서 커다란 진동이 일어났다. 무너진 잔해들이 쌓인 것을 걷어내더니, 그 아래에 있던 무엇인가가 나타났다. 그것은 괴물의 꼬리를 붙잡고, 옆으로 흔들었다.
"!!!"
"날 잊으면 곤란하지. 폭시 쓰레기야!"
"세라. 네년이 날!"
먼지를 뒤집어 쓴 묘령의 여인 세라였다. 그녀는 자신의 모든 힘을 끌어내어 폭시를 잡아당겼다. 그 결과 폭시는 그녀를 어떻게 처리하지도 못 하고 균형을 잃었다.
크로스 카운터를 먹이려던 계획은 실패했다. 팔을 뻗어 보아도 모르포의 공격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꼬리도 세라에게 붙잡힌 상황. 그녀는 용머리를 내뻗어 모르포를 집어삼키려고 했다.
- 트라이!
눈 앞에서 섬광이 터졌다. 여섯 개의 눈동자를 날카로운 창으로 찌르듯 눈이 화끔 거리며, 얼굴이 찌그러졌다. 하지만 이정도 상처로는 아직 죽지 않는다. 전신의 무게를 이용해 꼬리를 잡은 세라를 날려보내고, 모르포를 물어 뜯으려 달려든다. 입을 찢어져라 벌리고 뛰자 턱 아래에서 화염이 작렬했다.
- 봄버!
코앞에서 푸른 화염이 다시금 터지더니 괴물의 이마가 갈라졌다. 피를 잔뜩 흘리며 거친 숨을 토해내는 괴물의 목덜미에 두터운 손이 있었다. 신체의 절반정도를 뜯긴 검붉은 용 한 마리가 그녀의 턱 아래를 잡고 지면에 내리 처박았다.
"네년의 숨통을 끊겠다."
"크으윽. 네녀석도 날 방해하는 것이냐!"
증오어린 양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린다. 폭시는 짐승처럼 괴성을 내질렀다. 마지막 발악을 하듯 검붉은 용을 찢어버리고 하늘을 향해 입을 벌렸다.
여태까지 쏟아냈던 것중에서 가장 격렬하고 거대한 화염이 하늘을 향해 날아올랐다. 태양과도 같이 내부를 맥동하며 폭발하는 검은 불덩이가 푸른 하늘을 찢어갈랐다.
- 트라이
모르포의 발 아래로 새까만 먹구름이 짙게 깔린 것만 같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촘촘히 짜인 검은색 방벽. 그녀는 지금껏 불태운 것보다도 훨씬 더 맹렬한 푸른빛을 두르고 지상을 향해 낙하했다.
- 빅뱅!
창백한 불빛이 가느다란 실처럼 검은 하늘에 반짝였다. 굉음에 고막이 먹먹해져, 소리를 감지할 수 없었다. 모르포와 폭시, 둘 중 누구 하나도 먼저 움직이지 않았다. 세상이 정지한 듯 정적이 이어지더니 괴물의 보라색 피가 질척거리며 튀었고, 바다에 이는 파도처럼 지상에 넘실거렸다.
……
괴물의 신체는 더이상 재생하지 않았다. 그의 탁한 핏더미는 곧바로 말라버렸고 커다란 비늘과 껍질만이 앙상하게 남아있다. 몇 차례나 확인한 끝에 더이상 폭시가 존재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말을 듣자 자리를 가득 메운 긴장감이 사라졌다. 양은 그 자리에 힘이 풀려 쓰러졌고 루어시 또한 사라졌다. 그의 체력이 한계에 다다라 기절하듯 잠에 빠졌다.
가온과 세라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세라의 경우에는 그 자리에 앉더니 이내 바닥을 등지고 누워버렸다. 직접적으로 전투에 나서지 않은 소피아만 숨결이 거칠지 않았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녹초가 되어버렸다.
- 휴.
모르포가 한숨을 내쉬며 손을 가볍게 털었다. 그녀에게 뽀얗게 묻은 먼지가 같이 날아갔다.
모르포는 가온을 뒤로 하고 스트로리에게 다가갔다. 세라는 잠에 빠진 듯 하고, 스트로리 또한 땀에 흥건한 것이 지쳐보였다.
- 작별인사 하러 왔어.
- 작별인사?
- 폭시 그녀석이 죽으니까 왕관이 사라졌어. 그렇다는 건 저녀석은 평범한 사람이 된거지. 평범한 사람이 링커를, 그것도 나를 꺼낼 수 있겠어.
- 하긴 그렇지.
- 그래서 작별인사 하러 왔다 이거지.
- 나는 세라가 있으니까 남겠지만, 너는 사라지는 거구나.
- 이제 왕관도 뭣도 없으니 링커도 필요 없을 거 아냐. 오히려 잘 된 일이지.
