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월체가 다시 나타났다?"
새하얀 백발에 주름진 중년의 남성이 청년에 말에 경악한다. 교수들이 모두 각자의 방으로 되돌아간 저녁 늦게, 이사장실에는 스탠드 하나를 켜두고 이사장 초아와 가온이 대면하고 있다.
"게다가 엑시즈 차원의 적이라고."
이제 막 면도를 마친 기색이 역력한 초아에게 상상도 못 한 충격이 닥쳐왔다.
"샤크 슬레이. SS라고 하는 녀석이었다."
"혹시 랭크 업 매직이라는 걸 사용했나?"
"세븐스 원이라고 하는 카드를 썼지. 터무니 없는 효과였어."
"하아."
세븐스 원. 초아도 이미 들어본 적 있는 이름이었다. 12년이나 된 과거, 자신의 팔 한 쪽을 잘라낸 그가 사용한 카드가 아니던가.
"이겼기는 하지만, 그녀석은 링커를 소환하지 않았어."
"링커를 소환하지 않았다. 가온. 너는 그 때 이후로 링커를 쓰지 못 하게 되었다고 말했지?"
그렇지."
가온이 혜르와 싸웠던 2년 전. 그 이후로 그는 링커를 쓰지 못 하게 되었다. 링커를 사용할 수 있는 최대전력이 없어진 것이다.
"SS 그녀석. 내가 링커를 뽑아라는 듯이 행동했어."
"링커를 뽑으라고 했다?"
"내가 링커를 사용하지 못 하는 이유를 술술 불더니, 내가 링커를 소환하지 못 하는 이유도 설명했어."
"그녀석이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이거 큰일이군."
엑시즈 차원의 첩자들이 무슨 수를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링커를 사용할 수 있는 전력이 사라졌음을 안다는 것이다. 게다가 가온과의 실전으로 그것을 확신했을테니 위험성은 더 커진다.
"그녀석이 그렇게 말하고선…… 내가 링커를 부를 수 있는 조건을 충족시켰어."
힘의 격류가 바다의 형상을 해서 그를 감쌌다. 사방에서 짓누르는 강한 압력에 산발한 그의 힘이 한군데 뭉쳐, 링커를 부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결국 못 뽑았지."
SS가 가온이 링커를 뽑을 수 있게 보조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가온은 실패했다. 어쩌면 다시는 링커를 부르지 못 하게 된 것은 아닐까. 그런 걱정이 두 남자에게 닥쳐왔다.
초아가 지끈거리는 머리를 두 손으로 감쌌다. 짙은 한숨을 내뱉는다.
"어쩌면……. 녀석들이 곧장 쳐들어올지도 모르겠어."
위험은 그들의 코앞까지 닥쳐왔다.
……
Selected Ones - 09
Haze 1
……
잘 포장되지 않은 인도위로 바퀴 소리가 거칠게 났다. 울퉁불퉁한 돌맹이들 탓에 타닥거리며 앞으로 나아가는 휠체어 한 대. 휠체어를 탄 것은 갈색 머리 소녀였다. 다리가 움직이지 않아 평소에는 자기가 바퀴를 굴리거나, 다른 사람에게 밀도록 맞겨 휠체어를 탄다. 오늘은 주변에 사람이 없어, 서늘하고 고요한 밤길을 그녀 홀로 지나가고 있다.
"후우. 후."
바퀴 밀던 것을 멈추고 소녀가 장갑을 벗었다. 금새 추운 바람이 그녀의 손을 스쳐간다. 하지만 이미 땡땡 얼어서 벌개진 손이다. 바람이 불어봐야 할퀴는 것처럼 따끔한 느낌만 있을 뿐. 소녀는 빨개진 손에 뜨뜻한 입김을 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이렇게 멀리 나오는 게 아니었는데."
괜히 무리해서 멀리 나왔다. 근처를 도는 것이 지루해져서 홧김에 평소보다 길을 돌아간 것이 화근이었다.
다시 장갑을 끼고 바퀴를 굴리려던 차에 가로등 불빛으로 그녀의 앞에 그늘이 졌다. 그림자의 길이가 짧은 것으로 보아 어른은 아니다. 어깨도 넓지 않고, 다리도 얇다. 아마도 중학생 정도 되는 어린 아이일 것이다. 잘만 걸어가던 그림자가 걸음을 멈추고 소녀를 향해 방향을 돌렸다. 갈색 머리 소녀가 고개를 들어 그림자의 주인을 보았다. 키는 중학생만하고, 두꺼운 머플러를 칭칭 감고있다. 포니테일로 넘긴 길고 풍성한 머리카락은 눈처럼 새하얗다.
"음. 누구세요?"
"슈브 라킬드 소피아."
"저는 듀나라고 해요."
"네 이름은 이미 알고있다."
"어라. 그런가요?"
"그렇다."
소피아가 듀나에게 한 발자국 다가왔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던 그녀가 이제 또렷히 보인다. 그녀의 손에는 칼 한 자루가 쥐어져있다.
"칼?"
듀나는 위축된다. 소피아는 지금 그녀가 처음 본 사람. 자신의 이름을 알고있다는 말은 순전히 거짓말이 아니었을까.
"가까이 오지 마세요."
"그럼 여기까지로 하겠다."
