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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lected One - 41
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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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이 트기까지 무척이나 추운 새벽이었다. 의자를 대충 꺼내와 앉은 교수들과 빨간머리 소녀는 난로를 꺼내 작동시켰다. 불도 켜지않은 깜깜한 방에 햇빛보다도 난로의 붉은빛이 먼저 들어왔다.
바깥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고있건만 뼈가 얼어붙는 혹한의 추위에 그들은 누구 하나 선뜻 움직이지 못 했다. 자신들이 가르치던 학생 한 명이 홀로 밖으로 나서서 싸움을 하게 한 것은 그들의 마음을 조였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초조함때문에 비롯된 버릇들로 다리를 떨거나 손가락으로 괜히 의자 팔걸이를 치는 소리만이 몇 마디 말 대신에 오고갔다.
습관적인 소음만이 팽배하던 자리에 새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몇 명인가의 묵직한 발 소리. 그 소리를 가장 처음 감지한 소피아가 의자에서 가장 먼저 일어나 문으로 다가간다.
"요원들이 도착했다."
그녀가 살짝 문을 열자, 난로를 켰음에도 뼈가 시린 추위가 바람에 실려 들어왔다.
"!!!"
단단한 방한용 수트를 입은 요원들을 보고서 교수들은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정확히는 그들이 데리고 온 축 늘어진 남자를 보고 말이다.
"가온!"
그는 포피리아와 싸웠을 것이다. 그 대가로 입은 상처로 몸은 만신창이가 되어서 그가 입고있던 교복은 팔 부분이 완전히 뜯겨나간 상태였다. 건물 내부의 따뜻한 온도에 그의 몸에 묻은 눈과 얼음이 서서히 녹아갔다. 수정처럼 영롱한 빛을 내던 팔도 사르르 녹더니 살색으로 되돌아갔다.
"혜르 시장님과 대치하고 있던 것을 구조했니다."
"혜르와 대치하고 있었다……. 포피리아는?"
"그 자리에 포피리아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근처에 남은 흔적들로 보아 포피리아와 싸워서 이긴 것 같습니다."
"포피리아한테 이겼다. 그렇군……."
손끝으로 타들어가는 담배 한 개피를 집고서 초아는 가온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포피리아와 직접 싸워본 적은 없다. 하지만 포피리아와 싸웠던 혜르에게서 몇 번이나 그 경험담을 들은 적이 있다. 결코 쉽게 이길 수 있는 적이 아니라는 것을 초아도 알고 있다.
"잠깐. 그렇다면 혜르는 어디로 갔지?"
"사라졌습니다."
"사라졌다고?"
"예."
가온이 포피리아에게 이겼다. 그리고 요원들이 나타났을 때에는 이미 가온은 혜르와 대치중이었다.
'그런데 그녀석이 갑자기 사라져?'
요원들이 나타나자 도망쳤을까 생각해본다.
'아냐. 그녀석이 사람 몇 명 늘어났다고 발을 뺄 놈은 아니야.'
적어도 초아, 그가 알고있는 혜르는 적이 몇 명이 나타나건간에 밀어버리는 구석이 있다. 자신이 그토록 노리던 목표물이 눈 앞에 있는데 요원들이 나타났다고 도망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사라진거지?'
의혹으로 머릿속이 혼란한 와중에, 한 소녀가 기지개를 켰다.
- 후암. 드디어 깼네.
"링커!"
눈이 쌓인 것인지 머리가 드문드문 새하얀 검은 머리의 소녀였다. 하지만 얼마 안 되어 머리카락은 완전히 흑발이 되었다.
- 오호라. 10년만인가.
"소울 이터……!"
마크 교수가 보고했던 내용을 보고서 가온의 링커가 무엇인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정말 네놈이였을 줄이야."
- 이것 참 달갑지 않은 일인데.
