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똑같이 생긴 녀석은 망연자실해 있는 나를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바라보다 어디론가 가버렸다. 진짜인 나처럼 근무지로 간 것인지, 아니면 자신이 왔던 곳으로 돌아간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내가 있을 곳이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다.
원래대로 돌아올 때까지 집에 짱 박혀 있으려고 했는데.
세상 참 마음대로 안 되는 구나.
어차피 집에만 있어도 능사가 아니었다. 언제 찾아올지도 모를 지인에게 지금의 모습을 들키는 것도 시간문제이기 때문이니까. 웃지 못 할 장대한 흑역사가 탄생해버린다.
그러면 어디에서 지내야 한단 말이지?
소지금도 별로 없는 텐구가 밖에서 지낼만한 곳이 있을 리 만무하다. 주인 없는 폐가에서 생활하거나 노숙.
아니면..
「부대장한테 신세지는 수밖에 없나..」
평생 약점을 잡히겠지만, 별 수 없다. 현재 내 상황을 설명하고 도움을 받도록 하자.
방침이 정해지자, 기운이 나기 시작했다. 풀렸던 다리에도 힘이 들어간다. 자리를 털고 일어선 나는 잠시, 정다운 내 집을 바라보다가 이내 미련 없이 부대장의 집으로 향했다.
*
무언가 잘못 되어있다.
부대장의 집으로 돌아온 나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아가씨가 소우지라고?」
어떻게 된 영문인지 부대장은 나를 전혀 못 알아보고 있었다. 처음에는 일부로 장난을 치고 있는 게 아닐까 했다. 왜냐면 부대장은 종종 이런 식으로 텐구 약 올리는 짓을 잘 하는 화상이니까. 하지만, 그게 아니라는 것을 곧바로 깨달았다.
연기가 아니라 진심이었기 때문이다.
「정말입니다. 정 못 믿겠다면 나와 부대장만이 아는 과거 얘기도 들려 줄 수 있는데.」
「어디 소속 텐구인지는 몰라도 타인을 사칭하다니. 그 녀석의 상관인 나로서는 쉽게 넘어갈 만한 사안이 아니야.」
저 진지한 눈. 그리고 시종일관 변함없이 단호한 태도. 어린 시절부터 오랫동안 봐온 나로서는 이 모든 것이 거짓이 아니라고 고하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녀석의 장난은 오래가지 않는다. 가벼운 농담 형식으로 잠깐 속여 먹을지언정 이런 식으로 오래 끄는 일이 없었다.
이 이상 부대장을 설득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은 나는 순순히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네 맞아요. 제가.. 실수를 했나 봅니다. 사칭이라니.. 장난으로도 해선 안 되는데.」
도무지 믿기지가 않았다. 불과 몇 십분 전만해도 나라는 걸 알고 있었던 부대장이었다. 그런데 진심으로 몰라보다니. 이게 말이 되는 일인가? 성별이 바뀐 것도 그렇고, 가짜가 나타난 것도 그렇다. 이쯤 되면 유카리님이 각을 잡고 괴롭히고 있다는 느낌이다.
풀이 죽어 돌아가는 나를 부대장이 주제에 안 맞게 훈계한다.
「아무리 안 좋은 일이 있어도 그렇지. 사칭하는 건 옳지 않은 일이야. 모름지기 자신의 가치를 높이는 건 노력 뿐. 그렇게 스스로를 갈고 닦다 보면 남을 사칭하지 않더라도 인정 받게 될 날이 올 거야.」
지랄하고 앉았다.
집합 때만 보이고, 그 외에는 하루 종일 집에 박혀 컴퓨터만 하는 폐인이 그런 말 할 자격이나 있는지 모르겠다. 실력만 놓고 보면 재능충이 맞지만, 노력으로 따져보면 내가 저 녀석보다 못하지는 않다고 보는데.
뭐, 그것도 바깥세계에 나가기 전의 일이지만.
그렇게 정말로 갈 곳이 없어진 나는 기운 없는 발걸음으로 정처 없이 걷다가 반듯해 보이는 돌 위에 앉아 조금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앉자마자, 한숨부터 새어 나온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 지 앞날이 막연하기만 했다.