- 링커는 필요 없겠지만, 나는 더 살고 싶어. 짧은 시간이었지만 재밌는 것들을 배웠거든.
- 그래?
- 그건 너도 그럴텐데.
- 뭐. 그렇긴 하지. 순전히 링커로 살아갈 때는 먹는 것도 더럽게 맛없는 것만 먹었었는데, 저놈 덕에 제대로 된 음식이란 걸 먹어보니까 그건 좋았어.
- 이터 아니랄까봐 먹는 거에 신경이 다 팔리셨구만. 세상에는 더 재밌는 것들도 있더라고.
- 뭔데?
- 비밀.
- 뭐야. 궁금하게시리. 마지막 떠날 때까지 그러기야?
- 흐흐.
두 소녀는 말을 멈추고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살며시 손을 흔들고, 둘은 돌아섰다.
커다랗게 펼쳤던 푸른 날개가 민들레 씨앗처럼 바람결에 흩날려 사라졌다. 가온은 그녀를 바라보며 안도감을 내비쳤다.
"다 끝났다."
시간이 흐른다. 생명이 맥박한다. 그 말을 하고서야 비로소 가온은 느낄 수 있었다.
"정말 지긋지긋한 일이였어."
SS의 등장에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실험실을 탈출하고 양과 목숨을 걸고 싸웠던 그 날부터 시작해야 할까. 도대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할지 종잡을 수 없는 기나긴 싸움이 끝났다고 생각하니, 다른 것보다 허탈함이 먼저 느껴졌다.
"생각해보면 바람잘 날이 없는 인생이였어."
- 인생 다 산 것같은 사람처럼 말한다.
"너무 많은 일을 겪으니까. 이게 현실인지 그것조차 햇갈려."
- 그게 왜 햇갈려?
모르포가 다가와 가온의 이마에 손을 가까이 가져갔다. 둥글게 말아 엄지에 걸어놓은 중지를 풀어 딱밤을 날렸다. 경쾌한 소리가 나자 가온이 탄성을 뱉으며 자기 이마를 매만졌다.
"뭔 짓이야 갑자기."
- 이제 알겠지? 전부 현실이야.
"그래. 덕분에 잘 알겠다."
- 그럼. 고마워해야지.
주변이 푸르게 물들었다. 청명한 하늘빛이기도 하지만 다른 무언가가 반짝이고 있었다. 나비의 날개에서 떨어져나온 파란 불씨가 아름답게 일렁이고 있었다.
가온은 자기 이마 위로 왕관이 있던 자리를 쓸었다.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래도 폭시가 소멸하면서 같이 사라진 듯 하다.
"그녀석이 왕관은 자기가 준 거랬어. 트리나 코트한테말야."
- 흠. 그래서 그게 지금 안 보였던 거구만. 나는 네가 집어넣은 줄 알았지.
모르포는 허둥대는 가온의 모습을 보며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시치미를 땠다.
"왕관이 사라진다는 건."
가온이 말을 머뭇거렸다.
- 날 유지할 힘도 없어진다. 그 뜻?
가온이 침묵했다.
- 하음. 트리가 죽고나서 10년만에 다시 세상밖으로 나오나싶더니, 코트 그놈이랑 다시 싸우고 잠들었지, 이번에 또 잠들게 생겼네.
모르포가 실없이 웃었다.
- 이번에는 못 깨어날지도 모르겠다. 앞으로 깨어날 필요도 없을테고.
"깨어날 필요가 없다니. 꼭 그렇지도 않거든."
- 이제 적도 없겠다 내가 할 일이 뭐가 있겠어. 나는 푹 쉴란다.
"그러니까."
가온이 일어섰다.
"구태여 사라질 것도 없지. 쉬고싶다며. 그럼 남아서 쉬면 되는 거잖아. 그놈들 때문에 꼴이 말이 아니지만, 지하는 시설들이 멀쩡할 걸."
초조하게 말하는 가온에게 모르포가 다가갔다. 그리고는 가볍게 어깨를 두드렸다.
- 됐네요. 있어봤자 공사하느라 시끄러워서 잠도 제대로 못 잘 걸.
모르포는 피식 웃었다. 서먹서먹한 분위기 속에, 소녀는 가온을 보며 마지막 인사를 했다.
- 잘 지내. 앞으로도.
"모르포!"
그 말을 마지막으로 소녀는 사라졌다. 바람결에 휘날린 깃털처럼 흔적도 없이, 앞에는 무엇 하나도 남지 않았다. 가온은 저도 모르게 모르포가 있던 곳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그 자리에 모르포의 흔적은 남지 않았다.
축 늘어진 가온의 등 뒤로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은 메마른 땅을 쓸고 지나가며, 하늘을 향해 올라갔다. 하늘을 향해 높게 날개짓하며 날아가듯.
"이건……."