다만, 그녀가 정말로 10년 전 트리와의 싸움에서 보았던 그 링커라고 생각하니 저도 모르게 열이 올랐다. 제임스와 혜르를 차례로 쓰러트리고 자신도 패배하기 직전까지 내몰렸다. 듀얼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혜르는 그녀를 꺾을 수 있었다.
'아냐. 옛날 감정은 묻어둬야 해.'
검게 변색된 끝을 흔들어 재를 떨구고서는 다시금 담배를 입가에 올린다. 혜르가 다시 입을 열기 전에 그녀에게 먼저 다가간 것은 초록머리 여자였다.
"네이트라는! 네이트라는 어떻게 됬어?"
- 죽었다.
"……."
-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그 링커까지 흡수당한 상태였어.
"아아……."
담담히 대답하는 소울 이터를 보고서 고개를 떨군다. 얕게 신음하는 그녀를 보고서 소울 이터는 눈을 돌렸다.
"혜르가 사라졌나?"
- 그래. 갑자기 사라졌었지.
"어째서 사라진거지?"
- 아무래도 포피리아의 영혼을 흡수하려고 물러난거겠지.
"자의로 떠났다는 말인가."
- 그녀석은 프로젝트 클리파를 주도했으니까말야. 개개로 쪼개진 클리파를 모으는 것보다 포피리아 한 놈을 흡수하는 게 더 이득이지.
클리파 링커들은 원본보다 열화된 존재들. 그들을 흡수하는 것보다는 힘을 키워 성장한 포피리아를 흡수하는 게 수지타산에 맞는다.
'아마 혜르 입장에서 가온의 중요도는 낮아.'
포피리아를 흡수하기위해 물러났다고는 하지만 구태여 가온을 놓고 갈 이유가 없다. 자신의 정체가 들키지 않았을 때라면 모를까, 정체를 들킨 지금에 이르러서는 가온에게 접근하는 일이 무척 어려워질테니까.
'링커의 힘으로 요원들을 물려내려면 물려낼 수 있었을 거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어.'
"그녀석이 어디로 도망갔는지 알고 있나?"
- 알고있지.
"!!!"
당연하다는듯이 대답하는 소울 이터. 시원스러운 대답에 오히려 초아가 당황한다.
"그녀석은 어디로 갔지?"
- 흐음.
갑자기 대답하기를 꺼려하는 소울 이터. 잠시 생각하더니 초아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한다.
- 어디로 갔는지 알려주지. 대신 조건이 있어.
"조건?"
- 그래. 거기까지 걸어서는 못 가거든. 저기 밖에있는 D휠은 이 날씨에도 달릴 수 있는 것 같으니까 이걸 빌려타야겠어.
"그게 조건인가?"
- 아니. 이건 너네들한테 요구하는 게 아니니까. 너네들한테 요구할 거는 이거야.
축 늘어져있는 갈색머리 청년을 가리키는 소녀.
- 이놈이 일어나기를 기다렸다가 이놈을 데려간다.
"혜르한테 가온을 데려가겠다고?"
"그건 안 되. 그놈이 노리는 게 바로 너네잖아!"
마크와 제논이 반응한다.
"적진에 스스로 몸을 던질 필요가 뭐가 있겠어."
- 너네들 그놈한테 이길 수 있냐?
"뭐……?"
- 정신차려. 그놈은 이미 클리파중에 아홉을 흡수했고 이제는 포피리아까지 흡수했다고. 링커도 없는 너네들이 그놈을 어떻게 이기려고?
"……!!!"
그렇다. 혜르에게 쳐들어간다 하더라도 그를 상대할 힘이 없다. 링커가 없는 듀얼리스트 대 듀얼리스트로서도 이길 확률이 낮은데, 이미 그는 링커를 대부분 흡수한 것이다.
"우리들이 힘을 다 합쳐서……."
- 그렇게 극복이 가능하면 그놈이 그런 계획을 꾸몄겠어?
"아무리그래도 너네들이 가는 건 너무 위험해."
"혜르가 제일 바라는 상황이 그거잖아."