소피아가 걸음을 멈췄다. 듀나와 소피아에게는 어느정도 거리가 있었지만 소피아가 달려온다면 금방 메꿀만한 거리다. 듀나가 손에 불이나도록 바퀴를 굴려도 소피아에게서 도망치는 것은 불가능하다.
"대체 어쩌다 이런 일이……."
현기증이 일어났다. 소피아는 자기를 죽이려고 다가온 것이다. 이유는 무엇인가. 듀나와 소피아에게 원한이 있는걸까. 만약 그렇다고 하더라도 듀나는 소피아를 처음 본다. 대체 무슨 이유가 있어서 오늘 처음 보는 사람에게 칼침을 맞아야 하는 건가.
'장난감칼 아닐까?'
듀나에게 장난감칼을 들고 와서 진짜처럼 흉내낸다. 소피아는 살인마가 아니라 악질 개구쟁이일지도 모른다. 그런 듀나의 옅은 희망은 소피아의 칼이 장난감치고는 너무나도 날이 뚜렷하단 점이 부정했다.
'강도?'
"저는 지금 아무것도 가진 게 없어요."
"거짓말 하지마라. 이미 다 알고 왔다."
듀나의 세번째 예상. 소피아는 강도다. 이 예상이 적중한 듯 했다. 하지만 이어지는 소피아의 행동은 그녀의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되도않는 연기는 집어치우는 게 좋을거다."
"네?"
"이미 다 알고 있다."
소피아가 사진 몇 장을 그녀에게 던졌다. 사진에는 하나같이 듀나가 찍혀있다.
"이……이건."
스토커처럼 듀나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다.
"하루에도 몇 번이고 휠체어에서 일어나 잘만 걸어다니더군. 내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아무도 없으니 일어서서 걸었을테지. 그렇지 않나?"
"……."
듀나가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네. 저는 사실 다리가 멀쩡하답니다. 그런데 그것과 당신이 칼을 들고 찾아온 것. 무슨 관련이 있는거죠?"
"네가 걸을 수 있냐 없냐는 중요하지 않다."
소피아가 왼팔에 기계를 장착했다. 기계가 불빛을 내며 소음을 낸다.
"너는 주민등록되지 않은 시민. 어느 순간인가 갑자기 나타나서 이 도시에서 생활하기 시작했지."
"지하에서 살다 주민등록이 늦어진 거랍니다."
"코즈믹 코퍼레이션의 손길이 지하에는 닿지 않을거라 생각했나? 그것도 이미 다 조사해뒀다."
10년 전과 같은 혼란기라면 모를까 지금은 사회가 어느정도 안정됬다. 사람의 이름과 주소지 등 정보를 적어서 주민 등록을 한다. 물론 지하에서 틀어박혀 사는 사람들은 종종 하지 않는 일도 있지만, 그런 사람이 지상에서 활보할 리가 있겠나.
"네가 엑시즈 차원의 첩자라는 사실조차도."
"호오."
갈색 머리 소녀가 잠시 숨을 고르더니 휠체어 아래에 손을 댄다. 무기를 꺼내드는 것은 아니었다. 찻잔과 보온병을 꺼내든 것이다. 듀나는 칼을 든 소피아가 노려보는 와중에도 느긋하게 보온병을 열어 찻잔에 차를 따랐다.
"첩자라. 그 표현은 마음에 들지 않네요."
"?"
"눈치채셨을지는 모르겠지만, 저 또한 초월체."
"뭣."
"어라. 모르셨던 모양이네요."
듀나가 꺼낸 단어에 소피아가 긴장한다. 무기를 든 것은 그녀임에도 힘의 상하관계가 완전히 역전되었다.
"제가 이곳에 온 이유는 아름다운 마을을 찾기 위해서에요."
"아름다운 마을을 찾는다?"
"이곳 마을 중 어느 곳은 얼마 안되어 저의 땅이 될테니, 그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곳을 정하는 거죠."
"시티가 네놈들의 땅이 된다고?"
"단순히 시티만 말하는 것이 아니랍니다. 이 세상 어느곳도 피해갈 수 없어요. 저희들의 손아귀에서."
"과대망상이다."
"그럴지 어떨지는 저의 힘을 확인하고 말해주시겠어요?"
시종일관 여유로운 자세로 차를 머금는 듀나. 소피아가 주먹을 쥐자 자동으로 덱이 셔플되었다.
"저는 이 마을이 제 땅으로 삼기에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해요. 제 것으로 만든 다음에는 이 마을 전체를 정원으로 꾸미는 거죠."
"웃기는 소리."
"그러고선 새하얀 팻말로 저의 정원이라 나타내는 겁니다."
듀나는 찻잔을 내려놓고 주섬주섬 짐을 뒤졌다. 그곳에서 허름한 듀얼디스크 하나와 덱케이스를 잡아 열었다. 듀나가 덱을 듀얼디스크에 꽂고, 휠체어 위에 대충 올려놓자 덱이 자동으로 셔플되었다.
"당신은 저의 정원에 온 첫번째 손님. 듀얼을 즐기도록 허락하죠."
"이 듀얼이 너의 살아서의 마지막 듀얼이 될거다."
"어머 무서워라."
듀얼디스크에 불빛이 깜빡인다. 소피아와 듀나의 듀얼디스크는 서로 상대방을 인식하고 듀얼을 시작할 준비를 마친다.
"듀얼."
두 소녀가 결투를 외치자 메마른 바람이 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