모르포가 사라진 자리에 푸른 불빛이 나지막히 반짝였다. 가온은 손을 모아 그 빛의 정체를 보았다. 아름다운 인광을 내뿜는 그것은 한 마리 작은 나비. 나비는 가온의 손을 떠나 거칠게 몰아치는 바람을 타고, 저 멀리 날아갔다.
햇빛이 눈부시게 빛난다. 청명하고 따뜻한 그곳을 향해, 나비는 거친 바람을 이겨내고 날개짓 했다.
나비의 고된 여행을 보며 가온이 나지막히 속삭였다.
……
Selected Ones - 77
Farewell my friend
……
오랜만입니다 여러분.
백만년만이던가요.
셀렉티드 원즈는 77화로 완결입니다.
링크드 아이즈부터 시작해서, 아주 긴 시간이었는데 끝까지 봐주신 여러분께 감사하고 싶습니다.
고맙습니다.
그 왜 있지 않습니까, 소설 쓰려는 사람들 특징이 클라이맥스만 미리 생각해두고 중간을 생각 안 해둔다, 이 결말 크으 죽인다 해놓고 중간을 못 잇는다.
그런데 다 쓰고 보니까 정작 그 결말은 이미 있던거거나, 원래 구상했던 거랑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상한 엔딩이 나버린다.
저도 딱 그런 타입의 사람이였던 것 같습니다.
코트와 싸우면서 어떤 엔딩을 낼지 수십개는 생각해두고, 폭시와의 싸움으로 노선을 변경했을 때도 또 몇 가지 더 생각해뒀는데 이렇게 됐습니다.
형편없이 내버린 것 같습니다.
그리고 또 내용은 그렇게 많지 않았는데 연재 후반이 무척 늘어졌습니다.
하루면 쓸 내용을 일주일 걸려서 올리고, 그것보다 더 걸려서 올리고.
내용은 이미 머리속에 다 생각해뒀는데 그게 타자로 치기가 어려웠습니다.
뭐라고 해야할까, 쓰기 어렵다기보다 쓰기 싫었습니다.
그게 어느정도였냐면, 제가 듀얼로그를 종이에다가 다 써두고 듀얼을 쓰는 편인데 이번에는 코트와 듀얼 끝나고 단순히 폭시랑 리얼파이트 하는 부분이지 않습니까?
그걸 제가 어떤 형식으로 리얼파이트가 될지 3페이지 정도로 정리해서 종이에다 썼습니다, 이번화에 쓸 내용만 말이죠.
지금 생각해보면 그 행동들이 구성을 탄탄하게 하거나, 정리를 하거나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결말을 쓰는 때를 미루려고 딴짓을 한 것이었습니다.
저도 왜 이렇게까지 쓰기 싫어지고 미루려고 한 건가 잘 모르겠습니다.
하루에 한 편씩 쓰면서 열정이 타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맥이 풀린 것처럼 탁 놔버렸다고 해야하나. 시들시들해졌다? 탈진한 느낌이라고 해야할까요.
일이 모두 끝나자 가온이 허탈함을 느꼈다고 썼는데, 허탈함을 느끼는 건 가온이 아니라 제 자신인 것 같은 기분입니다.
끝내버릴 거라면 빨리 써버려서 끝내버리자.
12월 31일에 마지막 화를 올리면 딱이겠다.
제가 작년말에 했던 생각입니다.
그런데 정작 1월이 다 끝나서야 이렇게 마지막 화를 올리네요.
미루고 또 미루고, 결국 1월 3주째를 넘어서 4주째가 되서야.
일부러 느리게 썼던 것 같아서 사과드리고 싶습니다.
원래라면 마지막 화를 맞이한 감회가 어떻고, 무언가 즐거운 이야기를 해야하는데 우중충한 이야기만 하는 것 같습니다. 또 너무 중구난방하게 입에서 튀어나오는 걸 다 말하는 기분이고요.
즐거운 거를 말해야 하는 데 잘 생각이 안 납니다.
아. 그렇지.
3월에 군대를 갑니다. 정확히는 3월 12일.
신마스터룰로 듀얼 로그를 몇 편인가 쓰고 구기고, 또 썼습니다.
배경도 몇 개 정도 생각해두고 구기고 다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걸 쓰고 갈 기회는 없을 것 같습니다. 안타깝네요.
강귀를 주인공으로 할까? 가온의 이야기를 계속 이어나갈까? 가이아세이버를 주인공으로 할까? 링크 몬스터가 나오자마자 오만가지 생각들이 떠오르며 저를 즐겁게 했습니다.
뭐라도 하나 쓸만큼 여유가 없네요. 안타깝습니다.
지친 것 같습니다.
지금은 쉬고 싶습니다.
이만 글을 마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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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18.01.23 12:0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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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포 죽다 듀얼 스텐바이 군대 우아아ㅏㅏㅏㅏ | 18.01.23 12:54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