- 그러면 여기에 기다리고 있으라고? 너네들이 위치를 듣고 가더라도 그놈이 우회해서 여기로 다시 돌아오면 끝장이잖아.
"그건……."
마크가 우물쭈물거리는 사이 짧아진 담배 불을 끄고서 초아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가온의 의견을 기다리도록 하지."
- 뭐?
"깨어나서 혜르와 싸우겠다고 하면 그렇게 하겠다. 하지만 그가 그러고싶지 않다고 하면 우리한테 혜르가 어디로 갔는지 알려주고 여기서 기다린다."
- 그렇다고 한다면 상관없어.
"그래."
대답을 들은 초아가 다시 의자에 앉았다.
"괜찮은겁니까 이사장님.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나서서 싸우게 한다니!"
"……. 저녀석이 말한대로야. 만약 우리끼리 쳐들어간다고 하더라도 혜르가 이쪽으로 몰래 와버리면 끝이지."
눈을 감고서는 크게 숨을 내쉬는 초아. 숨소리가 커다란 한숨처럼 들렸다.
……
시간이 제법 지나갔다. 하얀 머리 괴물과의 싸움. 새벽의 검푸른 하늘이 가려진 새빨간 천정아래에서 이어진 기나긴 듀얼이었다. 사람의 모습에서 탈피하여 괴물은 거대한 몸을 얻었다. 무척이나 아름다운 육체, 신적인 존재로서 승화된 괴물은 청년의 양팔을 잘랐다.
'…….'
우역곡절끝에 청년과 소녀는 괴물에게 승리했다. 물론 그 직후에 쓰러져서 지금까지 누워있었지만 말이다.
'혜르…….'
괴물을 쓰러트린 둘 앞에 나타난 것은 모자를 쓴 남자였다. 가온과 마찬가지로 듀얼 웨펀을 꺼내들었고 링커와 몬스터들을 불러내 육탄전을 벌였다. 그 결과는 가온의 참패. 싸움이라고 하기도 뭣한 일방적으로 밀린 것이었다.
'아니. 그녀석은 아무런 문제가 없었어. 내가 픽 쓰러져버린 거지.'
자신이 짐더미였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굴욕적이다.
'멀쩡한 상태였다면…….'
그렇다면 이겼을까?
'…….'
모르는 일이다. 가온은 몸을 휙 돌렸다. 그러고보면 이곳은 어디일까. 몸아래로 푹신푹신함이 느껴진다. 뺨에 약간 서늘한 기운이 느껴진다.
'눈위에 누워있는 것은 아닐테지.'
눈을 뜨고 앞을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약간 흐릿했지만 평상시대로 초점이 회복된다. 미약하게나마 창문을 통해 빛이 들어오고있다. 아무래도 지금은 새벽이 아닌 것 같다.
"보건실?"
"일어났나?"
"이사장."
"그래 나다."
침대옆에 앉아있는 것은 새하얀 머리의 중년 남성. 스쿨의 이사장인 초아였다.
"용케 일어났군."
"시간이 얼마나 지난거지?"
"네가 포피리아와 싸운지 얼마 안 지났다. 기껏해야 몇 시간정도지."
"그래. 저번처럼 이틀이나 지났을거라고 생각했어."
"쓰러져서 시체처럼 늘어져있던 너를 코스믹 코퍼레이션의 녀석들이 데리고 왔다."
"코스믹 코퍼레이션이라. 소피아가 왔던 거긴가……. 제때 왔네."
이야기를 하던 초아가 갑자기 자기 품안에 손을 찔러넣었다. 새하얀 담배갑을 꺼내 열고서는 담배 한 개피를 뽑아든다. 기다란 담배를 입끝에 물고서 라이터를 찾는 순간, 익숙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초아도 그것이 누구의 발소리인가 눈치챘는지 급하게 입가에서 담배를 치우고는 대충 품안에 찔러넣는다.