상당히 지쳐버렸는지, 온몸에서 힘이 쫙 빠졌다. 기운 없는 상태로 멍하니 눈앞에 흐르는 냇물을 바라봤다. 그리고 발밑에 구르는 돌멩이 하나를 집어 냇가를 향해 던졌다.
퐁당-. 수면 위에 파문이 퍼져나간다.
그것을 보며 나는 또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있었다.
「무슨 고민이라도 있는 거니?」
「네. 상당히 곤란한 처지가 되었거든요.」
누군가의 물음에 나는 반사적으로 사정을 털어놓고 말았다. 고운 미성에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해초 같은 초록빛의 머리를 지닌 액신님이 계셨다.
카기야마 히나.
요괴의 산에는 수많은 신들이 살지만, 재액을 담당하는 그녀는 텐구중에서 모르는 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측에 속한다. 붉은 서양식 드레스를 입은 히나님이 「수심에 잠겨 있길래 무심코 말을 걸었어.」하고 참견한 이유를 밝혔다.
나는 억지 웃음을 지어 보였다.
「걱정해주시는 건 고맙습니다만.. 히나님이 해결해 주실 만 한 게 아니라서.」
「그래? 상담 정도는 할 수 있을 거라고 보는데.」
「그럼.. 들어는 봐 주시겠습니까?」
「물론. 고민을 털어 놓는 것만으로도 기분은 조금 나아질 거야.」
상냥하게 미소 짓는 히나님.
나는 그 상냥함에 기대어 보기로 했다. 평소의 나라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지금의 나는 여러 가지 일로 지쳐버린 암캐다. 다소 약한 모습을 보이더라도 용납될 것이다.
그렇게 자기 합리화를 하면서 털어 놓은 내 사정에 히나님은 조금 복잡한 얼굴로 끄덕였다. 그리고는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좋은 생각이 떠올렸다는 듯 해결책을 제시했다.
「모리야 신사에 신세를 져보는 게 어떻겠니?」
「네?」
뜻밖의 제안에 나는 놀란 눈으로 히나님을 쳐다봤다. 히나님은 자신 있는 얼굴로 설명했다.
「부대장이 널 못 알아보는 건 아마도 유카리의 힘 때문 일거야. 인식의 경계를 조작해 너를 알아보지 못하게 만든 거지.」
「그러면?」
「그래. 널 아는 다른 텐구들도 마찬가지로 인지가 개변되어 있겠지. 하지만, 신은 달라. 유카리의 능력이 아무리 만능이라도 신에게까지는 통하지 않거든. 내가 널 똑바로 인식하고 있다는 게 좋은 증거야.」
틀린 말이 없었다. 부대장은 내가 무슨 소리를 하든지 간에 믿지 않았지만, 히나님은 내 얘기에 귀를 기울여 주었다. 부대장처럼 무언가 강제력에 의해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믿지 못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그렇다는 건 희망이 있다는 소리였다.
「바꿔 말하자면, 신이 아닌 자는 전부 유카리의 손에 의해 인지가 개변되었다는 거지. 따라서 지금의 네가 의지할 수 있는 건. 나와 같은 신이 유일해.」
「그래서 모리야 신사에 신세를 지라고.」
「응. 거기라면 너도 안심하고 지낼 수 있겠지. 게다가 그곳 신님과 친분이 있잖아?」
「아..예.」
사나에 덕에 친분이 있긴 하지. 근데 문제는 그게 지나쳐서 나를 자꾸 사나에와 이어 주려고 한다는 점이었다. 특히, 스와코님. 그래서 사나에가 자주 놀려 오라고 보채는데도 자주 안 갔던 건데.
하지만, 거기가 아니면 달리 갈 곳이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곳의 신님이라면.
「신세도 질 겸. 원래 모습으로 돌아갈 방법도..」
「나로서는 불가능하지만, 신덕이 높은 그분이라면 어쩌면.」
희망사항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기운을 차리기 충분했다.