검정머리의 자그마한 의사가 쫄래쫄래 다가왔다. 손가락으로 안경을 슥 올리고서는 가온과 초아를 바라본다.
"깨어났네요."
"그래. 저번에 그랬다는 것처럼 멀쩡해보이는군."
"몸이 굉장히 차가웠어요."
스타가 손을 내밀어 가온의 손바닥을 만진다.
"지금은 그래도 따뜻해졌네요. 다행이에요."
"그렇게 차가웠나?"
"얼음장처럼 차가웠어요. 대체 어쩌다가 그렇게됬나 싶을정도로."
"그랬군."
주먹을 쥐었다 펴는 가온. 손에 눈을 올리고서 투명한 물이 흐를 때의 그 찌르는듯한 차가움이 손끝에 느껴진다. 약간의 통증에 가까운 것이 느껴지며 손가락이 움직인다. 감각이 살아있다.
'분명히 팔이 잘렸었어.'
포피리아의 공격으로 양팔이 잘려나갔다. 날아간 팔 두 짝은 눈에 파묻혀 더이상 찾을 수 없겠지만 분명 그 자리에 남아있을 것이다. 괴물의 핏물에 씻겨내려졌겠지만, 청년의 몸에서 철철 흘러나온 피가 그곳에 남아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부상은 그곳에 남겨지고, 지금 가온의 어깨 아래로 남아있지 않다.
'얼음으로 된 팔이 자라나더니…… 잠에서 깬 다음에는 새 살이 돋아난건가.'
믿을 수 없는 일이다. 얼음이 엉켜 팔을 구성한 일부터 시작하여 그것이 녹아내려 새 살이 돋아나기까지. 지금 당장 스타에게 이야기한다고 하더라도 그녀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무슨 황당한 소리를 하는걸까 생각할뿐, 그것을 사실로서 받아들이지 못 할 것이다.
"팔이 잘렸었어. 그것도 두 쪽다."
"네!?"
"뭐……?"
하지만 가온은 입을 열었다.
"포피리아가 공격해서, 링커에게 공격당해서 두 팔이 날라갔었지. 말그대로 날 직접 공격했었어."
"어어어……."
"기다란 손가락으로 내 가슴을 뚫을 수 있었는데, 내 머리를 뭉개버릴 수 있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았지."
"일부러 팔만 잘랐다……. 변태같은 놈이었군."
"듀얼 웨펀이랑 같이 팔이 날아갔어."
"그런데 지금 너한테는 팔이 멀쩡하게 달려있잖아?"
"그래. 팔이 떨어져나간 직후에……얼음이 자라났어."
"뭐?"
"어깨 아래로 새하얀 얼음이 자라나서……그게 팔이 됬었지."
"팔에 눈이라도 묻었나했는데 얼음이었던가."
"그래. 그게 녹아서 지금 팔이 됬어."
"그런 일이 가능할리가요……."
"하지만 사실이다. 저번에도 이런 적이 있었어."
"저번……? 혹시 방학식날에 상처를 입었다고 했던건가요?"
"그때는 가슴에 주먹만한 구멍이 뚫렸었지. 그런데 자고 일어나니 아무 상처도 없다는 듯이 살이 다시 자라났어. 흉터도 보이지 않았고."
"확실히……. 외상은 잔상처밖에 보이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팔이 잘리고 가슴에 바람구멍이 생겼는데도 치료하기도 전에 살이 자라났다는건가."
"그렇지."
"이것도 링커의 힘인가?"
"그렇겠지. 하지만 이번에는 조금 이질적이었어."
"이질적이다?"
"소울 이터의 모습이 변했거든."
"어떻게 변했지?"
"새로운 카드로서 만들어졌어."
"링커가 늘어났다?"
"지금 덱을 뒤져보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덱을 찾는 가온. 초아가 그를 대신해 덱케이스를 집어준다.
"한 번 펼쳐봐. 소울 이터가 하나가 아닐테니까."
"어디……."
카드를 펼쳐놓고 눈을 가느다랗게 뜨는 초아. 차례로 카드를 넘겨본다. 마지막장을 넘기고 처음으로 돌아오자, 초아는 다시 가온에게 시선을 돌렸다.
"소울 이터는 한 장 뿐이다."
"뭐?"
"쇠약의 소울 이터. 이렇게 쓰인 카드 하나뿐이다."
"그럴리가."
듀얼중에 가온은 분명히 또다른 링커, 극혹의 소울 이터라고 적혀있던 것을 불러냈다.
'그게 헛깨비였을리는 없어.'
결정적으로 그 카드의 힘으로 포피리아에게 승리했으니 말이다.
"잘못 확인한거겠지. 없을리가 없어."
"제가 확인해볼게요."
"그래. 다시 한 번 확인하면 분명히 두 장이 나올거야."
하지만 이번에도 결과는 똑같았다.
"이게 어떻게 된……."
- 일어났냐.
"!"
소울 이터의 목소리가 들려 가온은 고개를 휙 돌렸다. 싸움을 마쳤을 때의 새하얀 머리카락. 온몸을 감싸는 새까만 타이즈. 그런것은 보이지않고 한 송이 붉은 꽃처럼 피어있는 검붉은 머리의 소녀만이 그자리에 있었다.
"네가 새하얗게 변했던 그 카드가 안 보여."
- 녹아서 사라진 거 아냐?
"뭐……?"
- 눈은 따뜻한 데 놓으면 녹잖아. 당연한 일 아냐.
"그건 눈이 아니라 카드였잖아."
- 카드도 똑같지.
"다른 카드들은 멀쩡한데?"
- 카드가 진짜로 눈이겠냐 멍청아.
"무슨 말이 하고싶은거야."
- 그 새로운 카드가 카드로 자리잡게 하고, 눈처럼 녹아내리지 않게 한다. 너한테 그럴 능력이 없었다는 거잖아. 딱 들으면 몰라?
"그걸 어떻게 알아."
- 여튼 멍청하기는.
"누구 보고 멍청하다는거냐."
- 물론 너지 빡대가리야.
"머리채를 잡고 흔들어도 든 게 없어서 소리도 안 나는 놈이."
- 어허. 지도 똑같은 주제에. 한 판 해보자고?
"그거 좋지."
"자자 그만."
입씨름을 하려는 가온과 소울 이터의 어깨 위로 자그마한 손바닥이 올라왔다. 평소처럼 나긋나긋하게 말하는 스타의 말이 천근만근은 되는 철더미처럼 그들의 어깨를 짓누른다.
"네."
- 예이.
자그마한 의사의 해결 방법은 금방 효과를 봤다.
"이번에는 저번에 상처가 치료된 것과는 다르다고 했지. 무슨 차이가 있었던거지?"
- 내가 설명하는 게 낫겠네.
"그래 어떻게 된거지?"
- 저번에는 순전히 내 힘으로 이놈 상처가 나았어.
"가슴에 생긴 관통상이?"
- 그래.
"이번에는 어떻게 치료됬지?"
- 이놈이 팔을 잘렸을 때는 나도 파괴됬을 때야. 내가 어떻게 한다고 해서 이놈을 치료할 여건이 안 됬지.
"그렇다면 다른 누군가가 가온을 치료했다는건가?"
- 그래.
"그게 누구지?"
- 그건……. 음.
갑자기 대답을 주저하는 소울 이터.
- 아무튼 그런게 있어. 나는 아냐.
"누군지 모르는건가?"
- 아무튼 다른게 작용한거지. 내 힘이 아닌 다른 것이.
"네가 아닌 다른 누군가라고?"
가온이 질문한다.
"아."
그리고 그는 어느 한 답에 도달한다.
'시험자…….'