「상담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도움이 되었다면 그걸로 충분해.」
정말이지, 큰 도움을 주셨는데도 아무런 대가도 원하지 않다니. 과연, 카키야마 히나님은 평판이 좋은 신님다웠다. 신이라면 발에 차일 정도로 많은 요괴의 산에서 유독 그녀만은 잘 알려진 이유는 바로 이런 고귀한 인격 때문일 것이다.
평소에는 마을 인간들의 액(厄)을 거둬들이는 일을 하면서도 우리 요괴들의 고민도 들어주는 히나님은 그야말로 신의 귀감이라 할 수 있었다.
나는 히나님의 제안에 따라 모리야 신사에 신세를 지기 위해 정상으로 향했다. 다만, 사나에가 여자가 된 나를 어떻게 바라볼 지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지만. 그 정도 쯤은 감수하지 못 할 것도 없다.
오히려 여자가 된 지금이라면 가능한 좋은 이벤트도 있지 않을까 하는 엉큼한 기대감에 부풀어 오른다. 그.. 혼욕 이벤트라던가. 한 이불을 덮고 잔다던가..
참 꿈도 야무지다고 하겠지만.
망상 정도는 괜찮잖아.
유카리님 말처럼 조금 정도는 여자인 자신을 즐겨도 나쁘지 않을지도.
...... 젠장. 근심을 덜자마자 이 꼴이다.
아무래도 나는 위기감이 옅어지면 금세 쓸데없는 생각을 하게 되나 보다.
*
여자가 되서 그런지, 도착하는데 시간이 생각보다 많이 걸렸다. 모리야 신사의 산문을 지나는데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해가 하늘 정 중앙에 있는 걸 보니, 점심을 먹을 시간이었다. 히나님과 헤어져 여기까지 오는데, 두 시간은 더 걸린 모양이다.
거의 일반적인 인간과 같은 수준으로 산을 탔다는 말인가.
익숙지 않은 몸이라 변명하기엔 너무 처참한 신체 능력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백랑텐구인데, 이 무슨 나약한 피지컬이야.
그러고 보니 본전으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는데도 숨이 찬다. 이런 경우는 태어나서 처음이다. 근육이라곤 하나도 없는 연약한 팔과 다리. 그리고 움직일 때마다 출렁이는 두 덩이의 지방 덩어리.
날까지 더워서 온몸에 땀이 비오듯 흐른다.
나중에 땀 냄새가 나지 않을까 걱정 될 수준이었다.
헥헥 대며 힘겹게 돌층계를 오르며 간신히 마당에 발을 들였을 때였다. 시원한 물이 마시고 싶어 데미즈야(약수터)로 달려가 바가지에 물을 펴서 입을 축였다.
꿀꺽꿀꺽. 목 넘김 소리를 내며 충분히 수분을 보충한 나는 그 다음 내 정수리로부터 물을 끼얹었다. 더위가 땀과 함께 씻겨 나간다. 이제야 살 것 같은 나는 본전으로 다가가 종을 울리고, 손을 모아 참배했다.
그러자 어디선가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물에 젖어 서늘함을 느끼면서 뒤를 돌아 보았다.
「못 본 사이에 많이 바뀐 듯 하군요.」
처음부터 그 곳에 있었다는 듯 서있는 야사카 카나코님이 나를 보며 그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이 모습인데도 나를 알아본다고?
나는 카나코님에게 의아해하며 혹시나 싶어 물었다.
「저.. 알아보시겠어요?」
「예. 요즘 뜸하긴 해도 신사를 찾아와 주는 신도이지 않습니까?」
그렇게 말하면 잘 모르겠는데요? 하고 지적을 하려는 찰나, 카나코님이 헛기침을 내뱉으며 다시 말했다.
「흠.. 카자네 소우지 씨. 맞으시지요?」
「네! 맞습니다! 제가 카자네 소우지입니다!」
누군가가 나를 알아봐 주는 것이 이렇게나 기쁜 일이었던가? 나는 한순간의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그만 큰 소리를 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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