새하얀 설원에, 가온의 영혼에 중추라고 불리던 그 자리에 있던 그 남자. 자신을 링커가 아닌 다른 무엇인가라고 소개한 그가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그녀석은 크리스트론을 사용했지. 투명하고 은은한 수정처럼 새하얀 얼음 팔이 돋아났었어…….'
소울 이터의 힘 없이 치료됬다면 시험자가 그를 고쳤을 것이다.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다.
'그녀석이 날 치료한 영향으로 소울 이터가 새로운 모습이 되었다. 그런건가. 설명하기 복잡하군.'
"짐작가는 구석이 있다."
"누군지 알고 있는건가?"
"이름은 모른다."
"이름을 모른다?"
"그래. 이름은 모르지만, 이 안쪽에 한 명 더 있어."
자신의 목 아래에 손을 올리는 가온.
"안쪽에 한 명 더 있다. 링커말인가?"
"링커는 아닌 것 같다. 하지만 그것과 비슷한 무엇인가가 내 안에 들어있어."
"무슨 이야긴지 갈피를 못 잡겠군."
"나도 뭐라고 설명해야할지 어려워. 하지만 내 안에 있는 누군가의 영향으로 내 상처가 나았고, 소울 이터의 모습이 바뀌어서 새로운 링커로 거듭났었다."
"그런데 그게 온전히 유지되지 않고 눈처럼 녹아서 사라졌다는 이야긴가."
"그래."
"여전히 감을 못 잡겠군. 그래도 어느정도 알아들었다."
"저는 아직 모르는 구석이 있어요."
"어떤거지?"
"제 스스로 치료되는 일은 생물이라면 더디게 일어나는 일이니 이상하지 않아요. 그런데 팔이 날라가고 가슴이 뚫렸는데 자라났다? 그럴 수는 없는 거잖아요."
스타가 다가가서 가온의 양 팔을 잡았다.
"한 번만 더 잘라서 실험해볼 수 있을까요?"
"당연히 안 되지."
"으으. 하지만 이게 사실이라면 엄청난 일이라구요!"
"말이 되는 소리를……. 설령 팔이 잘렸다가 바로 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아직 일이 끝나지 않았잖나."
"아앗."
"일……? 그래. 혜르인가."
가온이 혜르의 이름을 담았음에도 스타는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드디어 올 게 왔구나 하고 각오를 하듯 침을 꿀꺽 삼켰다. 그녀의 표정으로 보아하니, 이미 혜르가 프로젝트 클리파의 원흉이며 실험체들과 포피리아가 죽게 된 모든 근원임을 알았을 것이다.
"이 말을 하려고 옆에서 기다렸다."
드디어 미루고있던 본론을 꺼내려는 초아. 습관적으로 품 안에 든 담배를 꺼내려다 다시 그것을 거둔다.
"혜르를 쓰러트리러 가겠나?"
"물론이지."
비장하게 물어본 질문에 대해 가온은 쉽사리 대답한다.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였어."
"의외군. 포피리아와 싸운 직후인데다가 상대는 그 포피리아보다 강한 혜르다. 정말로 싸울건가?"
"당연하지. 여태까지 그 고생을 했던 게 모두 그녀석때문이잖아."
"너 말고도 싸울 어른들은 많이 있다."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녀석만큼은 내 손으로 쓰러트리고 싶어."
"그렇냐."
한숨을 푹 내쉬는 초아.
"가온을 혜르가 있는 곳으로 데려가겠다. 혜르는 어디로 갔지?"
- 신목이 있는 곳으로 갔어.
"신목이라……. 또 거길 가게 되는건가."
"가본 적이 있는건가?"
"10년 전에말이야. 트리를 쓰려트리려고 그곳까지 향했지."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초아. 가온에게 손을 내민다.
"그렇다면 갈 준비를 하지."
"잠깐만요 이사장님. 지금 출발하려는 거에요?"
"서둘러야지."
"외상은 나앗지만 큰 상처를 입었던 직후에요. 당장 며칠간은 침대 위에서 안정을 취해야……."
"아니."
침대 매트위에서 몸을 치우고 바닥에 발을 대 일어서는 가온. 무릎에 손을 올리고서 허리를 올려 등을 편다.
"상처는 다 나았어. 이정도면 충분해."
"그럼 가자."
"아무리 그래도……."
"괜찮아. 문제 없어."
두 남자는 문을 밀고 밖으로 나갔다. 휑한 방에 두 소녀만 덩그러니 남아있다.
- 지가 괜찮다니까 뭐 괜찮겠지.
"정말 괜찮을까요? 그리고 듀얼을 할 때마다 그렇게 심하게 다쳤다면 이번에도 또……."
- 그건 그때가 되야 아는 일이겠지. 그럼 나도 간다.
"다들 무사히 돌아오세요. 반드시요."
- 그래그래.
소울 이터도 가온을 뒤따라 방을 나선다. 홀로 남게된 스타. 적막한 공기가 흐른다.
……
보건실에서 나와 복도를 걷자, 초아는 스타가 쫓아오지는 않나 슬쩍 뒤돌아보더니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곧장 품속에 손을 찔러넣었다. 담배갑 하나를 꺼내서 입에 물고서는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인다.
"완전 중독이군."
"이거 없이는 못 살아."
"그게 그렇게 좋나?"
"최고지."
잿빛의 매캐한 연기가 복도에 퍼진다. 손사례를 하며 가온은 연기를 치웠다.
"잠깐 기숙사에 들렀다 가도 될까."
"기숙사? 그래 기다리지."
초아는 차가운 벽에 등을 기대고 기다리기로 했다. 옅은 연기가 복도를 타고 흐른다.
기숙사로 돌아와 구석 자리로 향한다. 밤중에 나서서 한나절이 지나서야 돌아온 방은 몇 달이나 자리를 비우고 오랜만에 돌아온 기분이 들었다.
"뭐냐. 아침부터 어딜 갔다온거야."
"잠시 볼일이 있었지."
방에 돌아오자 보인 것은 침대에서 일어나 눈을 반쯤 뜬 클린트였다. 아직도 잠이 덜 깼는지 몽롱한 표정으로는 하품을 찍찍 내뱉고있다.
"방학 전에는 방에서 보질 못 했는데, 방학이 되고나니까 잠만 자는군."
"철야작업할 게 생겨서. 미리 자둬야되."
"방학인데도 엄청 바쁘네."
"나는 항상 바쁘지."
"그런 것치고는 얼마전에 여유롭게 당구나 같이 쳤지."
"그건 그거. 이건 이거다."
"그러셔."
"근데 너 교복 다 찢어진 거 아냐?"
"복잡한 사정이 있지."
"싸우리가도 한거야?"
"어."
"진짜냐."
"아주 격렬한 싸움이였지."
"그러니까 또 장난같네."
"장난아냐."
완전히 거적더미가 되버린 교복을 벗어던지고 옷장에 걸어둔 옷을 꺼냈다. 연구소에서 살던 시절부터 입고있었던 끝이 다 닳은 기다란 코트다.
"오랜만에 입어보네."
좀 제대로 된 옷을 입고싶지만 사정이 여의치않다. 급하게 옷을 갈아입고는 다시 밖으로 나선다.
"너도 바쁘구만. 그럼 난 다시 잔다."
"그래 잘 자라. 나는 늦게 돌아올 것 같다."
"진짜 싸우러가기라도 하나."
신발 뒷꿈치를 잡고는 발을 집어넣는다. 밑창을 땅에 몇 번 두들기고는 문고리를 돌려 문을 열었다. 서늘한 바람을 맞으며 가온은 초아가 서있는 곳으로 갔다. 계단을 내려가자 이미 한개피를 다 태운 초아가 새로이 한개피 뽑아 불을 붙인 뒤였다.
어느정도 나아가자, 둘은 교수들과 무거운 옷차림의 남성들이 앉아있는 곳에 도착한다.
"가는 것까지는 좋아. 장소는 당신이랑 소울 이터가 알고 있을테니까. 그런데 어떻게 가야 하는거지?"
"이봐."
이사장은 가온에게 대답하는 대신 가만히 앉아있던 코스믹 코퍼레이션의 요원들을 불렀다. 실외에서는 방한을 위해 완전무장했지만, 실내에서는 무거운 장비들을 어느정도 벗고서 평범한 옷차림을 하고 있다.
"옷하고 D휠을 빌리겠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어째서지?"
"저희들은 어디까지나 니아 회장님께 고용된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 옷과 바이크를 저희들 맘대로 빌려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비록 그들이 방한용 장비들을 착용하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그들의 물건인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니아가 그들로 하여금 입게 한 것일뿐, 실제 그것을 소유한 것은 다름아닌 니아다.
"허가라면 떨어졌다."
이사장이 담배를 태우는 쪽으로, 빨간 머리 소녀가 다가와서는 자신의 듀얼 웨펀을 들어올렸다. 니아의 방에서 자주 보이는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니아 직속의 부하인 소피아다.
"세 명이 입을 요원복이랑 바이크 빌린다고 이미 보내뒀다."
"윽. 알겠습니다."
회장으로부터 직접 명령이 떨어진 상황. 걸림돌이 될만한 것들은 모두 사라졌다.
"이걸 입으면 바깥 추위에도 버틸 수 있다는 건가."
"기술이 참 많이 발전했지."
"잠깐 이거 옷이 너무 크다."
여유롭게 요원들이 입던 장비를 입는 초아와 가온과는 달리 소피아는 너무나도 작은 체구 탓에 잘 입지를 못 한다.
"사이즈를 조절할 수 있지만 체격 차이가 너무 심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윽. 이러면 못 입잖나."
"애초에 성인 남성 사이즈로 만들어진 것이라……."
"내가 대신 입지."
체육 교사 마크 헌터즈가 선뜻 일어나 의사를 밝힌다.
"마크?"
"결국 가온을 데리고 가시는군요. 원래는 말려야했지만……학생이 사지로 향하는데 가만있을 수는 없는 일. 저도 따라가겠습니다."
소피아에게 장비를 넘겨받아 입는 마크. 장비를 갖춘 세 남자를 요원들이 인도한다. 그를 보내는 제논을 비롯한 이들이 일어선다.
"무사히 돌아오십쇼."
"그래."
"어디 가서 죽지 말고 돌아와라."
"당연하지."
"네가 죽으면 내 임무가 실패한다."
"그게 이유였냐."
눈이 내리지않는 건물 한 구석에 주차시켜놓은 바이크를 빼내는 요원들. 굵은 D휠의 소음이 새하얀 길 위를 달린다.
……
모든 이들이 각자 가야할 방향으로 나아갔다. 하지만 그중에는 정체되어 있는 사람도 있기 마련이다. 원수처럼 여기던 초월체에게 패배하고 겨우 목숨을 부지했다. 이어진 듀얼의 여파로 엉망이 되어버린 눈밭을 헤치고 지나간 청년은 눈처럼 새하얗게 되어버렸다. 철문을 억지로 비틀어 열자, 불이 꺼진 공간이 이어졌다.
"누구지?"
공허한 공간에 사람의 소리가 퍼졌다. 청년은 무어라 대답하지 못 하고 거친 숨소리를 낼뿐이다.
"너는 그녀석인가."
"하아……."
청년과 같은 새하얀 머리카락. 청년의 얼굴을 가린 가면이 부숴져서 맞은편에 서있는 남자와 똑같은 얼굴이 드러난다.
"나는 양이다. 네 이름은 뭐지……?"
역으로 질문하는 양. 차가운 바람 소리속에 기다리는 대답이 들려왔다.
"류세."
자신의 형제의 이름이.
……
오랜만이에용
백만년만이네요
드디어 클라이맥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